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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한국 역사교과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by 바로요거 2015. 8. 20.

(인터뷰) “한국사 교과서는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

역사는 한 나라의 강력한 힘이요

기사입력 : 2015년08월17일 15시47분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의 백마고지로 들어가는 비무장지대 초입의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4세기 로마 작가 푸블리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경구(Si vis pacem, para bellum.)이다.
그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전쟁은 엄연히 있어 왔다.

그 어떤 나라도, 그 어떤 국민도 전쟁을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증산도안경전 종도사는 숱한 전쟁들 중에서도 이른바 ‘역사전쟁’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쟁 가운데 가장 큰 전쟁은 역사전쟁입니다. 역사는 한 민족, 한 국가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마땅히 역사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오늘까지 그 민족이 이룬 모든 것을 잃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동북아를 중심으로 영토를 빌미삼은 갈등과 충돌 역시 그 본질은 역사전쟁, 문화전쟁입니다”

 역사전쟁이 치열한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서 배우고 철석같이 믿어온 ‘교과서 속의 역사’는 과연 우리의 진정한 역사인가? 증산도 안 종도사와의 ‘일그러진 우리 역사 이야기’로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환단고기" 대담을 시작한다.

 ▶ 영토전쟁, 영토분쟁이란 말은 익숙해도 역사전쟁이란 말은 언론 등에서 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가리키며 어떤 뜻입니까?

 

 지금 세계무대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하는 가운데, 동북아의 역사질서가 대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북아, 그 중에서도 특히 한중일 3국은 지금 역사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수천년 동안 지속돼 온 역사 주도권 싸움입니다. 나라 이름부터 보십시오.

 중국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국(中國)으로 역사의 주도국이라 합니다.

일본은 광명의 뿌리(日本) 국가라고 주장하며 자기네 역사를 한반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자생의 역사로 했습니다. 중국은 2002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한민족의 고대사를 그들의 역사 속에 편입시켜 자국을 동북아의 최고最古 국가이자 중심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동북공정에 깔린 중국의 저의가 무엇이겠습니까.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해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 미리 만들어두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통일되더라도 한국의 역사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시키고, 대신 중국이 동북아 전체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 미국을 앞지르는 초강대국으로 비상해서 세계사의 종주가 되겠다는 의도입니다. 일본의 독도 도발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의 주도권 분쟁이며 역사전쟁"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조선의 뿌리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이란 대목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석유환국이란 우리 한민족이 옛적에 세운 나라 곧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건국(建國)이야기인 동시에 인류 창세사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환국의 나라 국(國) 자를 인(因)자로 조작해서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는 한낱 인물사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글자 하나를 바꾸어 한민족 7천년 상고사의 혼을 동시에 뿌리째 뽑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동북아 역사는 주객이 전도된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한민족의 시원역사가 완전히 말살되었습니다. 저 아시아 대륙을 무대로 활짝 열렸던 환국과 배달은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중국과 일본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과 말살은 결국 제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잡아먹는 ‘패악질’이고, 이는 실로 용서받지 못할 배은망덕입니다.

석유환인. (사진제공=증산도)  


 ◆망국의 한국사학, 그리고 식민사관

 

 ▶ 역사라는 것은 사실 다 지나가버린 일인데, 오늘에 와서 그것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거나 혹은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닥쳐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에 대한 창조적인 의식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배우게 할 것이며 지배계급뿐 아니라 피지배계급도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습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혼과 같다’고 했습니다.

혼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 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혼이 없는 민족이고 정신이 없는 민족입니다.

