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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모든 이씨(李氏)의 관향과 시조

by 바로요거 2012. 1. 18.

대한민국 모든 이씨(李氏)의 관향과 시조

 

李氏-성(姓)의 하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51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0여 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으로서 32년(유리이사금 9)에 이씨로 사성받은 알평계(謁平系),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계(李翰系), 중국에서 귀화한 고성이씨계(固城李氏系), 당(唐)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연안이씨계(延安李氏系), 김수로왕 둘째 아들의 후예로 모성(母姓)을 따서 허씨(許氏)로 했다가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로 사성받은 이허겸계(李許謙系), 원(元)나라에서 귀화한 이지란계(李之蘭系) 등이 있고, 그 외의 재령(載寧)·아산(牙山)· 가평(加平) 등 대다수의 이씨는 경주(慶州)에서 분적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41만 8945가구, 598만 5037명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2위였다.

 

〔가리(加利)이씨〕 ----성주(星州)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승휴(李承休). 고려 충렬왕 때 밀직부사·감찰대부·사림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承旨)에 이르렀다. 문헌이 없어 정확한 세계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9(1985).

 

〔가평(加平)이씨〕

시조는 이인보(李仁輔). 신라 때 사람으로 선계는 중국인 이신이다. 《계해보(癸亥譜)》에 보면 관적이 완산(完山)으로부터 조종(朝宗)으로, 다시 가평으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렀다는 《신축보(辛丑譜)》 서문의 소개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이 되었다는 《정유보(丁酉譜)》의 서문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 1만 8623(1985).

 

〔강동(江東)이씨〕

시조는 이만욱(李萬郁). 1705년(숙종 31)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인구수 124(1985).

 

〔강양(江陽)이씨〕

시조는 이초(李超). 고려 때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에 보면 이개지(李開之)의 후손인데, 합천이씨(陜川李氏)와 동원(同源)이라고 하였다. 인구수 4476(1985).

 

〔강진(康津)이씨〕
시조는 이진(李珍).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 1351년(충정왕 3) 지도첨의상의(知都僉議商議), 54년(공민왕 3) 평리(評理)가 되었다. 그의 선계는 신라 남해왕 때의 완(完)이라고 하는데 그 뒤의 계대를 잃어 이진을 시조로 하고 강진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인구수 6998(1985).

 

〔강화(江華)이씨〕----여흥(驪興)이씨 지파로써 여주(驪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대평(李大平). 고려시대에 중랑장태보(中郞將太保)를 지냈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세거한 곳이 하음(河陰;강화의 옛 이름)이어서 후손들이 강화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3739(1985).

 

〔개성(開城)이씨〕
시조는 이차감. 고려 충숙왕 때 녹사령개성부윤(錄事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자손들의 세거지를 마련, 개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손자 이덕시(李德時)는 고려 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공신이 됨으로써 후손들이 개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7212(1985).

 

〔거창(居昌)이씨〕
시조는 이성곤(李性坤). 1759년(영조 35)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 문헌의 부재로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을 알 수 없다. 인구수 548(1985).

 

〔결성(結城)이씨〕
시조는 이창욱(李昌旭). 조선 태종 때 호남제군진무대장군(湖南諸郡鎭撫大將軍)에 추증되고 결주군(潔州君;결주는 결성의 다른 이름)에 봉해졌다. 본관은 처음 이성(利城)이었던 것을 정조 때 결성으로 고쳤다. 인구수 5631(1985).

 

〔경산(京山)이씨〕 ----성주(星州)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덕부(李德富). 고려 중기 사람으로, 당시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의 전단(專斷)에 반대하여 1173년(명종 3) 경산부(京山府) 본아리(本牙里;지금의 星州邑 京山里)에 옮겨 살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7909(1985).

 

〔경주(慶州)이씨〕
시조는 이알평(李謁平).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飡)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32년(유리이사금 9) 양산촌이씨(楊山村李氏)로 사성하였다고 하며, 536년(법흥왕 23)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를 알 수 없어, 이색(李穡)이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신라의 소판(蘇判)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가 되었다. 한국의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해온 몇몇 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의 후손에서 분관된 것으로, 합천이씨(陜川李氏)·차성이써(車城李氏)로 갈라졌다. 또 경주이씨의 중조인 이거명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져, 평창이씨(平昌李氏)· 가평이씨·아산이씨·재령이씨·우계이씨(羽溪李氏)·진주이씨(晉州李氏)·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갈라져나갔다. 인구수 121만 7279(1985).

