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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치우천황(蚩雨天皇)과 황제헌원(黃帝軒轅)

by 바로요거 2009. 12. 14.

치우천황(蚩雨天皇)과 황제헌원(黃帝軒轅)

고조선의 망국 이후 동양사에서는 이 사실이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漢武帝, 서기전 159~서기전 87)와 그의 사관인 사마천의 역사 왜곡 조작에 의해 거꾸로 알려져 있다.


치우(蚩尤)는 세속에서 부르는 별칭이다. 또 중국 고대사 관련 기록에 간단히 “동방의 군장(君長)”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이분이 바로 배달의 14세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다.


황제헌원(黃帝軒轅, 서기전 2692~서기전 2593)은 중국 한족이 그들 역사의 시조로 받들고 있는 인물이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여 성을 희(姬)로 고쳤다.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에서 갈려 나간 별파(別派)에 공손씨(公孫氏)가 있었는데 헌원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또 일설에는 소전이 신농씨(장남)와 욱(勖 : 차남)을 낳았는데 이 욱의 10대 자손이 헌원이라고 한다.


당시에 염제유망은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8대 임금이었다. 그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차례로 정벌해 나간 뒤에 마침내 유망의 수도인 공상(空桑 : 하남성 진류)을 함락하였다. 이 때 대패한 유망이 탁록(K鹿 : 하북성 탁록)으로 달아나자 치우천황은 다시 진격하여 일거에 정벌하였다.


이 때 치우천황의 공상 입성소식을 듣고 천자인 치우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이 동방 배달의 천자문화권으로부터 독자적인 ‘천자의 뜻’을 나타내며 대군을 일으켜 치우천황에게 대항해 왔다. 이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그 유명한 탁록의 대결전이 전개된다. 사마천 『사기』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거꾸로 뒤집어서 왜곡 날조하였다. 그러나 실은 유망의 제후인 헌원이 굴복하지 않고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서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蚩尤, 古天子之號也. 『史記集解』, 『三聖紀』 下)에게 도전해 온 것으로, “황제작란”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이 때 10년 동안 73회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치우천황은 일찍이 갈노산 槪;轅【 쇠를 캐어 투구 ㈎ 칼 등을 만들었으며(『管子』 「地數」), 머리에 최초로 철두갑을 만들어 써서 “동두철액(銅頭鐵額 : 구리머리에 무쇠이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史記』, 『雲j』 「軒轅記」, 『揆園史話』, 『太白逸史』). 또 이 전투에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어 헌원군을 혼란에 빠뜨려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헌원은 치우천황을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차(指南車)까지 만들어 대항해 왔다.


탁록의 대격전 끝에 마침내 치우천황이 승리하여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그런데 이 전투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진중이 몰살당해 죽었다. 이를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왜곡함으로써 동방고대사의 최대의 역사적 사건을 은폐 조작시켜 놓았다.


그러나 옛 천자(古天子) 곧 배달의 치우천황이 수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 일반은 물론 한고조 유방과 진(秦) 芎漢)시대의 중국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한사군(漢四郡)을 왜곡 조작한 한무제 때의 인물인 사마천의 역사조작 음모가 더욱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동방의 천자 치우천황의 위용은 배달조선족과 한(漢)족 백성들 가슴속에 살아 남아, 중국 진(秦) 芎漢) 때의 백성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산동성 동평군에 있는 높이 7장(丈)의 치우릉(陵)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붉은 기운(赤氣)이 반드시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사기』, 『한서』)


한고조 유방이 또한 자기 고향의 풍속을 따라 동방 무신(武神)의 원조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내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 후 5년 간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최후의 한판으로 승리하여 제위에 오른 뒤에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에 짓고 더욱 돈독히 공경하였다.(『史記』 「封禪書」)
치우천황의 신하가 된 헌원은 동방 배달의 청구(靑丘 : 치우천황 때의 수도. 후대에 동방조선의 별칭)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선사를 만나 뵈어 가르침을 받고 『음부경』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을 전수받아 갔다(昔有黃帝, 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抱朴子』 「地眞」). 이처럼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아 헌원은 황로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된 것이다. 당시에 헌원뿐 아니라 공공, 창힐, 대요 등이 모두 동방 배달에 와서 자부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상과 같이 배달의 치우천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하여 신교문화권으로 통치한 최초의 천자가 된 인물이다. 동방배달의 혈통으로 동방 신교문화의 법통을 전수하여 서방 한족을 통합한 종주국 천자 치우와 헌원의 대결전지는 지금도 탁록에 남아 있어 당시 역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