 

▶ 우리는 지금 그런대로 어엿한 국사교과서도 갖고 있고 또 수많은 역사학자나 교수, 교사들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역사교육의 바깥 틀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상고사 교육은 단언컨대 95% 이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을 예로 들면 단군신화만 소개하고 실제로 고조선의 통치와 문화 등 고조선의 실상에 대해서는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교과서를 집필한 강단사학(자들)의 책임입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일제 침략자들이 뿌리박아 놓은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 강단사학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이들은 일제 식민사학이 우리 역사의 시원사를 말살하는 지렛대로 이용한 소위 실증주의 역사학을 내세웁니다. 19세기 서양에서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표방한 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학문 유파는 실증할 수 없는 대상들을 모조리 역사학의 경계 바깥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표면적인 사실의 실증에 매달리다 보니 역사의 깊은 흐름을 놓쳤을 뿐 아니라 기록과 유물에 대한 숭배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유물론적인 역사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인간의 정신활동은 사료나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증주의 역사학은 영혼이 없는 역사학, 인류의 정신문화가 말살된 역사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실증주의 사관으로 한국사학계는 서양에서 유래한 단선적 발전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사를 단순히 어떤 도구를 썼느냐에 따라 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구분하고 고대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도구에서 찾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물질주의적 단선적 발전론은 역사적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페루와 멕시코 등에 남아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찬란한 고대유적은 철기를 쓰지 않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는 불리할지 몰라도 철기가 없었다고 해서 그들의 문명이 후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5천년 전의 고대 이집트문명도 단순한 도구를 기준으로 역사발전의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일찌감치 철을 알았지만 철이 불순한 금속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철보다는 청동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철기시대가 유럽보다 늦었는데 당시 유럽 특히 유럽 본토는 이집트문명에 비해 훨씬 뒤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한계나 폐해를 모르고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그것을 우리 고대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고대사의 진실은 심각하게 왜곡 말살됐습니다.

일례로 고조선 제1호 박사라고 알려진 한국교원대학교의 송호정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대 국가는 철기 단계에서만 가능하고 청동기 단계에서는 부족국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단군조선은 엄연한 역사가 아니라 그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현재 우리 강단사학은 조선 후기에 권력을 농단했던 노론論 파벌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주자학을 내세워 주자학에 어긋나는 모든 학설이나 주장을 ‘사문난적(斯文賊)’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러한 노론들의 행태를 요즘 강단사학이 답습하고 있다 고 지적합니다.

자신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독단적인 성격이 노론들의 행태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 강단사학은 열린 역사학이 아니라 폐쇄적인 역사학을 지향하는 학문적 권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리 고대사나 정통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지금이라도 그 사서들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환단고기"로 묶여진 다섯 책 이외의 정통 사서들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먼저 외적으로 무수한 전란戰亂과 탈취를 들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송호수는 사료 멸실의 대표적 사례로 열 가지를 꼽는데 이 가운데 전란이 무려 일곱 차례에 달합니다 반면 내적 요인으로는 우리 스스로의 잘못도 큽니다. 다름 아닌 우리 선조들, 특히 집권층에서 앞장서 우리 정통 사서들을 없애버리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으니까요.

 일찍이 고려 때부터 우리 사서는 홀대 받았습니다. 현재 우리 역사책이다 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대표 사서로 꼽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책들이 지어질 때부터 우리 고유 사서들이 배척됐습니다. 그 일차적인 내적 요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사서의 저자들에게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완고한 유학자였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불자(佛子)였습니다. 이들은 책을 쓰면서 당시까지 남아 있던 사서 중에서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에 위배되는 문헌은 고의적으로 배제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조선의 지배층에 와서 더 심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고려보다 더욱 강력하게 유교를 장려하며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그 선행 작업으로 한민족의 고유사서를 민간에서 간직해서는 안될 책으로 규정하고는 이를 모두 수거했습니다. 개국 초 춘추와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 사관이 적은 공식 역사)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 사서를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했습니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1367~1422)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돼 있던 고유 사서를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해서 소각해 버렸습니다. 그의 아들 세조에서 예종과 성종까지 3대에 걸쳐서는 임금이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습니다. 사대주의에 충실한 조선 유학자들 가운데는 중국을 떠받들고 고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조선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기도했던 한국사 왜곡 작업에 우리도 동조한 면이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국사 정통사서의 멸실 10대 사건.(사진제공=증산도)

 

 

조선 유학자들의 대표적 망언.(사진제공)

 

▶ 일제강점기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지요?

