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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피라미드와 동이족

by 바로요거 2009. 3. 3.

 

피라미드와 동이족
피라미드의 원조, 한민족

 

AD3,4세기때 고구려 중기무렵에 만들어진 장군총

 

 ▼만주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

 

 

 

흥미로운 것은 만주에 정체불명의 피라미드가 있다. 현재 밝혀진것만 100개이상이라는데 최고 큰것은 이집트 쿠푸왕 높이146m것보다 크다고한다.연대도 이집트 조세르 왕조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 전 2560년경)보다 최소 1,2천년 앞선다고한다.


 

사진출처: http://damtuh.oolim.net/travel.htm?board=travel_2&no=2&page=1&pass=view&URL=travel.htm 

 

 

사진출처: http://www.art2me.org/images-art/08-gamsang/02-godae/01-egypt/image013.html 

 

 


사진출처: http://blog.aladdin.co.kr/oren/category/1293?CommunityType=MyPaper&page=1

쿠푸왕의 피라미드 높이 148m(현재 137m), 저변 233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 (B.C. 2600 ~ B.C.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높이가 148미터, 밑변의 길이가 233미터에 이른다.(현재는 137미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 세번째가 멘카우레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그중에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는 현존하는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써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돌의 크기는 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 (또는 250만 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쌓을수 있다고 하며 높이 3미터 두께 30센티미터로 자른다면 프랑스의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캐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

연대도 이집트 조세르 왕조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 전 2560년경)보다 최소 1,2천년 앞선다고한다.

 

사진출처: http://younghwan12.tistory.com/entry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 사진출처: http://www.drkimsworld.com/BOARD/STORY_READ.ASP?IDX=12&PAGE=11  


 


그런데 중요한것은 중국 고고학자들이 1973년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中原대륙의 최초의 통일왕조라는 진시왕(BC3세기)의 무덤보다 수천년은 앞서 있다고 밝혔단다. 고분을 발굴해보니 東夷족의 유물이 쏟아져나와서 현재는 중국당국이 발굴을 중단하고 접근 금지 시키고 있다. <홍산문화>

 

발해 북안의 신석기문화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 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반도에서 발견 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 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한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화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요녕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 (B.C.4,000)의 신석기 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단계의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일대, 양자강하류 유역등입니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인데, 북신문화는 7천년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 (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 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 되기까지 합니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중원대륙의 시작은 배달국에서 시작 되었다.기록에도 없었던 홍산문화(B.C.4500~B.C.2500)가 요즘 발굴되고 연구 되어지고 있다.중국학자들도 홍산문화는 동이족 즉 고조선의 문화라고 인정한다. 시대에 따라 배달국==>고조선 이런식으로 바뀌듯 동이족,흉노족,선비족,동호족,돌궐족,말갈족,선비족,예맥족,부여족,조선족 등등 전부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韓민족이다.


중원대륙의 上古史(BC3000~2033년) 삼황오제가 있었던 시기 배달국 제14대 환웅 치우천황(BC2707-BC2598)과 전투를 벌였던 황제헌원도 전부 같은 동이족 출신이다.(한족과는 전혀 상관 없는 같은 민족간의 다툼이였다.)  즉 배달국의 제후국이 삼황오제였다.


기원전2C 중엽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를 보면 잘 나타나있다.

중원의 상고사인 "하(BC2033~BC1562년),(BC1562~BC1066년)<갑골문자>,주나라(BC1066~BC256년)는 전부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라고 적혀 있다.

그것도 1700년 후에 漢족 출신인 사마천이 중국 한족漢族 중심으로 쓴 역사서에 나와있다.

 

주나라(BC770~BC256년)<동이족이 세운나라> 말기(춘추전국시대) 반란군 진나라(BC221~BC206)의 진시왕<동이족아님>은 불과 2세대를 못넘기고,  漢고조 유방에게 멸망하기까지 고작 15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진시왕이 한 일이란 위대한 동이족(배달국)의 역사서를 전부 불태우는 것(분서갱유사건)과 몇천년을 지배 해 온 동이족(흉노족)이 두려워 만리장성의 기초를 닦는다.

