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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환단고기의 진실76-불교사찰의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환웅전

by 바로요거 2012. 10. 23.

환단고기의 진실76- 불교사찰(절)의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환웅전

대시전--> 환웅전--> 대웅전으로 변천되었음.

 

불교 대웅전은 환웅을 모시는 환웅전이었다.

출처 : http://cafe.naver.com/jaoji/31


환웅전이 대웅전으로

 

 

환웅(桓雄)의 웅(雄)의 뜻은 스승임으로 환웅이란 말의 뜻은 ‘태양과 같이 사물을 훤히 비추어 모든 진리와 물상의 이치를 환하게 드러내주는 스승’이란 말이 된다.

환(桓)의 뜻은 또한 크다(大也)는 뜻으로 쓰이므로 일반적으로 큰 스승(大師)이란 말이 된다.


환단고기 <신시본기>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僧家)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 환웅이란 말이 뒤에 불교가 들어와서 우리민족 역사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환웅이란 말을 차용하여 석가모니 부처를 대웅(大雄)이란 말로 불렀으며, 환웅전(桓雄殿)에서 환웅을 몰아내고 대웅전이란 바꿔진 전각문에 석가모니가 자리를 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신교를 누르고 불교를 숭상하는 입장에서 쓰여졌음으로 우리의 신교 역사는 폄하되고 단절되어 환웅천황께서는 첩의 자식이 됨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

그리하여 곧 환웅에게 명을 내려 가로되 (중략) 그대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뭇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아래 세계로 내려가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베풀어라. 그리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부권을 세우라.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어 평화로 이끌어 한마음이 되도록 하고 사도(師道)를 세워 재세이화(在世理化)함을 만세 자손의 홍범이 되게 하라.

이에 천부인3개를 전수해 주고 가서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서자지부(庶子之部) 대인(大人) 환웅(桓雄)은 모든 자제의 교육을 담당함으로 지금의 교육부총리와, 대학으로 말하면 대학 총장과 같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군사부일체의 천지인 삼신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였음으로 지금과 같이 교육부의 위상과는 달리 그 위격이 무척 높았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 보면 환인천제께서 환웅천황에게 사도(師徒)를 세워 재세이화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나온다. 

자료출처 : 네이버 치우천황 카페 (http://cafe.naver.com/jaoji.cafe)

 

 

      속리산 천왕봉

 

 

그림 1 지리산 천왕봉 


<추가 Tip>===>> 역사복원신문에서 발췌한 내용~ 

 

☆불교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곳

대시전--> 환웅전--> 대웅전으로 명칭변화

기사입력: 2012/03/12 [19:32] 성훈 컬럼니스트

 

(원문) 11세 도해단군 재위 57년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을 내려 12개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國仙蘇塗)를 설치케 하셨다. 그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불렀다.
겨울 10월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하고 크게 장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서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큰 태양의 둥근 빛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 위에 앉아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 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하생략)

정묘 38년(B.C1846) 백성들 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B.C1846) 송화강변에 관청을 세워 배와 노, 기물을 세상에 널리 쓰이게 하였다. 3월 산 남쪽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낼 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 밤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여 백성들과 함께 돌려 마셨다. 모든 유희가 끝난 후 누각에 올라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설명하고 오가(五加)를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며, 잡은 것을 놓아주며,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주고, 사형을 없애노라"하시니 나라 안팎에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해설)
* 경인년 기사의 환화(桓花)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인류 최초로 공화제를 실시한 조선 (17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99§ion=sc6§ion2=
* 정묘년 기사의 하나라의 도읍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몽골은 단군의 후손으로 우리와 형제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82§ion=sc6§ion2=
* 을해년 기사의 오가는 저가(猪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라는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신하들에게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국선(國仙)과 소도(蘇塗) 

국선과 소도에 대한 <인터넷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중국의 사서에서 우리의 고유한 소도에 대해 폄하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천제를 지내던 신성한 지역인 일컫는 소도를 설명하면서 귀신, 도망자 등의 표현을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도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신성한 구역이므로, 설사 죄인이라도 그곳으로 피신하면 잡으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백과사전>에서는 국선은 예전에 화랑의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이고, 소도는 삼한시대 때 각 고을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소도란 마한국 안에 신도 색채의 특수구역을 설치한 장소이다.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조(韓條)에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단군)이라 한다. 또 이들 모든 나라에 각기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라 한다. 긴 장대에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긴다. 모든 도망자가 이곳에 이르면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 일쑤였다. 소도를 세우는 뜻은 부도(浮屠)와 같은 점이 있으나 그 하는 일에 선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원문) 苏涂 : 古代马韩国中所设置的含有神道色彩的特殊区域。诸逃亡者至其中即可得到庇护。《三国志·魏志·乌丸鲜卑东夷传 第三十》:“信鬼神,国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诸国各有别邑,名之为苏涂。立大木县铃鼓,事鬼神。诸亡逃至其中,皆不还之,好作贼。其立苏涂之义,有似浮屠,而所行善恶有异。”   

