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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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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내일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

by 바로요거 2016. 1. 28.

[증산도]내일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

기획 구성 /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道學室


[지난 호 연재 소목차]
(1회) ‘삶은 왜 이리도 팍팍한가’ (2010년 8월호)
(2,3,4회) ‘세상은 왜 이렇게 어수선하기만 한가’ (2010년 9,10,11월호)
(5회) ‘세상이 도대체 어디로 굴러가는 건가’ (2010년 12월호)
(6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 (2011년 2월호)
(7회)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 (2011년 3월호)


앞편의 주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가을개벽을 넘는 것, 개벽 때 생존하여 내 조상과 내 후손의 모든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따지자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가을개벽기의 행복에 대한 총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생각, 어떤 행위를 통해 우리는 가을개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가을개벽기의 행복에 대한 각론이라 하겠습니다. 각 단락의 소제목을 보면 누구든 그 내용을 얼른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I 내 뿌리를 찾고 받든다
음력으로 새해 첫 날을 ‘설날’이라고 하고, 설날을 기념하며 쉬는 시간을 통틀어 ‘설’이라고 부릅니다. 올해 2011년에는 양력 2월2일이 설날이었고, 그로부터 사흘 동안 설이었습니다.


어김없이, 명절 하루 전인 2월1일 아침 일찍부터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동-서-남쪽 도로 곳곳에서 차량들이 정체현상을 빚었습니다. 그나마 전국을 휩쓴 구제역 탓에 다른 해보다 이동하는 사람들이 훨씬 적었다는데도 그랬습니다. 역시 설은 설이고 가족은 가족이고 고향은 고향인가 봅니다.


설에 대한 이모저모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그 시작을 신라시대쯤으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시대 역대 왕들이 새해 아침(=원단元旦)이면 신하들의 인사를 받고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했답니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로 넘어와 나라의 9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됐고 조선시대에는 한식, 단오, 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로 자리잡았습니다.


또 그 말뿌리를 캐보면 나이를 하나 더 먹는다는 뜻의 ‘살’에서 왔다는 이도있고, 한 해를 신중하게 시작하라는 뜻의 ‘사린다’에서 왔다는 이도 있습니다. 새롭다, 낯설다는 말에서 설이라 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명절이면, 특히 양대 명절인 설과 추석이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향을 찾아가거나 하다못해 고향을 그리워하기라도 합니다.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고 길이 막히고 사람에 부대끼지만 그래도 우리는 룰루랄라 고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이 태어난 계곡 물로 연어가 귀천歸川하듯.


때가 되면 으레 우리를 끌어당기는 고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이런 저런 해석들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뿌리’라는 말로 결론이 모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가 태어나고 그리하여 우리의 ‘소시少時적 성정性情’을 형성하고 그 소싯적부터 갖은 추억과 온정을 공유共有한 사람들이 깃든 곳, 그런 뿌리란 말이죠. 그러니까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내 뿌리를 찾아간다, 내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뿌리찾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충족할까요? 무엇을 얻을까요?


첫째 뭐니뭐니 해도 고향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줍니다. 귀향길은 행복과 설렘의 여로입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 치고 슬피 울거나 잔뜩 인상을 찌푸리거나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뭐 따지고 들자면 각자 사정에 따라 그런 뻘쭘한 경우도 없지야 않겠지만, 99.99%는 들뜬 기분, 밝은 표정으로 고향에 달려갈 것입니다. 그렇게 냅다 달려간 고향은 기대를 저버리는 법 없이 우리를 포근히 안아 주고요.


둘째 우리는 고향을 찾아 나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확인합니다. ‘그날 그곳’에는 자기를 낳아준 사람들, 자기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자기가 낳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소중한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짧게나마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 또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참으로 촘촘한 ‘생명과 사랑의 그물’에 내가 엮이어 있구나, 확인하고 안심합니다.


셋째 그러한 생명과 사랑과 행복의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는 활력을 얻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사랑을 체감하면서, 그들의 응원과 위로를 받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기운을 흠뻑 받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고 새로운 하루하루를 ‘창조’해 나갑니다.


