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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세종대왕 리더쉽

by 바로요거 2005. 11. 27.
세종대왕 리더쉽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님께 감사하면서 세종대왕 리더십에 관한 글을 보내드립니다
잘 읽어보세요 ~~^^ 즐거운 주말 되세요 ~~



 
 CEO 세종대왕 인간경영 리더십
 
 정리ㆍ강권창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세종대왕을 꼽는다.
 
 훈민정음 창제와 측우기, 해시계 등의 많은 발명품을 남겼으며, 대한민국 만원권 화폐의 표지모델이기도 한 그의 훌륭한 업적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위업을 이룰 수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과연 세종대왕이 조선의 요순시대를 이룬 임금이라 칭송을 받고, 후손에게 길이 추앙받을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그의 시대에만 유독 뛰어난 과학자, 음악가, 장군 등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사에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는 없다. 그의 위업은 사람을 발탁하고, 관리하고, 적절히 배치하고, 육성하는 관리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라고 밝혀주고 있다.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변혁을 꾀한 리더 세종대왕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불멸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가슴속에 품었던 의지를 ‘긍정적인(포지티브한) 허무’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그가 국초 국말의 권력쟁투와 무너져가는 인간사의 허무에서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것이 다시금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세종은 국초에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종의 심중에는 ‘적극적인 역사 개척보다는 허무에 기반을 둔 인간사와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역사를 이끌어간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두 형들은 골치 아픈 왕의 자리에서 도망쳤다. 첫째 형은 미친 척했고, 둘째 형은 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이 선택한 길은 노자의 도(道)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 :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세종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은 또 다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으며, 말년에 지은 「월인천강지곡」에는 이러한 세종의 이상이 잘 녹아 있다. 
 
 세종은 무엇보다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탐색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으로 인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과, 백성들의 새 왕조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 민생고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세종은 태종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시대적 요구사항을 고민하며 준비해 나갔다.
 
 저자는 “세종은 그 자신의 영달 때문에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피로 얼룩진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스림의 요체는 마음을 닦는 것
 
 백성과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심법으로 국가를 경영했는가.
 
 ‘총명(聰明)하다’는 말에서 총은 ‘귀 밝은 총’ 자이다. 즉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세종의 강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주로서 세종의 생활은 온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심성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노하지 않아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세종이 황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두문동에 머물러 있지 뭣 하러 세상에 다시 나왔는가?” 황희는 이렇게 대답한다. “일찍이 진리탐구에 열중할 뿐 과거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백성을 위하여 멸사봉공하는 것 또한 군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일러주신 부친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애초에 황희는 태종의 사람이었고 양녕대군을 옹위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의 청렴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시자를 붙여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총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서로를 믿었으면, 세종이 황희를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케 하고 20여 년을 정승의 자리에 앉힐 수 있었겠는가. 황희는 평생 세종의 정치적인 조력자이자 선생으로 묵묵히 세종을 보필한 신하로 남았다.
  
 또한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도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국가가 안정하게 존속하려면, 충분한 군사력[足兵], 충분한 먹을거리[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과 마음[民信]을 모두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려야 하고, 다음은 먹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의 신임과 마음임을 강조한다. 세종은 백성들과의 마음의 화합이 더 본질적이요 더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려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세종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그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임금이 되었다.
 
 
 인재 발굴만이 개혁의 힘이다
 
 세종이 인재를 선출하고 키우는 과정에는 유난히 배울 점이 많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재능있는 부하에게 관대하였고 왕이라고 해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세종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신하를 뽑는 과거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해서 임금 앞에 나섰다. 세종이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성삼문은 “어떤 배경인지만 하문하시니 적잖게 실망했습니다.”라며 직언을 올린다. 이때 대전 내시가 “쉬이∼”하며 주의를 주자, 오히려 성삼문은 “대전 내시 주제에 감히 신하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는데 중간에 ‘쉬이∼’하고 나서다니”하며 호통을 쳤으며, 이에 세종은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많이 도와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이 일을 통해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종은 장영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도 고리타분한 신분론에 대해 일일이 반박해 신하들을 설복시켰고,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도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일일이 다 읽어가면서 논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왕의 신분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당시 세종의 학식을 따를만한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태종은 즉위 기간 동안 총 학술 경연이 4회였던 데 반해, 세종은 총 1800회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았던 세종은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킨 강유(强柔)를 겸비한 임금이었다.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인재를 경영할 뿐
 
 세종이 인재를 발탁하는 요령은, 최종적으로 발탁할 때까지 비밀에 부치고 인재들 간에 경쟁심과 긴장감을 유발시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는 신하들의 자발적인 열의를 이끌어내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러면서도 노신(老臣)들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장단기적인 목표를 세워 두고 노장청(老長靑)의 조화를 잘 이끌어내었다. 저자는 이러한 세종은 인재관리법이 한국인의 특색에 적합한 방식이라 평한다. 
 
