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이어받은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
서 길 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서경대 교수)
1. 발해를 새운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 구당서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권 199 하) 발해말갈전의 기록이다. 구당서는 발해가 멸망하고 19년이 지난 945년 편찬한 사서로 중국 사서 가운데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별종(별종)]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이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 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는 뜻이라고 보며, 남북한 학자들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에서 나온 가지'라는 뜻이라고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별종이라고 T 는 구당서 발해전에 [(발해) 풍속은 고구려 거란과 같다(風俗與高麗及契丹同)]고 분명히 하 고 있으며, 별종이란 용어도 그 책에 나온 용례를 모아보면 간단히 결론이 나온다.
구당서에 나온 별종의 예
고려(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별종이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國 本亦夫餘之別種).
철륵은 본래 흉노의 별종이다(鐵勒 本匈奴別種)
해국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奚國 蓋匈奴之別種)
실위는 거란의 별류이다(室韋者 契丹之別類也)
습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 蓋匈奴之別種也)
신당서에 나온 별종의 예
고구려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高麗 本夫餘別種也).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 夫餘別種也)
거란은 본래 동호의 종(種)이다(契丹 本東胡種)
해 역시 동호의 종(種)이다(奚亦東胡種). 실위는 거란의 종(종)이다(室韋 契丹別種)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더부살이(附)하던 자인데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 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별종, 별류, 종 등은 모두 '어디서 나온 가지'라는 근원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유사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발해에 대한 설명만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신당서에서도 다른 민족은 별종이라고 쓴는데 유독 발해만은 [고구려별종]에서 [속말말갈부고려자]로 크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신당서는 구당서 이후 100년 이상 지난 1060년 송나라 구양수, 송기 등이 편찬한 사서인데, 송나라 때 중화사상의 강화와 중국의 명예를 위해 역사를 쓰는 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구당서보다 훨씬 충실하다고 인정되어 후대 중국 사가들이 많이 읽고 인용한 사서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송나라의 사가들이 아전인수 식으로 재해석한 신당서보다는 그보다 100년 이전에 쓴 구당서의 기록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발해의 근원은 구당서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2. 당나라가 쳐부순 고구려는 지금의 발해다 - 최치원
1) 삼국사기 권 46, 열전, 최치원 전 당나라 대사시중(大師侍中)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 右)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 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하여 나라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2) 동문선 권 47. 최치원이 당나라 괸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
3.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 삼국유사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구려 옛 장수인 조영의 성은 대씨인데 잔병들을 모아 대백산 남쪽 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했다.(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 於大伯山南 國號渤海) - 삼국유사(귄 1, 말갈발해조)
4. 발해인들의 기록 - 高麗
발해인 들은 처음 나라이름을 [진(振)]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발해]라고 고쳤지, [말갈] 이란 말은 써 본 적이 없다. 건국 후 29년인 727년(무왕 대무예 9년) 발해가 일본에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사절을 보 내면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속일본기 神龜5년 1월 17일조)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발해 사신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는 일본에서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渤海郡者 舊 高麗國也)] (神龜4년 9월12월 29일조)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발해와 고구려을 마치 같은 나라처럼 혼용하고 있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5. 일본이 발해에 파견한 대사는 고려사(高麗使) - 나라현 평성경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依遣高麗使廻來 天平寶字二年 十月 八日 進二階級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과 함께 귀국한 일본의 오노 다모리(小野田守) 일행을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발해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해 발해를 고 려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http://www.koguryo.org/balhe/balhe-30.htm
(출처 :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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