한마디로 고향-뿌리는 내 생명이 시작된 곳(과거)이며 내 몸과 마음의 안식처(현재)이며 나의 새로운 내일을 창조하게 하는 기운의 원천(미래)입니다. 그래서 초목이든 사람이든 내일을 향해 죽죽 뻗어 나가려면 항상 뿌리로부터 왕성한 기운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뿌리가 허약하고 뿌리가 흔들리는 생명은 건강할 수 도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뿌리는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소중함을 잊을 때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뿌리야말로 내 삶의 어제-오늘-내일을 지탱하고 성장케 하는, 그야말로 ‘뿌리’입니다. 마땅히 뿌리를 돌아보고 보듬고 받들며 그 기운을 받는 것이야말로 내 생존과 발전의 시작입니다. 내 뿌리를 찾아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섭리요 대도大道입니다. 증산 상제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상제님께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도(道)로써 인류 역사의 뿌리를 바로잡고 병든 천지를 개벽하여 인간과 신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하시니라. (道典 1:1:8)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하느니라. (道典 2:37: 4)
*이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혈통줄이 바로잡히는 때니 환부역조(換父易祖) 하는 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道典 2:26:1∼2)


더욱이 지금은 우주1년의 시간대에서 가을개벽기입니다. 가을은 뭇 생명이 열매를 맺는 계절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앞서 봄여름 동안 생명을 쑥쑥 키우던 성장의 기운이 한데 모여야 합니다. 열매는 무엇입니까? 씨앗을 품은 성장의 결과물입니다. 씨앗은 또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이듬해 땅에 뿌려져, 거기서 다시 뿌리가 나고 생명의 싹이 돋아납니다. 그러니 열매는 곧 씨앗이며 뿌리입니다.


한마디로 가을에는 모든 생명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이듬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습니다. 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생명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뿌리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고 새로운 창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원시반본입니다.


원시반본은 단지 사람이나 동식물에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닙니다. 우주의 섭리인 까닭에 우주 자신과 그 안에 깃든 모든 것이 이를 따릅니다. 천지일월의 운행, 시간마저도 원래 자기 뿌리와 자기 모습을 되찾아 돌아갑니다.


앞서 우리는 중심축이 기울어진 지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바람에 태양을 안고 돌아가는 지구의 공전 궤도 또한 타원형으로 눌렸습니다. 상극의 기운으로 천지가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천지일월이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오른쪽으로 23.5도 기울어진 지축이 똑바로 섭니다. 지축이 똑바로 서면서 지구의 공전 궤도 역시 동그란 정원正圓이 됩니다.


천지일월과 함께 시간도 원시반본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해마다 ‘1년=365와 4분의 1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개운치 않게, 꼬리가 달린 1년입니다. 또 한달도 어떤 때는 28일, 어떤 때는 29일, 30일, 31일로 달라졌습니다. 윤달이니 윤년이니 하는, 억지로 꿰맞추는 듯한 시간들이 생겼고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음력과 양력을 구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을이 되면서 시간이 원시반본, 이 모든 것이 본래의 시간질서로 돌아갑니다. 지구가 정원형正圓形으로 공전하면서 하루는 24시간, 한달은 30일, 1년은 360일로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원시반본’해야 할까요?


내 뿌리의 연원을 찾고 그것을 잘 받드는 것이 곧 사람의 원시반본입니다. 당장 가까운 데서부터 내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 다시 그 위의 부모님…. 조상님들이 바로 가장 ‘직접적인’ 내 생명의 뿌리입니다. 어떤 유전자든 특별한 성격이든 특정한 기질이든, 내 안에는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생명의 기운이 살아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생명을 통해 조상님들의 생명맥脈이 펄펄 뛰고 있습니다. 그런 조상님을 받드는 것이 첫째 의무요 으뜸가는 원시반본입니다. 증산 상제님도 이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인종씨를 추리는 후천 가을운수를 맞아 선령신을 박대하는 자들은 모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조상은 아니 위하고 나를 위한다 함은 부당하나니 조상의 제사를 극진히 받들라. 사람이 조상에게서 몸을 받은 은혜로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지의 덕에 합하느니라. (道典 2:26:8∼10)


나아가 내 민족을 있게 한 시조신들이 계십니다. 우리 한민족에는 환인-환웅-단군의 3성조聖祖가 바로 그 분들입니다. 외래문화에 찌들고 세뇌洗腦되는 바람에 우리는 그 분들을 잊거나 어이없게도 신화니 설화니,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뿌리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3성조는 한민족을 넘어 인류의 위대한 문명, 위대한 시대를 열어준 신인神人이요 은인恩人인 것으로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료史料와 역사적 증거들이 그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 줍니다.


