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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

by 바로요거 2009. 8. 25.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

 

을지문덕 성장과정 역사적 기록 없어
[국정브리핑 2005-09-05 14:47]
<기록이 없는 을지문덕>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 위인의 자리에 놓았으며,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능히 그 나라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데 『춘추좌전』에도 ‘믿을 만한 이야기다’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고려ㆍ조선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근ㆍ현대에 들어와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 정기를 드높인 위인으로 받들어졌다.

중국사서 재편집 불과…'선비족 출신' 소문도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을지문덕 전기는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며, 내용도 612년 수나라 군대를 격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조상ㆍ출생지ㆍ성장 과정 등에 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삼국사기』에도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돼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수문제와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경로.


한편 중국 쪽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책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으로 나온다. 중국 북쪽의 유목민인 선비족에는 ‘울지’라는 성이 있어 중국 왕조에도 관료로 많이 진출했다.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기에 ‘울지경덕’이란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을지문덕’이 선비족 계통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명림(明臨)’ 같은 복성(複姓)이 있었던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하고 있다. 특히 ‘을지’라는 성이 고구려 관위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ㆍ가부장을 뜻한다는 해석과 ‘을’만이 성이고 ‘지’는 존대의 접미사라는 견해도 있다.

이선민 박사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족을 중심으로 말갈ㆍ거란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을지문덕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을지문덕에 대해 3회에 걸쳐 설명한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야욕>

고구려는 5세기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동방사회의 맹주로서 부각되었다. 고구려는 고분 벽화와 천문학과 관측술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581년 중원에 수나라가 건설되어 천하를 평정할 기세를 보이자 평원왕은 고구려의 전통에 따라 이이제이(夷以制夷) 외교 정책을 썼다. 수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남조의 진(陳)에도 사신을 계속 파견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강화하려 했다.

이때 수문제(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는 평원왕(평강공주의 오빠로 온달장군의 매부)을 정3품 대장군과 고구려왕에 봉했다.

 

 

을지문덕 조상, 을지문덕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전쟁박물관).
중국은 평원왕의 이런 책봉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임을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책봉이라는 것도 인접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관례의 하나이다. 수나라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평원왕은 581년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수나라의 동태가 이상하자 585년부터 아예 사신을 보내지 않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 관해 황 원갑은 평원왕이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킬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수문제는 동북방에 있는 강력한 고구려가 반발할 경우 중국 통일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사절을 파견하라고 평원왕에게 경고성 서한을 보내는 등 고구려를 위협했다.

수문제 중국통일 하자 고구려는 전력보강 앞장

그런데 평원왕 31년(589) 수문제가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다음 공격 목표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있다며 수문제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면서 산성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전력보강에 앞장섰다.  

『수서』<고구려전>에는 수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황(開皇, 수문제의 연호) 초에는 입조하는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진을 평정한 뒤로는 탕(湯, 평원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평원왕은 수문제와 대결을 하지 못하고 590년에 갑자기 사망했다. 평원왕이 사망했지만 고구려로서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재위 590~618)은 25년간 태자로 왕의 수업을 받으면서 국정의 핵심을 잘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준비된 임금이었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수문제는 사절을 직접 파견하여 영양왕을 ‘개부의동삼사’라는 관직을 봉하고 요동군공의 벼슬을 주면서 고구려가 자기의 휘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런데 수문제가 영양왕에게 보낸 직책이라는 ‘개부의동삼사’는 대장군보다도 지위가 낮은 것으로 중국 동북방에서 독자적인 대국을 갖고 있던 고구려를 깔보는 처사였다.

