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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환단고기는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어요~

by 바로요거 2013. 2. 3.

환단고기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어요~

 

환단고기가 이 세상에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요...

환단고기에 대해서 이제부터라도 똑바로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한민족의 진정한 뿌리역사와 문화경전, 환단고기는 그냥 조작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단고기 감수자 이기 선생님, 환단고기 편찬자 계연수 선생님, 환단고기 전수자 이유립 선생님이십니다.

 

환단고기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이분들의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한민족의 정통사서 『환단고기』를 볼 수 있고 9천 년 한민족사의 정통 맥과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감수하신 해학 이기 선생님, 환단고기라는 이름을 정명(定名)하여 편찬하신 운초 계연수 선생님, 환단고기를 전수 받으셔서 우리가 잃어버린 뿌리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신 이유립 선생님의 처절한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바치신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다시한번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숙연한 마음 간절합니다. 어찌 이 분들의 숭고한 삶을 세치 혀를 멋대로 내두르며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 할 수 있겠습니까?

 

 

『환단고기』의 편찬과 대중화

 

1)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1864~1920)와 스승 이기(1848~1909)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이다.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

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인근 태천 사람 백관묵(白寬黙)에게서 구한 것.

범장의 <북부여기>+<단군세기>=합본된 것: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으로 이 중 <단군세기>는 백관묵이 소장한 <단군세기>와 내용이 동일함.

이맥의 <태백일사>: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

 

백관묵(1804~?):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이며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헌종 6년(1840)에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백삼규(白三圭, 1855~1920): 백관묵의 아들, 유학자이며 의병장.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 이곳에서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고,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됨. 일제 앞잡이 노릇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인해(白仁海): 독립단에서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함. 그 후 둘째 백인제(白仁濟)도 순국함. 3부자가 모두 일제에 희생.

-문화경제신문(2011.4.9) ‘화서학파 인물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형식(1796~?):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 합격.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 전라도 만경 출생,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며 독립운동가. 이기의 구국활동은 행동적 저항주의, 그는 저항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뜻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을 찾아간 것, 외국에 나가서 활동한 것 등이 좋은 예이다. 15세 때 향시(향시)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고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 이정직(1840~1910), 매천 황현(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한 평가

“대개 백중(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 -이정직-

“백중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 -이건창(1852~1898)-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 -황현-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진 어윤중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强),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이암의 현손으로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태백일사>가 가보로 전해졌기에 이기는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기의 지도와 감수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최종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이다.

 

계연수(1864~1920):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 1969>와 <정신철학통편 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해동인물지>는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1890년(庚寅)에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등을 간행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 오류가 있다.

 

 계연수는 1890년이 아니라 1911년(신해)에 책을 발간하였고,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환단고기』에 함께 묶어 간행하였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필자가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계연수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하게 밝혀졌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계연수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는다. 서문(凡例)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하였다. ☞ 스승 이기가 1909년 절식 자진 후 계연수는 만주로 건너갔다(양종현 증언).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

☞ 『환단고기』초간본의 발행방법에 대해 계연수는 범례에서 “부저기궐(付諸剞劂, 기궐에 붙이다)”이라고 하였다. 기궐은 “인쇄하려고 나무판에 글자를 새김”을 뜻한다. 『환단고기』초간본은 제주대 안창범 교수의 주장과 같이 목판본. 안교수는 “기궐은 ‘새김칼과 새김끌로 나무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원본은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이다”라고 주장한다(안창범, ‘『환단고기』는 진서 중 진서이다’, 270쪽). 이유립의 제자인 양종현도 스승으로부터 목판본이라 전해 들었고, 자신이 본 『환단고기』초간본의 글자는 활자체가 아니라 붓글씨체였는데, 크기가 고르지않고 거칠었으며 그리 잘 쓴 글씨가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삼일심법(三一心法=태고 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되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1914년(51세) 대영절에 계연수는 단학회 동지들과 평안도 삭주 천마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혈맹을 맺어 ‘역사 회복 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다.