 

〔고령(高靈)이씨〕 ----여흥(驪興)이씨 지파로써 여주(驪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헌(李憲). 고려시대에 예부상서 평장사(禮部尙書平章事)를 지낸 뒤 고령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062(1985).

 

〔고부(古阜―瀛州)이씨〕 시조는 이경조(李敬祖). 1064년(고려 문종 18)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의 출신지에 세거하게 됨으로써 고부를 관향으로 삼았다. 고부이씨는 한때 관향이름을 고부의 다른 이름인 영주로 한 적이 있었는데, 1968년 간행한 《무신보(戊申譜)》에서 고부이씨로 통일하였다. 인구수 2만 1558(1985).

 

〔고성(固城―鐵城)이씨〕
시조는 이황(李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란군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철성은 고성의 옛이름이어서 철성을 관향으로 하는 이씨도 고성이씨와 같은 뿌리이다. 인구수 7만 5904(1985).

 

〔공주(公州―公山)이씨〕
시조는 이천일(李天一).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다. 《공주이씨세계도》에는 시조로부터 중시조까지의 소목(昭穆)이 뚜렷하며, 31세손 이백령(李栢齡)이 양산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로, 34세손 이자송(李子松)이 수원이씨(水原李氏)의 관조로 분적되었다. 공산은 공주의 옛이름으로, 오늘날 같은 관향이면서 공주라 하는 종문(宗門)과 공산이라 부르는 종문이 있지만 모두 동원이다. 인구수 3만 842(1985).

 

〔광양(光陽)이씨〕
시조는 이무방(李茂方). 고려 말 검교문하시중이 되었다.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광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280(1985).

 

〔광주(廣州)이씨〕
시조는 이당(李唐). 고려 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한편, 그의 선대 인물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그는 칠원(漆原)에 세거해 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조에 후손들이 벼슬을 하였는데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준안(准;지금의 광주)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광주이씨의 시조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려 왔다. 본관은 조상의 거주지 준안이 고려 성종 때 광주로 개칭되었으므로 광주이씨라 한다. 인구수 14만 1830(1985).

 

[광평(廣平)이씨]----성산(星山)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무재(李茂材). 고려 성종 때 사재주부(司宰主簿)를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 능(能)이 나라에 공을 세워 광평(廣平: 성주의 고호)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지금은 성산(星山)으로 쓰고 있다. 그의 출생시에는 성주군이 광평군(廣平郡)으로 불리었다(경종6~성종14).(인구 통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부 성산이씨로 편입된 듯).

 

〔교하(交河)이씨〕
시조는 이진형(李震亨). 조선 숙종 때 예조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그 뒤 후손들이 교하를 관향으로 삼고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2405(1985).

 

〔금구(金溝)이씨〕
시조는 이주(李澍). 고려 때에 가선대부·홍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봉산군(鳳山君;봉산은 지금의 금구)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금구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830(1985). 〔김포(金浦)이씨〕
시조는 이관중(李管仲). 조선시대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병진보(丙辰譜)》에 의하면 이관중은 임진왜란 때 김포에서 성천(成川)·현봉(玄峰)으로 피란한 뒤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김포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구수 1137(1985).

 

〔나주(羅州)이씨〕
시조는 이철우(李哲祐). 조선 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다. 그는 이색(李穡)의 7세손으로, 금성(錦城;나주의 옛이름)에 낙향하여, 세거의 터를 잡음으로써 나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구수 9383(1985).

 

〔남평(南平)이씨〕
시조는 이동말. 문헌이 없어 선계는 알 수 없으며, 이동말은 조선시대에 보조공신(補助功臣)·정헌대부(正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고 남평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인구수 1306(1985).

 

〔농서(隴西)이씨〕----성주(星州)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장경(李長庚). 선계는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그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서 요양성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원나라 왕이 그 공을 찬양하여 그와 조부인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봉했으므로 후손들이 농서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328(1985).

 

〔단성(丹城)이씨〕

시조는 이현(李峴).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등 요직을 겸했다. 조선시대 후손 이영보(李永寶)가 말년에 단성현에 세거의 터를 잡게 된 것이 연유가 되어 이때부터 단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2270(1985).

 

〔단양(丹陽)이씨〕
시조는 이배환(李盃煥). 고려 태조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뒤 세계가 실전되었다가 10세손인 이방규(李方揆)로부터 다시 이어졌고 15세손 이무(李茂)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제1차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단산은 지금의 단양)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인구수 1만 4343(1985).

 

〔대흥(大興)이씨〕
시조는 이연계(李連桂). 전주이씨의 후손으로, 이성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한 것이 화가 되어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가 1403년(태종 3) 풀려나 대흥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대흥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3050(1985).

