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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이 발생된 계기와 상제님

by 바로요거 2009. 10. 17.

갑오동학혁명이 발생된 계기와 상제님

 

 


 “동학신도들이 ‘안심가’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다”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학경전을 보면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도 천상문답(天上問答)사건의 중심에 상제님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안심가」(安心歌)는 최수운(崔水雲, 1824~1864) 대신사의 도통체험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동학의 깨달음을 새로운 차원에서 음미케 한다. 이 글에서는 수운가사(水雲歌辭) 중 특히 「안심가」에 초점을 맞추어 「안심가」가 전해주는 동학의 근본 메시지를 알아보고, 갑오동학혁명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안심가」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진리의 근본 명제를 밝혀보도록 하겠다.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안심가」에는 수운 대신사의 도통체험이 매우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어 그의 깨달음의 실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무정세월 여류파라 칠팔삭 지내나니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 할러라
 공중에서 웨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사람 거동 보소 경황실색 하는 말이
 애고 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러한고
 애고 애고 사람들아 약도 사 못해볼까
 침침칠야 검은 밤에 눌로 대해 이말 할고
 경황실색 우는 자식 구석마다 끼어있고
 댁의 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참할 때
 공중에서 웨는 소리 물구물공 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십이제국 다 버리고 아국운수 먼저 하네
 그럭저럭 창황실색 정신수습 되었더라
 그럭저럭 장등달아 백지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길 없어 백지펴고 붓을 드니
 생전 못본 물형부가 종이위에 완연터라

 (『용담유사』 「안심가」)

 
 
 이 수운가사(水雲歌辭)의 내용을 보면 수운 대신사가 상제님과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그 기운을 감당키가 굉장히 버거웠음을 알 수 있다.. 수운 대신사에게 ‘천명’(天命)을 내리시는 상제님은 「안심가」에서 “물구물공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라고 말씀하신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에서도, “물구물공(勿懼勿恐)하라. 세인(世人)이 위아상제(謂我上帝)어늘 여부지상제야(汝不知上帝也)”라고 말씀하시며, “두려워하지 마라, 겁내지 말라”고 수운 대신사를 달래시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하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고 계신다. 이 두 문구를 음미해보면, 상제님이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최고인격신으로 존재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수운가사의 총 9편의 가사 중 상제님에 대한 호칭은 「안심가」에 2회, 「도덕가」에 1회 등장한다. 그리고 ‘상제님’의 다른 표현인 ‘하날님’도 다른 가사보다 월등하게 많은 12회에 걸쳐 나오는 것을 보면, 「안심가」의 주제가 수운 대신사의 ‘상제님 체험’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수운 대신사가 전하는 동학사상은 한마디로 시천주주(侍天主呪)의 본주문인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훈가」에서 상제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실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하염없는 이것들아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날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 말가
 나 역시 바라기는 하날님만 전혀 믿고

 (『용담유사』 「교훈가」)

 
 동학의 근본주제가 ‘시천주’(侍天主)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갑오동학혁명의 사상적 동력이 된 ‘안심가’(安心歌)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동학 왜곡의 중심에 「안심가」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동학(東學)신도들이 안심가(安心歌)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느니라. (道典 5:4)
 
 그러면 도대체 동학신도들은 안심가를 어떻게 잘못 해석했다는 말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더듬어 보자.
 
 개 같은 왜적놈이 전세임진 왔다 가서
 술 싼일 못 했다고 쇠 술로 안 먹는 줄
 세상 사람 누가 알까 그 역시 원수로다

  (『용담유사』 「안심가」)

 
 
 내가 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하날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여 전지무궁 하여놓고

 (『용담유사』 「안심가」)

 
 
 위의 두 단락에는 일본에 대한 수운 대신사의 분노와 적개심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개 같은 왜적놈을 하날님의 조화권능으로 일야간에 소멸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항일’(抗日)의 표현이 있을까? 「안심가」가 동학(東學) 신도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척왜(斥倭)의 논리’로 전달되었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은 청·일 상인들의 조선 내지(內地)에서의 상업활동으로 인해 심각한 무역 불균형에 직면하였다. 특히 일본으로의 미곡 대량유출은 조선민중의 생존을 크게 위협하였다. 신흥자본주의 국가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값싼 농산물의 수출국으로 일본의 곡물시장을 안정시키고 저임금 노동체계를 뒷받침하는 후진적 농업국가에 불과했다.
 