 

 

수 문제, 수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에 복속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수문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수나라와 일전을 준비했다.
이와 같이 수문제가 고구려를 모욕한 것은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천자라고 자임하고 있던 수문제에게 고구려가 전혀 굴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제가 영양왕 8년에 보낸 국서에도 영양왕을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글이 적혀 있다. 이덕일의 글에서 인용한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수문제)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후에 여진족)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시켰다(이 뜻은 당시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함). 우리나라는 공인(工人)이 적지 않으니,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나에게 주청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 다연발 화살을 만드는 사람)를 빼어갔다.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좆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겠는가.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가 넓다한들 장강(양자강)과 어찌 비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한들 어찌 진국(陳國)과 비교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하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지만 그래도 순순이 타일르니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수문제의 불평은 계속 된다.

‘왕은 짐의 사자를 빈 객관에 앉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고 보지도 못하게 했다.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 짐의 변경 사람들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내용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고구려는 수나라 사신이 도착하자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빈 객관에 가두어 놓았다고 볼 수 있으며 수나라의 변경지대에 군사를 보내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복속할 생각이 전혀 없이 수나라가 공격해오는 것조차 겁을 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만무례한 글은 칼로 화답해야한다" 개전

〈수나라를 선공한 영양왕〉

영양왕이 수문제의 모욕적인 서신을 받고 크게 노하여 수문제에게 어떻게 회답해야 할지 중신회의를 소집하자 강이식(姜以式,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원수림이 있다고 전한다)은 “이 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합니다.”고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강이식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진주시 봉산사, 수문제의 모욕적인 서신을 받자 강이식(姜以式)은 “이 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합니다”고 개전(開戰)을 주장, 중국의 요서를 선제공격했다(사진 진주강씨대종회).


영양왕은 그의 말을 쫓아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예(濊, 『수서』의 말갈) 군사 1만으로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케 했다. 또한 거란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을 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제1차 전투이다. 과거부터 한국은 오로지 외침만 당했다는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이 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을 통일하여 명실상부하게 세계를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중국 천자의 지배를 거부한 것은 고구려뿐이었다.

『삼국사기』에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영양왕 9년(598) 왕이 말갈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하니, 영주(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시)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했다. 수문제가 듣고 크게 노해 한왕 양(諒, 문제의 넷째 아들)과 왕세적을 원수로 삼고 주나후를 수군총관으로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게 했다.’

수나라로서는 통일을 달성한 지 불과 7년 만에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당함으로써 급소를 찔린 셈이다. 이는 고구려가 이 당시에 요하 동쪽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나라도 곧바로 대응하여 산해관 서북지역인 임유관을 지나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임유관을 기세 좋게 통과해 고구려 영토로 진격했지만 마침 장마철이라 유행병이 만연하고 보급 역시 원활치 못한 상태에다 산동성을 출발한 해군은 도중에 태풍을 만나 전함을 대부분 잃었다. 이때의 수군 80〜90퍼센트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동운해(大東韻海)』와 『서곽잡록(西郭雜錄)』이란 책을 인용해 수나라와의 1차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고구려 장수의 이름을 강이식(姜以式)이라 적었다. 특히 영양왕이 수나라의 1차 침략을 물리친 후 2년 후에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고구려 역사서인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도록 한 것은 통일제국 수나라를 완패시킨 자부심의 표현으로 풀이 된다.

그런데 영양왕 15년(604) 7월, 수나라에서 대 격변이 일어난다. 태자 광(廣)이 아버지 수문제를 살해하고 수양제로 즉위한 것이다.

이때 상황이 묘하게 꼬이면서 수양제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607년 수양제가 서부를 시찰하고 돌궐의 계민가한의 막사에 들렸을 때 고구려의 사신과 마주쳤다. 영양왕이 돌궐과 연합전선을 맺어 수나라를 압박하려 한 것인데 그만 수양제에게 발각된 것이다.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는 수나라 군대, 수나라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국 고구려에 패배하여 당나라에 나라까지 빼앗겼다.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을 직접 불러 고구려 영양왕이 자신에게 입조하지 않는 이유를 따지면서 영양왕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돌궐에 파견되었던 사신의 말을 듣고도 이를 묵살하면서 입조는커녕 백제나 신라 등으로 수나라 사신이 가는 길을 막을 정도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수양제로서는 영양왕의 이런 오만불손한 행동과 아버지 수문제의 참패를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런데 양제의 총신 배구(裵矩)가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사군의 땅인데,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선제가 일찍이 고구려를 토멸하려 했으나 양양 장군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하고 고구려 침공을 사주했다.

