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
1, 인종학적인 측면
오늘날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인종은 구석기시대인 4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사) '한족'(韓族)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분화한 것으로 보이는 몽골 인종, 코카서스 인종, 니그로 인종 가운데 몽골 인종에 속한다. 시베리아 일대를 원주지로 했던 몽골 인종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몽골족 또는 古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으로 나누어지고 새 시베리아족은 알타이와 우랄 산지 일대에 흩어져 살면서 형질·문화·언어구조상으로 구분되는 2개의 어족, 즉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나뉜다. 한족은 형질과 언어구조상 알타이어족에 가까우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알타이어족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 등 알타이계 종족과 언어구조가 다른 부분이 많다. 알타이어족의 원주지는 알타이 산지와 바이칼 호 일대의 삼림과 초원지대로 목축과 농경이 모두 가능한 곳이었다. 기후 변화, 인구 압력 등의 요인으로 알타이어족들은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는 내륙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터키족은 중앙 아시아 및 중국 북부 초원지대에, 몽골족은 몽골 고원 및 만주 북부에, 퉁구스족은 만주 동부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이들과 구별되는 또다른 갈래였던 한족은 중국 동부 해안지대 및 만주 서남부, 한반도 일대를 생활무대로 삼게 되었다.
한민족은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처음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왔을까? 볼행하게도 그런 궁금증을 풀어 주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원시 시대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민족이 속해 있는 아시아 대륙의 동북 지방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 한민족의 피부색, 체격, 언어 등으로 짐작할 뿐이다.
한민족은 아시아 중부 파미르(Pamirs) 고원에서부터 동쪽으로 옮겨 온 고대 동부 아시아 종족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민족은 인종학 상으로는 시베리아족이며, 언어학 상으로는 알타이 어족이라 할 수 있다.
예맥족 또는 맥족이라고 불리던 한민족은 처음에는 주로 냇가나 바닷가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 아니고, 수천 년의 긴 세월 동안 조금씩 무리 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좋은 환경, 살기에 더 알맞은 터를 찾아 몽고-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만주 부근에 다다랐고, 차츰 송화강-압록강-두만강 부근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이 때가 기원전 3천년경으로 이들이 한민족의 조상임에 틀립없다.
처음 만주에서 살기 시작한 한민족의 조상은 점차 한반도로 생활의 터전을 넓혀 백두산 일대에 다다랐다. 따라서 한국 역사의 첫 무대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활한 지역이었다.
2, 진화와 고고학적인 측면
인류의 조상이 이 지구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지금부터 1 천만년 전이었다. 그리고 생물학적인 진화를 거듭해 나갔다. 그러나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는 대략 4.5만년 전 현생인류의 출현과 함께 일단락되었다. 현생인류 출현이후 인간은 이제 자기 세대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문화라는 형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앞선 세대가 남긴 역사적 유산 위에서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그 삶을 영위하는 양태에서 지역적인 차이가 조금씩 커져갔고, 서서히 개성적인 면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반도에 최초의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고학적 단계인 구석기시대부터였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물은 1933년 두만강유역의 동관진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그러나 이 구석기 유적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무시되고 말았다. 한국의 구석기 유적에 대한 존재가 본격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옹기 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1964년 공주의 석장리에서 역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 두 유적의 발견은 식민주의 사관에 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우리에게 �아 준 계기가 되었고 우리 역사의 상한을 신석기시대에서 구석기시대까지 올려주었고, 식민지 사관의 허구성을 밝혀 주었다.
그 후 상원의 검은모루동굴, 청정암동굴, 평산의 해상동굴, 덕천의 승산리동굴, 제원의 점말동굴, 청원의 두루봉동굴, 연천의 전곡리, 단양 수양개, 등에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전역에 구석기 유적이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구석기인들은 대부분 동굴에서 살았는데, 공주석장리 유적 중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층 유적에서는 주거지가 발견도기도 했다.
구석기인의 사회조직은 극히 간단하였다. 구석기 시대는 생산력이 낮아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고, 집단으로 떠돌아다니고 무리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조직으로 권력과 지배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구석기인은 타제석기만 제작 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마제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또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토기는 그 특징에 따라 제작인의 문화계통을 잘 나타내므로 신석기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식량생산 단계는 아니고 원시적인 농경이 계시되었을 뿐이다. 그 후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부터는 지역적 차이에 따라 농사도 지어조,피 수수등의 농작물을 수확하였고 아직 주거는 움집에서 기거하는 형태였다. 완전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농경생활을 영위한 뒤 부터이다. 신석기 시대의 사회단위의 기본은 혈연중심의 씨족공동체이며 폐쇄적인 생활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씨족공동체를 떠나서는 사회생활이 영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씨족과 씨족은 그 지역을 구획하는 경계가 있었으니 이를 침범하여 경제활동을 하면 그에 대한 배상을 해야했다. 또한 같은 씨족 안에서는 족외혼(族外婚)만이 허용되어 사회유대가 형성되었다.