 

 일제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한 말이 있어요. “조선인들에게 일본혼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큰일이므로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사업이 시급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들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사 왜곡의 의도와 방향에 대해 밝힌 것이지요. 이 같은 방침에 따라 당시 조선을 통치하는 법령 제정과 형벌을 관장하는 취조국은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계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전국 각지의 사서들을 대량 수거하는 일에 나섭니다.

 이들은 헌병과 헌병 보조원을 앞세워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각종 도서 20여만 권을 거둬들여 대부분 불살라 버립니다. 지금의 서울 남산 식물원 자리에서 며칠 동안이나 책들을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한민족 상고사에 관한 주요 서적 일부가 일본의 황실 도서관으로 옮겨져 비장秘藏되기도 한 사실이 그곳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근무한 박창화(1889~1962)에 의해 증언된 바 있습니다. 일제는 수거된 사서들 가운데 조선사를 왜곡하거나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서 수거 만행은 그후 총독부의 조선사 편찬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집니다.

 

◆ 우리 시원역사의 참 모습 
 
 ▶ 지금까지 ‘왜곡된 우리 역사 쪽’으로만 말씀하셨는데, 이제 화제를 확 돌려서 그 반대쪽, 그러니까 왜곡되지 않은 우리 시원역사의 참모습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우리 시원역사에 대해 말하려면 역시 환단고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거기에 잘 나와 있으니까요. 먼저 환단고기가 어떤 책인지 부터 잠깐 이야기하지요.
환단고기는 신라시대의 고승 안함로가 쓴 삼성기 고려시대의 원동중이 쓴 같은 이름의 삼성기, 고려 말 이암이 쓴 단군세기와 범장의 북부여기, 그리고 조선 중기의 이맥이 쓴 태백일사, 이렇게 다섯 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안함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고승이며, 이암은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학자입니다. 범장은 두문동 72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이맥은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습니다. 모두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글은 조선의 사대주의 사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민족자주사관이었기 때문에 일반에 공개되지 못하고 일부 양반가에 비장되어 오다가 1911년 운초 계연수에 의해 한권으로 묶여 간행되었습니다.
 
 환단고기의 첫 두 권인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따르면 단군조선 이전에 18대 환웅들이 통치하던 배달국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신시(神市)라는 곳에 도읍했다가 1200년 정도 지나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단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치우천왕은 이 배달국의 14세 자오지 천왕으로, 중국의 시조 헌원과 싸워 이긴 분입니다. 그때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청구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배달국을 세운 사람들은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환국9桓國)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환국의 환웅이 3천명의 문명개척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와 신시 배달국을 열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환국 사람들은 기존의 토착세력이자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던 웅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홍익인간은 바로 이 배달국의 건국이념이었습니다. 배달국의 건국은 원동중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900년경의 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연대인 기원전 2000년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환웅이 나온 환국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었던 옛 국가로 안함로는 ‘오환건국이 최고(最古)’라고 했습니다. 환국이 가장 오래된 국가라는 뜻이죠. 환국의 통치자를 환인(桓因)이라 해서 역대 일곱 분이 계셨는데 그 각각의 연대는 잘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원동중은 환국이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 12개 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이었다고 하면서 그 나라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고 있습니다.

 원래 삼국유사에도 보면, 그 첫 부분인 고조선기에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라는 말로 환웅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나중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석유환인’으로 바꿔치기 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경대학 소장본에조차 엄연히 ‘석유환국’이라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환국’에 대해 ‘제석을 가리킨다’(謂帝釋也)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제석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입니다. 이마니시 류는 바로 이 문구를 빌미삼아 한민족의 위대한 나라 환국을 하느님을 의미하는 ‘환인桓因’으로 바꿔놓았던 것입니다.

 

▶ 본래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 정통 역사를 나중에 일본인들이 모두 왜곡했다는 말씀인가요?

