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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한민족역사찾기]

by 바로요거 2010. 10. 1.

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한민족역사찾기]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5월호

 

1, 민족혼을 잃어버린 대한의 현실

 

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 2
 
 지난 호에서는 외래 종교에 의한 역사 왜곡과 전란과 병화兵火로 고유사서들이 소실된 까닭을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중국 중화사관의 중독中毒, 일제 식민사관의 왜독倭毒, 서양 실증주의 사관의 양독洋毒으로 우리 역사가 왜곡된 현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중화사관中華史觀에 의한 역사 왜곡,
 中毒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이중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의식과 그들의 시원 역사가 동이족으로부터 비롯하였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한민족사를 왜곡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중국의 한민족사 왜곡은 오랜 내력이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탁록대전에서 치우천황蚩尤天皇이 죽었다?
 한·중 고대사를 날조하여 기록한 첫 번째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무제 때의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이다. 그가 왜 한민족사 왜곡을 시작했는지 당시의 시대 배경이 말해준다. 북방 흉노족 정벌에 성공한 무제武帝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동북아 전역을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중화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번조선을 침탈한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북부여까지 넘보았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한 무제의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두 민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배경 속에서 사마천이『사기史記』를 편찬했고,『 사기』의 첫 장인「오제본기五帝本紀」서두에서 조선사 왜곡의 첫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금살치우擒殺蚩尤’이다. 4,700년 전 배달국 14세 임금인 치우천황이 대승을 거두고 황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사실을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치우라는 인물을 잡아 죽였다’라고 뒤집어 기록한 것이다.
 
 당시 치우천황이 서방으로 출정하여 제후들을 정벌하느라고 도성을 비웠을 때,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 난은 무려 10년 동안 73회의 공방전이 오고간 뒤 마지막 탁록대전으로 진압되었다. 이 싸움에서 치우비蚩尤飛라는 장군이 전사하였는데, 그것을 치우천황의 전사로 각색한 것이다.
 
 『사기』는 치우천황을 매도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큰 권위를 누리고 있는『사기』의 삼가三家주석에서는 치우에 대한 올바른 기술이 보인다. 그 중『사기정의』는‘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大弩]와 같은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말하며, 『사기』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치우는 옛 천자였다’[蚩尤古天子]라고 한다.『 관자管子』에는 치우천황의 승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요컨대 사마천은‘치우가 천하를 제패했다’[蚩尤覇天下]라는 역사의 진실을‘치우가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로 뒤집음으로써, 일개 제후였던 황제 헌원을 천하를 호령하던 천자이자 동북아 문명의 주도권자로 만들어 공자가 싹을 틔운 중화사관中華史觀을 더욱 확고히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2) 조선의 역사는 기자조선으로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두 번째 조선사 왜곡은 치우천황 이후 1,600년 뒤 고조선 시대인 중국 주周나라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중국의 모든 역사책은 우리 민족을 일컬을 때, 정식 국호인 조선을 쓰지 않고 조선의 제후국 70여 개의 이름을 끌어다가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 내이萊夷, 견이??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등으로 부른다.
 
 사마천도『사기』의 알맹이인「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는데 열국사를 다룬「세가世家」중「송미자세가」에서‘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 하여 조선이란 이름이 불쑥 등장한다. ‘봉기자어조선’은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 상商·주周교체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은)나라 폭군 주紂왕을 방벌하면서 감금돼 있었던 삼현三賢을 풀어주었는데, 그 중 하나인 기자箕子가 조국 상나라가 멸망해버린 사실에 좌절하여 중원을 떠나 조선으로 가버리자 무왕이 이를 섭섭해 하며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다.
 
 
 왜 사마천은‘봉기자어조선’이란 말을 지어냈을까? 첫째, 지난 요순시대부터 선진문물을 전수해준 종주국 옛 조선을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나라를 계승한 한나라도 주나라처럼 조선의 주인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둘째, 한나라보다 무려 2,100년이나 앞서 개국한 고조선이 중국 동부지역을 장악하여 분국을 세우고 중원지역 정권을 좌지우지한 사실을 감추고 한나라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사대모화사상에 빠진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기자조선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자가 동방으로 와 몽매하던 조선을 교화시켜 은혜를 입었다는 망언을 하며 소중화小中華를 자청하였다.
 
