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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by 바로요거 2009. 4. 13.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강의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역사란 집안의 족보와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속에서 흔히 자기 집안의 족보를 모르면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를 하고 천하게 여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공부는 자아인식을 목표로 합니다. 자아인식이란 쉽게 말해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역사를 알아야 그 바탕 위에서 역사적인 인간이 되어 새로운 역사도 창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모습을 우리가 이신사(理神事)로 이야기하는데, 이법(理法)과 신도(神道)가 결국 인사(人事)로 결론이 납니다. 그리고 이 인사는 바로 역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안다는 것은, 상제님 진리 차원에서 볼 때는 진리의 종합적인 모습을 보는 겁니다. 역사를 깊이 아는 사람은 대세를 볼 줄 알고, 또 상제님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 상제님의 큰 일꾼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태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잘못 전해진 것을 누차 강조해 주셨습니다. 태사부님은“우리는 민족은 있는데 역사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또 사부님께서는“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 왜곡이 되었느냐?”는 문제를 지적하시며“그것은 북부여의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결론내려 주셨습니다. 흔히 북부여의 역사를 미싱링크(missing link)라고 얘기합니다. 즉 잃어버린 고리라는 얘기죠. 부여사가 바로 앞의 역사와 뒤의 역사를 연결해주는 고리와 같은 것인데, 이 부여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우리 역사가 왜곡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부여사 개괄
 그러면 부여사 전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원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부여의 시작은 대부여에서 시작이 됩니다.『 환단고기「』단군세기」를 보면,‘ BCE 425년에 44대 구물단군이 장당경에서 단군으로 등극을 하면서 대부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대부여는 단군 조선의 마지막 단계로 시기는 BCE 425년에서부터 238년까지에 해당됩니다. 이 대부여를 원시부여라고도 말합니다. 그 다음이 해모수 단군이 세운 북부여입니다. 기간은 BCE 239년에서 86년까지입니다. 그리고 고두막한이 졸본 땅에서 세운 부여를 졸본부여 혹은 동명부여라고 하는데, 이는 북부여를 계승하기 때문에 후기 북부여라고 합니다. 기간은 BCE 108년부터이며 후기 북부여는 BCE 86년에서 58년까지입니다.


그리고 해부루가 BCE 86년 가섭원으로 쫓겨가서 세운 부여를 가섭원 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 동부여는 CE 22년 대소왕 때에 망하게 되는데, 이후 대소의 동생은 북쪽으로 가서 갈사부여를 세우게 되고(CE 22~68), 대소왕이 죽은 뒤 고구려에 항복을 한 대소의 종제를 연나부에 봉해주는데 이를 연나부부여 또는 서부여, 낙씨부여라고도 하며 494년 문자 열제때 완전히 고구려에 병합됩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 부여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 지금의 역사학계에서 이걸 자세히 모릅니다. 학자들이 부여를 이야기하지만, 이 부여가 도대체 북부여를 얘기하는 것인지, 동부여를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두막한의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인지, 서부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구분하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환단고기』를 통해서 보면 그것이 전부 구별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북부여기」의 출현과정
 이제 원문을 살펴보게 될 텐데요, 먼저『환단고기』에 실린「북부여기」는 누가 기록한 것일까요?
 그 유래에 관한 내용이『환단고기』범례에 나옵니다.
 
 北夫餘記上下(북부여기상하)는 休崖居士 范樟所撰也(휴애거사 범장소찬야)라.
 ☞북부여기 상하는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것이다.(「환단고기」 범례)

 
 휴애거사 범장이라는 분은 고려때 외직 벼슬을 하다가 간의대부를 지낸 분인데, 고려가 망한 뒤 개성 만수산에 들어가 은둔을 합니다. 조선의 임금들이 불러도 나가질 않고 나중에는 나주로 낙향을 합니다. 범장의 본래 이름은 범세동이었다고 하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분입니다. 지금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가면, 휴애 범세동의 무덤이 있습니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이라는 거죠. 이제 원문 강족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나오는 부여는 ‘서부여’
 