시조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뭇 생명을 낳아준 천지天地에 닿습니다. 증산 상제님은 “부모를 경애하지 않으면 천지를 섬기기 어려우니라.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 자손이 선령을 박대하면 선령도 자손을 박대하느리라.”(道典 2:26:4∼6)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땅은 그저 물질적인 존재나 정복,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을 낳아준 위대한 존재이며 지금도 생명을 살려나가는 영적 존재입니다. 천지 없이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늘, 어머니로서의 땅을 보존하고 받들고 이에 제사하는 것 또한 사람이 행해야 할 중대한 원시반본입니다.


그리고 이제 천지를 넘어, 온 우주와 대자연과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재자를 받드는 일이 궁극의 원시반본입니다. 사실 천지만물이 움직이는 원동력, 그 장엄한 뿌리 기운은 상제님으로부터 내려받습니다. 일찍이 3성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문명을 개창하고 인류사를 펼쳐나간 원동력도 상제님을 신앙하고 상제님 말씀을 받들던 데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제신앙, 상제문화입니다. 한마디로 상제신앙, 상제문화가 우리 민족 나아가 인류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것이 모태문화, 시원문화, 뿌리문화입니다. 따라서 상제신앙, 상제문화의 원형을 되찾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가장 크고, 최종적인 원시반본이 됩니다.


원시반본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제사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도 제사는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뿌리를 받드는 가장 직접적인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일부 외래종교의 영향으로 항간에서는 제사문화에 대해 미신이니 우상숭배니 유교적 잔재니 하면서 배척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나의 조상님과 민족신과 상제님을 받드는 제사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도 유교적 의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과 천지와 조상을 모시는 고귀하고도 중대한 ‘의무’요 ‘생활’이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주의 가을, 원시반본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실제 원시반본하는 일상 생활을 통해 뿌리 기운을 받을 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다가올 가을개벽을 넘는 힘입니다.


II 의義로운 삶으로써 원한을 씻는다
우리는 앞서 원한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증산 상제님은 ‘오늘 사람들이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원한에 있다’고 선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울러 서로가 서로를 이기려 기를 쓰는 상극의 세상에서 원한은 반드시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가, 이 가을개벽기에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면 바로 이 원한의 문제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남에게 원한을 품고 있거나, 남의 원한을 사고 있는 한 가을개벽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개벽 너머 열리는 조화선경造化仙境은 원한이 팽배한 상극의 세상이 아니라 원한이 말끔히 해소된 상생의 경지인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풀어야 하고, 남의 원한을 산 사람 역시 그것을 끌러야 합니다. 곧 해원解寃입니다. 상제님께서도 “너희들이 나를 만나서 해원하지 못하면 한이 되리라”(道典 3:272:2)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의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늘 조심한다 해도, 때로는 실수로 때로는 내가 모르는 새 남의 원한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한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 방법 또한 증산 상제님이 선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후천을 개벽하고 천하의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후천선경의 무량대운(無量大運)을 열려 하나니 너희들은 오직 정의(正義)와 일심(一心)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 이 때는 천지성공(天地成功) 시대니라. 천지신명이 나의 명을 받들어 가을 운의 대의(大義)로써 불의를 숙청하고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도와주나니 악한 자는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멸망할 것이요, 참된 자는 온갖 과실이 가을에 결실함과 같으리라. (道典 2:43:2∼6)