 또한 세종은 일회적인 목표 제시로 끝내지 않고, 끊임없는 사후점검을 통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에서 점검과 잔소리에 지쳐서라도 일을 이행하게 만드는 임금이었으며, 부하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부 보고자들의 은밀한 비공식 보고에도 귀를 기울였다.
 
 새벽경연은 신하들에게 늘 바늘방석이었다. 아침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신들에게 공부를 안 한다는 잔소리를 해대고 닦달하였으며, 지각을 하는 신하에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통을 쳤다.
 
 세종은 부국강병을 위해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고양시키기 위해 늘 고민했다. 또한 왕실의 종친이라도 사사로이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이 늘 공변되게 인재를 관리하였다.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천하사를 하는 자는 항상 생각이 멀고 깊어야 하고, 불시의 일에 대비하여야 하며,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도전』 8:56) 하신 증산 상제님 말씀처럼, 조선의 임금인 세종은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문제를 먼저 자각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서 파수꾼처럼 늘 깨어있는 임금이었다. 논쟁에 있어서도 모르는 것이 없어야 했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임금은 또 아파서도 안되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와 늦은 밤 호흡을 가다듬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정신수양을 통해서 임금의 사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힘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일생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훌륭한 임금이었고, 또한 국방에 임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는 사령관이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엄격한 지휘관이었고, 신하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열정과 깊은 겸손의 덕으로 한없는 본보기가 된 국가의 최고 경영자였다.
 
 무엇보다 세종은 시대정신을 읽을 줄 아는 임금이었다. 국초 국말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시대를 다스려야하는 군주에게 어떠한 형극의 길이 펼쳐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시대의 요구를 결코 회피하지 않은 천명에 눈뜬 임금이었던 것이다.

박영규 저 | 들녘 | 2002년 | 10,000원
 
 
 한 나라의 왕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당대에 대한 모든 평가를 포괄하는 일일 게다. 또 그 왕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왕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시대를 만들어간 주변인들을 모르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좋은 리더 밑에는 좋은 인재가 나오고 좋은 신하가 좋은 리더를 만든다” 는 말이 있다. 좋은 리더와 신하의 표본, 이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이 책이 기존의 인물소개와 다른 점은, 비평을 통해 구체적인 예시로써 우리에게 각 인물들의 장단점을 납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키워드1 세종은 왜 사람들에게 단지 명성만으로 남아 있는가?
 첫째, 세종에 대한 기록은 현대의 책 편집방식으로 약 400페이지의 책 40권 분량, 전체 조선왕조실록의 1/10이라는 방대한 양이다.
 둘째, 기록이 사건별로 구성되어 연도를 일일이 뒤져야만 하는 편년체로 되어 있어 웬만한 학자는 연구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세종대왕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널리 위상을 떨치고 있건만 그의 진면목은 드러날 수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이다.
 
 키워드2 세종은 누구인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叡武仁聖明孝大王)
 이 긴 문구는 세종대왕의 무덤에 새겨진 묘호이다. 뜻을 풀이해 보면 “학문에 영특하고 병법엔 슬기로우며 인자하고 뛰어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운”이라는 의미다.
 한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라고 보기엔 너무 많은 찬사들이 나열되어 있어, 과장이 아닐까 의심하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으로 집필을 시작한 저자의 결론은, 이보다 더한 찬사로 끝을 맺게 된다.
 
 “태종의 업적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종을 왕으로 세운 일이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어깨를 겨뤄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학문적 깊이를 갖춘 책벌레였고, 인정 많고 마음씨 좋은 어진 선비였으며 우애를 잃지 않는 형제였다. 또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벗이었고,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냉철한 판관이었으며, 사람의 그릇을 잴 줄 아는 현명한 경영자였고 백성의 행복과 진리구현을 꿈꾸는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에겐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 넓은 아량이 있었다. 다른 왕 아래선 전혀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던 인물도 그를 만나면 날개를 달았고, 다른 시대엔 쓸모없는 지식으로 여겨지던 것들도 그의 시대엔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대에 만들었던 보석들은 조선왕조 전체의 주춧돌이 되고 대들보가 되었다.”
 