 壬午二十八年(임오이십팔년)이라 二月(이월)에 高句麗(고구려)가가 擧國來侵(거국래침)하니
 ☞ 임오 28년(CE22년) 2월 고구려(대무신 열제)가 나라의 힘을 다 모아서 침범해오니
 
 王(왕)이 自率衆出戰(자솔중출전)이라가
 ☞ 왕(대소)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遇泥淖(우니뇨)하야 王御馬(왕어마)가 陷不得出(함부득출)이라
 ☞ 진흙탕을 만나 (대소)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高句麗 上裝怪由(고구려 상장괴유)가 直前殺之(직전살지)하대
 ☞ 고구려의 상장군 괴유가 바로 앞으로 나아가 살해하였다.

 
 이 부분은 「북부여기」의 제일 마지막 부분입니다. 고구려는 고주몽 성제, 유리 명제, 대무신 열제 이렇게 내려가는데, 나중에 동부여와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CE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치게 되고 2월에 벌어진 전쟁에서 고구려 상장군 괴유가 대소왕을 죽이죠. 그러자 4월 달에 대소의 동생은 북쪽으로 무리를 이끌고 가는데,, 사냥 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거기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 나라가 갈사국(갈사부여)입니다. 이 갈사부여는 북갈사라고도 부르는데 CE22년에서부터 68년까지 지속이 됩니다. 그리고 CE 68년 태조 열제 때는 이 부갈사의 도두왕이 고구려로귀순을 하게 되자, 혼춘을 식읍으로 주고 동부여 후에 봉해주는데, 이것을 북갈사와 구분해 남갈사라고 부르게 됩니다.
 
 한편 대소왕이 죽은 CE22년 7월에 대소의 종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무신 열제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러자 그를 지금의 장당경 아사달(지금의 요령성 개원시) 서북쪽에 있는 연나부라는 곳에 제후를 봉해주게 되는데, 이를 연나부부여라고 합니다. 한편 그의 등에 낙문(洛文)이 있어서 낙씨라는 성을 하사받게 되는데 그래서 낙씨부여라고도 불리고, 또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부여라고도 얘기를 합니다. 후에 이 서부여는 CE494년 문자 열제 때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이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부여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사서인 《이십오사二十五史》의 〈부여전〉을 다 보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있는 〈부여전〉입니다. 내용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12월달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했다, 또 소의 발굽을 태워서 점을 쳤다는 등 부여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어느 부여에 대한 이야기였느냐? 바로 연나부부여, 즉 서부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정사에 나오는 〈부여전〉의 부여가 대부분 서부여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위만의 남하와 간도수의 실현
 
 丙午四十五年(병오사십오년)이라 燕盧綰(연노관)이 叛漢(반한)하여 入匈奴(입흉노)하니
 ☞ 병오 45년(BCE 195년)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其黨衛滿(기당위만)이 求亡於我(구망어아)어늘 帝不許(제불허)라
 ☞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 단군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然(연)이나 帝以病不能自斷(제이병불능자단)하고
 ☞ 그러나 해모수 단군께서는 병 때문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番朝鮮王 箕準(번조선왕기준)이 多失機(다실기)하여
 ☞ 번조선 왕 기준이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쳐
 
