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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중요인물들이 본 이순신

by 바로요거 2005. 11. 8.
해외 중요 인물들이 본 이순신
 


<이순신 장군 영정>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적이 있지요..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님 탄생때 온다는거....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 때랍니다..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많이좀 다릅니다..성격등이..

물론 우리가 바라보는것과 그들이 바라보는건 차이가 있겠지요...아뭏든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읍니다..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 수하로 만드는 뭐 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중에 명장이기도 하죠..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네요...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전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중에 기억나는 문장이......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을 해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아마 이러한 글귀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 때 오나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읍니다.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해놓았더군요.

 


하루는 어두운 밤에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 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10살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 명나라장군(人)이 본 이순신... 내용중에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아래의 글은 명나라 도독 진린이 황제께 이순신을 거두어 달라는 서신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게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의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장수였던 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 해에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 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그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배가 400 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 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 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대로 일본 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 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 뒤 내게 있어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순신....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 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 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4-1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 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밖애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 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 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 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햇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 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 탓도 있고.. 황제 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 싸움에 휩싸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 그자가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수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 수 잇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 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참고로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 나셨습니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 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 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5.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 분이 떠오른다....

두 분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셧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러했듯이..

이순신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