 

〔담양(潭陽)이씨〕
시조는 이덕명(李德明). 선계는 신평이씨(新平李氏)이나, 고려 인종 때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지자, 그의 후손들이 신평에서 분적,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643(1985).

 

〔덕산(德山)이씨〕
시조는 이재술(李在述). 고려 명종 때 덕풍(德豊;지금의 덕산)의 호장(戶長)을 지내면서 터를 잡고 덕산을 관향으로 가문을 열었다. 인구수 7355(1985).

 

〔덕수(德水)이씨〕
시조는 이돈수(李敦守).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중손 이윤온은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사판도판서(密直使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덕수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인구수 4만 3505(1985).

 

〔덕은(德恩)이씨〕
시조는 이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뒤 덕은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그의 선계는 진위이씨(振威李氏)이며 그 상대(上代)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후손인 이거명의 14세손이다. 인구수 2321(1985).

 

〔동성(東城―泗川)이씨〕
시조는 이식(李軾). 고려 충렬왕 때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었으며, 그 뒤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낸 이자에 이르기까지 6대가 진사를 누렸다. 이들이 사천에서 거주하게 됨에 따라 사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동성은 사천의 옛이름으로 현재는 동성이씨로 관향을 통일하고 있다. 인구수 7098(1985).

 

〔벽진(碧珍)이씨〕 ----성주(星州)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총언,
신라 말 고려 초기의 호족. 신라 말기 벽진군(碧珍郡;지금의 성주)의 치안에 힘써 백성을 보호하였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도움을 요청하자 18세의 나이인 아들 영(永)을 보내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삼한을 정복하는 등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이에 왕건은 그에게 삼중대광원훈(三重大匡元勳)으로 벽진장군에 올랐다. 그리고 손수 서신을 보내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치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후손들이 벽진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8만 662(1985).

 

〔보성(寶城)이씨〕
시조는 이윤장(李胤章).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세계를 알 수 없다. 한편 보성(保城)을 보성(寶城)으로, 윤장(胤章)을 윤창(允昌)으로 전하기도 한다. 인구수 508(1985).

 

〔봉산(鳳山)이씨〕
시조는 이수(李隨). 조선 태종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황해감사·병조판서·이조판서·집현전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봉산 토지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 사람인 이사빈(李士贇)을 시조로 하고, 이수를 중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인구수 6599(1985).

 

〔부안(扶)이씨〕
시조는 이지발(李之發). 선대는 부안의 토착사족(土着士族)으로 전해지나 고증할 문헌이 없다. 6세손 이봉정(李奉禎)이 조선 때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군(保君;보안은 부안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부안을 관향으로, 계통이 확실한 이지발을 시조로 삼았다. 인구수 1048(1985).

 

〔부여(扶餘)이씨〕
시조는 이품(李稟). 고려 정종의 왕비 용목(容穆) 왕후의 아버지로 공부시랑을 지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764(1985).

 

〔부평(富平)이씨〕
시조는 이희목(李希穆).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4세손 이정공(李靖恭)이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짐으로써 부평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5090(1985).

 

〔삼척(三陟)이씨〕
시조는 이강제(李康濟).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세계나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인구수 216(1985).

 

〔상주(尙州―商山)이씨〕
시조는 이민도(李敏道). 중국 농서 사람으로 한림학사로 있다가 원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東來), 조선 개국 때 공을 세웠다. 상산군(商山君;상산은 상주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명으로 본관을 농서에서 상주로 하였다. 인구수 4331(1985).

 

〔서림(西林―舒川)이씨〕
시조는 이익존(李益存). 고려시대에 흥록대부 호부상서(興祿大夫戶部尙書)에 올랐다. 18세손 이세공(李世公)이 고려공신이 되어 서림군(西林君;서림은 서천의 옛이름)에 봉해지고, 20세손 이언충(李彦忠)이 서주군(西州君;舒川의 딴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연안이씨(延李氏)에서 분적, 이익존을 비조(鼻祖)로 하고 이언충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2152(1985).

 

〔서산(瑞山)이씨〕
시조는 이영모(李令謨).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를 지내고 부성군(富城君;부성은 지금의 서산)에 봉해져 후손들이 서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978(1985).

 

〔성산(星山)이씨〕----성주(星州)이씨의 한 지파로서 성주(星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능일(李能一). 신라 말 성산현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이었다. 고려 건국에 수훈을 세웠으며,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뒷날 성산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6만 4735(1985).

