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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환구단(圜丘壇)은 원구단(圓丘壇)

by 바로요거 2011. 7. 8.

환구단(圜丘壇)은 원구단(圓丘壇)

 

환구단(圜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다.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사적 157호로 지정된 환구단은 고종 대에 있었던 환구단 터로,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 자리이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받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

▶동영상 출처: EBS 잊혀진 나라 1부. 중에서...

 

<환구단의 역사>

1897년(고종 광무 원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지(天地)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환구단이 마련된 곳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로,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에는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冬至)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12년(융희 4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정자로,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광무 4년)에 환구의 북쪽에 건립하여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 앞에는 1902년(광무 7년)에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돌로 만든 북(石鼓)을 세웠는데, 이 북은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환구단 터와 황궁우는 당시 고종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다.

한편, 1960년대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이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 [1] 2009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2] 

 

<원구(圓丘)>

천지제(天地祭)는 원래 천제(天祭)와 지제(地祭)로서 원구(圓丘)·방택(方澤)이라 하여 원형단(圓形壇)과 방형단(方形壇)의 형태로 각각 수도의 남쪽 교외와 북쪽 교외에 나누어 세우는 것이 원칙이나, 후일 합제(合祭)하는 것을 통례로 하였다. 그 배향(配享)은 원구의 맨 위층에 천황(天皇) 상제위(上帝位)를 두고, 지황(地皇) 지위(祗位)·대명위(大明位)·야명위(夜明位) 북두칠성 5성(五星) 28수(宿)의 성신위(星辰位)와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5악 5진(五岳五鎭)·4해 4독(四海四瀆)·명산대천·성황사토위(城隍司土位) 등을 둔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9월 17일(음력)에 제사할 때 친히 제주(祭主)가 되는 것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이기 때문이며, 국가의 안녕을 축원한다.

 

 

 

 

환구단(원구단) 사진-조선풍속풍경첩 엽서집

 

엽서 속의 환구단

연합뉴스 | 입력 2010.06.25 09:39

(서울=연합뉴스) 지금의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 조선풍속풍경첩이란 엽서집에는 '원구단'(園丘壇)이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공동으로 마련한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특별전에 선보인다. 2010.6.25 <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

 
taeshik@yna.co.kr (끝)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김민수 칼럼>서울 광장을 환구단 광장으로

2010.04.14 11:22 입력 박은정 기자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었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이라 국호를 정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환구단(圜丘壇)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환구단에 나아가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하였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高祖) 광무제(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환구단(圜丘壇)을 축조하였는데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에 의한 일제의 대한 병탄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관리한 총독부가 1913년 대한제국 황단 환구단(圜丘壇)과 대한 황궁 경운궁 동편 권역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고 경운궁은 원형복원이 가능하지만 환구단은 원 위치 원형복원이 불가능하며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3층 건물로 황천상제,황지지 신위를 봉안한 황궁우(皇穹宇)와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는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정문만 남아 있다.


총독부가 환구단(圜丘壇)과 경운궁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경운궁과 환구단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 철거,경운궁 대안문과 황궁우 석고단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여 고조 광무제가 친히 환구단에서 제사드린 친사환구의를,경운궁 태극전에서 고조 광무제가 황제위에 오르는 등극의,고조 광무제의 조칙을 반포하는 반조의,황태자가 광무제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문무백관들이 광무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의 환구제를 봉행해야 한다. <글 : 김민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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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환구단/김성호 논설위원

서울신문 | 입력 2009.12.10 02:37

[서울신문]일제 36년의 침탈로 수도 서울의 4대문 안에서 가장 큰 아픔의 흔적을 간직한 곳은 경복궁과 환구단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기세를 펴기 위해 낙점한 조선시대 정궐이 경복궁이고, 고종황제가 국격의 자존을 살려 천제를 올리던 제천단(祭天壇)이 환구단 아닌가. 통치와 집정의 핵심인 경복궁에 식민통치와 수탈의 중심인 조선총독부를 세운 것이나, 황제의 제천단을 허물어 호텔을 올린 일제는 식민 심장부의 눈엣가시를 모두 제거해 회심의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훼손된 경복궁 안 390여칸의 전각이며 정문인 광화문을 복원하려는 국가적 역사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혼 부활을 겨냥한다. 망가지고 스러진 조선 정궐을 다시 살려내려는 역사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국가적 대사의 뜻대로라면 어두운 과거를 털고 민족정기의 회복을 코앞에 둔 셈이다. 이렇게 웅장한 경복궁 복원의 거사와는 달리, 1㎞도 채 안 떨어진 환구단이 똑같이 아픈 잔재임에도, 관심에서 먼 채 그늘의 잔재로 남아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환구단이 천제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나라의 자존과 위신을 세우려는 고종의 통한이 담긴 곳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곤 이 천구단에서 제사를 드린 뒤 황제에 즉위했다. 삼국시대부터 거행한 제천의례는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원구제 형태로 이어지다 세조 때 폐지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구제라 함은 천자(天子), 즉 황제가 하늘에 드리는 제사였으니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원구단을 빌려 나라의 독립을 천명한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환구단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고왔을리 없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3년 뒤인 1913년 일제는 결국 총독부 부속건물인 철도호텔을 세우면서 많은 부분을 헐어냈다. 1967년 조선호텔 건립 때 신주를 봉안하던 황궁우만 빼놓고 그나마 모두 철거됐다니 환구단은 시련의 점철이다. 서울시가 2007년 우이동에서 발견된 환구단 정문을 원래의 자리에 이전 복원해 놓았단다. 뒤늦은 가치의 발견과 역사의 복원이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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