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화와 한국역사의 뿌리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명지대 사회교육원 문화콘텐츠과 교수)
1. 홍산문화의 역사적 지위
만주지역과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통로는 육로와 해로가 있다. 이중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유적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우하량유적, 동산취유적, 능원 삼관전자묘지, 요녕 부신 호두구유적이 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근래에 이 홍산문화의 주체를 3황5제의 하나인 전욱고양씨로 보고,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예라는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고구려족의 근원을 중국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홍산문화가 주목받는 것은 서기전 3,000-3,500년전 동북아의 고대문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학계에서는 80년대까지 황하 중류에서 번영하였던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는 앙소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이지 주류라는 황하문명 일원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앙소문화의 최대 약점은 국가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의 지표유적인 신전, 제사, 도시유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이룩한 주체는 고도로 발달한 종교문화와 돌문화, 옥문화, 청동문화를 지닌 종족이다. 공간적 위치와 시기적으로 이 문화를 남길 수 있는 세력은 서기전 28세기에 청구(靑邱)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치우천왕(서기전 2706-2598)의 직계조상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동이문화사에서 홍산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겠다.
2. 우하량 홍산문화의 중요성
홍산문화는 1935년에 내몽골 적봉시 홍산후(紅山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동북아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이다. 출토의 범위는 북쪽으로 내몽골자치구 소오달맹의 오이길목륜하에서 남쪽으로 요녕성 조양지구에 이르며 중국 하북성 북부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었다.
1954년도에 홍산문화로 명명이 되었고 시기는 서기전 3,000년 전후이다. 1983년도에 능원현과 건평현의 경계지점인 우하량(牛河梁)에서 대표적 유적이 발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가장 대표적인 문화의 내용은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1) 산상제단, 2) 적석총, 3) 여신묘, 4) 옥(玉)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이런 유형은 황하문명의 문화원류에 해당하는 대문구, 하모도와는 닮은 형이고, 또다른 황하문명의 원류인 황하중류 앙소문화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동북아지역 신석기문화의 주류에 해당된다.
1) 산상제단 : 인간의 생명과 죽음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사상체계에서 산상(山上)은 우주목의 원형이며, 환웅천왕이 하강한 태백산의 후신(後身)이며,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생명수(生命樹), 신단수(神檀樹), 건목(建木), 약목(若木)이라는 신수숭배의 원초적 모습이다.
또한 원형제단과 방단제단은 생명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상징을 표현하는 구조물이며 산(山)은 생명이 태어나고 돌아가는 근원으로 이때에 고유한 신교(神敎)의 3원적 세계관과 함께 원방각 이론이 체계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교문화는 한민족의 개국신화인 천손강림신화로 이어진다.
2) 적석총 : 고대 동북아 돌무덤의 원형으로 이는 3만 5천년전부터 동북아의 주인으로 군림한 초원의 수렵족들이 남긴 바위새김무늬(암각화)의 후계문화로, 바위가 갖는 불변성(不變性), 부동성(不動性), 융기성(隆起性)의 상징이고, 나아가 산상제단의 변형이며 우주목의 또다른 모습이다.
적석총 문화는 돌문화의 시원적 형태로 뒷날 고조선, 부여의 고인돌, 석관묘(돌관무덤), 석곽묘(돌곽무덤), 고구려의 계단식적석총, 석실묘(돌방무덤) 등으로 전승되는 북방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이다.
3) 여신묘(女神廟) : 여성신은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의 기본특징인 생산과 풍요의 숭배대상으로 여성이 신격화된 당대의 사회징표를 말한다. 홍산문화의 사람들은 원형제단에서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방단제단에서 여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이미 신격(神格)의 계통화와 함께 남성 조상신이 천제(天帝)의 위치로 격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신묘의 얼굴이 위압적이고 근엄한 것은 군림하는 신격의 표시로 볼 수 있다.
4) 옥문화 : 옥(玉)은 바위숭배를 계승한 영원성과 신비감, 종교적 권위, 정치적 권력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옥(玉)으로 만든 도끼는 왕(王)이란 의미로 발전하여 최고의 통치자로 상징되었고, 뒷날 불변성의 상징으로 금(金)과 함께 보석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바위에서 빛이 나는 옥(玉)을 뽑아내기 위해 바위를 불에 달구는 과정에서 청동(靑銅)이라는 인류최초의 금속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은 훗날 청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화발전의 시금석이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특징인 옥문화의 탄생지였다.
3. 동산취 유적의 중요성과 의미
동산취유적은 요녕성 객좌현 대성자진 동남쪽에 있는 대능하 서안의 산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유적은 동남향으로 강 건너에 마가자산과 대산산맥이 있다.