 遂拜衛滿爲博士(수배위만위박사)하고 劃上下雲障 而封之(획상하운장 이봉지)라
 ☞ 마침내 위만에게 박사 벼슬을 주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북부여는 해모수 단군에 이어 두 번째 단군인 모수리 단군, 세 번째 고해사 단군, 네 번째 고우루 단군... 이렇게 죽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BCE 108년에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한무제가 군사를 보내서 위만조선을 친 사건입니다. 사실 위만조선은 ‘조선’ 자를 붙이기도 아까운데, 위만에 대해서는 지금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단재 신채호의 말대로 떠돌이 도적의 수령으로 우리 서쪽의 번조선의 한 모퉁이만을 차지했던 인물에 불과한데, 지금 학자들 대부분은 ‘위만이 고조선을 계승했고, 한무제가 위만정권을 멸망시킴으로써 우리 고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다’ 이렇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는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들어왔으며 국호인 조선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위만이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위만은 중국 사람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에도 보면, ‘위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중국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을 했습니다. 당시 노관의 부장들 중에 위만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번조선으로 망명을 요청하자 대단군인 해모수 단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죠. 그런데 BCE 195년인 그 해는 해모수 단군이 67세로 돌아가시던 해로 그 일을 과단하게 처리를 못하시고, 번조선왕 기준이 결국 위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벼슬을 주고 상하 운장 땅을 떼어줘서 맡깁니다. 그런데 이 위만이 그 다음해에 반란을 일으켜서 BCE 194년에는 기준을 몰아내게 됩니다. 이때가 우리 민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해가 되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만주에 있던 진조선 번조선 즉, 진한 번한의 유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면서 간도수가 실현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삼한과 후삼한
 諸加之衆(제가지중)이 奉上將(봉상장) 卓(탁)하여 大擧登程(대거등정)하여 直到月支(직도월지)하여 立國(입국)하니
 ☞ 오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길을 떠나 곧장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月支(월지)는 卓之生鄕也(탁지생향야)라 是謂中馬韓(시위중마한)이오
 ☞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於是(어시)에 弁辰二韓(변진이한)이 亦各以其衆(역각이기중)으로 遂封百里(수봉백리)하여
 ☞ 이에 이르러 변한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백성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백리땅의 임금에 봉해졌다.
 
 立都自號(입도자호)하고 皆聽用馬韓政令(개청용마한정령)하여 世世不叛(세세불반)하다.
 ☞ 도읍을 정하고 변한 진한이라 부르고 모두 마한의 명령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전후삼한고>에 의거해서 전삼한, 후삼한이라는 개념을 쓰는데 전삼한은 북쪽에 있어 북삼한 또는 대륙삼한이라고도 하고, 후삼한은 남쪽에 있어 남삼한 또는 반도삼한이라고도 부릅니다. 전삼한은 고조선의 삼한관경을 얘기하는 것으로, 전삼한에서 최고의 권력은 진한의 대단군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삼한은 번조선이 위만에게 망함과 더불어 상장 탁이 익산에 와서 재건한 것입니다. 무강왕 탁이 BCE 194년 익산에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BCE 193년에 악롱건이라는 사람을 진한에, 진완이란 사람을 번한에 봉하게 되어 이를 후삼한이라고 합니다. 후에 진한을 이어 신라가 나오고, 마한을 이어 백제가, 변한을 이어서 가야가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 후삼한의 성립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간도수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한일 때는 종주국이 진한이었지만, 후삼한 시대에는 마한이 종주국이 됩니다.
 
 단군께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신 것은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와 배합한 것인데 마한이 天, 번한은 地, 진한은 人에 배합되며 진한이 종주국이었다는데서 인존사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한반도는 전삼한 시대에 마한땅이었고, 후삼한의 마한은 전라도에 위치했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도는 천중지천(天中之天)이 되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이 땅을 통해 강세하셨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또 진한을 계승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역시 인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숭과 낙랑국의 역사
 壬申元年(임신원년)이라 正月(정월)에 樂浪王(낙랑왕)崔崇(최숭)이 納穀三百石于海城(납곡삼백석우해성)하다
 ☞ 임신 원년(BCE 169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요령성 해성시)에 바쳤다.
 
 先時(선시)에 崔崇(최숭)이 自樂浪山(자낙랑산)으로 載積珍寶而渡海(재적진보이도해)하여
 ☞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산(하북성 창려현)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발해)를 건너
 
 至馬韓(지마한)하여 都王儉城(도왕검성)하니 是檀君(시단군) 解慕漱(해모수) 丙午冬也(병오동야)라.
 ☞ 전삼한의 마한땅인 평양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E 195년)의 겨울이었다.

