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아프리카 남부의 칼라하리 사막은 부시먼들의 고향이다. 이곳에 우연히 콜라병 하나가 떨어진다. 그리고 부시먼들은 콜라병을 통해 현대 문명과 역사적 만남을 갖는다.
영화 ‘부시맨’에서 원주민들이 처음 접한 현대 문명은 다름 아닌 잘록한 모양의 코카콜라 병이었다.
인체를 형상화했다고 널리 알려진(사실은 잘못 알려진) 이 코카콜라 병은 단순히 탄산음료를 담는 용기(容器)가 아니다. 이 코카콜라 병은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할리우드 유명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 병은 현대 문명 자체를 의미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 브랜드가 돼 버린 용기
지난주 국제 브랜드 가치 조사 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는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상품으로 코카콜라를 선정했다. 그 가치만 해도 40조 원이 넘는다.
그런데 이 가치 가운데 ‘콘투어 병’이라고 불리는 코카콜라 병의 가치가 최소한 4조 원이 넘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콘투어 병은 코코넛 모양을 본떠 만든 코카콜라 특유의 병으로 1915년 만들어진 이래 코카콜라의 상징이 됐다.
이처럼 상품이 아니라 용기 자체가 브랜드를 형성해 시장을 장악하는 일이 적지 않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마시는 요구르트는 감질나게 65∼80mL 조그만 용기에 담아 팔리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해답을 요구르트의 원조 ‘야쿠르트’에서 찾아야 한다.
1971년 등장한 이 조그마한 음료는 1994년 한때 하루 평균 800만 개를 판매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경쟁사들이 비슷한 음료를 만들었지만 250mL나 350mL 용기를 쓸 수가 없었다. ‘요구르트는 작은 용기에 담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공우유 상품으로는 처음으로 연 매출 1000억 원을 넘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도 마찬가지다.
각종 바나나 우유를 컵에 쭉 따라놓고 맛을 구별하라고 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수류탄 모양의 용기에 담긴 바나나맛 우유를 가장 맛있고 가장 뛰어난 가공우유로 믿는다.
심지어 바나나맛 우유가 아니라 딸기맛 우유도 이 수류탄 용기에 담겨 있으면 신뢰를 받는다.
캔 음료가 활개를 치는 최근에도 비타민 음료의 용기는 캔이 아니라 짙은 갈색의 100mL짜리 병이다. 비타민 음료 용기가 이렇게 통일된 것은 다름 아닌 ‘박카스’ 병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었다.
이 짙은 갈색 박카스 병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의약품이라는 한계 때문에 병 크기가 제한됐고, 또 변질을 막기 위해 우중충한 갈색이 사용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병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 용기의 경제학
이런 용기들의 실제 상업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이를 측정하는 공인 기관이 없어 해당 업체의 추산을 빌릴 수밖에 없지만 용기의 브랜드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는 가공우유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한다. 연 매출이 1100억 원인데 그 가운데 무려 1000억 원 정도가 바로 수류탄 용기의 공이라는 게 빙그레 측의 계산이다.
동아제약은 박카스의 브랜드 가치를 약 2000억 원으로 추정하는데 그 가운데 병의 가치만 700억∼1200억 원으로 본다. 한국야쿠르트도 브랜드 가치 5000억 원 가운데 약 1500억 원 정도를 용기의 몫이라고 계산한다.
시장을 제패한 용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1000억 원이 넘는 기업의 자산인 셈이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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