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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매창의 시조속에 옥황상제님

by 바로요거 2007. 9. 6.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
그의 시문에 옥황 상제님이 등장하는데 당시의 우리나라 상제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있다.

증우인(贈友人)

술병 속의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았지만
속세의 청춘은 젊음도 잠시일세
후일 상제께로 돌아가거든
옥황 앞에 맹세하고 그대와 살리라


매창(梅窓ㆍ1513~1550)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매창은 천민 출신이지만 청절(淸絶)한 시문(詩文)으로이름을 날렸던 인물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깊은 정분을 나누었다. 1532년 부안에 내려온 촌은은 명기 매창을 만나게 된다.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한시와 거문고에 능하고 성품이 바른 매창을 가까이 깊은 정분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그러나 2년 뒤 촌은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님과 이별한 뒤 매창은 고통스런 심정을 시조와 한시로 달랬다.


기생으로서는 이미 늙은 나이인 28세에 매창은 허균(許筠)을 만났다. 허균은 전국 방방곡곡을 기생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난봉꾼이었지만 매창의 한시와 노래, 거문고에 반해 10년 동안 ‘정신적인’ 교분을 나눴다.

그는 매창의 재주를 사랑했고, 절조 높은 뜻을 헤아려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관계를 유지했다. 매창의 말년 시 세계가 도선 사상에 가까워진 것도 허균의 권유에 힘입은 바 크다.


‘증우인(贈友人)’이라는 시에서 매창은 허망한 이승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인 선계(仙界)를 지향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역사스페셜에서 매창에 관해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더 알아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