 
 임신 원년은 BCE 169년인데, 정월달에 낙랑왕이였던 최숭이라는 사람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다가 바쳤다고 나옵니다. 이때는 북부여가 위만 정권하고 대립하고 있을 때인데, 그 전방에 해당하는 해성에 군량미를 보급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해모수 단군 병오년, 즉 BCE 195년에 최숭이 낙랑산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싣고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낙랑은 지금의 난하, 하북성 창려현 지역입니다. 그 창려현의 최숭이라는 대부호가, 위만이 들어와 정권을 잡기 몇 개월전에 모든 재물을 싣고서 발해를 건너, 평양에 와서 도읍을 한 겁니다. 그래서 세우게 된 것이 낙랑국입니다.
 
 
 한사군은 없었다
 癸酉十三年(계유십삼년)이라 漢劉撤(한유철)이 寇平那(구평나)하여
 ☞ 계유 13년(BCE 108년) 한의 유철(한무제)이 평나(위만 정권의 도읍지 창려현)를 노략질하여
 
 滅右渠(멸우거)하고 仍欲置四郡(잉욕치사군)하여 盛以兵四侵(성이병사침)이어늘
 ☞ 우거를 멸망시키고 사군을 두려하여, 성대하게 군사로써 사방에서 침범하거늘
 
 於是(어시)에 高豆莫汗(고두막한)이 倡義起兵(창의기병)하여
 ☞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所至(소지)에 連破漢寇(연파한구)하니
 ☞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유무에 대한 문제, 위치에 대한 문제 등으로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역사문제입니다. 하지만 좬환단고기좭를 통해 보면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좬환단고기좭에는 한무제가 사군을 설치하려고 사방에서 침범을 하자 동명왕 고두막한이 다 무찔렀다고 나옵니다. 사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의도만 했다는 것이죠.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도 사군의 구체적인 명칭은 안 나옵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것은 책속에서만 있었던 것이지 실제로 한사군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최숭의 낙랑국이 바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로 전해오는 그 낙랑입니다. 낙랑국의 마지막 임금이 최리라는 사람인데, 그의 딸이 바로 낙랑공주입니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고구려 대무신 열제의 아들이죠. 낙랑국에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우는 북, 자명고가 있었는데 호동왕자가 “그 북을 찢어서 없애버리라.”고 하자 사랑에 눈이 먼 낙랑공주는 자명고를 찢게 됩니다. 그 후 고구려 대무신 열제가 쳐들어가서 낙랑국이 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CE 37년의 일입니다. 이렇게 BCE 195년부터 CE 37년까지 역사속에 존재했던 낙랑국이라는 나라가 실제 있었습니다. 이 낙랑국은 한사군의 낙랑군하고는 전혀 별개의 나라죠.
 
 
 역사의 변천과정이 곧 진리의 모습이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를 알아봤습니다. 북부여를 비롯해 동예, 옥저, 낙랑국 등의 나라가 등장했던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열국시대의 다음을 오국시대라고 부르는데, 오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서)부여, 가야를 말합니다. 그 후 CE 494년에 서부여가 망한 뒤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 CE 562년에 대가야가 망한 뒤부터는 삼국시대라고 이야기하게 되죠.
 
 삼국시대가 끝난 뒤에는 남북국 시대가 열립니다. 이 때는 고구려의 정통 계승 국가인 북쪽의 대진국(발해)이 남쪽의 신라와 대치하던 시대입니다. 사실 남북국 시대는 고려, 조선으로 오면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또는 청나라를 고려, 조선과 대비시켜 보면 전부 남북국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남북한으로 또 나뉘어져 있죠. 이런 남북한 대립구도는 모두가 태극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태극이 통일이 되면서 무극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태극이 무극화 되면서 후천 오만년의 세상이 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제님의 진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를 깊이 공부해야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윤창렬 (태전 갈마도장, 대전대 한의학과 교수)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11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