 
 3) 한민족의 세 분 성황聖皇이 한족漢族이다?
 중국은 서방으로 진출하여 산동성을 중심으로 황하문명 형성에 큰 공적을 남긴 역사의 선구자인 동방 배달 동이족 혈통의 세 분 성황聖皇에 대해서도 왜곡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5,500년 전 삼신상제님으로부터 하도河圖와 팔괘八卦를 받아내려 천리天理의 기본을 밝힌 역易철학의 시조이자 문명의 개척자인 태호太昊복희伏羲씨와 농경, 의약, 교역문화의 시조인 5,200년 전 염제炎帝신농神農씨, 그리고 4,700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금속문명을 일으켰으며 서방 한漢족에게 동방의 신교神敎와 천자문화를 전해준 대제왕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을 동이족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동이족인 세 분 성황이 중국문화의 시원임이 밝혀지자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정부가 염제신농씨와 치우천황을 한족 조상으로 슬그머니 편입시켜 놓았다. 이를 가장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 치우천황이 황제 헌원의 난을 제압했던 하북성 탁록에 세워진 삼조당三祖堂이다. 한가운데에 헌원을 모셔놓고 신농씨와 치우천황도 자기네 조상이라 하여 좌우에 모셔놓았다. 최근에는 태호 복희씨까지 인문지조人文之祖, 즉 인류문명의 시조라고 떠받들면서 자기들 조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 분 성조를 자기네 조상으로 둔갑시킨 것은 동북아의 뿌리 역사를 다 중국역사로 집어 삼키려는 것으로 지금 한·중 역사 전쟁의 뜨거운 감자인 동북공정과도 관련이 있다.
 
 
 4)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 왜곡, ‘동북공정’
 20세기에 들어서 유물과 유적의 과학적 연대 측정이 가능해진 가운데, 뜻밖에도 중국의 동북방 변방인 요하유역에서 그동안 중국의 주류 문화로 인정받던 황하문명보다 연대가 더 오래된 문명인 홍산문화가 발견되었다. 이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낸 절묘한 방안이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우는 것이었는데, 중국의 시원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중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하夏·상商·주周의 연대를 확정하는 사업을‘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란 이름으로 2000년 9월에 완료하였다.
 
 그 후 2003년부터, 그동안 신화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三皇(수인·복희·신농)과 오제五帝(황제·전욱·제곡·요·순) 시절을 실재했던 왕조로 만드는 ‘중화고대문명 탐원공정’을 진행했다. 이것은 중국역사를 1만 년 전까지 끌어 올려 중국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 오래된‘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이다. 이를 위해 홍산문화를 세계 4대문명보다 앞서는 1만 년 역사를 가진 문명권으로 부각시키는‘요하문명론’을 만들었다.
 
 이 탐원공정을 하면서, 한민족의 북방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정치공작을 벌인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만주와 요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고조선, 고구려, 대진국(발해)은 중국 조공체제에 예속된 변방 정권, 다시 말해서‘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국내사이므로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그 내용은 첫째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것, 둘째 조선족은 중국의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것, 셋째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과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동북지역과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에 깔린 그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한국이 북한과 통일을 이루더라도 통일한국이 꾸려나갈 역사 무대를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에 200만 조선족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포함한, 한민족의 조상들과 관련된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만들어 동북아 전체 영역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미국을 앞지르는 초강대국으로 비상하여 21세기를 중국의 시대로 만들고자 함이다. 중국의 거대한 국가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된 동북공정은 한국사 왜곡의 완결판으로 과거 2천여 년의 역사 왜곡을 총 정리한 최후의 작품이다.
 
 이와 같이 중국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2002년부터 7년 동안 우리 역사를 훔쳐가고 있을 때 이 땅의 정치가, 역사가들 대부분은 침묵만 지킨 채‘한민족과는 무관하다’는 망발을 하였을 뿐이다. 몇몇 민족사학자들이 한민족의 옛 터전을 찾아 중국의 파렴치한 행동을 고발하고 있으나, 그 외침은 광야의 빈 메아리로 그치고 있을 뿐이다.
 
