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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흐름 읽기/예언&비결*미래정보

진표율사와 금산사 미륵불상

by 바로요거 2009. 11. 20.
 진표율사와 금산사 미륵불상
 
 
고대 삼국이후 우리 민족의 심성 깊숙한 곳으로부터 내려온 메시아 사상이 있는데, 바로 `미륵사상'으로 오래 전부터 정토세상을 가져올 차세대의 `구세주'로 한민족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왔으며, 우리 한민족의 사상 저변에 뿌리 박아 온 이 `미륵' 신앙은 단순히 불교에서 말하는 석가모니불 다음에 오는 미륵불의 의미가 아니라, 정통불교의 울타리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민중신앙으로 대중화된 것은 바로 1230년전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와 그의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상 창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로 인해 이후 미륵신앙의 꽃은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됐던 것이다.
 
진표(眞表)율사(734- )는 1260년전인 통일신라시대때 불교의 승려로 12세 때 전북 김제군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출가하였으며, 미륵으로부터 직접 법을 구해 대도를 펴겠다는 큰 이상을 품고 진표율사가 수행했던 변산 부사의 방에서 29세 되던 신라 경덕왕 21년(762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희생시키며 행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이라는 수행법으로 자기 온 몸을 돌로 두들기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참회를 하며 3·7일(21일)간 구도하였는데, 과거의 불법, 또는 기독교에도 진표율사 이상으로 이 법을 실행한 자가 없었다.
 
마침내 21일을 마치자 그는 도통을 하여 천안(天眼)이 열리게 되었으며, 도솔천 미륵존불로부터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이것이 인간이 미륵불, 즉 천주(天主)를 만나 계를 받은 역사상 최초의 `천상문답사건'이다).
한편, 진표율사가 도통을 해서 미래의 우주시간대를 보니 천수백년 후에 우주가 대개혁을 하는 것이 환히 보였다. 그래서 다시 미륵존불께 개벽기에 미륵불이 출세(미륵하강)한 이후 자신도 그 때 다시 태어나서 억조창생을 건지는 큰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러자 미륵존불로부터 당시 금산사내에 있는“사답(寺沓) 칠두락(마지기)”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龍沼)을 메우고 미륵존불 모양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다시 받는다.
 
그런데 불상을 세우기 위해 처음(762년 건립시작)에는 흙으로 못을 메웠는데, 이튿날 보면 다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때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숯(목탄)으로 메우라고 일러준다.
이에 진표율사는 도력(道力)을 써서 안질을 퍼뜨린 후 누구든지 안질을 앓는 자는 금산사 용소에 숯을 한 짐 집어넣고 못물로 눈을 닦으면 낳는다.'는 소문을 내니, 안질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숯을 집어넣으니 그제야 연못은 메워지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연못이 숯으로 메워지자 미륵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연못 한 가운데에다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 (석조 연화대 또는 석련대, 현재 보물 23호)를 세웠으나, 무슨 조화에서인지 석련대(石蓮臺)는 밤 사이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위치 (현재 석련대가 있는 위치)로 옮겨져 버린다.
이 때 미륵이 꿈에 현몽하여 “야! 이 미련한 놈아. 돌이란 직접 불에 들어가면 튀는 법이니라”고 계시한다. 이에 다시 진표율사는 연못 중앙에다 밑이 없는 대형 무쇠시루(甑 증)를 걸고 그 위에다 우물 정(井)자 형태의 나무 받침목을 얹은 다음 철로 된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4년에 걸쳐 766년 완공). 
 
지금도 금산사 미륵불상 밑에는 밑이 없는 거대한 시루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이며, 세계 최대의 미륵존불상이다.
지금 이 미륵존불상은 이를 모시고 있는 3층 미륵전과 함께 국보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 미륵불상 외에도 금강산의 발연사와 속리산의 법주사에 모두 3개의 미륵도량을 세웠다. 진표율사는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진표율사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했는데, 어느 해 사냥을 갔다가 쉬면서, 집에 가지고 가서 구워먹을 생각으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코와 입을 꿰어 물에 담가놓았으나, 사슴을 쫓다가 다른 길로 돌아오는 바람에 개구리 잡아 놓은 일을 잊고, 다음해 우연히 다시 그곳을 지나던 그는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들을 보고, 깊은 자책에 싸인 그는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출가의 뜻을 품게 되어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금산사의 순제법사(혹은 숭제법사)에게로 가 머리를 깎았다. 

스물일곱 살 때 그는 변산의 선계산 불사의암으로 들어가 미륵상을 보시고 3년 동안 법을 구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자, 절망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그때 어디선가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그를 받아 도로 바위 위에 올려놓아, 다시 결심을 다진 그는 삼칠일을 기약하고는 온 몸을 바위에 내던지는 참회행으로 간절히 법을 구하니, 사흘째에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져나갔으며, 이레째 되는 날에는 지장보살이 나타나 그의 손과 발을 도로 붙여주고 가사과 발우를 주었는데, 삼칠일이 되던날, 그는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간절한 참회구법을 칭찬하고 각각 그에게 계본과 두 개이 목간자를 주었다.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은 진표율사는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전생의 업을 알아 참회 정진하는 점찰 법회를 열어 중생을 교화하였는데, 경덕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보살계를 받고 많은 재물을 보시하여 진표는 그것을 여러 사찰의 불사에 썼다.

이러한 얘기는 [삼국유사]의 관련 내용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실린 것을 아우른 것인데, 각 기록마다 구체적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가 신라 성덕왕(702-736)때 태어나 경덕왕(742-764)때 구도에 전념했으며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느 기록에서든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