☞ 1914년 3월 16일(대영절)에 계연수, 이관집(이유립의 부친), 최시흥, 오동진, 이덕수, 이용담, 전효윤, 박응백, 양승우, 이태집, 서청산, 백형규 등의 12명은 제천혈맹을 맺고, 민족주의 교학과 사관을 정립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박응룡, 정창화, 박용담, 김병주, 이용준, 이봉우, 허기호, 신찬정, 이양보, 주상옥, 이동규, 김석규, 손인영, 이진무 등 14명이 추가로 결의하였다(이유립, <대배달민족사> 5권, 40쪽)

 

이듬해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구(紅石拉子區)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天摩隊),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민사(義民社), 벽파대(碧波隊),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지 10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8호까지 발간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 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 당시 밀정을 파견한 위순사감독(僞巡査監督) 감연극(甘演極또는 甘永極)은 ‘조선의 역사를 고취하는 놈은 일본의 대동방 평화정책을 방해하는 것이니 모두 잡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양종현, <백년의 여정>, 106쪽)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2) 『환단고기』를 대중화시킨 이유립(1907~1986)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계연수의 토막난 시신이 수습될 때, 그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14세 소년이 있었다. 바로 한암당(한암당) 이유립이었다.

 

이유립은 계연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릴 뻔했던 『환단고기』를 굳게 지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이암과 이맥의 후손인 이유립은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천자문을 익힌 이유립은 6세 때 <동몽선습>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 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토벌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이 나는 싫다” 하고, <동몽선습>을 더 읽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특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눈을 뜬 것이다.

 

 이유립은 13세 때(1919) 배달의숙에 들어가 계연수와 최시흥,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 강의를 듣고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 이듬해에는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단원을 통솔하는 단장이 되었다. 그해는 계연수가 일제의 칼날에 참혹하게 도륙되던 해로, 그 무렵 이유립은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독립군사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이유립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24세(1930) 때는 해학 이기의 신교육의 뜻을 이어받아 삼육사(三育社)를 조직하고 잡지 <삼육三育>을 발행하며 일제의 역사왜곡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이듬해 일제는 7월호의 내용을 문제삼아 <삼육>을 폐간시키고 삼육사도 강제로 해체하였다. 33세(1939)에는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세워 교사로 종사하며 학생들에게 조선의 얼과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일제는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창씨개명 불응, 무궁화 심기 운동 등을 이유로 들어 이마저도 중단시켰다.

 

 1945년(39세) 광복을 맞은 후, 배달의 건국일인 10월 3일에 단학회 동지들과 천마산에서 8.15 해방 경축 천제를 올리면서 단학회 기관지 <태극>의 주간(主幹)이 되었다. 이 잡지 역시 다음해 1월 신년호에 “신탁통치 반대론”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발행이 금지되고 말았다.

 

 광복은 되었으나 여의치 않는 활동 여건 때문에 이유립은 1948년 5월 월남을 하다가 안내인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해주 내무서(內務署)에 수감되었다. 4개월여에 걸친 수감기간에 고문과 급질로 죽을지경에 이르러 소생 기미가 없자 내무서 인근에 버려졌다. 다행히 폭우 속에서 정신을 차린 이유립은 추석 바로 다음 날에 어렵게 삼팔선을 넘었다. 그 후 북한을 두어 차례 다녀왔는데, 이때 『환단고기』를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하여 친척집에 살다가 1963년(57세)에 대전 은행동에 정착하였고, 그해 11월단학회를 단단학회로 개칭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

☞ 남한으로 넘어와 공주 마곡사 부근의 친척 집에 거처하다가 1949년 대전 정동에서 셋발살이를 시작하였다. 6.25를 맞아 계룡산과 안영리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였고, 1963년 대전 은행동으로 이주하였다.

 

 이유립이 남하한 직후,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그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吳炯基)였다. 현 단단학회 회장이자 이유립의 제자인 양종현에 의하면,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1949년에 오형기는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초간본을 빌려 가서 필사하였다. 이때 오형기가 책의 말미에 발문(발문)을 써 붙였는데,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유립은 대전 은행동 자택에 단단학회 본부를 두고, 1965년(59세)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관련 저술과 더불어 역사교육을 실시하고,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도 만들어 돌렸다. 이후에 ‘간도 땅’ 문제에 관심이 컸던 박창암(1923~2003)과 연결되어 1976년(70세)부터 월간 <자유>에 역사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자유>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채우며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역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1976년은 이유립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박창암의 배려로 의정부로 올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백내장 수술 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에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로 알고 밀린 집세대신으로 이유립의 책을 모두 팔아버린 것이다. 이때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던 『환단고기』초간본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 필사본이 있었기에 『환단고기』전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환단고기』대중화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유립의 젊은 문하생 조병윤(趙炳允)이 1979년 서울에 있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오형기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이다. 이른바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되자.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사태 수습차원에서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를 발간하엿다. 이유립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였다. 평생 지키고 외쳐 온 『환단고기』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공표한 것이다.