 

〔성주(星州)이씨〕
시조는 이순유(李純由). 신라 사람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충절을 지켜 고려조에 나아가지 않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동(京山洞)에 옮겨가 숨어 살았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왕은 그를 경산부원군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의 황제가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이장경을 중시조로 삼게 되었으며, 그가 농서군공이 되었기 때문에 농서이씨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가 크게 일어나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인구수 15만 3146(1985).

 

〔수안(遂安)이씨〕 시조는 이견웅(李堅雄). 경산(京山) 사람으로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하고 태조를 따라 견훤(甄萱)을 토평, 벽상공신이 되었다. 13세손 이연송(李連松)이 수안군에 봉함을 받아 계대하였으므로, 수안을 관향으로 한 뒤 이때부터 그대로 봉지(封地)를 따라 수안이씨라고 하였다. 인구수 1만 4099(1985).

 

〔수원(水原)이씨〕
시조는 이자송(李子松). 고려 우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진뒤 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수성은 수원의 옛이름)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수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6374(1985).

 

〔순천(順天)이씨〕
시조는 이사고(李師古). 고려시대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과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다. 순천을 계통으로 관향을 정하기는 고려 때 비롯되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증할 수 없어 구보(舊譜)에 의하여 대언공(代言公) 이사고에서 시작한다고 범례(凡例)에 씌어 있다. 인구수 4644(1985).

 

〔신평(新平)이씨〕
시조는 이덕명(李德明). 고려시대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한편 《무오보(戊午譜)》에 보면 시조는 백제 때 신평현(新平縣) 호장(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라고 했으나 계대와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다만 이름과 관직만을 적어 이씨의 연원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 진무공신 신양군 묘갈명(振武功臣新陽君墓碣銘)에는 이덕명을 원조로 삼고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이덕배(李德培)를 중조로 한다는 구절도 있다. 인구수 2만 9281(1985).

 

〔아산(牙山)이씨〕
시조는 이주좌(李周佐). 신라 대아찬(大阿飡) 이알평(李謁平)의 후예로 5세조가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며,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승훈(李承訓)의 둘째 아들로 아산으로 분적하여 아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기계(起系)는 200여 년 뒤의 인물인 이서(李舒)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인구수 1만 403(l985).

 

〔안산(安山)이씨〕
<경기계>
시조는 이인수(李仁守). 조선시대에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선계는 연안이씨로, 그가 안산군에 거주하면서 연안이씨에서 분적하여 이인수를 시조로, 본관을 안산으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철산계>
시조는 이희적(李希勣). 고려 고종 때 철산방어사를 지냈다. 몽골의 살리타이군을 맞아 싸우다 순국하였다. 그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안산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경기계와 철산계는 다른 계통이다.

인구수 양계 합계 4973(1985).

 

〔안성(安城)이씨〕
시조는 이중선(李仲宣). 고려시대에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큰 업적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고 삼국모와 더불어 이자의(李資義)의 역모를 평정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되었으며, 백하군(白夏君;백하는 안성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이런 연유로 자손들이 안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7546(1985).

 

〔안악(安岳)이씨〕
시조는 이견(李堅). 고려 공민왕 때 검교문하대승상장군(檢校門下大丞上將軍)을 지냈다. 안악이씨는 상계의 소목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조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이 엇갈려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이극규(李極奎)를 시조로 하는 주장이 있다. 인구수 7973(1985).

 

〔양산(梁山)이씨〕
시조는 이만영(李萬英).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개국 후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이 양산에 정착, 이전생의 아들 이징석(李澄石)이 양산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양산을 관향으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4517.

 

〔양산(陽山)이씨〕
시조는 이천일(李天一). 신라 때 공산군(公山君;공산은 公州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는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시조이기도 하여 공주이씨와 양산이씨가 동원(同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산과 공산이 갈린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이들 족보의 손록(孫錄)이나 세계표(世系表)에서 분관역혁을 볼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34세 이교송(李喬松)은 공산이씨로 분적되었고, 아우 이자송(李子松)은 수원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31세 이백령(李栢齡)은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져 양산이씨로 분관되었다. 43세 이항무(李恒茂)가 세조 때 양산군에 봉해져 양산이씨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인구수 4517(1985).

 

〔양성(陽城)이씨〕
시조는 이수광(李秀匡).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동래하여, 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데 연유한다. 인구수 3만 8302(1985).

 

〔양주(楊州)이씨〕
시조는 이석숭(李碩崇). 진사(進士)를 지낸 양주의 토착사족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268(1985).

 

〔여주(驪州-驪江-驪興)이씨〕
여주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 즉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는 교위공파(校尉公派),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이 3파는 각각 관향을 여흥·하음(河陰)·여강으로 달리 써오다가 여주로 단일화했다. 인구수 7만233(1985).

