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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태전을 대전이라 부르게 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by 바로요거 2019. 10. 25.

이토 히로부미가 太田을 大田이라 부르게 한 이유

왜 이등박문은 태전을 대전이라 부르게 했던 것일까?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한 원흉, 이또오 히로부미(이등박문)가 태전을 대전이라 부르게 한 것은, 

한마디로 지명을 왜곡시킴으로써 지세를 꺾어 지기를 받는 조선 사람의 기운을 제어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태(太)자를 대(大)자로 고쳐 부른다고 해서 과연 그 지세가 꺾이게 될까요?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순히 생각하기에 태(太)자나 대(大)자가 모두 크다는 의미에서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런데 太田과 大田의 의미는 엄연히 전혀 다릅니다.

大田이란 단순히 큰 밭이라는 의미뿐이지만, 太田은 실로 무궁한 뜻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大자는 사람이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형상인데 반해 太자大자에다 점을 찍은 글자이다. 그렇다면 이 태자의 점이 상징하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곳인 창조의 기능을 담당하는 생식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太는 大와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太자의 의미


[1]太는 창조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처음, 시작, 비롯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태자의 의미로 인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첫임금을 태조(太祖)라고 부르며, 시간이 시작된 첫 순간을 태초(太初)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음양으로 되어있는 우주 삼라만상을 낳은 자리를 태극(太極) 이라고 부른다. 

[2] 太는 성장이 정지된 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져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至尊)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을 태자(太子)라고 부르며, 왕위를 물려주고 생존해 있는 임금을 태왕(太王) 혹은 태상왕(太上王)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가장 지존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太자는 가장 작거나 가장 큰 데에 걸림이 없으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커나가는 과정은 물론 가장 커버린 궁극의 경지도 내포되고 있다. 


이러한 태자에 만물 창조의 모태가 되는 밭(田)이라는 글자가 결합될 때 두 글자는 비로소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게 된다.

태전(太田)이란 바로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우주역사가 시작되는 지극히 성스러운 땅이며,

바로 그러한 지기(地氣)를 갈무리하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관련뉴스기사> ‘대전(大田)’, 일제가 남긴 말 속의 혈침인가?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04 22:07

비록 일제에 의해 이름이 강제로 바뀌었으나 8.15광복 초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태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갔지만 태전의 지명은 본래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전(大田)’은 현재 인구 150만 명 이상이 사는 광역시다. 대전시 홈페이지에 “대전(大田)은 우리말 큰 밭, 즉 넓은 들판이라는 뜻의 ‘한밭’이 한자화 된 이름이다.”고 되어 있고, 많은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원래 이름은 태전(太田)이었는데,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이 땅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바꾸었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본디이름 찾기 운동과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어 잠시 산책해 본다.

‘대전’이라는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전천’이 나오고, 1689년경에 나온 『초산일기』에 송시열 장례 때의 상여꾼 동원 마을 이름에서도 보이며, 『대전지명지』 등에 1600년대에 그 이름이 나타나지만,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지도 못한 작은 자연마을이었다. 그러다가 고종 때인 1895년에 처음으로 행정지명인 ‘대전리’가 된 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이, 1931년에 대전읍이 된다. 1932년에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졌으며, 1935년에는 대전부로 되었다가, 광복 후 1949년에 대전시, 1989년에 대전직할시, 1995년에 대전광역시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면, ‘대전(大田)’의 본디이름은 ‘태전(太田)’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콩 태(太)’자를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시내 중심을 흐르는 대전천(川) 주위로 콩을 많이 심었던 ‘넓은 콩밭’ 지역이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므로 1895년까지 최소의 행정단위인 ‘리’도 되지 못한 작은 자연마을에 불과하여 붙은 별칭이라고도 한다.