☞ 3년 만에 『환단고기』를 출판한 것에서 당시 단단학회와 이유립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절감할 수 있다. 양종현의 증언에 따르면, 이유립은 평생 안위와 재물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 강의와 원고 집필 등으로 받은 사례비로 생활을 꾸렸으며, 1960년대 대전 은행동에 거주할 때 한 번은 식량이 떨어져서 일주일을 꼬박 굶기도 하였다. 가난하고 고독한 역사학자 이유립의 생활상은 2007년 9월호 <신동아>에 실린 “환단고기의 진실”에서도 보인다. 1970년대 말 이유립이 의정부에 살 때, 부인이 끓여 놓고 나간 라면이 점심 때가 되면 꽁꽁 얼었는데, 그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을 때우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전, 일본어로 번역된 『환단고기』가 일본에서 출판되어 나왔다.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하다가 『환단고기』를 동북아 역사와 일본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책이라 여기고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가지마 노보루는 한문으로 적힌 『환단고기』를 번역하려고 고심하던 중 박창암과 인연이 닿아 한국을 방문하여 이유립을 대면하였다. 그 후 이유립이 우리말로 풀이하고 주석까지 붙인 『환단고기』원고를 박창암에게서 받아 본 후, 마침내 1982년에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동경에서 출간하였다.

☞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유립은 자신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각주까지 붙인 『환단고기』번역본을 박창암에게 주었고, 박창암은 ‘이유립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원고를 가지마에게 넘겼다. 이유립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 더구나 나중에 돌아온 원고는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신동아>,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2007.9). 가지마 노보루가 이유립을 찾아 온 첫날, 가지마가 큰 절을 올리며 배움을 청하는 현장을 지켜 보았던 양종현은, 이유립이 출판을 목적으로 박창암에게 위탁하엿던 원고를 박창암이 이유립에게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가지마 노보루에게 준 것이라 증언하였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至寶)’라 극찬하였다. 하지만 번역에 오류를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책의 핵심 내용을 훼손하고 왜곡시켰다. 환국 → 배달 → 고조선 → 북부여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 대진(발해), 통일신라 → 고려로 이어지는 한국역사를 배달 → 야마토일본 → 나라일본 → 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역사로 둔갑시켜 번역하였고,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다.

 그때 국내에서는 이유립, 임승국 등이 수년 동안 <자유>에 우리 고대사를 연재해 왔고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미 출시된 터라, 한민족의 상고역사와 신교문화가 조금씩 국민들에에 알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쓴 『환단고기』가 역수입되자, 한국 역사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일반대중도 『환단고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이유립은 군인과 일반인을 상대로 역사강연과 저술활동을 하다가 80세(1986)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유립은 평생 동안 일신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광복에 매두몰신 하였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한암당 이유립! 그는 『환단고기』의 모든 글을 감수하고 조선의 망운에 목숨으로써 답한 해학 이기와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발간하고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운초 계연수, 이 두 분과 마찬가지로 ‘국사학의 대부(代父)’이다. 이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한민족의 정통사서 『환단고기』를 볼 수 있고 9천 년 한민족사의 정통 맥과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3) 『환단고기』전수 내력

 

필자는, 이유립을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환단고기』를 배우기 시작한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8~ )을 2009년 이래 네 차례(2009.2.13 / 2009.10.27 / 2011.11.3 / 2011.12.30)에 걸쳐 면담하였다. 이유립이 세상을 떠난 1986년까지 20년 동안 이유립을 스승으로 모신 그는 이유립의 생애, 인간 관계, 사회 활동과 『환단고기』가 계연수로부터 이유립에게 전수된 과정,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83년에 배포하기까지 과정 등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하였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의 창작’이라는 설에 대해서 그는 “좁은 방에서 스승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환단고기』초간본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하며, “『환단고기』는 결코 위작이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알게 된 『환단고기』전수 과정에 대한 새로운 사실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이 자리에 소개한다.

 

① 이유립의 부친 이관집이 계연수의 <단군세기>, <태백진훈> 출판에 협력하고 함께 역사를 발굴한 인연으로, 이유립이 초간본 30권 중 한 권을 자연스럽게 전수받음.

② 1949년 열정적인 역사 탐구욕을 가진 호남 출신의 오형기가 이유립에게 개인적으로 필사를 하겠다고 요청함.

③ 1976년 의정부 거주 시, 집세가 5개월이나 체불된 상태에서 백내장 수술 차 군산에 사는 종친, 이공빈이 운영하는 병원 ‘공안과’에 간 사이, 집주인이 책을 모두 팔아 버려 『환단고기』초간본을 분실함(이유립의 증언)

④ 1979년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에 100부를 발간함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중에서 발췌. 글쓴이: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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