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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대중 전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by 바로요거 2009. 8. 18.

 

故 김대중 전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前대통령서거]주치의 "사망 2시간전 눈빛으로 대화"

아시아경제 | 김수희 | 입력 2009.08.18 17:22

 

주치의일문일답2-장준 연세대세브란스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장준 연세대세브란스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임종 2시간 전부터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며 "2시간 전까지는 가족들과 눈빛으로 대화하셨다"고 전했다.

다음은 장 교수와의 일문일답.
-시간별로 상태는 어떠셨는지.
▲어제 밤 11시경부터 나빠지기 시작해서 조치를 취했다. 혈압상승제를 높이고, 추가투입하는 과정에서 새벽 1시경에 호전됐었다. 그러나 오전 6~7시경부터 또 다시 악화되서 오후 1시 43분에 운명하셨다. 혈압이 떨어졌었고, 산소포화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급하는 혈압상승제의 양을 높였으나 산소 공급 수치를 높였으나 2시간 전부터는 소용이 없는 상태까지 됐다.

-의식이 있었던 것은 언제까지인가.
▲오늘 운명하시기 1~2시간 전에도 눈빛으로 가족들과 의사소통을 했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눈빛으로 가족들과 대화했다.

-정확한 사망시간은.
▲43분에 심정지로 사망했다.
-산소포화도가 많이 떨어지셨었다는데
▲산소포화도는 후반부에 많이 떨어졌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진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조치가 소용이 없었던 시기는.
▲떨어질 때 혈압이 높아지거나 하는데, 돌아가시기전 2시간 전부터 혈압을 더 높일 방법이 이미 없었다.

-폐렴으로 입원하셔서 자발성장기부전으로 사망하셨다고 하는데
▲폐색전증 이후에 호흡곤란증후군 왔다. 자발성장기부전증은 부열증, 폐열증 등으로 불린다. 폐렴, 폐색전증, 급성 호흡곤란이 자발성장기부전증의 증상이다.

-몇 명 정도 임종을 지켰나
▲세어보지 않았다.
-임종시 표정은
▲답변하지 않겠다.
-지난주까지 상태가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언제부터 악화됐나.
▲워낙 고령이시고, 심장이나 뇌나 위에 합병증이 생길 우려가 있어 주시하고 있다는 발표가 이미 있었다.

-임종 당시의 사망 선고하시고 호흡기 떼신 분은
▲사망선고 후에 기계를 떼어낼 때까지 시간이 있어서 확인을 못했다.

-35분에 심장이 멎었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35분경에 맥박이 매우 느려진 시기는 있었으나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심장이 멎은 것은 43분이다. 일시적으로 1분, 2분 정도 심정도 상의 심박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완전한 심정지는 아니었다.

-신장투석은 언제까지 했나
▲혈압이 아주 떨어지기 전까지인 2시간 전까지는 계속 했었다.
-의료진들은 37일동안 어떻게 치료했나.
▲병원에서는 주치의 뿐 아니라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로 힘들게 돌아가면서 24시간 최선을 다했다. 13분 정도가 돌아가면서 일했다.

김수희 기자 suhee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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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대통령 서거…민주화ㆍ남북화해 큰 발자취 남기다

매일경제 | 입력 2009.08.18 17:09 | 수정 2009.08.18 17:33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18일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 43분 입원 중인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지난 1960년대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과 함께 한국 현대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 사진은 김 전 대통령이 1999년 9월 "젊음의 광장"인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 <사진 제공=김대중도서관>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 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며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박지원 의원은 오후 2시 30분 병원에서 가진 특별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역임하셨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신 김대중 대통령께서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서거하셨다"고 발표했다.

박 의원은 "그동안 쾌유를 기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세계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임시 빈소를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특1호실에 마련했다. 앞으로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가족들 뜻을 잘 받들고 정부와도 긴밀히 협조해 김 전 대통령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중히 모시겠다"고 밝혔다.

박창일 연세의료원 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서거하셨다"며 "김 전 대통령은 저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7월 13일 폐렴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으며 안타깝게도 급성 호흡곤란증후군과 폐색전증 다발성 장기부전 등을 이겨내지 못하셨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의 심장박동이 멈추자 의료진은 소생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판단 내렸고 가족들과 의논 끝에 심폐소생술은 실시하지 않았다. 박 원장은 "워낙 고령이신 데다 장기부전 증상이 심각해 고인을 조용히 보내드리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에는 이희호 여사와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 삼남인 김홍걸 등 3형제,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전 의원, 안주섭 전 경호실장, 박지원 의원과 윤철구 비서관 등이 함께했다.

김 전 대통령 장례 형식과 절차는 청와대 측과 조율 중이다. 박지원 의원은 "의료진에게서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은 후 청와대 맹형규 수석에게 간접적으로 보고 드리고 서거 후에도 알려 드렸다"며 "청와대와는 제가, 행정안전부와는 윤철규 전 비서관이 대화창구가 돼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 경제, 외교, 남북관계' 등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주의 실현 △외환위기 극복을 통한 경제 회생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기억되는 남북관계 개선 등이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호는 '후광(後廣)'이며 '인동초(忍冬草)'로도 불린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출생일은 1926년 1월 6일이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ㆍ7ㆍ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63~1967년 민주당ㆍ민중당ㆍ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겨뤘다가 패배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했다가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해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ㆍ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극복했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됐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했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해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 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로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 밖에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2000), 무궁화 대훈장(1998), 국제인권연맹 인권상(1998),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의 메달(1999)을 받았다.

[김상민 기자 /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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