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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하이라이트]주대의 상제의식과 유학사상 (3,4강)

by 바로요거 2010. 8. 19.

[STB하이라이트]주대의 상제의식과 유학사상 (3,4강)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3월호


 천명의 수용과 인간질서의 확립 
 

 STB상생방송은 지난해 12월『주대의 상제의식과 유학사상』에 대한 역사 강의를 진행하였다. 저자의 설득력있는 강의가 호평을 얻었다. 지면을 통해 지난 번 1강, 2강에
 이어 3강,4강‘천명의 수용과 인간질서의 확립’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편집자 주)
 강사: 배옥영(원광대학교 서예과)

 
 
 하늘의 뜻을 읽는다는 것
 하늘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것을 천명天命, 다른말로 성性혹은 본성本性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본성대로 사는 것인지 수천년동안‘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가르쳐주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할 때“너 하늘이 무섭지 않니? 하늘이 무서워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니.”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데 과연 하늘이 무엇이길래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얘기할까요.
 
 고대에 팔괘八卦를 만든 것 자체가 인간의 질서를 하늘에서 끌어오고자 한 겁니다. 고대에 하늘은 인간을 주재하고 있는 주재자로서의 천天입니다. 주재자로서의 천을 인간의 질서로서 승화시켜 천도를 실현하는 것이 인간 가치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임금이‘계천입극繼天入極’했다는 것은‘하늘을 이어서 푯대를 세웠다’는 말이거든요. 하늘을 이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어요? 하늘의 정신을 이었다는 거죠. 보통 사람은 가능한 얘기가 아니죠. 그래서 은나라 때는 그런 사람을 정인正人이라 그랬습니다. 신통력을 가지고 하늘과 인간 사이를 이어준단 말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물으면 하늘의 소리, 귀신을 불러가지고 귀신에게 물어본다든지 해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겠죠. 요새는 그런 사람들을 무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무당하고 달리 은나라 때의 무당은 그야말로 하늘의 얘기를 전할 수 있었어요. 곧을 정자 정인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내일 일도 잘 모르죠. 내일 일뿐만 아니라 이 자리가 끝나고 나서 벌어질 일도 모릅니다. 한 시간 후, 삼십분 후의 일도 모르는데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하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죠.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고대엔 가장 특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인이 곧 통치자였고 통치자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주제권主祭權을 지니고 있었어요.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통치권과 주제권이 나누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통치는 왕이나 천자가 하게되고하늘에제사를지내는주제권은따로갖게되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이라는 것은 주나라의 때의 책력이에요. 당시의 정인, 하늘의 질서를 읽을 수 있던 사람들이 만든 겁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책력이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 주나라 때 사용했던 책력이 오늘날까지 수천 년 동안 그대로 내려올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하늘의 질서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하늘의 질서는 어때요? 한 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매순간, 매일 변하고 있는 인심人心과는 다릅니다. 제가 주역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공감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계천입극한 이유가 변하지 않는 대자연의 질서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예요. 당시엔 그런 사람이 통치자니까.
 
 어떻게 하면 내 백성들이 가장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겠죠. 그래서 대자연의 역수曆數를 정해서 달력을 만듭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과 주대의 달력이 같습니다.
 
 요임금은 나라를 걱정하고 천심 그대로 살아가는, 순에게 천자의 자리를 맡겼습니다. 요임금이 하늘의
 도를 이어가지고 푯대를 세우고 순임금이 인도를 완성했습니다. 계천입극했다는 말이 하늘의 뜻을 읽고 그것을 인간이 살아가는 질서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봄에 봄비가 촉촉하게 내릴 때 씨앗을 뿌려야 그 씨앗이 대지를 뚫고 나올 수 있습니다. 가령 여름에 씨앗을 뿌리면 어때요? 소나기가 한바탕 내려버리면 그 씨앗들이 전부 다 파묻혀 버리고 제대로 싹을 틔울 수가 없죠. 봄에는 신기하게도 비가 와도 부드럽게 와요. 봄비라고 하면 어떤 비인지 연상할 수 있죠. 촉촉이 대지를 적셔주는 그런 비입니다. 바람도 세게 불지 않아요. 봄에는 거센 바람이 안 불잖아요.
 