 

〔연안(延)이씨〕
시조는 이무(李茂). 중국 당(唐)나라의 중랑장(中郎將)으로 660년(태종무열왕 7) 소정방(蘇定方)의 부장으로 신라에 와 백제를 평정한 뒤 연안후(延侯)에 봉해졌다. 이무묘비문에 보면 무열왕은 그에게 개국 현후작(縣侯爵)에 식읍 1000호를 추봉하고 빈객으로 예우, 신하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으로 삼아 현족(顯族)으로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2만 6569(1985).

 

〔영천(寧川)이씨〕
시조는 이능간(李凌幹). 1320년(고려 충숙왕 7)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상왕을 호종하였으며 뒤에 재궁(梓宮)을 모시고 돌아왔다. 26년에는 지사사우상시(知司事右常侍)로 나라에 공을 세워 면좌당(免左堂)이란 액호(額號)를 사림으로부터 받았다. 32년(충혜왕 2)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조적의 난을 평정, 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관향을 영천으로 삼았다. 인구수 9만5473(1985).
 

〔영천(永川)이씨〕
시조는 이문한(李文漢).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냈다. 영천이씨는 시조의 6세손 이후의 연계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때 영양군(永陽君;영양은 영천의 옛이름)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을 비조로 하는 파와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전을 기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인구수 8663(1985).

 

〔영해(寧海)이씨〕
시조는 이연동(李延東). 고려시대에 문하시랑을 지냈고, 나라에 공을 세워 영해군에 봉해져 완산(完山)으로부터 이적, 자손들이 영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2042(1985).
 

〔온양(溫陽)이씨〕
시조는 이흥서(李興瑞). 조선 선조 때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함으로써 선계를 잃고 손자 이만대(李萬代)가 조부가 쓴 《난중향기(亂中鄕記)》를 근거로 이흥서를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2475 (1985).

 

〔용궁(龍宮)이씨〕
시조는 이정식(李禎植). 선계는 여주이씨로 전해오나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다. 고려 때 그의 둘째아들이 아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가 폐한 사실이 관에 알려져 그의 3남이 각각 유배되었는데 후손들이 유배 전의 세거지인 용궁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653(1985).

 

용인(龍仁)이씨〕
시조는 이길권(李吉卷).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사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師三重大匡)에 책록되었고 구성백(駒城伯;구성은 용인의 다른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2만 7389(1985).

 

〔용천(龍川)이씨〕
시조는 이밀(李密). 고려 때도등고판관(都登庫判官)을 지냈다고 전해지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99(1985).

 

〔우계(羽溪)이씨〕
시조는 이양식(李陽植). 원래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47세손 이선용(李宣用)의 둘째 아들로 고려 인종 때 중서사인좌복야(中書舍人左僕射)를 지냈다.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江陵)의 속현이던 우계현에 터를 잡아 관향을 삼고 분적함으로써 우계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구수 1만 4191(1985). 〔우봉(牛峰)이씨〕
시조는 이공정(李公靖).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잠성은 우봉의 다른 이름)에 녹훈되었다. 그 뒤 자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그를 시조로 하고 우봉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잇고 있다. 또한 《고려사》에도 그는 우봉인으로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하였다. 인구수 1만 7513(1985).

 

〔울산(蔚山)이씨〕
시조는 이철(李哲).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훈으로 학성군(鶴城君;학성은 지금의 울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433(1985).
 

〔원주(原州-李椿桂)이씨〕
시조는 이춘계(李椿桂). 고려시대에 안일호장(逸戶長)을 지냈고, 인종과 의종 때 병부상서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중국 진(秦)나라 사람으로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 진한(辰韓)에 피난해 왔는데 옛일이어서 세계가 불확실하고 신라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진민(李眞民)이 원조(遠祖)라고 한다. 인구수 2781(1985).

 

〔원주(原州-李申佑)이씨〕
시조는 이신우(李申佑). 고려 목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뒤 나라에 세운 공훈으로 원주백에 봉해졌으며 호장으로 원주에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경주에서 분적, 이관하여 원주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분적 초에는 익흥(益興)을 관향으로 삼았으나 13세 경원군(慶源君) 이반계(李攀桂)의 뜻에 따라 원주로 바꾸었다. 인구수 5만 6001(1985).

 

 〔음죽(陰竹)이씨〕
시조는 이방서(李方瑞).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했고, 이천(利川)에 정착하였다. 그 뒤 후손들이 음죽(이천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였다. 인구수 303(1985).