이밖에 <후한서〉와〈진서〉 등에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즉 소도는 제사가 행해지는 신성한 지역으로 성역이 된다. 한편 소도는 입목(立木)과 간목(竿木)을 나타내는 '솟대' 또는 '솔대'에서 온 말로 읍락의 원시 경계 표시로, 신체 혹은 제단으로 건립되는 큰 나무의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나아가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일어나는 신.구 양 문화의 갈등을 완화, 조절하는 제도적 장치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소도는 처음에는 나무 숭배사상에서 큰 나무를 의미하던 것이 후에 천신이 내려오는 계단 및 사는 곳 또는 신성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점차 개념이 확대 변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권리는 원래 천손민족인 우리민족에게 있었으나 조선왕조 세조 이후로 명나라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광무황제위에 오르면서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일제 때 부서진 원구단이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도는 제천행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원구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천제를 지냄에 있어 반드시 임금이 몸소 제를 지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이 생산한 것을 바치고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귀한 물건이 언덕에 산처럼 쌓였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영토를 넓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곧 구리(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한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고 하여 단군조선과 신라의 화랑(花郞), 고구려의 조의(皁衣) 등과 같이 국가의 간성을 길러내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국선(國仙)이란 바로 이들 선인(仙人)들의 최고 사부(師父)를 말하는 것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에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신의 형상의 웅상(雄常)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마한의 소도는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과 같은 제천행사이다. 소도를 처음 세운 분은 11세 도해단군이 아니라, 3세 부루단군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으로 보인다. 

또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의 기록에,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등이 있어 소도를 무척 신성시하고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 <중국백과사전>의 간략한 설명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배달국을 개천한 1대 환웅천왕의 화상(김산호화백 작품). 배달국은 1,565년간 18분의 환웅에 의해 다스려진 나라였다.    

웅상(雄常) 

웅상이란 천제를 지내는 장소인 소도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낸 상을 불렀던 이름이다. 웅상에 대한 중국사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아래의 백민을 백의민족의 약자로 해석해 "숙신국에는 백의민족이 있다”로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백민이 지명이라는 것은 <단군세기> 43대 구물단군의 기록 중 우하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이 어명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대목으로 입증된다.  

(번역) <산해경 해외서경> “백민국의 북쪽에 있는 숙신국에 이름이 웅상인 나무가 있다. 옛날 팔대제(=삼황오제)가 여기에서 이를 취하였다.” 곽박의 주에 웅을 락으로 만들었다. <진서 사이전 숙신씨> “숙신에 락상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의 성제 때 세워졌다. 그 나무의 껍질로 옷을 만들 수 있다.”
(원문)《山海经·海外西经》:“肃慎之国在白民北 有树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 袁珂 校注引 郭璞 注:“雄或作雒。”。《晋书·四夷传·肃慎氏》:“肃慎氏有树名雒常,若中国有圣帝代立,则其木生皮可衣。”。
(주 : 先入伐帝는 先八代帝의 오기로 보인다. 先入伐帝로는 해석이 이상해진다.) 

또한 숙신국을 설명한 중국의 자료 중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번역) 숙신국 : <해외서경>에 숙신의 나라는 <대황동경>의 숙신씨의 나라이다. 중국과 외국학자들은 “진나라 이전 옛 책에 기록된 숙신은 바로 지금 만족의 최고 오래된 조상이다. 숙신족의 기원은 오도등에서 나온다. 한나라 이후 왕조의 사서에 나오는 읍루(후한,삼국), 물길(북조), 말갈(수,당), 여진(요,금,송,원,명)은 숙신의 후예로 역시 만주족의 조상이다.
(원문) 肃慎国 :《海外西经》所载"肃慎之国"见于《大荒东经》"肃慎氏之国"; 目前,中外学者公认的看法是,先秦古籍中的肃慎人,就是今天满族的最早先民。肃慎族起源于鸟图腾。汉代以后,不同朝代的史书上出现的邑娄(后汉,三国)、勿吉(北朝)、靺鞨(隋,唐), 女真(辽,金,宋,元,明), 是肃慎的后裔,也是满族的先民。 

즉 부여와 고구려의 주축을 이루는 읍루, 물길, 말갈, 여진족이 숙신(=조선)의 후예이며 현 만주족(=청나라)의 조상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500년간 명나라의 속국인 소중화(小中華)가 되어 오히려 이들을 오랑캐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시작된 조선왕조가 우리민족사에 끼친 해악이 참으로 크다 하겠다.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던 환인, 환웅, 단군의 초상     

대시전 --> 환웅전 --> 대웅전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인 원년에 세운 대시전(大始殿)은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모신 곳으로 일명 환웅전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이 환웅전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본전 자리를 내주고 뒷전인 삼성각(三聖閣)으로 옮겨가게 된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인의 성인을 모시는 삼성각도 있다.  

중국에서는 사찰의 중심건물인 본전(本殿)을 대부분 대웅보전(大雄宝殿)이라 부르고 있다. “대웅은 부처의 덕호이다. 대는 만 가지를 포함하여 있는 의미이며, 웅은 섭복마귀떼라는 의미이다. 불제자의 존칭을 대웅이라 했다(大雄是佛的德号。大者,是包含万有的意思;雄者,是摄伏群魔的意思。因此佛弟子尊称他为大雄。)”라는 설명으로 대웅의 참 뜻을 숨기고 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를 인용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보아 알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어 현 사찰의 대웅전은 불교가 본당을 차지하면서 환웅전에서 이름이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 불교 사찰의 대웅전은 원래 환웅상을 모시던 곳이었다.    
환기:9211 개천:5910 단기:4345 서기:2012.10.23 14:04
*출처: 역사복원신문 http://www.history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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