각 씨족들은 시조신이 자기를 보호하여 준다고 믿어 조상숭배열이 강하였다. 자기 씨족의 기원을 특정의 동.식물과 연결시켜 이를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존재하였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토템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무격신앙이나 동물숭배의 생활풍속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원시신앙의 한 단면으로, 수호신이나 시조신을 받들기 위하여 돌로 제단이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흔히 태양거석기념문화라고 일컫는다. 그 밖에 특정한 동물이나 특별한 장소에 접근하는 것을 금기하는 터부사상이 있다.
황하유역이나 한반도 지방은 북방이나 중국방면에서 오는 여러 문화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은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중국북쪽을 거쳐 동진하고 있던 스키토시베리안계통의 문화와 긴밀한 교섭관계를 가지면서 청동기 문화를 성립시켰다. 동이족의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던 예.맥 족은 중국북방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하여 와서 선주민인 즐문토기문화인들을 흡수하거난 구축하면서 청동기문화를 성립시킨 무문토기문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들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하여 먼저 홍도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 하였고, 다음에는 서해안지역에 들어온 혹도 계통의 문화를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한국인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 대희, 채 수환, 작
*출처: http://blog.daum.net/awse7208
3, 역사학적인 측면
(1) 환국(桓國)
인류문명사의 뿌리 되는 세계 최초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의 실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환국의 ‘국(國)’자를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인(因)’자로 변조하여 환국, 배달, 조선의 창업자 환인·환웅·단군을 모조리 도매금으로 신화의 인물로 몰아붙이고 한민족의 뿌리사를 송두리째 거세시켜 버렸다. 12환국으로 나누어 다스린 환국은 천산(天山) 동방에 남북 5만 리, 동서 2만여 리의 방대한 지역에 걸쳐 광역동방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환국은 7대의 환인이 3,301년(서기전 7199∼3898) 동안 다스린 것으로 전하고 있다.
(2) 배달(倍達)
환국 말기인 약 6천 년 전, 환국의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桓雄)께서 동방문명개척단 3천 명을 거느리고 동방 태백산(백두산)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배달국을 건국함으로써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즉 상고시대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인 신시에 도시국가를 열고 단군의 고조선 이전의 환웅천황의 통치시대인 배달 신시시대를 개창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과 신교의 도가사서인 『삼성기』(상·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을 반만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 데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고조선 이전에 환웅의 배달 신시시대가 엄연히 있었다. 모두 18대 환웅천황이 1,565년 간(서기전 3898∼2333) 배달 신시시대를 통치한 것으로 전해 온다.
(3) 조선(朝鮮)
고조선을 개창한 국조 단군성조께서는 “여요동시(與堯同時)”라고 하여 중국의 요임금과 동시대 인물이었음이 『삼국유사』,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 『관자』, 『산해경』 등 중국 고대 사서에서는 고조선의 머리와 몸체는 거세해 버리고 꼬리 되는 말기의 역사만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왜곡 날조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단군의 고조선은 초기에 이미 청동기시대에 진입해 있었고, 법률제도(팔조법)가 있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고대신지문, 圖畵문자와 문자토기의 발견)를 사용했다. 또한 화폐제도(명화전·일화전, 팔조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1/20세), 토지제도(均田制),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철학, 책력법(曆法)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 시대였다. 단군의 고조선은 신교 삼신사상에 입각하여 전영토를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였고, 모두 47대의 단군이 2096년 동안(서기전 2333∼238) 다스린 고대 한민족사의 최대의 전성기였다.
4, 기원설
우리 민족 기원설은 크게 북방기원설과 남방기원설 그리고 남북방혼융기원설로 나뉜다. 이 중 다수설은 북방기원설. 이 학설은 다시 스키토-시베리아기원설과 오르도스기원설로 나눌 수 있다. 몽골학계도 마찬가지다. 스키토-시베리아기원설은 천산북로의 스텝-타이가로드를 위주로 이루어진 민족의 이동을 전제로 한 것이고, 오르도스설은 그 지역을 넘어서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황하상류의 만곡부를 중심지로 추정한 것이다.
|
▲ 중국 만주 벌판의 하늘에서 왼쪽을 보면 거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서있다. 남북 길이 1200km,동서쪽이 400km로 한반도 크기만한 대흥안령산맥, 이 산맥은 크기에 비해 높은 봉우리는 없는 편으로 고원의 초원이란 할 수 있다. 기마민족의 후예인 몽골인들에게 있어 말은 생활 그 자체였다.
|
몽골고원과 시베리아의 물은 대부분 북류해 북극해로 흘러들고 일부는 남류 또는 북동류하면서 태평양으로 흘러든다. 하류로 갈수록 습도가 높아져서 혹한기만 피한다면 생산이 용이하고 생존가능성이 높아진다. 한여름 알타이산의 기온이 영상 30~40도에 이르고 일조시간이 18시간이나 된다. 몽골고원 북쪽으로 눈을 돌리는 한민족의 바이칼호 기원설은 이러한 점을 기반으로 삼는다.
