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친일파와 독립투사

by 바로요거 2017. 8. 23.

 

 

 

 

 

 

 

▣친일파와 독립투사

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 사대파는 바로 친일파였다. 이들은 조선에 지켜야 할 좋은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일한 살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선진국인 일본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도왔으며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열렬히 일본에 충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일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기를 거부했으며,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주적 조선인만의 나라를 만들려 일본과 친일파와 맞서 싸웠다. 그들이 바로 독립투사였다.

 

500년을 넘게 이어져온 조선왕조는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두고 여려가지 주장이 있으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구한말 조선 무렵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 일본과 결탁한 친일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대적인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계몽 기관이자 언론사로 알고 있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사실 일본과 결탁한 친일조직이었다. 애초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자체가 일본 외무대신과 주한 일본 공사 같은 일본의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단체였으니,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일본이 제공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일본을 열렬히 찬양하는데 열을 올리며, 조선인들 사이에 친일여론을 퍼뜨리는데 주력을 다했다. 고종34년(1897년) 114호자 《독립신문》에는 “사악한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난 것은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베푼 은혜”이며, 고종35년(1898년) 별호에는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라는 논설이 실렸다. 또한 《독립신문》은 조선이 자구 국방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2척의 군함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우자“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 무엇하러 군함을 들여오는가? 군대는 그저 도적떼나 평정할 정도의 소규모만 있으면 된다”라고 극렬히 반대했다.

 

《독립신문》의 논지대로 라면 조선은 일본의 화폐를 그대로 쓸만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고, 자주 국방을 위한 국비 증강도 하지 말아야 했던 셈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을 하는가 하면, 조선 침략에 열을 올리는 이토히로부미와 내통하던 이완용을 불세출의 천재이자 애국자라고 찬양을 했다. 이런 《독립신문》이야말로 친일 사대주의 언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립협회 역시 친일 행각으로는 《독립신문》에 뒤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 대립하자 독립협회는 반러시아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종황제를 압박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 4000명의 장교와 3만 명의 병사로 조직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조선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를 품은 일이 아니냐며 협박을 했다. 또한 독립협회는 연일 러시아를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고종을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말로는 ‘독립’을 내세웠으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사실 일본에 종속되기를 원한 위선적인 친일파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히로부미 조선에 보낸 첩자이변서 고종의 측근이었던 배정자 같은 경우도 있었다.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아버지가 역모에 휘말려 죽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의 첩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조선을 증오하여 반드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실행하게 된다.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고 뛰어난 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서 그의 측근이 되는데 성공한다. 조선 지배층 깊숙이 침투한 배정자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고급 정보들을 전부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고종이 일본의 손길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던 일이 도중에 무산된 것도 배정자가 그 사실을 알고 일본 공사관에 정보를 전해주어, 일본이 손을 써서 고종의 망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려 밀사들을 보냈던 헤이그 밀사사건도 배정자의 밀고로 인한 내부 기밀 누출로 인해서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배정자처럼 자발적인 친일 사대 매국노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일진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약 40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일진회는 《독립신문》처럼 친일 여론을 퍼뜨리는 한편, 회원들에게 군사 훈련도 시켰는데 이는 일본군을 도와 항일 의병들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이야말로 구한말에 활개 치던 가장 악독한 친일 사대 매국노들이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동참한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 늑약 이후,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면서“장차 50년 후, 일본에 조선인 출신 재상이 나올 줄 누가 알겠느냐? 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게 조선 권력층 내부에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파가 가득 했으니, 조선이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항일 의병들이 무기들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도, 친일파가 그 정보를 모조리 일본에 보고하는 상황이니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역자인 친일파들을 정신병자나 패륜적인 악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형세의 이익을 계산한 이들은 “조선은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 빨리 망해서 일본에 흡수하는 일이 옳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확신범들이었다. 구한말 배웠다는 상류층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초들은 의병으로 거사를 하여 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지사들도 많았다. 또한 무지렁이 민초들 중에도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하여 친일을 서슴지 않고 한 자들도 많았었다.

오늘날 친일파와 가장 닮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 한다”라며 세계주의를 가면을 쓰고 자국 혐오와 사대주의적 발언을 일삼는 지식인이다. 만약 이들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열렬한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자주파 VS 사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