사방이 평지로 5천 평방미터의 넓이에 방형기단의 건축부지와 원형의 석축제단이 발견되었다. 산상과 석축제단의 발견은 우하량의 돌문화와 천손숭배사상이 우연의 소산이 아닌 이 지역의 대표적 문화징표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울러 제단의 부근에서 진흙으로 빚어만든 임산부의 여신과 나녀좌상(裸女坐像)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또한 이것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나녀소상(裸女小像)과 문화적 친연성이 뚜렷한 지표유물로 천신의 후손이 지상의 생산신(生産神)과 결합하여 하늘+땅+인간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군림한다는 한국형 개국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옥으로 만든 쌍룡황(雙龍璜), 녹송석으로 만든 올빼미상(鴞像)도 출토되어 홍산문화가 동아시아 옥문화의 원류임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서 녹송석(綠松石)은 푸른 소나무 잎의 색깔이 나는 암석으로 다량의 구리를 함유하고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청동(靑銅)을 생산하는 기본 광석이다. 따라서 서기전 3,500년경에 녹송석을 다룬 이곳의 석공들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청동을 제련할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4. 홍산문화의 여러 유물의 내용
홍산문화는 동북아의 흥륭와유적, 조부구문화를 계승한 사람들이 남긴 문화로 다양한 형태의 유물과 유적이 드러났다. 산상제단과 산상무덤, 적석총과 여신묘, 여신숭배와 나녀상, 그리고 숱한 옥(玉)의 출현이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동물상이 옥저룡과 새, 거북이다. 옥저룡은 옥과 돼지의 결합으로 돼지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우세한 세력을 가졌다는 의미와 함께 돼지의 중요성이 강조된 사회를 말한다.
옥저룡 가운데 특이한 유물로 요녕성 건평현 출토의 백옥으로 만든 저룡(猪龍;요녕 건평현)으로 높이는 15 Cm이며, 몸체 너비는 10Cm이다. 형태는 머리와 몸체로 2등분되고, 큰 머리와 두 개의 눈이 특징적이다. 몸에 걸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같은 유형이 적봉시 파림우기 나사태 유적에서 나왔다.
적봉시 옹우특기 삼성타랍 유적의 벽옥룡은 동아시아에서 년대가 가장 오래된 벽옥룡으로 높이는 26 Cm이고, 줄을 꿰는 구멍이 있으며 저룡과 새의 결합이 아주 특이하게 표현되었다. 주변의 옹우특기 광덕공 황곡돈에서 모양이 비슷한 홍옥룡이 출토되었다.
대표적 그릇으로는 적봉시 옹우특기 대남구 무덤에서 출토된 연형도호(燕形陶壺)가 있다. 묘지에서 출토된 그릇으로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며, 목의 둘레에 검은 띠를 하여 제비를 표시하였다.
귀가 달려있어 도기의 제작수준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두 귀에 두 아가리를 지닌 홍도호(紅陶壺)는 물이나 술을 담아 따르기 쉽게 두 개의 주둥이를 만들었지 않나 여겨지며 제사에 사용하였다면 술그릇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주변문화, 주변민족과의 관계
홍산문화를 남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초기역사의 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집단은 치우집단을 들 수 있다. 동이족의 주요한 종족이었던 청구, 주두, 고죽 등의 위치도 이곳이고, 서기전 28세기경에 천손사상을 가진 세력은 치우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중국학계가 이곳의 유적을 굳이 전욱고양씨(서기전 2514-2437)와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황제의 아들인 창의((昌意)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제헌원씨의 선조들이 남긴 문화로 연결된다.
전욱고양씨는 산동 용산문화를 일으킨 소호금천씨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20세에 독립하여 공공씨를 누르고 천하의 주인이 된 후 동이족 계열을 핍박하고 동이족 문화를 부정한 인물이다. [사기]에는 고양씨의 고손(高孫)이 우순이다.
한편으로 서기전 28세기경에 동북아에서 홍산문화와 같이 우월하고 뛰어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북방민족은 오로지 고조선의 선주민인 배달족(동이족)만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우리겨레와 관계된 문화이고,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청구로 천도한 까닭도 이곳의 문화적 수준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하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대문구문화를 계승한 산동 용산문화의 창조자를 소호금천씨로 보는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소호금천씨는 동이족으로 성씨는기(己=활을 만든 종족, 궁=弓)이고 이름은 지(摯)이다.
[좌전]에 따르면 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하고 관직명을 봉조씨, 현조씨, 청조씨 등 24개의 새의 이름으로 정한 것에서 신조숭배를 하였다. 이로볼때 홍산문화, 대문구문화, 산동 용산문화는 새숭배를 공통으로 하는 동이족 계통의 사람들이 남긴 문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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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이 한창이지만 동북공정은 요서·요동에서 발굴되고 있는 놀랄 만한 문명을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노림수도 작용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을 자랑해온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빠른 요하유역 고대문명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중국 고대 민족인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가 우월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중국 사학계는 ‘황화문명 일원론’에서 벗어나 ‘다원화 구역발전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 사학계는 다른 시각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요령성 우하량(牛河梁) 지역에서 발굴된 ‘여왕국’에 주목한다. 기원전 2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 유물들은 고조선 등 우리 유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기이하게도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한 시기다.
이같은 의문을 풀어나가는 학술회의가 27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다. 국학운동시민연합이 주최하고, 국학학술원 등이 주관하는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에서 ‘동이족의 국가기원’이 집중 논의된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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