최근의 항공사진은 바이칼호 언저리의 논농사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부이르호 언저리의 주민들은 “고올리(고려) 사람들이 벼농사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수로의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다. 바다처럼 드넓은 고올리 농장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알타이산맥과 항가이산맥지대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러시아는 ‘모피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 모피의 주된 공급지는 시베리아다. 그리고 조선, 부여, 고구려, 거란, 발해, 여진과 몽골은 시베리아에 역사적 태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민족의 뿌리를 밝히려면 ‘모피(fur)의 길’ 추적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몽골의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부이르호 남쪽에 있는 고올리칸 훈촐로의 상이 동명성왕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올리족과 고리(槁離; 고려) 그리고 바이칼호 올콘섬을 시조지로 하는 코리족은 호수 동쪽인 눈강상류-할힝골(훌룬부이르) 언저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것 같다.
몽골에선 오래전부터 이들이 같은 계통이라는 견해가 있어왔다. 이에 관한 분석이 이뤄진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SBS-TV의 ‘몽골리안 루트를 가다’ 제작팀은 데옥시리보핵산(DNA) 검사로 이를 실증했으며 최근 서울대 의대의 이홍규 교수는 이를 좀 더 발전시켜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검증해내고 있다.
DNA방식은 구미의 언어·인류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던 퉁구스족의 기원지 알타이~바이칼 사이의 사얀산맥 소욘(鮮)족에 관한 연구에도 적용됐다. 그 결과가 2001년 졔례코와 마뺘르추크가 쓴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지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아메리카원주민의 기원지가 사얀산 일대임을 실증하고 있다.
러시아쪽의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대학의 러시아과학원 일반유전학연구소장 자하로프 교수는 데옥시리보핵산 검사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밀접하게 직관돼 있는 것으로 밝혀진 우리 민족 또한 이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리라는 가정하에 한국인과 소욘족의 혈연적 관계규명을 위한 검사에 착수했다.
|
▲ 몽골 알타이 산맥에 있는, 우리의 서낭당과 너무 흡사한 '어워'
|
‘소욘’은 산이름에서, ‘퉁구스’는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바이칼호 지대라는 개활지에 진출하려면 상당한 힘이 축적돼야 한다. 이 지역은 해발 4000여미터가 넘는 많은 고산지대로 형성되어 있어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수량도 풍족하여 드넓은 땅을 보유해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힘을 비축하고 인구 수를 늘린 뒤, 바이칼 지역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기원지도 바이칼 유역
필자는 메이원핑(米文平)이 1980년 초에 발견한 선비족의 석각축문 소재지 ‘가셴둥’이 있는 대흥안령 북부의 Sayan(대선비)산이 ‘이르쿠츠크 북쪽에서 퉁구스하 남쪽 사이에 있다’는 정겸(丁謙)의 기록을 따라 2001년 8월에 현지를 답사, 이를 실증한 바 있다.
그리고 1999년 8월에 대흥안령 북부 오룬춘 기(旗)를 답사하면서 선(鮮)이 순록의 겨울주식인 이끼, 즉 선(蘚)이 나는 산임을 ‘시경(詩經)에 관한 모시주소(毛詩注疏)’ 권23을 통해 입증했다. 또 조선(朝鮮)의 ‘조’자는 ‘아침’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고 ‘찾음’을 뜻하는 글자임은 흥안령 선비족 기원지와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를 현지 조사해 확인했다.
또 ‘중국어사전’을 참고해 ‘조선’이 이끼(蘚)가 나는 새 땅을 찾아다니는 ‘순록 유목민’을 의미하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토속어란 사실도 밝혀보았다. 이른바 ‘조선 순록유목민설’이 되는 셈이다.
이끼는 응달에 많이 나고 습기가 많을수록 잘 자라므로 조선겨레들은 서시베리아쪽에서 산지를 따라 태평양이 있는 동쪽으로 ‘이끼의 길’을 찾아 이주해 왔으리라는 추론도 있다. 아울러 몽골의 맥(貊) 고올리 기원설을 선보이며 맥이 ‘Ussurian Racoon Dog’이라는 학명을 갖는 너구리임을 훌룬부이르대학 생물학과의 황학문 교수와 함께 대흥안령 현지 조사를 통해 입증했다.