 봄이라는 시기가 어때요? 인간으로 치면 태어나서 20살까지입니다. 80살을 수명이라고 한다면 20살까지일 거예요. 그때까지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혹시 큰 바람이 불세라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해주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먹여주고 입혀주고 좋은 것 가르쳐주고 또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봄이예요. 봄이라고 하는 계절은 천지 만물이 그렇게 나서 자랄 수 있도록 바람도 세게 안 불고 햇볕도 지나치게 따갑지 않습니다. 생물이 나와서 그저 잘 자랄 수 있을 정도만 햇볕이 따뜻하죠.
 
 봄에 적당하게 잘 자라면 그 다음은 어때요? 그대로 있으면 씨앗이 여무나요? 봄만 있으면? 가령 사시가 없이 봄만 계속된다고 하면 생물은 번성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생산할 수 없을 거예요.
 
 여름에는 어때요? 봄에 대지를 뚫고 나온 나무들이 여름이 되면 뜨거운 햇볕도 견뎌야하고 또 그 뜨거운 햇볕 뒤에 숨어있는 태풍도 견뎌내야 해요. 견뎌내야만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여름만 계속되면 안 되죠. 뜨거운 더위와 바람과 비와 이런 온갖 것들을 잘 견딘 열매들이어야만 가을에 튼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절기가 가을로 바뀌는 순간 어느새 밤낮으로 소슬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확실한 변화죠. 그때가 되면 곡식을 제때에 맞춰서 갈무리 해줘야 해요. 이게 바로 우주운행의 이치입니다. 누가 거부할 수 있겠어요? 하늘의 이치가 대자연의 이치고 인간 삶의 이치입니다. 대자연이 가지고 있는 이치와 성정을 체득하여 그것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다스렸다는 겁니다.
 
 
 천심대로 산다는 것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천하를 물려줄 때 요임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천하를 넘겨주지 않습니다. 그 당시 순은 역산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밭 갈고 있었고 아버지가 어렸을 때 재혼을 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아주 모질어서 전실前室아들인 순을 수차례 죽이려고 해요. 그렇게 했는데도 순은 역산에서 밭을 갈다가 한쪽에 가서 통곡을 하고 웁니다. “내가 좀 더 노력해서 계모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드려야 할텐데”이렇게 통곡합니다. “어머님이 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합니다. 효도가 부족해서 계모가 저렇게 역정내고 그러는가 헤아립니다. 더 효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통곡합니다. 순임금은 그와 같이 천심으로 살았어요.
 
 순이 그와 같이 천심으로 살았단 이유 하나만으로 천자의 직위를 물려준 겁니다. 그래서 요임금이 하늘의 도를 이어서 푯대를 세우고 그대로 순임금이 인도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순임금은 바로 하늘의 정신을 이은 요의 정신을 인간의 도로서 정착시켰습니다. 인간의 도를 정착시킨다는 게 보통의 영성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하늘의 도를 인간으로 정착시킨다는 것은 하늘과 통해 있는 정도의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죠. 아까 봄,여름,가을,겨울을 얘기했죠. 춘하추동의 질서를 인간 질서로 정착시킨다는 건 봄에 씨앗을 뿌리게 하고 여름에 가꾸게 하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게 하고 겨울에는 쉬게 하는 겁니다. 그런 천심대로만 살아도 충분하도록 해준다는 겁니다. 대자연의 정신을 바로 통치정신으로 취한 겁니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은 농사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텐데요. 하늘을 떠나서 농사지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거부하고 지을 수 있는 농사가 어디에 있나요? 저도 조그마한 채전 밭을 가꾸고 있기 때문에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을 주고 가물 때 물을 대주고 하지만 비 한번 온 것만 못하죠. 그래서 하늘이라고 하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서는 절대 농사지을 수 없습니다. 천명대로 사는 것은 대자연의 질서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거슬러 욕심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오로지 생산량만을 생각하여 제철을 벗어나 농사짓는 게 정상적인 건가요? 개발을 한다고 하며 땅을 훼손하고 농약을 살포하고… 이런 것들은 어때요? 오로지 다산, 많이 생산할 것만을 생각하고 무분별하게 농약을 뿌리고 이렇게 했던 것들은 어떤가요. 그게 어떤 결과를 빚고 있나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
 순임금이 바로 하늘의 정신을 이은 요의 정신을 인간의 도로서 정착시켰습니다. 하늘의 도를 인간으로 정착시키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을 통해서 가능하겠죠. 춘하추동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서 정착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입니다.
 
