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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일제의 만행과 한국 근현대사

by 바로요거 2017. 8. 1.

 

 

 

 

 

 

▣ 일제의 만행과 한국 근현대사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수하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견을 바탕으로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은 체질 인류학적 연구를 시행했다. 당시의 연구 자료를 보면‘조선인들의 두골이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인에 가깝다’,‘일본인에 비해서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안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여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했다’는 등 편견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그 연구결과, 일본국내 지역 간 인종적 차이가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차이점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한국인이 열등하다는 근거를 만들기 우해 시작한 체질인류학 연구가 나중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가 같다는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열등한 민족으로 낙인찍은 한국인을 일제가 어떻게 대접했는지 보여주는 시화가 있다. 일본은 1907년 3월에 메이지 왕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코 박람회를 거행하였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아시아 최강 제국으로 올라선 일본의 국력을 자랑하는 무대였다. 이 박람회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시물이 있었다. 조선 사람 두 명이 살아 있는 동물처럼 전시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전시한 이 반인륜적인 박람회에서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 동물 두 마리가 아주 우습다”라는 반응까지 보였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비친 한국인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아베총리는“중국은 어처구니없는 국가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 게임이 가능하다. 한편,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국가”라는 조롱을 하였다. 이 조롱을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최근 한국의 정치 사태를 보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국정교과서에 뉴라이트 친일사관을 반영한 국정교과서가 나오고, 서울 도심한복판에서 자위대 창설기념식에서부터 일왕생일 축하 파티까지 여는 실정이니 말이다. 얼마만큼 우리 선조들의 찬란했던 자주독립역사관이 붕괴가 되어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어떠한가?

약자를 억압하여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제국주의 사조로 말미암아 6백만 유태인이 학살되었다고 하는데,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명의 한국인을 무참하게 죽였다.

우선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최고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을 학살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양민 대학살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수행하고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1894년 9월부터 1895년 7월 까지 10개월 동안 수도를 동경에서 히로시마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비밀 문건을 보면, 동학군이 함경도 방향으로 도망하지 못하도록 전라도 방향으로 몰아서 섬멸한다는 치밀한 작전까지 적혀있다. 그때 일본은 저항하지 않은 도학군과 양민까지 무참하게 학살을 했다. ‘우지개’라 불리는 볏짚으로 만든 농기구를 머리에 씌우고 불을 질러 죽이기도 했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는 계곡과 산마루에 동학군의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개천에는 핏물이 여러 날 흘렀다.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수많은 의병이 죽어 갔고, 만주에서는 양민 대학살이 자행되었다.1920년 일본군은 3~4개월 만에 조선인 5천명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을 하였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일제가 벌인 온갖 만행을 복도한 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이렇게 고발하였다.

 

“부인의 다리를 양편으로 벌려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일신을 사분오열로 가르며, 여자는 이렇게 죽이는 것이 묘미가 있다고 웃으면서 담화하였다. 우리 동포를 전차 궤교軌橋 아래 목을 매달고 양다리를 끈으로 묶어 좌우에서 다수인이 끈을 잡고 신호하며 호응하면서‘그네’같이 흔들어 죽인 일도 있다. 신체는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고통스런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갈라 죽인일도 있다. 기차에서는 다수의 왜놈들이 조선인 사지를 잡고 창밖으로 던져서 역살을 하였고, 남녀 수십 인을 발가벗겨 보행시키고 또 춤을 추게 하여 수 시간 동안 동물처럼 희롱을 한 후 찔러 죽인일도 있었다. 이런 괴악한 수단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바이다( 김상웅.『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 생체실험을 행하였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가 중심이 되어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을 상대로 무려 31종류의 실험을 강행했다. 고속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고, 사람 몸에 말을 피를 넣었을 때 어떻게 죽는지도 관찰하였다. 각종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사람이 죽는지도 측정하고, 페스트와 콜레라균을 주입시켜 체내 장기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도 생체해보로 알아냈다.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는 실험을 감행하고, 사람에게 전혀 물을 안주고 빵만 먹이면 6~7일째 가서 퉁퉁 부운 채 피를 토하고 죽는 다는 것도 알아냈다.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생체 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 행위였다.

 

한국인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음모의 절정은 1933년 흥아 연구소라는 특수 조직에서 ‘도요카와 젠요’라는 자가 작성한 경성천도京城遷都 공작이다. 이문건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들어, 일본이 세계를 경영하려면 동경은 수도로서 부적당하고 조선의 경성이 가장 적함한 곳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만약 일본인 1천만 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킬 계획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은 완전히 일본인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혈통이 섞이고 언어와 역사도 완전히 빼앗겨 한민족이란 인종자체가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민족의 역사가 난도질 당하고,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달하는 8백만 명이 살해되고 자칫 민족의 씨종자까지 말라 버릴 뻔했던 참담한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고 산다. 한국인이 일제에게 겪은 수난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사건이 결코 아니다.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당한 그 고통은 오늘날에도 우리 한민족 정서 속에 깊은 한으로 새겨져 있다.

 

이런 역사를 쉽게 망각하고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을 미화하는 뉴라이트 친일사관 국정교과서가 다시 활개치고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동아시아 패권을 다시금 쥐려고 하고 있다. 구한말 국망의 위기에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출세와 부귀에 눈멀었던 노론 친일 사대세력들은 해방 후 청산이 되지 않고 이승만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 권력을 다시금 계승하였다. 일제시대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출세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들이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주장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역사와 국권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몸부림치던 독립지사들은 가난하여 후손들 교육을 못시킨 결과로 여전히 가난하고, 친일파들은 부일을 해서 생긴 부귀로 후손을 교육하여 다시금 부와 권력이 계승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상류층 권력의 주류가 되었다. 이것이 청산되지 않은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부패는 이런 불의와 부도덕성을 바탕으로 근현사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제국주의의 유산인 일방적이고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며 조작과 공작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역사를 바로잡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거대한 물결이 촛불시위와 더불어 새로운 희망과 새 역사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한국의 민중들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억압과 독재의 역사를 넘어 희망의 새 역사를 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 시대는 그 가치관을 실현시킬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