 키워드3 세종의 인재들은 누구인가?
 우연히도 이 책에는 세종을 보필한 인재 15명이 등장한다.
 “나랏님 혼자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는 말처럼,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 할지라도 세종의 비전을 알아보고 실현해 줄 인재들이 없었더라면 당대의 태평성대는 꿈으로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세종이 어떻게 시대에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한 해명을 구체화시켜 주는 동시에 그의 인재들의 예시를 통해, 리더의 보필자로서 그리고 조직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의 표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황희 맹사성 유관
 주목할 만한 점은 세종이 인재로서 크게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청렴을 들 수 있다. 황희와 맹사성은 벼슬길의 동반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 함께 세종을 보필해 왔다. 황희는 영의정을 18년간 역임할 정도로 세종의 신임을 받았고, 맹사성은 80세가 넘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항상 자문을 구하던 신하였다. 또 유관은 세종대에 오래 살지는 못했으나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리우며 그의 사후에 세종이 유일하게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국방-이종무 최윤덕 김종서
 우리나라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모두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윤덕은 무인임에도 정치를 하는 우의정에 올랐고, 김종서는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문관이었지만 국방에 공을 세웠다. 이로써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사색의 기반이 있고 지혜로워야만 위기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여기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세종의 주체의식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분야이다.
 
 집현재-변계량 이수 윤회
 집현재는 세종의 학구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산 증거로서, 당대의 유학적 소양을 가진 인재들을 대거 배출한 인재양성기관이자 학문연구기관이었다. 변계량은 태조, 태종, 세종 3대의 국가서류 90%를 작성했다는 문필의 달인이었고, 이수는 세종의 스승이었으며, 윤회는 시대의 천재라 불렸다.
 하지만, 순수학문을 다루는 집현재 학자들이 이성적으로는 매우 뛰어났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문제가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변계량은 속이 좁고 인간관계가 편협했으며 부인을 학대했고, 인격자로 일컬어지던 이수는 세종의 우대에 우쭐한 나머지 도를 지나친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으며, 윤회는 과도한 술로 인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것을 극명히 드러내주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훈민정음-정인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은, 세종이 집현재의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세종은 조선 최대의 운학의 대가였다. 그는 유학 보수파 신하들의 반대를 예상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를 거의 독자적으로 진행하여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야 발표한 듯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훈민정음의 창제 도중 상의를 한 이가 바로 정인지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현재와 함께했으며 운학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 소양과 융통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과학-정초 이순리 장영실
 이 분야에서는 세종의 실용적인 성향과 용인술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문의 중시로 기술적인 부분은 천시당하던 풍토에서 아무리 뛰어나도 장인들은 출세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미 생활에 실용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부문에 뛰어난 인재를 신분의 차별없이 등용하였다. 특히 노비였던 장영실을 궁궐의 장인으로 쓰고 벼슬까지 주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 결과 과학부문에서 조선은 생활에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것은 물론, 고도의 논리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 등 여러 부문에서 세계에 내놓아도 놀랄 만한 성과들을 이루어낸다.
 
 음악-박연
 박연은 조선 최고의 악인으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악기에 소질이 있어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 예학에도 능통한 학자였다.
 고대로부터 예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지녔고 악은 인심을 감화하는 효용을 지녔다 하여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당시의 음악은 정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많은 부분에서 중국의 음악을 본땄을 뿐 본래 우리가 가진 색채를 잃고 있었다. 세종은 악기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도 능통해야 조화롭게 악을 정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박연을 등용하여 예악의 정비를 실현한다.
 
 키워드4 세종은 인재들을 어떻게 길렀는가?
 세종의 인재양성 텃밭은 집현재였다. 거기에 심는 나무의 틀은 학문이고 그 열매는 바로 인재였다. 거기에는 아무 종류의 나무나 심는 게 아니라 재주와 행실, 나이, 자문 능력, 경전과 역사에 대한 이해 등을 기준으로 씨앗을 선발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고른 씨앗은 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나무가 자라는 단계에 따라 주는 먹이가 달라지는데, 처음에는 무조건적으로 주입하는 ‘기송’, 그 다음에는 내용에 주석을 다는 ‘훈고’, 그리고 자신의 짧막한 견해를 펴는 ‘저술’, 또 자신만의 뼈대가 선 체계를 집필하는 ‘저서’로 각각의 과정이 나뉘어지게 된다.
 
 궁극적으로 한 시대의 태평성대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조직이란 목적달성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조직에든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직체계 안에서는 누구나 리더이면서 동시에 조직원일 수밖에 없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좋은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할 것이다. 각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전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태평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조화롭다는 의미이다. 한 조직 안에서 혹은 조직과 조직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