그 ‘태전’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이 때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태전역’이 생기고, 관련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됨에 따라 학교와 집, 가게 등이 형성되면서 점차 인구가 늘어나 활기 띤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1904년 11월 경부선 철도의 개통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太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모든 공식문서에 ‘태전’으로 기재되었고, 한국 철도사에도 “초기 역 이름은 ‘태전역’이었으며, 역무원 4명밖에 안 되는 초라한 간이역 정도였는데, 얼마 후 이토 히로부미가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그리고 8·15광복 직후까지도 지역 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태전’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일본인이 쓴 『대전발전지』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1909년 1월 순종황제를 호종하여 이곳을 지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태전역에 내려 휴식을 취하다가 태전의 지세(地勢)와 이름을 보고 그 자리에서 “대전(大田)이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이 좋겠다.” 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 명산에 혈침을 박았듯이 이 지역의 지세(地勢)를 꺾고 그 지기(地氣)를 받아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풀이한다. ‘대(大)’자는 작다는 말에 대립되는 크다는 의미에 불과하지만, 태(太)자는 大자 아래에 찍힌 점이 생명력을 상징하므로 태초, 태극기, 태조임금 등에서 보듯이 ‘시작’과 ‘무한한 크기’와 ‘발전의 에너지(生命力)’라는 뜻이 담긴 글자이므로, ‘무한히 발전해 나가는 생명력이 있는 도시’ 태전(太田)의 생명력을 없애기 위해 점을 떼어버렸다는 말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의 내용을 빌지 않더라도 사용되는 말(言)이나 글에서 나오는 파동과 심리적 효과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토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대전으로 바꾸었다’는 소문만으로도 대전 주변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 발전에 부정적인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일제 혈침’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대전’과 ‘태전’의 소리파동을 비교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필요하다면 이름을 바로잡고 소문의 진위도 알아내어 널리 홍보하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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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


대한민국 중심도시 태전(대전)이 미래의 새 서울로 도약하고 있다.


100여년 전만해도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대전. 어느새 인구 150만이 넘는 대한민국 5번째 가는 도시로 오늘날 눈부시게 성장했다. 바로 이웃한 곳에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대전은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중부지방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대전의 신비로운 지세(地勢)와 자연환경을 살펴보고, 이와함께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중핵도시로서의 대전을 가늠해본다.


*태전太田은 대전의 본래지명이다(太田의 太 자는 클 태·콩 태, 田 자는 밭 전)




한반도의 혈, 태전太田
대전(본래지명은 태전太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남쪽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 대전은 동쪽의 식장산, 서쪽의 구봉산, 남쪽의 보문산, 북쪽의 계족산(원명 봉황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들에 둘러 쌓인 분지형태의 도시다. 서북쪽 공주와의 경계에는 금병산, 우산봉, 도덕봉, 백운봉 등 계룡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계가 논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동쪽 청원군과의 경계에는 대청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산지 사이를 갑천과 대전천, 유등천이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들면서 주변에 넓은 평야를 형성시켰다.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순하여 정말 큰 도시가 형성될 땅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큰 읍으로 성장하지 못하다가 100여년 전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은 지리적으로 산태극 수태극 형상을 이루고 있다. 대전을 중심으로 산맥과 강줄기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처럼 태극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은 금강의 수원지로서 그 물길이 대전과 계룡산을 돌아 서해로 흘러 수(水)태극을 이루고,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마이산(馬耳山)으로 해서 대둔산(大屯山), 계룡산(鷄龍山)으로 이어지는 맥은 산(山)태극의 형세를 이룬다.


증산도 안운산 종도사님은 이곳 태전(太田, 대전의 본래지명)이 한반도의 혈(穴)자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세상만사가 다 순(順)해야 하는데 지리만은 역(逆)해야 된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김포 강화도 쪽으로 흐르지만, 청계천은 묘하게도 서에서 동으로 역하며 거꾸로 흐른다. 그 기운으로 서울이 조선 왕조 오백 년의 도읍지가 되었고 지금은 천여 만 인구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면 중부지방의 태전(太田)은 서울과 비교할 때 어떻게 생겼는가? 전라도의 진안, 무주에서부터 시작한 금강의 물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치오른다. 추풍령 물도, 속리산 물도 전부 거꾸로 오른다. 그렇게 해서 금강이 공주까지 거꾸로 치오르다가, 공주 고마나루(곰나루)에 이르러서부터 아래 부여 쪽으로 구부러져서 장항 군산으로 순(順)하게 내려간다.


