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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적봉지역 고조선 유적 계속 발굴된다"

by 바로요거 2009. 4. 4.

 

"적봉지역 고조선 유적 계속 발굴된다"
<내몽고 적봉(赤峰)답사기>중국의 고조선 유적지를 찾아서
 
강동민 이사장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윤내현 소장을 고조선 학회회장으로 등록을 마치고, 학회 회원교수들과 일반회원들이 고조선 지역인 중국의 요서지역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우리일행은 신용하 교수를 단장으로 고고학박사인 복기대 교수와 고인돌박사 우장문 선생, 박용일 변호사,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 등 여러 분들이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의지로 어렵고 험난한 길을 마다않고 출발했다.

 

 

▲내몽고 적봉지역. 필자 강동민 이사장 .
지난 5월 1일부터 7일까지 하루에도 무려 6시간∼8시간 씩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유적지와 유물을 확인하며 강행군을 했다. 우리는 한 곳이라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보고 싶은 욕심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중국 쪽에서 보면 관내와 관외의 접경지역이며 공산당 고급간부들의 휴양소가 있는 북대하와 진황도시의 갈석산 지역부터 답사는 시작됐다. 그곳은 산해관이 버티고 서 있는데,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고 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라고 하였으며 14세기 초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이다.

북경-조선-일본은 “광명의 땅“

만리장성의 마지막 꼬리부분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 식민사학자들은 만리장성이 북한의 평양까지 있는 것처럼 국사교과서에 기재하였기 때문에 중국정부의 모든 지도에도 북한 평양까지 만리장성을 그림으로 그려 넣고 있다. 여기 인근에 옛날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던 곳이고, 위로는 조양과 내몽고의 동남쪽에 위치한 적봉이 있다.

북경(북평). 조양. 고죽. 조선. 평양. 왜. 일본 등의 한자로 적힌 지명은 우리민족의 고어(옛날 말)로는 “광명의 땅”이라는 뜻이다. 적봉 역시 같은 어원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언어학자 박병식 선생님의 글). 적봉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한웅천왕 때의 첫 수도였던 ”신시(神市)”였다고 타당성 있는 주장을 한다. 한(漢)나라 때의 표현으로는 170년~200년 가까이 매년 조공을 바쳤던 두려움과 원한의 대상이었기에, 이름마저 노예라는 나쁜 뜻이 담긴 흉노족(匈奴族)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우리민족의 일파인 흉노(훈족)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진, 말갈, 물길, 돌궐(터키국가로 변함) 등도 모두 우리민족의 사촌이 되며 이곳 적봉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 이태리를 망하게 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훈족의 침략과 압박 때문이라고 하니 훈족(흉노족)의 용맹성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흉노의 장수가 적국을 원정하다 죽게 되면 그의 말에다 장수의 칼과 소지품을 실어서 보내는 곳이 여기 적봉이라고 한다(신용하 교수님의 설명). 이 부근 역시 대능하, 난하, 요하가 흐르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자를 만들기 이전의 우리 민족의 글.
그동안 중원지역 한족들의 기록에는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들만 사는 곳이라고 하더니, 만리장성 밖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7,000년~8,000년 전의 토기와 문화유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고조선의 부족들 중 예, 맥 조선의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여기가 바로 중국 한(漢)족의 기원이며 “중화제1용”의 기원이 발굴된 장소라고 떠벌리며, 중, 고등학교 학생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역사를 정치에 교묘히 이용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현실을 재확인 할 수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용 빈약

반대로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용산 소재)은 명색이 세계5대 규모라고 자랑을 하면서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이 줄지어 많은 견학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빈약하여 한 바퀴 전부다 돌아보고 난 후의 느낌은 매우 허전하다.

“우리민족은 아무것도 아니 구나!” 하는 허탈한 심정과 동시에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민족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중국으로부터 직수입한 것처럼 꾸며놓았다.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1,000년경부터라고 하며, 그때부터 국가가 성립된다는 일제식민사관을 그대로 인용하여 역사연표를 만들어 놓고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게 되면, 도리어 우리민족이 역사도 없는 보잘것 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상황인데도 정작 교육 담당부처와 박물관 측은 모르고 있는 듯하다. 현재의 중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일반 여행자들은 깜박 잊어버리는 때가 가끔 있다.

 

 

▲고조선 때의 성곽.
사실 공산주의사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며 직업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을 여행하는 일반 외국 여행객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기를 자유민주주의와 똑같은 사회인 줄로 착각을 하곤 한다. 국가가 정해주고 허용하는 지역은 특구형식으로 많은 혜택과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엄청난 제제와 압력이 가해지고 있음을 외부세계 사람들은 알기가 어렵다.