 
 2.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
 倭毒

 
 일본의 한민족사 왜곡도 결코 최근의 사실이 아니라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1) 한국사 왜곡의 1단계, 임나일본부
 일본의 고대사는 한민족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개척한‘한민족의 이민사’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건너간 조선족들이 고대 일본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하였으며 왕실의 혈통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해상왕국이었던 백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왜倭조정은 사실상 백제의 분조分朝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백제가 660년에 나당동맹군에게 망하고 백제부흥운동도 실패로 끝나자 왜는 친정집인 한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이 종래에 사용되던 왜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670년), 왜왕을 천황天皇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이민사였던 역사를 자생自生왕조사로 변색한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면서‘기기사관記紀史觀’이 성립되었다. 이 기기사관은 우선 일본 천황가를 백제가 아닌 신대神代로부터 시작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조로 조작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모국인 한반도의 역사도 조작하였는데, 4세기 후반에 신공황후가 한반도의 소국들을 정벌하고 그 땅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벌인 역사 왜곡의 제1단계라 할 수 있는 이 일에 대해 일본 학자 요시노 마코토는“『일본서기』가 천황통치를 정통화하기 위한 역사서였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과 관련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관계가 있다. 일본 왕이 천황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킨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은 나중에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 시키는 도구로 활용되었는데, 그들의 조선 통치는 신공황후가 이미 정복했었던‘옛 땅을 회복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올해 3월 한일 역사공동위원회는‘임나일본부’설을 학문적으로 폐기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합의가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 극우세력이 만든 역사 교과서에 정설인 것처럼 실린 것까지 없애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역사 교과서에서 이 학설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여전히 유효하다.
 
 
 2) 날조된『조선사』35권
 일본의 한민족사 왜곡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민족이 3·1독립만세운동(1919)을 위시하여 강력히 저항을 하자, 일제는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선사 왜곡을 진행하였다.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 경지에서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는 데 있었다. 총칼로 한 때는 지배 할 수 있겠지만 영원히 탈취하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저력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조선 땅만이 아니라 조선 민족까지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노골적으로 조선총독부 산하에‘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조직적인 조선 상고사上古史말살 작전을 펼쳐나갔다.
 
 조선의 역사를 편찬한다는 미명하에 군경을 동원한 6년 동안의 압수, 수색 끝에 무려 20만 권의 역사서를 압수 폐기하고 일부는 그들의 황실 도서관으로 가져가 깊이 감추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에 있는 모든 사서를 없앤 것은 아니다.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 데 무리가 없는 사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와 같은 강탈과 은폐, 변조와 곡필로써 민족정신의 날개를 꺾어버린 일제는 총독부의 교육시책에 맞춰 치밀하게 날조된『조선사』35권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의 85%가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겨우 8%만이 상고사에 해당되는데, 그것도 상고 역사를 제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상고사에 관한 조선측 사료, 중국측 사료, 일본측 사료를 나열하였을 뿐이다.
 
 
 왜곡의 주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첫째, 동방의 창세문명의 주인공인 조선의 상고사를 완전히 잘라내 한민족사를 2천 년의 역사로 줄였으며, 둘째“귀신도 불가능한 땅 뜨는 재주로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겨놓고”라고 한 신채호의 말처럼 대륙사를 반도사로 둔갑시켰고, 셋째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다 지워 버리고 한민족을 사대주의에 빠져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으로 격하시켰다.
 
 한민족사의 비극은 우리 역사가 우리 손이 아닌 침략자들의 손에 의해 잘못된 시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엉터리 역사의 망령이 오늘날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혼 속에 그대로 붙어있다는 것이다.
 
 
 3) 한민족사 왜곡의 회심작, 석유환인昔有桓因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왕의 칙령으로 조선사 왜곡에 앞장선 일본 어용학자가 이마니시 류今西龍이다. 그는 『삼국유사』「고조선기」첫머리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의 국 을 인因으로 변조시켜『삼국유사』「경도제대 영인본」이란 판본으로 배포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이 조작된 판본이 통용되고 있다.
 
 
 일제는 왜‘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를‘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로 변조해야 했을까?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정신의 상징이 바로 ‘광명의 나라’인 석유환국의 환국桓國이다. 과거 일본이『일본서기』를 편찬하여 자기들 역사 1,300년을 2,600년으로 갑절이나 늘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는 조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한민족의 엄연한 고대 국가였던 환국, 배달, 고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고자 석유환국昔有桓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쳐 한 나라의 국사國史를 인물사人物史로 돌려버렸다. 그럼으로써 환국, 배달, 조선 모두를 실재하지 않은 신화의 역사, 허구의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환국이 있었다’는 것이 전혀 없었던 역사이기 때문에 환국으로부터 뻗어 나와 동방 역사를 개창했다는 배달의 역사 또한 허구일 수밖에 없고, 배달 말기에 환족들을 하나로 통일한 단군왕검의 고조선 역사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 이마니시 류의 논리이다. 그는 글자 하나를 조작함으로써 동북아의 시원역사 7천 년을 송두리째 뽑아 매장을 시켜버리는 역사말살의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일제의 고조선사 왜곡을 좀 더 이야기하면, 우선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에 대해‘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 중기에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여 만들어진 신화’라고 매도하였다. 고조선의 출발 시기도 한반도에 청동기 문명이 들어온 BCE 10세기 이후로 잡았으며, 강역도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로 축소하였다. 이는 고조선의 강역을 요서와 요동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중국 측의 많은 기록들과도 모순된다.
 