수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고구려는 당대의 강자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동안 만리장성 밖의 북방기마민족이 침략해 올 우려도 있었음으로 섣불리 군사를 동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양제 고구려 정벌 앞서 변방수비 강화

그러므로 양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만리장성을 수리하는 등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다. 여기에 동원된 장정만도 100만 명에 달한다.

또한 수양제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들을 산동으로 집결시키고 군함 500척을 건조케 했다. 그 당시 건설된 함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만들어진 전선 한 척의 도면을 보면 오층 누선으로 최고 1000명을 태울 수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군함으로 알려진다.

중국 내부의 불안 요소가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한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를 동원한다. 수양제가 고구려 2차 침공 때 동원한 군사는 무려 113만 3천 8백 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 숫자는 수나라의 군 편제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수양제는 전군을 24군으로 편성했으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였다.

 

 

을지문덕 대첩도.


그런데 그 당시 1대가 100명이므로 1군은 1만 2천명, 전투병은 28만 8천 명 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툭하면 100만 대군이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삼국지』에서 조조가 형주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백만 대군을 이끌고 갔다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20만 명이었고 형주에서 오나라와 적벽대전을 치를 때는 15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임 용한 박사는 수나라가 113만 명을 동원했다는데 과장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앞에서 24군을 동원하여 전투병 자체로는 28만 8천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치중대(수송대)가 전투병 수만큼 편성되었고 중간에 보급기지를 설치하고 그곳에도 경비병과 병참부대를 확보해야 했다. 그러므로 수양제가 20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자랑한 것도 병력 외에도 군량을 운반하는 데 동원된 인원도 같은 수가 있어야 하므로 200만 명도 과장된 숫자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200만 명이라도 당시에 전 중국 인구의 5〜7.7퍼센트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수나라의 약점이었다. 전 인구의 5퍼센트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는 한국군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한국군은 60만 명으로 병력 수만 따져서 세계 5위 안에 들었는데 그 당시의 인구를 3천 만 명으로 계상해도 2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국처럼 넓은 땅에서 5퍼센트의 인구를 원정에 통원했다면 중국의 국내 군사력은 거의 텅 비었다는 뜻이 된다. 이 때 반란이 일어나거나 주변의 이민족이 침공하면 꼼짝없이 당하기 마련인데 실제로 수나라가 그런 꼴이었다.

더구나 대군이 동원되면 워낙 긴 전선으로 펼쳐져야 하므로 지형을 잘 아는 수비군의 게릴라전에 걸리면 그야말로 낭패이다. 군이 공격 받아 둘로 분산되면 전력이 1/2로 떨어지고 넷으로 분산되면 1/4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투부대와 수송대가 서로 분리되면 분열된 부대는 전력 자체를 상실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간은 매일 물을 마셔야 하며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단 며칠 안에 전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의 제1 목표로 속전속결을 내세웠다.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고구려의 평양까지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륙양면 작전을 구상했다. 육군은 100일 동안 먹을 식량을 지참하고 전격작전으로 고구려를 공략하며 동시에 수군(水軍)은 평양까지의 해상을 장악하여 육군이 필요로 하는 식량 등 보급품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대형 함선들을 건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수나라 공격군에게는 매우 불리한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산동과 하남에 큰 수재가 발생하여 30여 개 군이 물에 겼다. 농번기임에도 군사를 동원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자 농경지는 황무지로 변하여 식량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적절치 못한 군사동원에 전국에서 반란도 끊이지를 않았지만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 의지는 꺾기지 않았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