그렇습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의義롭게 사는 것이 그 답입니다. 가을 개벽을 앞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원칙이 바로 의義, 정의正義입니다. 이 가을에 의롭게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을 자체가 바로 열매를 거두기에 앞서 ‘심판審判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옳을 의義라는 글자는 <희생양羊을 제단 위에 올리며 칼로 찌르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칼, 희생, 제단, 심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과 함께 가을을 나타내는 또다른 글자가 바로 예리할 리利 자입니다. 사계절의 이치를 각각 나타내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말에서 그 쓰임새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칼刀로써 벼禾를 수확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가을이 내포하는 의미가 칼 또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을은 알캥이와 쭉정이를,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여 가르는 계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써 사는 사람은 남의 원한도 사지 않으며 가을개벽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사람은 알게 모르게 남의 원한을 사고, 그 원한의 살기가 작용해서 가을개벽의 서릿발 같은 심판을 받고 쓰러집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정의의 문제에 대해 그저 윤리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정의의 문제는 가을개벽에서 내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III 가을의 진리를 만나 사람을 살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을개벽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각 시대, 각 사회에는 그것을 이끌어가는 중심사상이나 진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가령 서양의 대세는 기독교가, 동양의 대세는 유교가 끌어왔습니다. 중동은 이슬람교가 지배해 왔고 동아시아는 불교가 득세했습니다. 그러한 중심사상 또는 ‘당대의 진리’가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지배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정의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당대의 진리’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만나야 할 진리 또한 달라져야 합니다. 단순히 한 시대, 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나 정의로써의 진리는 이제 넘어서야 합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가을개벽기입니다. 마땅히 우리 인류는 가을에 걸맞는 궁극의 진리를 만나서 그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데서 행복을 얻고 삶의 목적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을의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가을은 성장을 그치고 성숙하는 계절입니다. 성장을 위해 동원됐던 모든 기운이 한 곳(열매, 뿌리)으로 수렴되는 시기입니다. 봄여름 동안 생명의 기운은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분산됐지만 가을에는 오직 열매를 맺기 위해 그 모든 기운이 통합돼야 합니다. 가을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분산됐던 기존 사상과 문화와 철학과 종교를 한 데 모으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증산 상제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가을의 진리, 열매의 진리인 증산도甑山道입니다. 한 시대, 한 사회를 풍미했지만 결코 온 세상을 통합하지 못했던 기존 종교를 넘어서는 진리, 그것이 곧 증산도입니다. 그래서 증산도는 종교를 넘는 대도大道요, 그 끝과 시작이 무한한 무극대도입니다.


가을의 진리라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왔던 우주1년, 상극과 상생, 선천과 후천, 생장염장과 춘생추살, 원시반본 등이 모두 증산도에 담겨 있습니다. 우주와 인생이 돌아가는 이치와 가을개벽을 극복하는 법방法方까지 아우르는 인류 최후의 열매진리가 곧 증산도입니다. 지난 봄여름 동안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등 기존 성자들의 가르침이 꽃으로 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을, 꽃은 시들고 마침내 진리의 열매가 나올 때가 됐습니다. 이 가을 우리는 증산도에서 생존과 발전과 행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을개벽을 넘는 길은 오직 증산도의 가르침, 증산도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나 증산도를 만나 새 진리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상제님을 신앙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부족합니다. 마지막 남은 일, 곧 자신이 만난 놀라운 진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우리에게 처음 가르쳐 주신 상생相生이란 덕목은 본래 <남을 먼저 살리고 남을 먼저 잘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내가 비로소 가을개벽을 넘고 복락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가을개벽을 넘는 상제님 진리, 곧 증산도를 보다 널리 알려서 한 사람이라도 더 가을개벽에서 건져내는 일이 곧 상생의 본뜻입니다. 그러니 증산도 진리를 만난 기쁨을 나 혼자 품고있지 말고 남에게도 적극 알려야 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자신이 가장 먼저 알게 된 소식을 가슴에 혼자 담아두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는 그런 본능을 잘 표현합니다. 특히 기쁜 소식, 기쁨의 비밀은 어떻게든 남들에게 알리려는 설레임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만난 기쁜 소식, 가을개벽을 넘는 놀라운 진리, 그 놀라운 느낌과 체험을 자기 가슴에만 담아두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만난 즉시 기쁨에 겨워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진리를 알리기 위해 세상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가을의 진리인 증산도를 만나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일, 부지런히 그 일을 해내고 보다 많은 사람을 상제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바로 이 가을개벽기의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뛰다 보면,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있어도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테지요. 기회가 되면, 보다 자세하고 더더욱 쉽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여러분과 재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재 끝>

 

 

출처: 증산도 공식홈페이지 http://www.js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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