 일제의 한민족 뿌리역사 날조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찍이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전공한 이마니시 류가 일제가 강탈한 조선사 문헌들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내놓은 역사왜곡의 회심작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그가 한민족 시원 역사를 이와같이 부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가 쓴『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원문을 보면,『 삼국유사』의“위제석야謂帝釋也”라는 주석 구절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일연이 석유환국에 대한 주석을 그렇게 달아서 실제 있었던 역사를 부정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것에 충실해서 조선의 상고사를 이렇게 해석할 뿐이다’라는 것이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부정을 교묘하게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 삼은 것이다.
 
 
 4) 일본의 땅 뜨기 재주
 석유환인으로 조선 역사의 밑뿌리를 완전히 잘라낸 일제는 한민족의 중간 역사도 난도질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한사군 대동강설’이다.
 
 요서의 고대 지명을‘귀신도 못할 땅 뜨는 재주를 부려’대동강 주변에 옮겨 낙랑·임둔·진번·현도군으로 이름을 붙여 놓고, 그것을 역사의 사실로 만들기 위해 점제현신사비 같은 가짜 유물을 대동강 변에 묻어 한나라 식민지 군의 유물이 나왔다고 사기극을 벌였다. 한반도 북쪽을 원래 중국의 식민지였던 것으로 왜곡했다.
 
 그리고 한사군에 의한 지배가 한민족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철기와 한자를 비롯한 중국의 선진문물과 발전된 통치제도를 가져다준 한사군은 후진적 상태에 있었던 한민족에게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발전이 한사군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러한 발상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간접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5) 일제의 마수가 그대로 살아있는 우리의 국사교과서
 근대적 역사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최고의 독버섯이 일본 제국주의의 하수인 이병도李丙燾였다. 그는 1927년 조선사편수회가 조직을 확대·정비할 때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로 들어가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데 헌신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을 맞이하자 이번에는 이승만의 후원을 등에 업고 똑같은 짓을 하였다. 이승만은 역사청산을 목표로 결성된 반민특위를 반공이념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해산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끌어들여 요직에 앉혔는데, 이때 이병도가 서울대학교 사학과 주임교수로 발탁되었다. 그는 그 후 수많은 식민사학의 제자들을 길러내어 이 땅에 뿌리내렸다. 한국의 고대사를 말살한 원흉인 이마니시 류의 비서노릇을 하던 이병도가 국립대학의 핵심 역사 교수가 되면서 우리 국사학계는 헤어나기 힘든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 것이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면서 민족사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구 친일사학의 무리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타고 그들의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하여 한국 역사학계를 독점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최근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민족사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아 부분적으로 시정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과거 일제의 마수魔手가 만든 기본 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대사부분에 있어서 고조선사는 알맹이는 뺀 채 10쪽 내외로 간략히 기술되어 있고,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의 중세사는 각각 불교사와 유교사로 온통 채색되어 있다. 또한 석탑, 불상, 무덤, 서원, 사화, 당쟁 같은 암기사항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사의 경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이에 맞선 독립전쟁사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다루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제의 역사날조 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 말살에 참여했던 이병도로부터 배운 후예들이 초중고 교사가 되어 잘못된 역사관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 온 국민이 나서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질타하고 있지만 정작 이 땅의 국사책이야말로 그들의 식민사서를 모방하고 있으니 이 개탄할 현실을 어찌해야할 것인가!
 
 
 3. 서양 실증주의 사학에 의한 왜곡,
 洋毒

 
 오늘 우리나라 역사학계 풍토의 대세는 한마디로 서구의 실증사학(실증주의 사학+랑케 사학)이라 하겠다. 이 실증사학이라는 것은 마치 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가서 흙을 퍼 와서 규명하듯이,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뼈와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너무도 과거 역사의 사실 입증에만 집착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실증사학은 출발부터 역사의 대상이 인간이면서도 인간 부재의 역사로 인하여 종합적인 전체사를 상실하였다. 이것이 실증사학이 안고 있는 최대의 맹점이자 핵심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둘째, 개별적인 사실 확인에만 집착하여 종합적인 가치판단이나 의미부여에는 무관심했다. 한마디로 역사의 대세를 전혀 모르고 인간의 참된 가치도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역사가의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에 무능했다.
 
