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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수의 방/나의뿌리*조상님,족보

여주이씨의 연원

by 바로요거 2012. 1. 18.

여주이씨의 연원

 

여주 이씨(驪州李氏)의 연원

▣성씨잡록▣/성씨의연원 2009/08/23 16:50 |

 

여주(驪州)는 본래의 지명은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고려 태조 23년(940년) 황려현(黃驢縣)이 된 후, 현종 9년(1018년) 강원도 원주에 영속되었다가 고종 1년(1214년)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충렬왕 31년(1305년)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한 후, 조선 태종 1년(1401년)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태종 때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예종 1년(1469년)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현 능서면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하고 목사(牧使)를 주재시켰다. 연산군 7년(1501년) 여주목의 관할 구역을 없애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고려(高麗)의 인용교위(仁勇校尉) 이인덕(李仁德)을 시조(始祖)로 하는 교위공파(校尉公派),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진사(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경주파(慶州派)가 그것이다. 이 3파의 여주 이씨 선조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여주(驪州)에 자리잡아 대대로 호장중윤(戶長中尹)ㆍ향공진사(鄕貢進士) 등 향직(鄕職)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豪族)이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상계의 연원을 명백하게 가리지 못하였고, 예전부터 서로 뿌리가 같은 동족(同族)이라 생각하여 조선 때에는 대동보(大同譜)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여주 이씨 3파는 관향(貫鄕)의 이름을 각기 다르게 쓰기도 했다. 교위공파(校尉公派)에서는 문중에 전래하는 ‘개성호적(開城戶籍)’에 따라 고려 때는 ‘황여(黃驪)’라 하였고, 조선조 때는 주로 ‘여흥(驪興)’ 또는 ‘여주(驪州)’라 하였으며, 간혹 ‘영의(永義)’라는 관향을 쓴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文順公派)는 고려조 이래 대체로 ‘여주(驪州)’라는 단일관향을 썼으나, 이규보(李奎報)의 후손 가운데 그 습봉(襲封)의 지명에 따라 ‘하음(河陰ㆍ지금의 강화)’을 관향으로 삼은 종파가 있었다. 경주파(慶州派)는 ‘을축대동보(乙丑大同譜)’부터 ‘여강(驪江)’이란 관향을 정하였다가 근년에 이르러 ‘여흥(驪興)’ㆍ‘영의(永義)’ㆍ‘하음(河陰)’ 등의 관향 이름을 ‘여주(驪州)’로 단일화 했으며, 경주파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여강(驪江)’이란 관향도 ‘갑자보(甲子譜)’로부터는 ‘여주(驪州)’라는 관향과 함께 쓰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황려ㆍ여흥ㆍ영의ㆍ여강ㆍ고령ㆍ하음 이씨는 모두 여주 이씨를 뜻한다.

 ▲ 1650년 필사된 여주 이씨 교위공파(校尉公派)의 최초 족보.

교위공파(校尉公派) 시조 이인덕(李仁德)에서 3세 효온(孝溫)까지는 여주에서 향직에 종사했으나, 4세 교(喬)에 이르러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개성 북부 흥국리에 정거하였다. 그 아들 3형제 가운데 장자 수산(秀山)은 유배지인 평북 선천(宣川)에 눌러 살았고, 6세 이상은 중화군 상원(祥原)에 살았다. 13세 호신에 이르러 다시 중화 풍동에 자리잡은 후 일부 자손은 수산(秀山)에 이주했으며, 정주ㆍ축안ㆍ평양과 전남 광양에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교(喬)의 차자 수해(秀海)는 처음 개성 덕산리와 오관리에 거주를 정했으나 조선조 개국과 함께 후손들이 한양으로 옮겨 세거하였다.

 ▲ 교위공파(校尉公派) 시조 이인덕(李仁德)으로부터 6세조까지 묘를 실전하여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에 설치한 시조 단향비(壇享碑)와 2~6세의 단비(右).

시조의 묘는 아직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나 가전(家傳)에 여강(驪江) 상류의 대촌(大村) 가운데 있다는 일설이 있고, 여주군 추읍산(鄒邑山) 기슭 여흥평(驪興坪) 위쪽의 무시곡(無時谷)이 그 곳이라는 다른 일설도 있다. ‘무시곡설’은 그곳에 고려 때부터 있어 온 큰 무덤 하나를 여주 이씨 시조산(始祖山)이라 일컬어 왔는데, 후대에 이르러 산 아래에 거주하는 이씨 가문의 노속(奴屬)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 자취를 없앨 양으로 비석과 석물을 근처의 개천 바닥에 쳐 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년 전 후손들이 탐색 발굴 작업을 한 일도 있으나 실패했다.