 곡물의 해외유출은 쌀값 폭등과 기아의 고통을 민중에게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관료체제는 지방과 중앙 차원에서 ‘방곡령’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 ‘방곡’(防穀)은 체제유지를 위해 행해지기도 했지만 시세차익을 노린 탐관오리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일제’와 ‘부패관료·대지주층’의 탐욕은 조선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였다.
 
 이러한 시운을 당하여 갑오동학혁명은 민중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안심가」구절 중 ‘일본’에 대한 멸시와 적대의 표현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신음하던 민중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저항의 논리를 새롭게 제기했으리라 보여진다. 

 

 
 역사의 물꼬를 새롭게 튼, 갑오동학혁명
 안으로는 양반 지주와 관료의 착취, 밖으로는 일본·청 등의 2류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침탈에 신음하던 민중들은, 급기야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맞아 분연히 일어섰다. 이름하여 ‘고부민중봉기’다. 고부봉기 후 민중의 분노는 좀 가라앉는 듯이 보였지만 부패하고 잔인한 관료, 이용태의 동학교도 대탄압은 민중들의 저항의 불꽃을 다시 지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갑오동학혁명의 불꽃이 타오른다. 이것이 무장기포(茂長, 1차 기포)다.
 
 한편 전주화약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점하고 조선의 국권을 흔들자, 전명숙 장군은 삼례기포(參禮, 2차 기포)를 통해 ‘항일(抗日)봉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당시 『전봉준 공초』를 읽어보면, 일본의 경복궁 강점이 2차 기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선의 체제개혁’과 ‘척왜’(斥倭)가 삼례기포의 대의였다.
 
 바로 이 때 「안심가」가 동학 신도들의 반일(反日)의식을 고취하면서 참전을 촉구하는 사상적 동력(動力)으로 작용했으리라 보여진다.
 항일 봉기로 일컬어지는 2차 기포 시, 증산 상제님은 동학도(東學徒)들에게 참전하지 말 것을 종용하셨다. 이는 무장(茂長, 1차) 기포 때 역사의 물꼬를 새롭게 트는 천하대란의 동세(動世)가 이미 현실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신님 천지공사의 틀대로 판세가 기운 상황에서 민중의 참화를 더 이상 원치 않으셨던 상제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인류사, 우주사의 근본 명제 : 상제님 절대 신앙
 갑오동학혁명을 흔히 ‘미완의 혁명’이라 말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역사의 과제이기에 이 혁명은 우리에게 항상 긴 여운과 함께 새로운 역사의식의 원천이 되고 있다. “동학(東學)신도들이 안심가(安心歌)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다”(道典 5:4)는 상제님 말씀은 동학혁명의 진정한 뜻을 바르게 알고 체화(體化)하여 상제님이 언제나 삶의 중심에 자리해야 함을 강조한 ‘신앙의 화두’가 깃들어 있다.
 
 당시 민중들의 현실을 감안할 때, 죽창을 들고 보국안민의 대의를 천명한 것은 그 자체로서도 크나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상제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고 위하는 삶을 통해서만 조화세계를 열 수 있다”(侍天主造化定)는 동학의 순수한 참뜻을 망각한 것이 패망(敗亡)의 주된 요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
 
 선후천의 시명(時命)이 뒤바뀌는 개벽의 시운을 맞아 “상제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한다”는 동학의 본래 메시지는, 수운 대신사의 깨달음의 한계와 이후 최시형·손병희의 상제님에 대한 체험과 깨달음의 빈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의 제약 등으로 인해 양천주(養天主), 인내천(人乃天) 등으로 ‘구원관’이 변질되기에 이른다.
 
 “안심가를 잘못 해석했다”는 상제님 도전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천주의 깨어진 ‘절대신앙’만이 인사(人事)의 성공을 가져온다”는 진리의 명제가 새삼 가슴을 친다.
 
 
 <참고도서>
 최제우 저, 윤석산 주해, 『용담유사』, 동학사, 1999.
 최제우 저, 윤석산 주해, 『동경대전』, 동학사, 1998.
 최제우 저, 세종출판기획 편집, 『용담유사』, 대원출판, 2000.
 최효식 저, 「水雲 崔濟愚 연구」, 『한국향토사연구』, 2002.
 하원호 저, 「곡물의 대일수출과 농민층의 저항」,
  『1894년 농민전쟁연구 1』,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