이 세계에서 이렇게 된 자리가 없다. 진안, 무주가 태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서울 터와 비교해 보면, 태전이 서울 터의 몇 백배에 해당한다. 자그마치 우리나라 중심부의 절반을 역(逆)을 한 곳이다. 지리학상으로 볼 때 지구의 혈(穴)이 바로 남북한을 통틀어 대한민국이고, 이 대한민국 중에서도 오직 태전이 자리한 중부지방만이 그렇게 크게 역(逆)을 했다. 이곳 태전이 본래 지구의 혈이다.”




작은 마을에서 중부권 최대 도시로!
100여년 전만 해도 대전은 한가로운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전을 큰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는 태전역이 들어서면서부터다. 1905년 경부선 개통에 맞추어 태전역이 세워지면서 하루아침에 도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부선에 이어 1914년 대전을 **점으로 하는 호남선까지 개통됨으로써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굳혔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까지 옮겨오게 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천도(1950.6.28∼7.14)를 한 적도 있다.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대전은 전후 복구와 급속한 인구 증가로 중부지방의 행정·문화·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불타서 1958년에 새로 지은 대전역과 충남도청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중앙로는 대전 시가지 발달의 중심이 되어왔다.


1974년부터 건설하여 자리 잡은 대덕연구단지는 한국과학기술의 중심지로, 대전이 과학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에는 정부대전청사가 들어섬으로써 대전은 행정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대전은 한국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도시로 손꼽힌다.


태전, 새 수도지로 꾸준히 거론되다
대전은 이제 더 이상 충청권의 지방도시가 아니다. 대전은 현재 인구 1만이 넘는 정부대전청사(제3정부청사, 통계청·조달청을 비롯한 10개의 정부기관)가 들어와 있다(1998년 이전). 얼마 전 세종시의 원안 관철로 이제 대전은 제2의 행정수도로서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다. 오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정부과천청사(제2정부청사, 7개 정부부처와 10개 공공기관)가 세종시로 옮겨온다. 세종시를 곁에 둔 대전은 이제 대한민국의 중핵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대전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임시수도가 된 적이 있다. 1970년대 서울인구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중앙정부 부처를 옮길 것을 골자로 하는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대전 부근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새 도읍지 후보지로 대전 근방을 지목했었다(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 아래 새 서울을 찾아 나섰던 이성계는 중도에 마음을 바꾸어 한양을 수도로 확정). 또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정개혁을 위한 여러 정책을 펴면서 계룡산 아래로 도읍을 옮기려는 마음을 먹고 이를 시행하려다 그만뒀다는 흔적과 개인기록도 있다. 이것이 실행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먼 훗날 대전을 미래의 새 서울로 쓰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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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大田의 본래 지명은 태전太田
대전(大田)의 본래 지명은 ‘태전’(太田)이다. 대전은 오래전부터 한밭, 콩밭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어 한밭, 콩이 많이 나서 콩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명인 한밭, 콩밭을 모두 아우르는 한자어로 표기하면 태전(太田)이 된다.


역사적으로 태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太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 모든 공식자료(대한제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공식지명으로 태전(太田)이 기재되었다.


그러던 태전이 ‘대전’으로 그 지명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대전’은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만들어낸 오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일본인 전중여수가 지은『대전발전지』에 그 내막이 나온다. 한일병합이 되기 한해 전인 1909년 1월의 일이다.


당시 순종황제를 호종하여 태전을 지나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이곳 주변의 수려한 산세와 이름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아랫사람에게 태전(太田)의 태(太) 자에 점을 뺀 대전(大田)이라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한 것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함이다. 금수강산 곳곳에 혈(穴) 자리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경복궁 앞에 ‘日’자 모양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한밭과 콩밭이라고 불려지던 명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지명은 태전(太田) 밖에 없다. 『설문해자』를 보면 大 자는 사람이 두 팔과 두 발을 쫙 펴고 서 있는 형상이며, 太 자의 점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창조의 기능을 담당하는 생식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太는 大와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太는 창조의 상징이다. 따라서 시작한다(太初, 太始, 太祖 등)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至尊)하다는 의미(太皇帝, 太上皇 등)도 담고 있다.


(1992년부터 증산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태전지명찾기 서명운동〉은, 민족의 혼과 역사를 바로 찾는 운동으로 승화되어, 약 75만 명의 시민이 서명에 동참했다.)



출처: 증산도공식홈페이지 http://www.js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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