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위기 때마다 성장했다
희망 2009… 힘찬 새출발!
70년대 오일쇼크 때 경공업→중화학공업 전환
중국의 추격에 쫓기자 '글로벌 브랜드 전략' 승부
삼성전자·현대차·포스코… IMF 겪은후 세계기업으로
한국 경제 성장史는 늘 존폐 기로에서 이뤄져
1990년대 말, 미국 시장에서 현대자동차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재고는 쌓이고 딜러망은 붕괴돼 갔다. 현대 브랜드는 싸구려의 대명사였다. "내 시계가 당신의 현대차보다 비싸다"는 식의 조크가 TV 토크쇼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현대차 한국 본사는 IMF 사태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최후의 카드가 던져졌다. '10년간 10만 마일 무상보증'. 경쟁업체의 보증기간이 '3년간 3만 마일'이었으니, 무모한 도박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대차 직원들에겐 배수진을 친 셈이 됐다. 10만 마일 보증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도 힘들었던 '품질의 벽'을 돌파한 것이다. 지금 현대차의 각종 경영 지표는 세계 톱 클래스다. 부채비율·영업이익률에선 세계 최강이라는 일본 도요타마저 능가한다. 위기가 아니었으면 현대차는 아직도 그저 그런 싸구려 메이커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 ▲ ‘취업 전쟁’을 뚫고 입사한 IBK기업은행 신입사원 200여명이 새해를 하루 앞둔 31일 경기도 기흥 연수원에서 새해 소망을 담아 함성을 외치고 있다. 이들의 밝고 희망찬 얼굴에 11년 전 IMF외환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만든 우리 국민의 저력과 자신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2000년 8월 4일 미얀마 수도 양곤. 트레이더스 호텔 대회의실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임채문 이사(현재 부사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얀마 서해안 가스전 공구의 독점 탐사권을 따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보다 긴장감이 더했다.
당시 대우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외환위기 후폭풍으로 그룹 전체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 있었고, 자금난에 시달렸다. 수백억원이 소요될 탐사에 실패하면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대우에게 주어진 시추 기회는 사실상 한 번뿐이었다. 제주도만한 바다에서 지름 1m짜리 시추공을 내려 단번에 가스전을 찾아야 했다. 해저 3200m까지 내려가는 시추공 하나 뚫는 데 1500만 달러가 들었다. 하나 뚫다 실패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고(Go)!" 사인이 떨어졌다.
그 후 3년5개월이 지난 2004년 1월 7일. 서울 본사의 임 이사에게 미얀마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가스층을) 확인했습니다." 3년간 마음 졸이던 임 이사 입에서 그제서야 환성이 터졌다. 이 가스전에선 우리 국민이 3년 쓸 양이 발견됐고, 대우인터내셔널도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경제성장 자체가 위기 극복의 역사였다. 한국 경제의 도약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위기 국면에서 이뤄졌다. 70년대 오일쇼크 때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80년대 후반 임금 폭등 때는 OEM(주문자 생산방식)에서 ODM (생산자 개발방식)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했다. 2000년대 중국의 추격에 쫓기자 글로벌 브랜드 전략으로 또 한 차례 도약했다.
한국 경제는 공격수 스타일이다. 위기일수록 공격에 나선다. 70년대 오일쇼크를 맞은 우리는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전략을 펼쳤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에 해외건설과 노동자를 수출해 기름 사올 달러를 벌어들였다.
포스코는 위기 때일수록 더 많이 투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80년대 초에 광양제철소를 세웠고, 선진국 저성장으로 촉발된 91년 위기 때는 당시 국내 제조업 총 투자액의 10%를 혼자 투자했다. IT버블 붕괴로 미국에서 34개 철강사가 파산했던 2000년대 초에도 매년 1조8000억원씩 투자했다. 덕분에 남보다 많은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인에겐 위기에 강력히 반응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국난(國難) 때면 항상 민족적 에너지가 분출돼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곤 했다는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에 따르면, 우리는 위기에 강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좁은 국토에 경쟁밀도가 높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이노베이션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지난 세밑 희소식이 하나 더 들려왔다. 지수 산출 기관인 MSCI(모건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는 새해 한국 기업들의 주당 순이익 증가율이 10.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만(-38.1%)·홍콩(-10.7%)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앞지르는 수치다. 한국 경제가 그만큼 위기에 강하다는 얘기였다.
입력 : 2009.01.0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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