예로써 티베트 사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는 수, 당 때 막강한 세력으로 당의 공주를 맞이하여 정치적 혼사를 할 정도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등, 실크로드의 중요 지점에서 더욱 더 문화가 발전하였지만, 그 후 국력이 쇠퇴하면서 중국의 지배하에 종교 지도자도 마음대로 뽑아 받들지 못하는 오늘의 티베트가 되었다.
국내 각 언론사들도 인구대국, 군사대국에 대한 두려움에 다들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일찍부터 중국을 방문하였고 사업타당성 검토와 관광여행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이번 답사여행처럼 여러 가지 걱정으로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는 현장”을 보았다. 그것도 한족의 역사가 아닌 고조선역사를 한족의 역사라고 꾸며서 정치에 이용하고, 중국의 어린학생들에게는 자국의 역사 뿌리가 엄청나게 오래된 것처럼 만들기에 혈안이 된 현장들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학생들은 이것을 보고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갖게 되겠지, 거짓역사를 만들어서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일본처럼 말이다. 거짓역사도 오래두면 나중에는 헷갈리는 역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 단군조선을 부정

내몽고 적봉(赤峰)의 오한기(敖漢旗) 박물관에는 중국역사 이전(以前)의 역사기록과 유물유적을 전시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설명자의 말에 의하면 “연나라” 장성 유적지 강역도 같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본래부터 고조선 단군조선의 중심지역 이었기 때문에 연나라 장성은 있을 수도 없고 있을 곳도 아니다. 고고학적으로도 아무런 발굴된 유물유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여기는 연나라 장성 유적지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식의 정치광고형식으로 설명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만리장성의 끝. 낙랑지역.

 

 

 

 

 

 

 

 

 

 

 

 

 

 

 

 

 

 

 

 

 

 

 

 

 

 

 

 

 

 

 

 

 

 

 

 

 

 

 

 

 

 

 

 

 

 

 

 

 

 

 

 

 

 

 

 

 

 

 

 

 

 

 

 

 

 

 

 

 

 

 

 

 

 

 

 

 

 

 

 

 

 

 

 

 

 

 

 

 

 

 

 

 

 

 

 

 

 

 

 

 

 

마치 명도전(고조선 돈<화폐>)을 연나라 화폐라고 주장하는 중국이나, 이것을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교육시키는 얼빠진 한국 학자들과 똑 같았다. 또한 홍산문화 유적지와 연결되고 이어지는 하가점 하청문화 유적지의 발굴현장 옆 산에 아주 큰 글자로 “연나라 유적지(燕遺址)”라고 일부러 만들어 놓고 2007년 개통된 고속도로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이곳에도 연나라의 유물유적이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으나 중국정부에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고고학자들의 증언) 이것은 고조선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연나라에서 피난 와서 단군조선의 서쪽변경(기자조선이 있던 곳: 하북성 북경부근)에 거주해 살던 위만을, 위만조선이라고 하며 우리민족의 역사 시작점으로 만들어 놓은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똑같이 이론을 맞추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요서지역, 신석기 문화 발달

요서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원전 5,500년경의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혹은 “사해문화(査海文化)” 유적지 입구에는 “중화제1촌(中華第1村)”이라고 크게 글씨를 써놓고 중화민족의 용(龍)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용 모양하고 약간 비슷하게 하여 작은 돌들을 1미터 정도 높이로 흙을 돋우어서 유적지를 만들어놓고, 학생들 교육용으로 이용하다가 현재는 현장만 보존한 채 방치해 놓고 있었다.

본래는 용(龍)으로 자기표시를 삼았던 사람은 우리 동이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태호복희(BC 3528~3413)씨이다. 봉황(鳳凰)을 표시로 삼았던 사람은 태호복희씨로부터 한참 후대인 제곡고신(황제 헌원의 증손자)씨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사실 우리민족의 본래 상징이었던 용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명나라에 스스로 신하라고 하며 사대주의를 꽃피웠던 상징중의 하나인, 발이 네 개 달린 용(중국은 발이 5개로 정상)을 표현하는 등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중원유적과 다른 형태의, 고조선 유적으로 확실한 것은 발굴도중 덮어 버리든지 발굴 후 방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요령성 금서시연산구 여아가의 “임둔군 태수장 봉니 출토유적”은 “한사군”의 위치가 요서지역에 설치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중요 유적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평양을 한사군의 낙랑이라고 하며, 한사군 낙랑을 한반도로 끌어다 놓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중국공산주의는 그 맥과 이익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의 최고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몽고 적봉시 초두랑 지역의 고조선 성터 유적지로서 후에 고구려 성곽기술의 기초가 되는 석성(石城)과 마면이라고 하는 성의 돌출부가 나와 있는 고구려석성의 특징 유적지 여러 곳을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의 중화 유적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발굴도중 한국인 발굴동참 학자에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중국 선생의 묻는 말에 “변소 같지 않습니까?”하고 예사롭게 말하여 마치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며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유적지 보존에 보이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요서지역 성터. 발굴유적 현장. 토성이다. 

“축소-왜곡 덮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민족의 역사 유적지를 한 곳이라도 더 보존 하고자하는 어느 고고학자의 순수한 애국애족정신의 발로가 필자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정치와 힘의 논리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만, 일부러 만들어진 거짓말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연구해보면 저절로 알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축소 왜곡한다고 모두 덮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최고의 지리풍속을 기록한 산해경과 회남자, 사기진시황본기, 사기조선열전, 사기흉노전, 사기송미자세가, 삼국지위지동이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책들엔 우리민족의 풍속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청나라 때 국력을 총 동원 7만9천여권의 책을 엮어서 “사고전서”를 만들었다. 그 책 속에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 날조하려고 해도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강동민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화운동가. 현재는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세계적인 줄자 회사인 코메론의 CEO를 지냈다.

 기사입력: 2008/07/23 [14:14]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출처: 브레이크뉴스 http://www.break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