 

8세 고(皐ㆍ1341~1420)는 호는 망천(忘川)으로 공민왕 23년(1374년) 문과에 급제, 공양왕 1년(1389년) 집의(執義)ㆍ한림학사(翰林學士)ㆍ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다. 사직한 뒤에는 수원(水原)의 광교 남탑산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즐기는 바를 묻자, 자신이 사는 산천을 칭찬하였다. 그런데 그 말이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었다 한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삼사좌승(三司左丞)ㆍ경기우도 안렴사(京畿右道按廉使)로 등용코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느며,  태조가 화공(畵工)에게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는 그 마을 입구에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라는 석비를 세웠다. 대개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8명의 학사를 팔학사라고 하는데, 팔학사 중 조견(趙죺)ㆍ이집(李集)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내왕하였다 한다.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에 안장된 8세 이고(李皐) 묘. 뒤는 아버지인 동지중추부사 이윤방(李允方)의 묘.

9세 행(行ㆍ1352~1432)은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백암(白巖)·일가도인(一可道人), 충주목사 천백(天白)의 아들이다. 공민왕 20년(1371년) 과거에 급제, 한림수찬(翰林修撰)이 되었다. 우왕 12년(1386년) 탐라(耽羅)가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에 가서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볼모로 데리고 왔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ㆍ지신사(知申事) 등을 지내고,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청주옥에 갇혔으나 수재로 석방되었다. 그 뒤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1392년에는 이조판서로써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禮泉洞)에 은거하였다. 태조 2년(1393년) 고려의 사관(史官)이었을 때 이성계(李成桂)를 무서(誣書)한 죄가 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적몰되고 울진(蔚珍)에 장류(杖流)되었다가 풀려 나와, 태종 5년(1405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형조판서ㆍ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지냈다. 시호는 문절(文節). 

 ▲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에 자리한 이계손(李繼孫)의 묘.

11세 계손(繼孫ㆍ1423∼1484)은 자는 인지(引之)로 의인(依仁)의 아들이다. 세종 29년(144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ㆍ병조좌랑ㆍ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세조 7년(1461년) 북방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명회(韓明澮)를 순찰사로 파견하였을 때 그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거부, 웅천진(熊川鎭) 군졸로 충군되는 형벌을 받았다가 곧 사면되었다. 1462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기근이 심한 백성들의 진휼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형조ㆍ예조참판을 지냈다. 1469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후에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 향교를 적극 후원하여 교학(敎學)을 진흥시켰으며, 성종 2년(1471년) 이조참판ㆍ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ㆍ대사헌(大司憲) 등 요직을 역임하고 1478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나 임사홍이 처벌될 때 아산에 유배되었다. 성종 12년(1481년) 풀려 나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경헌(敬憲).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에 자리한 이광윤(李光輪)의 묘. 충남도기념물 제17호.

광윤(光輪ㆍ1545~1592)은 호는 중임(仲任)으로 행(行)의 6대손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의리를 존중하며 효로서 부모를 봉양하더니, 33세 때 효행(孝行)으로 추천받아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북쪽으로 쳐들어오자 친척과 친구, 동네의 장정들 300여 명을 모아 청주 작전에 참가하였다. 청주성 탈환작전에서 승려인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여 마침내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며, 승전의 기세로 금산지역으로 향했으나 이미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습격을 받아 전원이 전사하였다. 그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봉해지고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을 받았으며, 헌종 6년(1840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추증되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자리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40호.

계손(繼孫)의 후손인 익(瀷ㆍ1681~1763)은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둘째 형 잠(潛)에게서 글을 배워 숙종 31년(1705년) 증광시(增廣試)에 응하였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아 회시(會試)에 응할 수 없었다. 1706년 잠(潛)이 노론(老論)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장살(杖殺)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安山) 첨성촌(贍星村)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영조 3년(1727년) 조정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1763년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해 12월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그는 집안의 많은 장서를 통하여 경전과 정주학(程朱學)을 섭렵하고, 이황(李滉)의 성리학적 입장과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정신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성호집(星湖集)’과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이 있다.

