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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환단고기 위서론 5가지 이유/ 환단고기 위서론 종식!!!

by 바로요거 2013. 1. 11.

★환단고기 위서론 5가지 이유, 환단고기 위서론 종식!!!

 

위서로 몰린 『환단고기』

 

 한민족의 고대사와 국통맥을 밝혀 줄 사서들이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정통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그러나 이 땅의 주류 강단사학자들은 이 책을 '위서(僞書)', 즉 조작된 책이라 매도한다.

대표적인 『환단고기』위서론자: 환단고기 보급판 해제 67페이지 참조.

 

때문에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널리 보급시킨지 30여 년이 되도록 『환단고기』는 그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하는 것은 학계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뿌려놓은 '『환단고기』위서론 바이러스'가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 그들에게 배우는 학생들, 그리고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위서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환단고기』는 위서'이며 '『환단고기』는 읽어서는 안 될 위험한 책'이라 말한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라는 책 제목의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환단고기』를 단 한번도 갚이있게 읽지 않았다. 그리고 유불선(儒佛仙) 경전을 비롯한 고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결여되어 있고, 인류의 시원종교인 신교(神敎)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식민사학을 밑거름으로하여 구축한 아성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한다.이에 위서론자들은 식민사학의 대변자요, 나팔수가 되어 지금도 한국사의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

 2012년 여름, 필자는 지난 30년 동안의 『환단고기』번역과 주석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 발표된 『환단고기』진위 논쟁에 대한 논문, 자료,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점검하였다. 그 결과 강단사학의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게 되었다.

 

▲사진: 2012년 서울국제도서전시회에 출품된 『환단고기 역주본』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이유 5가지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어떻게 부정하나

 

1. 『환단고기』를 20세기에 쓰여진 책으로 매도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 선생이 그때까지 전해 오던 다섯 종의 사서를 한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20세기 전반에 항일독립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해 창작한 책'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계연수를 비롯한 『환단고기』간행에 기여한 사람들이 모두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고 당시에 민족주의 사학이 크게 일어났던 상황을 역으로 이용하여 『환단고기』를 흠집 내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의 인물로 단정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한다. 1915년에 충주에서 불상이 발견되기 전에는 장수왕 연호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환단고기』에 '건흥(建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은 『환단고기』가 1915년 이후에 쓰여졌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1923년에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를 통해서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환단고기』에 '자유(子遊)'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쓰여졌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물의 발굴로 역사기록이 입증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오히려 두 가지 발굴 사건은 『환단고기』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2. 『환단고기』에 적힌 지명, 인명을 오해한다.

 위서론자들은 '영고탑'청나라(1644~1911) 시조의 전설과 관련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영고탑(寧古塔)은 본래 영고특(寧古特)에서 영고태(寧古台)로, 영고태에서 영고탑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設)로서 지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고탑이란 명칭은 청대 이전 명나라 때에도 존재하였다. 명나라 신종 때(1608년) 일어난 한 사건의 기록에서 명나라 때 '영고탑로(寧古塔路)'라 부르던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영고탑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위서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영고탑이란 이름이 청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영고탑은 중국의 하상주 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한 고조선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16세 위나단군과 20세 고홀단군 때의 기록을 볼 때, 원래 영고탑은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소도 제천단'이 있었던 곳이다.

 23세 아홀단군은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을 신하들과 의논하였고, 33세 감물단군은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짓고 제사를 드렸다. 백악산 지역으로 천도한 고조선 제2왕조 시대의 기록에 나오는 영고탑은 제1왕조 때의 것과 달리 '영고탑이라는 지역'을 가리킨다. '소도 제천단이 있었던 영고탑'을 그리워하여 천도 후에 영고탑을 지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명, 청대의 지명에 나오는 영고탑은 고조선 중기에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분명히 천제와 관련된 장소였던 영고탑이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지명으로 바뀌었고, 그 자취가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지명에 남아있는 것이다.

 

3. 옛 술어를 근대 용어로 오해하여 『환단고기』를 매도한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인류, 헌법, 산업, 문화, 자유, 평등, 국가, 세계만방 등의 술어를 근대 용어로 주장하며, 이러한 술어가 쓰인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여진 책이라 말한다. 그러나 고전을 읽어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용어가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잇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단어의 의미가 지금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인류, 헌법, 산업> 등은 최소한 2,200년 전 전국시대부터, <문화>는 2,000년 전 한나라 때부터 <자유, 평등>은 1,800년 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국가>는 『주역』에서 <세계>는 당나라 때의 『능엄경』에서, <만방>은 『시경』과 『서경』에서 그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설사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환단고기』를 위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주역』,『도덕경』,『황제내경』,『화엄경』등 인류사의 여러 경전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보정 작업을 거쳐 오늘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 사서가 무려 천 년에 걸쳐 쓰여졌고,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후 400년이 지나서야 『환단고기』가 묶여졌음을 생각해 보자. 신라 시대 이후 다섯 저자가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피하여 소실하지 않고 온전히 계연수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계연수가 수집한 책은 모두 필사본이며, 거기에는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거나 몇 글자가 가필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의 시원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 적 한(韓) 문화의 다양한 모습 등의 기록을 통째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를 표절, 도용한 책이라 매도한다.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에 『환단고기』와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을 경우, 무조건 『환단고기』가 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내용을 베낀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삼조선에 관해 『조선상고사』보다 더욱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 될 수 있겠는가? 『환단고기』는 또 『조선상고사』와 달리,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적힌 '광개토태왕은 17세손'이란 말에 대한 비밀도 정확하게 풀어 준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신일체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의 일부인데, 삼신일체상제는 '얼굴 없는 무형의 하나님인 조물주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는 유형의 인격적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삼신일체'와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5. 『환단고기』의 저자들을 부정한다.