 일본인들도 그랬지만 애당초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특히 단군조선을 심하게 왜곡했습니다. 마치 단군왕검이 홀로 1500년이나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또 ‘단군은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근거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웅일호(一熊一虎)’라는 구절을 당시 부락을 이루어 살던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아니라 한 마리 곰과 한 마리 호랑이인 것처럼 써놓은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 바람에 오늘까지도 곰과 호랑이 이야기가 대한민국 건국신화처럼 돼버린 것입니다. 이밖에 고조선이 도읍한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라 하여 그 지리적 위치를 왜곡하였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내용들을 다 바로잡아 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그러면 고조선은 실제 어떤 나라였습니까?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2천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47대代에 이르는 단군들이 통치한 나라입니다. 고조선은 한 분의 단군이 통치하되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으로 나뉘어 국가가 운영됐습니다. 이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합니다.

 뒤에 22세 색불루 단군 때에는 삼한을 삼조선이라 불렀는데 44세 구물 단군에 와서는 삼조선이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삼조선이 대단군을 받들어 한 분이 다스리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화전和戰의 권한이 세 단군에게 나뉘어져 나라의 힘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구물 단군은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습니다. 후대에 부여라는 이름을 단 국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이때 부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앞서 잠깐 말했듯이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면서 당시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908세라고 하는 것은 단군세기에 의하면 한분 단군의 나이가 아니라 초대 단군왕검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 고조선이란 나라가 죽 이어진 전체 햇수를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후 고조선에서 대부여로 나라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고조선과 그 뒤 이름을 바꾼 대부여는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로 이어집니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6세 고무서 단군 때까지 181년을 존속하다가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는 환단고기에 실린 북부여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북부여기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만 나오는 중국사서들과는 달리 부여사의 전모를 완전하게 드러내주는 귀중한 사서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에 실린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환국에서 나온 배달국이 단군조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북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온 것이니 북부여는 고조선에서 열국시대로 가는 길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시대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우리 역사는 무려 7천 년입니다(환국 3301년, 배달시대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도합 6960년) 동북아의 한민족과 인류의 찬란했던 황금시절의 뿌리역사가 7000년이나 지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고조선만 슬쩍 남고 환국과 배달시대 5천년이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 땅의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너무도 허망하게 싹둑 잘려나가 버렸습니다.”

 

고조선 왕계표.(사진제공=증산도)

 

▶  한국사 왜곡 문제는, 종도사님께서도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겠다 싶습니다. 이제 어떻게 그 잘못된 것을 잡아야 할지, 앞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정리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국사교육이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잡아야합니다. 최근 국사를 오는 2015년부터 수능 필수과목으로 한다는 방침이 발표됐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논란이 컸습니다. 국사교육은 논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계 어떤 선진국이든 국사는 교육과정의 필수과목 중 필수과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국사는 국가와 민족의 문화를 가르치고 혼을 불어넣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국사를 교육과정의 필수과목으로 정한다 해도 엉터리 역사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차라리 안 가르치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우리의 상고사와 근대사를 제대로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단군조선이 신화에서 역사로 편입된 것도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곰과 호랑이와 마늘이야기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상고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됩니다. 근대사의 기록도 좀더 민족사관 혹은 주체사관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산업혁명이니 이성주의니 하는 서구중심의 근대관과 우리가 근대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사가 시작된 진정한 출발점은 상제신앙과 개벽사상을 내세운 동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학문적, 문명론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셋째, 범국민적인 역사광복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역사전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자행돼온 역사왜곡 문제, 그리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역사전쟁 문제를 국민들에게 상세하게 알리고 모든 국민들이 동참하는 역사회복, 역사광복운동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넷째, 우리 고유 사서를 찾고 그 사서를 분석 연구하여 참 역사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환단고기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보고(寶庫)입니다. 지금 강단사학계에는 식민사관의 틀을 전혀 못 벗고 환단고기를 부정하고 비판합니다. 어떤 책이든 우리 역사의 맥을 전하고 있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담고 있다면 먼저 그 기록을 철저히 연구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점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
 다섯째, 대한사관, 민족사관에 입각한 정통 역사교과서를 집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교과서를 가지고 역사교육을 해야 합니다. 역사학계의 풍토도 바꿔야 합니다. 지금도 강단사학계에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중화사관에 의해 왜곡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하는 풍토가 존재합니다. 그들이 만든 교과서들 역시 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나라도, 조상도, 문화도, 정신도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역사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는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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