 

〔익산(益山)이씨〕
시조는 이문진(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大學博士文部典書五經博士)로 공신후(功臣侯)가 되었고, 백제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익산의 옛이름)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익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제를 이어왔다. 인구수 1624(1985).

 

〔익흥(益興)이씨〕
시조는 이반계(李攀桂), 혹은 이시정(李時楨). 선계는 원주이씨(原州李氏)이며, 이반계는 원주이씨 시조 이신우(李申祐)의 12세손으로서 고려 때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원주에서 분적, 익흥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편 호장(戶長) 이신우(李申祐)와 장령(掌令) 이시정(李時禎)을 각각 시조로 전하는 문헌들도 있다. 인구수 60(1985).

 

〔인천(仁川)이씨〕
시조는 이허겸(李許謙).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러 소성백(邵城伯;소성은 지금의 인천)에 피봉되었다. 본래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모비(母妃)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이허겸의 10대조 허기(許奇)가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이허겸까지 이·허 2성으로 내려오다가 이허겸을 관조로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6만 1045(1985).
 

〔임천(林川)이씨〕
시조는 이현(李玄). 본래 회골인으로 고려말 귀화하여 공양왕 때 통사(通事;通官)의 공으로 임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457(1985).

 

〔장수(長水)이씨〕
시조는 이임간(李林幹).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상서병부판(尙書兵部判)을 지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장천은 장수의 다른 이름)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2421(1985).
 

〔장성(長城)이씨〕
시조는 이병규(李丙奎). 1451년(문송 1)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郎)에 이르렀다. 그 뒤 후손들이 장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457(1985).

 

〔장흥(長興)이씨〕

시조는 이원성(李元成).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의 선계나 그 밖의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수 2117(1985).
 

〔재령이씨〕
시조는 이우칭. 고려 때 보조공신(補祚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가 재령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재령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경주가 본관이었다. 따라서 재령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수 4만 5417(1985).

 

〔전의(全義―禮安)이씨〕
시조는 이도(李棹). 공주(公州)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고자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 진군을 멈추게 되자 도강책(渡江策)을 주도한 공이 커, 삼한개국 익찬이등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開國翊贊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에 책록되고 전산후(全山侯;전산은 전의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전의의 이성산(李城山) 아래 거주하게 되어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예안이씨가 전의이씨에서 분관되었기 때문에 흔히 전의·예안이씨라고 한다. 인구수 12만 3371(1985).

 

〔전주이씨〕
시조는 이한(李翰). 전주에 토착해온 명문 태생으로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고, 문성왕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 이한의 선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전주에 세거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한 이후 18세손인 이안사(李安社;穆祖)에 이르기까지 전주에서 호족으로 세거하고, 시조의 묘소도 전주에 있기 때문에 본관을 전주로 하게 된 것 같다. 이한의 후손 중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 이린(李隣)·이의방(李義方) 등은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 관직에 있기도 했다. 그 뒤 이성계의 직계 선조는 동북면으로 이주,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임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가 시조 이한의 22세손인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전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그 뒤 27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손이 크게 번성, 현달하여 파계(派系)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성씨를 이룰 때 제왕은 조상으로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왕자, 즉 대군이나 군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이안사의 선계에서 갈라지는 파와 그 이후에서 갈라지는 파를 합하여 모두 123파가 된다. 인구수 237만 9537(1985).

 

〔정선(旌善)이씨〕
시조는 이양곤.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금(金)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에 와 경주에 정착함으로써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관향을 정선으로 삼게 된 것은 8세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인구수 3107(1985).

 

〔정주(貞州)이씨〕
시조는 이세화(李世華). 1231년(고려 고종 18) 광주안무사(廣州按撫使)로 있으면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고 뒤에는 사재경(司宰卿)을 지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주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345(1985).

 

〔진보(眞寶―眞城)이씨〕
시조는 이석(李碩). 진보현리를 지낸 뒤 생원시에 합격했다.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보면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1364년(고려 공민왕 13) 홍건적을 평정,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이석은 충렬왕과 충선왕 때 인물이라고 하였다. 진성(본래는 진보였는데, 진보성을 줄여 진성이라 부른다)을 관향으로 삼게 된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에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인구수 5만 8877(1985).

 

〔진위(振威)이씨〕
시조는 이자영(李自英).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진위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본관을 진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경주이씨로 시조 이거명(李居明)의 후예라고 한다. 인구수 4018(1985).

 

〔진주이씨〕
시조는 이군재(李君梓). 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그는 성품이 곧아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 성천(成川)으로 유배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대제학을 사임하고 진주로 낙향한 형 이영재(李英梓)를 생각, 본관을 진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인구수 1만 3591(1985).