 위서론자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이 『삼성기』상, 하편을 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환단고기』는 저자 이름부터 조작되었다'고 말한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는 『세조실록』에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이것을 '안함로와 원동중이 쓴 삼성기'로 해석하지 않고, '안함, 노원, 동중이라는 세 성인의 기록'으로 풀이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성을 쌓았다고 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한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몇 가지 모순점이 있다.

첫째, 『세조실록』의 이 기록은 사서를 수거하기 위해 내린 유시(諭示)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래서 『삼성기』는 특정 사서명이지 위서론자들의 해석과 같이 '세 성인의 기록'을 뜻하지 않는다.

둘째, "안함로원동중"은 두 사람이지 세 사람이 아니다. 세조의 유시에 언급된 책 중에 저자가 세 명인 『수찬기소(修撰企所)』의 경우, '문태산, 왕거인, 설업 세 사람이 쓴 책'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셋째, 왕조실록은 기록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정사(正史)이므로 실록을 쓴 사관들이 '안함(安含)과 안함(安咸)', '노원(老元)과 원로(元老)'를 혼동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엄정한 실록의 기록을 후대에 나온 인문지리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전설에 빗대어 자의대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위서론자들은 또한 '고려시대 이암이 『단군세기』를 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단군세기』서문에서 이암이 자신이 살던 당대를 아조(我朝), 본조(本朝), 혹은 아국(我國)으로 표현하지 않고 고려라는 국호로 칭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군세기』는 고려보다 더 후대의 사람이 지은 책이라 주장한다. 이암이 고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의 사상이 동북아 창세 시대의 시원 종교로서 한민족의 고유 사상인 신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암은 몽고의 지배를 받던 그 때, 당당히 우리의 국호 '고려'를 쓰고 고려를 침범한 원을 '몽고'라 불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단순히 『환단고기』의 가치를 파괴하고 훼손하려는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위서론자들은 한민족의 시원역사를 부정하고 동북아의 원형문화인 신교를 은폐하는 반민족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한민족과 인류의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것은 오십 대, 백 대의 제 조상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 하여 족보에 실린 조상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환단고기』로 동북아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

 

 

 『환단고기』가 위서로 몰리고 있던 1993년, 전 서울대 천문하과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BCE 1733)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오성취루]' 현상을 실제 역사 사건으로 증명하였다. 그의 연구 결과는 『단군세기』기록보다 1년 전(BCE 1734)에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초승달과 함께 서쪽 하늘에 10도 이내로 모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고조선 29세 마휴단군 때(BCE 935) 남해의 조수가 석 자나 물러가 현상도 증명하였다. 『환단고기』가 한민족의 참역사를 기록한 진서임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전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도 『환단고기』의 오성취루 현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이것은 '우리 조상이 천문 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만큼의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강단사학계에서 신화로 매도하는 단군조선은 분명히 실존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천문 관측까지 할 정도로 뛰어난 문명을 일군 '고대의 선진국'이었다.

 최근에는 지각 있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환단고기』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환단고기』위서론을 주장하는 논문이 1990년대 말 이후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데 반해,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히는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환단고기』내용 자체를 분석하여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힌 연구도 있고, 국내 다른 사서 또는 중국 사서와 비교하여 『환단고기』의 가치를 증명한 논문도 여러 편 발표되었다.

 역사는 진실과 정의를 향해서 나아간다.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이 사회에도 정의는 살아 있고, 우리 모두는 정의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진위 논쟁은 반드시 종식될 수 밖에 없다.

 학계는 『환단고기』를 완전히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 민족사학자든, 강단사학자든 누구라도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국내 사료에 갇히지 말고 중국, 일본, 동남아, 유럽의 사료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한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만 집착하지 말고 천문학과 유전학 등에서 밝히는 최신 자료도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류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시각에서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의 원형을 파괴하고 한민족의 역사 혼을 말살시킨 중화 패권주의사관과 일본 식민주의사관'의 쇠사슬을 과감히 끊어 내고, 대한민국 상고사와 인류 시원 역사의 참모습을 드러내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출처: 안경전 역주-환단고기 보급판 67~73쪽 내용.  타이핑: 뾰족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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