(한자도 갑골문자에서 나온 배달국 즉 동이족의 문자이고,화약,비단의 제조기술 전부 동이족으로부터 전수 받은것이다.진시왕이 동이족의 역사서와 기록들을 전부 없애지는 못했으니 1700년후 사마천이 자료 수집해서 쓴글이 史記이다.

 

또한 漢나라(BC202년~AD8년) 고조인 유방은 겁대가리 상실한채로 동이족(흉노족)의 본토를 넘보다 개쪽 당하고 다시 60년정도 노예 생활을 영위한다.漢무제(BC141~때 남북 흉노의 동족상잔으로 겨우 노예국에서 벗어날수 있었다.이당시 만주의 고구려와 한반도에서는 삼한의 기초가 성립된다. 당시 흉노,돌궐,고조선등은 같은 피를 나눈 배달국에서 나온 형제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이런식이다.

배달국이 다스린 영토범위는 워낙 광대 했으니 당연한것이다.

 

훈족(흉노족)이 3C~5C유럽을 침공해서 한 일(게르만족을 이동 시킨일과 로마를 굴복시킨일)은 알렉산더따위와는 비교 할 수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다. 지금의 유럽지도를 만든 위대한 종족 이였으니 말이다.


 

 

 

유럽의 게르만족을 이동시킨 훈족은 분명 동양인이란것은 훈족의 수장 아틸라가 동양인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 졌으며 훈족의 유골중 사분의 일정도 동양계로 나온것은 지배세력은 동양계 흉노족이 확실하고 나머진 훈족에 복속 당한 용병들로 보면 된다.살롱 대전투 때 훈족20만중 5만은 지휘부 동양계였을거고,나머진 훈족에게 복종 하는 유럽애들 이다.로마도 마찬가지 지휘부는 로마인이고 나머진 용병이였다.살롱전투(451년 6월20일)때는 1진(최강훈족)은 안나갔을테고 (구경)했을테니 로마가 가까스로 막아냈다.당시 훈족의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돌아가 전렬을 재정비 한후 일년뒤인 452년 훈족의 1진만으로 구성된 최강의 군대가 출병 한다는 소문에 서로마가 굴복하고 훈제국이 탄생 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신라가 선비족이 세운 당나라와의 전투인 매소성 전투 때 3만의 신라군으로 20만의 기병을 초전박살 낸것과 유사한것이다.당나라도 선비족은 지배계층이였고,피지배계층(즉 노예들)은 한족들이였으니 숫자로 밀어 붙인다고 다 되는것이 아니라는걸 보여준 사례이다. 최강 흉노전사 1명은 10명의 타민족 전사보다 전투력이 우위에 있다고 볼수있는 좋은 예이다.

 

 

중국의 신화통신이 보도한 5000년 이전에 만들어진 만주 북서부(내몽골)의 피라미드가 중국문명의 시초라고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황하문명(4000여년전)보다 앞섰고, 당시 그 지역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 내륙 서안(西安)지역의 피라미들에 대해 중국당국에서도 대대적인 홍보를 실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접근을 금하고 있다.

이어 만약 황하문명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면, 중국당국이 벌써 오래전에 세계를 향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을 것이다.

 

아울러 큰 돌들을 쌓아서 건축된 이 피라미드들은 돌무덤이 아닌  흙무덤을 짓는 중국의 문화와 차이가 있다.
피라미드들은 역사 관련 서적 ‘환단고기’에 나오는 ‘고대 한국인들’이 만든 것이다.
“중국당국이 고조선이나 고구려 역사 훔치기와 고대 만주 역사를 통째로 훔쳐가기가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면 세계를 향해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것”이며 중국 측이 공식적이면서도 대대적인 공개를 하지 않는 이유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도 그 역사가 5000년을 넘지 않는다.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들 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 http://blog.ohmynews.com/ggoon/54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