또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불함(不咸)은 ‘밝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붉음’을 뜻하는 것임을 시베리아-몽골-만주 현지 연구를 통해 정리했다.
|
▲ 몽골 알타이 산맥에 있는 현무암으로 된 석상,제주도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
현지 원주민들에게는 타이가의 자작나무와 물가의 버드나무가 신앙의 대상이다. 버드나무 중에도 붉은 가지를 가진 버드나무가 특히 그렇다. 현지 나나이족 언어로 버드나무를 푸르칸(purkan)이라 한다. 이는 그대로 burqan(不咸: 하느님)으로 적을 수 있다.
만주에는 ‘보드마마’굿이라는 무당굿 메뉴가 있는데 이는 ‘버들어머니’굿과 같은 것으로 ‘버들꽃’을 의미하는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 유화(柳花)에 대한 모태회귀신앙과 접맥된다는 논문이 1993년에 조선족 동포 최희수 교수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길림성야생경제식물지’(1961년)에 보면 조선버드나무(朝鮮柳)의 별칭이 붉은 버드나무(紅柳)다. 물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는 분포밀도로 보아 전 몽골리안루트-스텝로드에 걸쳐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박혁거세’란 이름도 ‘붉을 혁(赫)’자를 사용해 ‘혁거세’라 한 것이나 ‘弗矩內’라 이두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보아 ‘밝음’이기보다는 ‘붉음’을 상징색으로 하는 제사장 종족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작년 유월 우리의 잠든 영혼을 강타한 ‘붉은 악마’ 신드롬을, 적어도 이 정도의 역사적 안목은 가지고 천착해 봐야 할 것 같다.
저명한 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라는 불후의 명저에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이 남북 축으로 돼 있는 데 대해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 축으로 퍼져 등온대(等溫帶)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과 기술의 이전이 용이했다”며 “따라서 유라시아 대륙인이 다른 대륙을 지배하는 주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이에 다시 몽골리안 루트로 접맥되는 유목민의 기동성이 가세하는 중심축을 이루는 곳이 유라시아 대륙임을 강조한다. 더구나 야생식물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맨먼저 가장 다양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진 곳이 서아시아다.
●“유라시아인, 이동 쉬워 다른 대륙 지배”
유라시아의 거대한 섬이라 할 중국은 히말라야산맥-천산산맥 등과 타크라마칸사막 등으로 그 서부와 북부가 가로막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고립되었던 데에 대해, 칭기즈칸의 안방처럼 스텝과 타이가로 탁 트인 천산북로-스텝로드는 사람과 기술의 이동이 자유로워 그 언저리들에 또 다른 선진 문화권을 이룰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배경 위에서 조악한 유목적 생산환경에 도전·응전하며 적응해 오는 역사를 펼치다 보니 그 부산물로 뛰어난 군사력이 생겨나서 북방민족이 중원의 안보를 담보하는 역할을 해내며 농업생산 환경을 보장하는 정치적 경영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이징은 바로 이런 스텝로드와 중원농경지대의 농산물 집산지. 한반도와 만주세력이 되새김질해 키워낸 수렵-유목 민족들의 중원 경영역량이 발산돼 나오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실로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왕조 창업 및 수성 능력은 흑룡강 북쪽으로 만주보다 훨씬 더 드넓은 대만주로 이어지는 거대하고 비옥한 지역을 기반 삼아 스텝로드로부터 주입되는 수준 높은 인력과 물력을 포용해 생겨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건조지대란 고원지대라 바람을 많이 맞아 습기가 적어진 스텝-준 사막지대를 주로 일컫는데 그런 생태환경에서 빚어진 인간들의 한 부류가 북방민족이고 그들이 한민족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북유럽에서 티베트고원으로 이어지는 지대에도 진출하고, 북극해를 건너 툰드라-타이가-스텝으로 이루어진 북서부 아메리카에도 진출해 간 것이었다
이렇게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동아시아, 아니 세계 역사 시원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밝혀내는 내용을 더 이상은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부정하는 것에 빠져 무조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된다.
*출처: http://kr.blog.yahoo.com/xodmfwn9
'한민족 역사문화 > 환단고기*韓의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의 기원을 그리는 김산호 화백 (0) | 2009.05.11 |
---|---|
한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유와 배달의 뜻 (0) | 2009.04.08 |
홍산문화 곰의 정체 (0) | 2009.04.06 |
우하량(牛河梁.뉴허량)의 옥기묘 (0) | 2009.04.06 |
중국의 역사 조작극, 단군신화까지 노린다! (0) | 2009.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