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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동북공정 깰 수 있는 열쇠, 한민족의 원류 홍산문화

by 바로요거 2009. 5. 23.

 

동북공정 깰 수 있는 열쇠, 한민족의 원류 홍산문화

[집중조명]사라진 단군의 진실을 복원하라!

 

출처 : 뉴스메이커 696호

 

사학계 한민족의 원류 ‘홍산문화’에 초점…

“동북공정 깰 수 있는 열쇠” 주장


 

 

 

▲ <우실하 교수 제공> 
 
‘요하문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광활한 요하의 ‘홍산문화’가 국내 사학계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함께 상고시대에 사라진 고조선과 단군의 진실을 밝혀줄 단초가 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이곳 유물은 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고 진행중인 동북공정을 저지할 한민족의 비기라는 게 일부 재야 학자의 주장이다.

 

홍산문화 지역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유물. <국학원 제공> ▶

 

기원전 3500년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청동기대에나 출현 가능한 흔적이다.

무엇보다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이곳이 단군신화 속 곰 토템을 지닌 웅족(웅녀)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동기 문명을 갖고 이주한 환인족(부계사회)과 웅족(모계사회)의 결합을 통해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설이다. 문제는 여지껏 이를 확증할 사료가 없다는 점.

 하지만 재야 학자들은 이를 대신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정황증거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붉은산 인근의 후기 신석기문화

 

◀ 위_ 삼좌점 터에서 발굴된 성벽. 움푹 튀어나온 ‘치’ 는 고구려 고유의 축성양식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발굴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형 집터. 대문과 문설주는 물론 곡식창고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이곳 60여 채의 군락은 매우 드문 큰 규모로 파악된다. <국학 학술원 제공>

 

이와 같은 주장에 불을 댕긴 대표적 학자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문화·사상사를 통해 한민족 원류를 밝히는데 힘써온 그는 “홍산문화를 직접적으로 단군조선 원류로 거론하긴 아직 이르지만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홍산문화 전문가도 “결국 중국은 이곳을 한민족 원류로 인정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 몽골인은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붉은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붉은산 인근에서 중국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삼위일체의 거대 후기 신석기문화가 발견됐다. 상식을 깨고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적봉시 홍산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발견된 대규모 유적은 넓게 퍼져 있다.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그 시작은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중국 동북성 남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1400km의 요하 모습. 이 강을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이 나뉜다. <국학 학술원 제공> ▶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 왜소한 체구로 동북지방 한파를 뚫고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동북공정의 첫 삽을 양사영이 뜬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다. 일본편입이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