 ▲ 이익(李瀷)의 종손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의 금대집(錦帶集)

익(瀷)의 종손으로 용휴(用休)의 아들인 가환(家煥ㆍ1742~1801)은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ㆍ정헌(貞軒)으로 영조 47년(1771년) 진사가 되고 정조 1년(177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780년 비인현감을 지냈으며, 1784년 생질인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北京]에 다녀왔을 때 이승훈ㆍ이벽(李檗) 등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던 중 감화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가 점점 탄압을 받자 교리연구를 그만두고,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된 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에는 교인을 탄압하였다. 그 뒤 대사성(大司成)ㆍ개성유수ㆍ형조판서를 지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교인들을 탄압하였으나 뒤에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천주교인을 박해한 일을 뉘우치고 다시 천주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 이승훈ㆍ권철신(權哲身) 등과 같이 순교하였다. 천문학에 정통하였으며, 수학의 대가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근대적 의미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중환(重煥ㆍ1690~1752)은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ㆍ청화산인(靑華山人)으로 익(瀷)의 문인이다. 숙종 39년(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717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1719년 승정원주서, 1722년 병조정랑ㆍ전적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睦虎龍)의 당여로 구금되어 영조 1년(1725년)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나 형을 받았고, 이듬해 12월 섬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한다. 그리하여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우리 나라 전역을 두루 답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의 관계를 연구,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하였다.

문순공파(文順公派) 시조(始祖) 이은백(李殷伯)의 손자인 윤수(允綏ㆍ1130~1191)는 교위공(校尉公) 화(和)의 아들로 ‘고려사(高麗史)’와 ‘문순공연보(文順公年譜)’에 의하면, 고려 명종 8년(1178년)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을 역임하고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使)에 오른 대장군(大將軍) 부(富)의 형이다. 당시 황려현(黃驪縣ㆍ현재 여주의 고려시대 지명)에서 대대로 중윤(中尹), 교위(校尉) 등의 향직에 종사해온 토착 호족(豪族) 가문의 자제로서 그곳 근곡촌(根谷村)에 많은 농토도 소유하고 있던 윤수(允綏)는 일찍부터 출세의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다. 20세 초반에 개경(開京)으로 올라온 그는 시골의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성 밖 서교(西郊)에다 집을 장만하고 토지와 노비도 확보했다. 처음 얼마동안은 하급관리로 전전하며 신분의 기반을 모색한 끝에 30대 중반에는 이미 중앙관원으로서의 관록과 위치를 단단히 굳히었다.

의종 22년(1168년) 맏아들(이규보)이 출생하였고,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에 의한 무인정변(武人政變)이 일어나자 중앙관부의 문신으로 있던 그는 불안을 느낀 나머지 명종 1년(1171년) 평안도 성주(成州)로 고을살이를 자원했으며, 당시 3살이 된 아들을 데리고 부임했다. 명종 4년(1174년) 내시부(內侍府)의 요직에 등용되어 아들과 함께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고, 명종 13년(1183년) 봄에 수주자사(水州刺史)를 거쳐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냈다. 만년에는 서쪽 성밖에 서교초당(西郊草堂)이라는 별장을 두고 독서와 양한(養閒)을 했다.

 ▲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윤수(允綏)의 외아들 규보(奎報ㆍ1168∼1241)는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백운산인(白雲山人)·지헌(止軒)으로 말년에 시ㆍ거문고ㆍ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불리었다. 명종 19년(11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곧 관직에 나가지 못하여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백성들의 피폐함 등에 자극받아 ‘동명왕편(東明王篇)’ㆍ‘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를 지었다. 신종 2년(1199년) 비로소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였으나 1년 4개월만에 면직되었고, 1202년 동경(東京ㆍ慶州) 일대에 반란이 일어나자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 종군하였다. 그 뒤 강종 2년(1213년) 40여 운(韻)의 시 ‘공작(孔雀)’을 쓰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고,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을 거쳐 고종 4년(1217년)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다.

1230년 위도(蝟島)에 귀양갔다가 다시 기용되어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와 정당문학을 지내고, 태자소부ㆍ참지정사 등을 거쳐 1237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경전ㆍ사기ㆍ선교(禪敎)ㆍ잡설 등 여러 학문을 섭렵하였고 개성이 강한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만년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피난 정부를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 객사의 서랑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러므로 자손들도 규보(奎報)의 유택(幽宅)을 지키며 오랫동안 강화에서 살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각각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산거하였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백운소설’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순(文順).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자리한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의 묘와 재사인 유영각(遺影閣).