 셋째, 실증사학은 철저한 문헌고증학의 입장에서 많은 성과를 가져왔으나 과거 사실의 고증에만 힘써 현재와 연결된 종합적 개념 파악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역사에 흐르는 참된 정신 맥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넷째, 역사에 흐르는 정신사의 맥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흘러 가버린 과거의 사실에 대한 완전한 실증이란 있을 수 없다. 원래 낭만주의의 사생아로서 어머니의 결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랑케 사학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는 것은 한갓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랑케 자신조차도 고백한 바 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실증사학은 19세기의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치를 둔 서구의 근대 과학주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역사학의 한 조류일 뿐으로서 이미 세계의 역사학계는 이를 탈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실증사학은 인간이 부재해 있다는 것,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면서 인간을 모르며, 또 과거 역사적인 개개의 사실에 대한 과학적인 엄정한 입증과 개별적인 사실의 확인에만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겨 우주의 신비를 머금고 파노라마 치는 역사의 대세와 참된 근본정신을 보는 데 무지몽매한 것이다. 한마디로 근시안적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며 역사의 의미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모른다.
 
 인간은 천지라는 바다에 떠서 시공의 파도를 가르며 무심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배를 타고 어디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 항진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전혀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증사학은 한민족의 뿌리와 혼을 송두리째 뽑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 땅에 이식되었다.
 
 일제의 치밀한 한국사 말살작전으로 이루어진 식민사학의 교과서가 조선사편수위원회의『조선사』35권이다. 이 책은 한국사의 영광과 긍지를 의도적으로 깎고 뭉개버리기 위하여 상고사 무시, 근세사 강조의 편찬지침을 세우고 한국사의 치부만을 부각하는‘병력病歷카드 전력, 패전 기록’만을 수록하여 엮었다.
 
 아직 서구 근대화의 신선한 맛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사학이 근대 사학의 문호를 처음으로 열었다는 명분으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준 실증사학은, 당시 한민족의 역사를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한 망국멸족의 침략사관이 배어있는『조선사』35권을 마치 귀중한 보물인양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여 왔다. 오늘의 한국사학은 이러한 근본 문제점을 안고 있는 실증사학을 본원으로 식민사학의 잔재까지 물려받았다.
 
 그리고 식민지배 정신이 스며있는『조선사』의 토대 위에서 조선사편수위원회에서 배우고 공부한 이병도와 그 후예들이 광복 후 한국사 연구의 주인 행세를 해왔다. 따라서 해방이 된지 어언 60여 년이 지났지만 제 2의 광복인 국사의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한국사에 있어서 실증사학이 안고 있는 본래의 문제점과 깊은 상처는 바로 역사침략에 있다. 즉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한민족사를 왜곡하는 수단으로 실증사학이 도입되어 한국 근대사학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실증사학은 첫출발부터 극복해야 할 숱한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의 날조, 왜곡이라는 깊은 병독을 한민족의 의식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물론 실증사학은 이러한 해독만을 남긴 것만은 아니다. 해방 후 실증사학은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잊힌 고대사의 사실들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증명해 냄으로써 한국사의 정립에 적지 않은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 아닌가? 현행 국사 교과서의 유물 발굴만으로는 결코 역사가 될 수 없다.
 
 
 식민사학에 의해 이 땅에 이식되어 한민족사 말살과 왜곡의 수단으로 봉사하였던 실증주의 사학은 해방 후 지금까지 여전히 역사학계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역사학계를 차지하고 있는 주류 사학자들은『환단고기』나『규원사화』같은 한민족의 뿌리역사와 시원문화를 밝혀주는 사료를 거의 대부분 부정한다.
 
 수백 년 이상 민간에 비전되어온 우리의 전통사서들도 비록 100%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역사적 전승과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료로 이용되어야 할 것이다. 어렵게 전수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몇가지 결점을 트집 잡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특히 상고사의 경우 어느 나라나 문헌사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기존의 자료들은 그 신뢰성에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열린 태도로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실증주의 역사학은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문헌사학이 근본이고, 문헌사학과 고고학은 서로 보완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증의 부재라는 핑계를 앞세워『환단고기』같은 우리의 뿌리역사서를 외면하고 부정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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