 

〔차성(車城―機張)이씨〕
시조는 이위(李渭). 신라 말 또는 고려사람이라는 양분된 설이 있다. 그가 차성군(車城君;차성은 기장의 옛이름)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차성에 세거하면서 관향 역시 차성으로 하여 경주이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038(1985).

 

〔창녕(昌寧)이씨〕
시조는 이정현(李正賢). 고려 원종 때 태어나 충선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뒤 창산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029(1985).

 

〔천안(天安)이씨〕
시조는 이립상. 《기사보(己巳譜)》에 보면 그의 행적이 나와 있지 않고 서문에도 천안으로 관향을 삼은 뒤 1세 이상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이립상은 한 파의 기세조인 듯하다. 인구수 1968(1985).

 

〔청송(靑松)이씨〕
시조는 이덕부(李德富).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성주(星州)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의 5세손 이우(李祐)가 청송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269(l985).

 

〔청안(淸安)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는 이양길(李陽吉)로 1 356년(공민왕 5) 가을적홀고탁란(加乙赤忽古托亂) 때 순절, 1등훈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또 다른 계통인 충간공파(忠簡公派)는 이한번(李漢藩)을 시조로 한다. 그는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 검열관을 지낸 뒤 58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청안군에 봉해졌다. 인구수 1만 2801(1985).

 

〔청주(淸州)이씨〕
시조는 이능희(李能希).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10세손 이계감이 낭성군에 봉해졌고 12세손 이애가 좌명공신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상당은 지금의 청주)에 봉해져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청주이씨족보》에 보면 이능희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인구수 2만 8968(1985).

 

〔청해(靑海)이씨〕
시조는 이지란(李之蘭).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1371년(공민왕 20) 고려에 귀화하면서 개명하였다. 그 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청해백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본래의 고향인 중국 칭하이성〔靑海省〕을 연유로 하여 본관을 청해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1만 12(1985).

 

〔초산(楚山)이씨〕
중시조는 이허 이헌(李憲). 고려 공민왕 때 춘방시학사(春坊侍學士)를 지냈다. 이헌을 시조라고도 한다. 고려가 망하자 초산(井州의 옛이름)으로 낙향, 스스로 산림거사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전국인구조사에서 그 통계가 나와 있지 않으나 초산이씨 문중에서 1975년 보첩을 발간하였다.

 

〔충주(忠州)이씨〕
시조는 이관(李墳). 고려시대평장사를 지냈다. 나라에 공을 세워 충주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구수 3215(1985).

 

〔태안(泰安)이씨〕
시조는 이기(李奇). 중국 당나라 때의 이승남(李昇南)의 후손으로 고려 광종 때 난을 피해 동래하여, 태안에 들어와 세거하게 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그 뒤 7세손 이천이 태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3464(1985).

 

〔태원(太原)이씨〕
시조는 이귀지(李貴芝). 고려 충렬왕 때 중국의 타이위안〔太原〕에서 난을 피해 동래(東來)하였다. 손자 이방무(李芳茂)는 조선조 개국원종공신으로 벼슬이 사정(司正)에 이르렀다. 조선 때 후손들이 북청(北靑)에 정착하면서 타이위안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36(l985).

 

〔통진(通津)이씨〕
시조는 이인(李仁). 조선시대 수의부위참판(修義副尉參判) 등을 지냈고, 통진에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이거한 뒤 통진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147(1985).

 

〔평산(平山)이씨〕
시조는 이부명(李敷明). 그 뒤의 세계를 실전, 그의 후손인 고려시대에 밀직부사를 지낸 이자용(李子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세거지인 평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인구수 2929(1985).

 

〔평양(平壤)이씨〕
시조는 이극문(李克文).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242(1985).

 

〔평창(平昌)이씨〕
시조는 이광(李匡). 1126년(고려 인종 4)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 동북면도순문사평장사(樞密院府事東北面都巡問使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 태사(光祿大夫太師)에 이르렀고 백조군(白鳥君;백조는 평창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러 많은 공훈을 세워 평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평창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만 5487(1985).

 

〔하빈(河濱)이씨〕
시조는 이거. 고려시대에 예부상서에 올랐다. 1174년(명종 4)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기병하여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을 평정할 때 낭장으로 동북로도지휘사 최균(崔均)을 따르다가 서경유수군(西京留守軍)을 받아들여 정이지당(鄭李之黨)을 토평하여 그 공으로 하빈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빈(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던 지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2627(1985).