규보(奎報)의 4대손인 미숭(美崇ㆍ1346년~?)은 호는 반곡(盤谷)으로 아버지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안북장군(安北將軍)을 지낸 언(彦)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관력(官歷)에 대하여는 기록이 손실되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북방 오랑캐의 침략과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있을 때마다 전장으로 나아가 적개(敵愾)의 공훈을 세웠으며, 마침내 안동장군(安東將軍ㆍ종3품)직에 올랐다.

 ▲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인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 고려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미숭산성.

그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참살되고 조선이 개국되자 진서장군 최신(崔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으며, 처음에는 주둔지인 충청도 미산(尾山)과 강경에서 접번했다가 패하고 경북 김천의 덕대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남하하여 경상도 금릉과 성산에서도 격전을 치루었다. 패퇴를 거듭한 끝에 고령(高靈)과 합천(陜川)의 접경지역인 상원산(上元山)에 들어가, 진서장군 최신(崔信) 등과 함께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의 이름인 미숭(美崇)으로서 산 이름을 고쳐 불렀으며, 산 위에는 공의 소상(塑像)을 모신 신사(神祠)를 세워 충절을 기리는 한편 이 고장의 수호신으로서 경모했다. 해방후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반곡재(盤谷齋)를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으며, 그 재호(齋號)의 글씨를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썼다. 

 ▲ 여주 이씨 경주파의 가첩(家牒).

경주파(慶州派) 시조 이세정(李世貞)이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입신한 점으로 미루어 당시에 이미 개경에 진출하여 일문을 이루었으며, 고려가 망할 때까지 개성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변혁기를 맞아 자손들은 경상도 동남해안으로 낙향한 듯한데 8세 간(艮)의 자손은 울주ㆍ언양에서, 상도(相道)와 극량(克良)의 자손은 흥해에서, 숭예(崇禮)의 자손은 경주와 영일 등지에 각각 정착하였다.

 ▲ 이번(李蕃)이 살던 고택인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무첨당(無堂).

숭예(崇禮)의 손자 번(蕃ㆍ1463~1500)은 그 곳에서 아들 언적(彦迪)ㆍ언괄(彦适)과 같은 명현을 낳아 그 자손들은 약 500년간 양좌동(良佐洞)을 중심으로 인근인 옥산ㆍ천서ㆍ안계ㆍ하곡ㆍ원동ㆍ우각 등지에 산거하여 명가의 전통을 빛냈다. 특히 양동과 옥산마을은 이 가문이 남긴 양반마을로서의 전통과 유습이 보존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사적을 비롯하여 많은 지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기 위해 1512년 건립한 옥산서원(玉山書院ㆍ사적 제154호)과 1543년 그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어준 향단(香壇ㆍ보물 제412호). 

번(蕃)의 큰아들 언적(彦迪ㆍ1491∼1553)은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으로 중종 9년(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ㆍ장령ㆍ밀양부사 등을 지냈다. 1531년 사간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慶州)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명종 즉위년(1545년) 좌찬성에 오르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문묘와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 (文元).

 ▲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자리한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묘.


▲ 독립운동가요 교육가인 남강(南岡) 이승훈 (李昇薰).

 

그 외 조선 말기 애국자로 승훈(昇薰)과 한구(韓久)가 있다. 승훈(昇薰ㆍ1864∼1930)은 호는 남강(南岡). 본명은 인환(寅煥)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1874년 정주 근처 납청정(納淸亭)의 상점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상술을 배웠다. 그 뒤 보부상으로 자본을 모아 납청정(納淸亭)에 유기점을 차렸으며,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자본을 육성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상점과 공장이 전화(戰禍)를 입었으나 오희순(吳熙淳)에게 자본을 빌려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고, 오산면(五山面) 용동(龍洞)으로 이사하여 교육에 뜻을 두고 서당을 세웠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에 감화되어 신민회에 가담하였고, 관하 산업기구로서 마산자기회사를 설립하였다. 또 오산에서 이전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는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고, 이어서 오산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으로 있으면서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11년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서울로 압송, 1912년에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 다시 투옥되어 3년을 복역하였다.

1922년 가출옥한 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때 물산장려운동ㆍ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펼쳤다. 그 뒤 오산학교로 돌아가 학교운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협심증으로 죽자 사회장(社會葬)으로 오산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한구(韓久ㆍ1870~1907)는 자는 한유(韓有)로 언적(彦迪)의 후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주살을 외치며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4월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순기(鄭純基)ㆍ손영각(孫永珏) 등과 모든 일을 계획ㆍ지도하였다. 각지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1907년 9월 1일 강원도로 북상 도중 영일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정용기ㆍ손영각ㆍ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http://san114.tistory.com/category/▣성씨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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