 
 人心- 형기의 사 [形氣之私]에서 생기고,
 道心- 성명의 바름 [性命之正]에 근원한다.”도심만이 선한‘이성적 도덕 심정’
 인심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생긴 심정으로, 선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러나 어디로나 흐를 가능성이 있는‘자연적 심정’
 
 그 마음이 바로 도심이자 천명입니다. 내 마음이 도심을 벗어났을 때 경고는 누가 해줘요? 눈에 보이는 하늘에서 어떤 경고를 내려주나요? 그게 아니죠. 바로 뭐예요? 내 마음에서 경각심이 일어나는 거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도심이 바로 하늘이 명한 겁니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바로 솔성率性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천명이라고 하는 것을 밖에서 구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밖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구한다거나 누가 하늘의 계시다 하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하늘의 계시는 바로 내 본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거죠. 하늘의 본성은 바로 인간 마음 그 자체인 변하지 않는 영명성靈明性이예요.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것은 영명성이지 어떤 형체를 주었다거나 그런게 아니란 말예요.
 
 인간은 늘 변해요. 그대로 있는 게 아니고. 제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런 것도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 세상에 형체로 있거나 물질로 있는 것은 모두 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변하고 존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서 전해지는 영명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가치 때문에 수천수만 년 동안 상제를 섬기고 하늘을 섬기고 하는 거죠.
 
 지금은 가치 기준이 흔들려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시대입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할 게 과연 어떤 것일까요? 유학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가르침인데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재해와 질병을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건 대자연질서와 하나인 인간 성정이 탐욕과 무지에 의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천심을 잃었기 때문인거죠.
 
 고대엔 하늘의 질서대로 백성을 통치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천심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죠. 그래서 하늘의 질서를 본떠 육경제도를 두었는데 이 육경이 천지 춘하추동에서 오게 됩니다. 이런 통치제도가 주나라 말기에 공자에 의해서 학문으로 완성됐어요. 그게 유학입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 중용 첫 장에 나옵니다. 인간에게 제시한 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으로서 영명주재한 천이 바로 상제입니다. 상제가 인간에게 영명을 줍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그 영명성이 발현됨으로써 인간이 가장 지선한 존재가 됩니다. 하늘의 마음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죠.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정신은 바로 상제가 내려준 영명, 즉 천명이라는 겁니다.
 
 
 중용의 전체 내용이‘정성 성誠’
 중용에 나오는‘중中’은 실천적인 중이예요. 천명으로 받은 본성 그대로 가장 근원적인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죠,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것, 즉 도심입니다. 도심이 바로 정성과 바로 연결됩니다.
 
 중용의 전체 내용이 정성 성誠자로 일관돼 있습니다. 율곡과 퇴계선생 모두 정성 성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복한다’는 말이 있죠. 유학의 정신은 바로 그겁니다. 천도와 인도 모두가 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직업에 정성을 다해 종사하면 그 일 자체가 천도를 실현하는 겁니다. 하늘이 준 천심과 영명을 따라 정성을 다해 격물치지하는 것, 그게 상제를 섬기고 도를 실현하는 겁니다. 나의 가치기준을 대단한 학문에서 찾는 게 아닙니다. 바로 내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옳은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중용지도라고 하는 거예요. 중용지도라고 하는 것이 대단한 학자들이나 높은 위정자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라고 하면 애써 가치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겠죠. 중용지도는 각자 제자리에서, 현재 처해있는 지금의 환경에서 정성을 다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길을 닦는다는 것
 앞선 사람이 바르게 길을 닦아놔야만 다른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죠. 인간이 된다는 것은 후세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역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라고 하는 것은 원래 길 도道자입니다. 성인들이 길을 밝혀놨기 때문에 수천 년이 지나서 우리들이 좀 더 나은 정신으로 좀 더 나은 나를 발현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륜의 기준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제 위치에서 중용지도를 한번 되새겨 보시고요. 내가 지금 바르게 행하고 있는가, 나의 바른 위치는 어디인가. 내가 정말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도로를 만들어줘야 해요. 그래야 우리 후손과 후학들이 제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출처: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10.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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