 

〔하음(河陰)이씨〕----강화(江華)이씨의 한 지파로써 여주(驪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영(李英). 내시정용낭장을 지냈다는 것 외에 세계나 사적(事蹟)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 국세조사에 충북 영동군(永同郡) 양강(楊江)에 25가구가 살고 있다고 나타나 있다. 인구수 811(1985).

 

〔학성(鶴城)이씨〕
시조는 이예(李藝). 울주군기관(蔚州郡記官;울주는 학성의 다른 이름)으로 출사하여 24세 때 군수 이은(李殷)과 함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는데 이은을 극진히 공대하니 일본인이 예절에 감복하여 같이 돌려 보냈다. 왕이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예빈소윤좌군사직(禮賓少尹左軍司直)을 제수하였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고, 병기의 발명에도 힘써 완구포 등의 제작은 유명하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학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8869(1985).

 

〔한산(韓山)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계로 나뉜다.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 한림 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 정당문학(正堂文學)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진 이곡(李穀)의 5대조인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 충렬왕 때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상호군 검교대장군(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軍檢校大將軍)에 오르고 역시 한주군에 봉해진 이무(李茂)의 3대로 이윤우(李允佑)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權知公系)이다. 인구수 11만 9174(1985).

 

〔함안(咸安)이씨〕
시조는 이상(李尙). 고려 고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파산은 지금의 함안)에 봉해졌다. 《을축보(乙丑譜)》에 그의 선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고, 범례편에 파산군이 처음으로 봉작되었으므로 그를 시조로 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따라서 후손들이 함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구수 3만 1938(1985).

 

〔함양(咸陽)이씨〕
시조는 이홍(李洪). 조선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인구수 710(1985).

 

〔함평(咸平)이씨〕
시조는 이언(李彦). 고려 태조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고 함풍군(咸豊君;함풍은 함평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5세손 이림(李琳)은 고려시대 검교 흥위위대장군(檢校興威衛大將軍)을 지낸 이순지(李順之)의 큰 아들로 신종 때 태어나 문과에 급제,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는데, 그 뒤 후손들이 크게 번성, 함평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순지의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함풍부원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일파를 이루고 있다. 인구수 10만 3696(1985).

 

〔합천이씨〕
시조는 이개(李開). 신라에서 벼슬하여 강양군(江陽君;강양은 합천의 옛이름)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합천호장으로 옮겼다.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 보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 다시 문학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이알평의 후손으로, 따라서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다. 이개가 합천호장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9만 8595(1985).

 

〔해남(海南)이씨〕
시조는 이지형(李之亨). 고려시대에 태자소경(太子少卿)을 지냈다고 한다. 선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다만 후손들이 해남에 세거하며 본관을 해남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859(1985).

 

〔해주(海州)이씨〕
시조는 이선 (李璿). 조선시대에 참봉을 지낸 뒤 해주에 정착, 세거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해주로 삼게 되었다. 그의 선계는 덕수이씨로 조선시대에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의 큰 아들이다. 인구수 2164(1985).

 

〔홍주(洪州-安平)이씨〕
시조는 이유성(李維城). 고려시대 인물로 서경부유수를 거쳐 정당문학·찬성사에 올랐다. 그 뒤의 계보는 병화 등 여러 사정으로 인멸되었다. 선계의 실전으로, 본관을 정하기는 9세손인 이기종(李起宗)이 홍양부원군으로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된다. 후손 중에 일부는 호적상의 본관이 안평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는 중간에서 호적상 오기임이 입증되어 그중 대부분은 홍주로 정정하였고, 잔여 종인(宗人)들도 현재 정정 중에 있다. 인구수 1만 3358(1985).

 

〔화산(花山)이씨〕
시조는 이용상(李龍祥). 안남왕(安南王) 이용한(李龍翰)의 아우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여 고려 고종 때 옹진(甕津)의 화산에 망명, 정착하였다. 인구수 1131(1985).

 

〔회덕(懷德)이씨〕
시조는 이몽(李蒙). 능양군(綾陽君, 인조)의 후예로 나라에 공이 있어 회덕군(懷德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지나 문헌이 없어 선계를 알 수 없다. 인구수 338(1985).

 

〔흥양(興陽)이씨〕
시조는 이언림(李彦林). 고려 인종 때 병부상서, 이듬해 공부상서와 우복야를 지냈다. 그 뒤 7세손 이길(李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通禮門副使)를 지내고 흥양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흥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3829(1985).


원글 보기: http://cafe.naver.com/yonginlee/15 (게시자:이인규)                                           수정보완: 아천원량

참고사이트: http://www.jokbo.re.kr/book/area.html (부천 족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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