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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보천교의 독립운동

by 바로요거 2005. 9. 22.

*보천교*는 다름아닌 바로 "증산 상제님"을 신앙한 종교단체임.


일제시대 보천교의 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친일 인물 3000여명 발표

종교분야도 모르고 있던 인물들이 발표가 되었고 종교별  친일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해서 60년동안 드러나지 않은 독립운동및 운동가들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그 양적인 면에서 볼때 너무나 뭍혀져 있었습니다.

친일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역사도 재정립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제하 최대의 독립운동자금원겸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 보천교

일제하 한국의 종교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 바로 민족종교 보천교였다는 사실과 친일지로서 일제의 문화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조선, 동아 등 당시 언론의 유사 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의 일방적 매도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로써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의혹 받은 보천교의 막후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안후상의 논문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을 보기 바람)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일간지와 월간지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적어도 1925년 이전의 보천교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천교의 항일운동과 기타 종교와의 비교]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 건, 천주교 2 건, 불교 18 건, 유교 15 건, 천도교 32 건 인데 반해 증산 계열 보천교 83 건, 태을교 9건, 훔치교 55 건으로 총 147 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 하나만 해도 불교나 기독교 항일운동의 4배에 맞먹으며 훔치교만 해도 불교의 3배, 기독교의 2배가 넘고 있는 항일운동 사건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방한암 스님이 산천중원(山川重遠)으로, 송광사 주지 임석진이 임원길(林原吉)로 각기 창씨개명하고 , 월정사 주지 이종욱이 광전종욱(廣田鍾郁)으로, 용주사 주지 강대련이 위원형(謂原馨)으로 창씨 개명한 것에서 보다시피 불교는 종단전체 차원에서 친일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이자 분위기였고, 가톨릭과 기독교 역시 경성기독교 연합회와 교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로 돌아선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임원길은 조선총독 미나미의 향응을 받고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신불교」라는 친일지를 발행해 총후보국의 논조를 유지했으며, 강대련은 「불교총보」에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란 친일성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승을 왕실 및 양반집 여인과의 결혼을 주장하는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1919년 11월 사이토(齊藤實) 총독에게 제출하기도 한 친일 분자였다.

37년 7월 26일 YMCA에서는 종교단체 연합 친일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불교의 권 상로, 유교의 안 인식, 천도교의 이 돈화, 이 종린, 감리교의 양 주삼, 장로교의 전 필순 등이 친일을 위한 사자후를 토했으며, 38년 5월 1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창립되어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아래 내선일체, 신앙보국을 맹서한 바 있다.

1938년 7월 29일, 구세군 최고사령관 윌슨도 전선각처의 소대장에게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행사 실행을 지시하는 통첩을 내렸으며 이에 의해 황 종률 구세군 전장 서기관은 구세군 1만 8천 신도가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15일의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첫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시국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 결의에 의해 동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 주삼, 김 종우, 성결교의 이 명식, 장로교의 홍 택기, 김 길창 등 조선을 대표한 기독교계 지도급 교역자 5명의 신궁참배단이 결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가시와라(檀原) 신궁, 메이지(明治)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궁 및 모모야마 황릉(桃山宗陵) 등을 참배했다.

일제시대에는 특히 '공인종교(公認宗敎)'라 하여 일본의 전통적 신교(神道), 교단적인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 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식적 종교라고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이외의 새로운 종교들은 비슷한 종교 즉 유사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막강한 반일 민족종교 보천교는 유례없는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탄압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본 통계와 같이 보천교의 가장 활발한 147 건 항일기사는(기독교 23 건, 불교 18 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 친일로 돌아선 여늬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보천교가 그만큼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유일하게 친일적이지 않은 민족 자생종교 보천교를 조선의 종교단체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요리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특히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부칙'은 일본 내지(內地)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민족종교는 근본 속성을 정치적 결사체로 보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당시 650만 신도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1936년 3월 주인장(교주 호칭) 차경석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기 전, 당시의 『보천교』는 이미 공개적인 차원에서 친일로 돌아선 국내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경호, 고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재홍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이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