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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동명성왕의 진실을 밝히자!

by 바로요거 2008. 12. 20.

동명성왕의 진실을 밝히자!

-동명(성)왕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우리가 아는 추모왕(주몽,중해,상해)의 삼국사기 기록 처럼 과연 시호였을까? 그럼 일단 이 삼국사기의 추모왕이 동명왕이란 기록을 보도록 하자.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위의 기록처럼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을 추모왕(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주몽,중해,상해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중모라고 나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도모 라고 나오기도 하며 <한서>에서 왕망이 고구려에 관한 것중에서 고구려후 추(騶)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로 보기도 한다. 즉 고구려 시조의 이름은 한 이름에 여러 번역하면서 음차가 많이 남을 알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 정부의 공식적 기록이라 볼수 있는 광개토태왕릉비에서는 고구려 건국 시조를 추모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추모라고 적겠다.)의 시호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못박듯이 적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우리학계에서는 이 동명(성)왕을(이하 동명왕) 고구려의 건국자인 추모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위의 삼국사기 기록과 똑같은 <위서>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것은 위사의 기록을 삼국사기가 많이 참조 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럼 <삼국사기>,<위서>(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신화를 실은 <북사>의 기록은 위서와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북사> 의기록은 생략 할까 한다.)의 기록을 적겠다.한번 보기 바란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泳汰?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금와]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리)·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12세기)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왔고 그 선조가 주몽이라고 한다. 조몽의 모친은 하백의 딸이다. 부여왕에게 잡혀 와서 갇혀 있게 되었는데 햇빛이 그녀를 비추어 피했으나 햇빛은 또 다시 그녀를 쫓아와서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잉태하여 닷되 크기 마한 알 하나를 낳았다.
부여왕은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어도 역시 먹지 않았다. 다시 그 알을 길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갔고 들에 버려도 많은 새들이 깃털로써 그 알을 감싸주었다. 그 알을 깨려고 하여도 깨지지 않아 부여왕은 할수 없이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어미가 그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장성하자 주몽이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나라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이르는 이름이다.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다른 뜻이있을 것으로 여기고 그를 없애 버리도록 왕에게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다. 주몽은 준마에게는 먹이를 감량해서 마르도록 키우고,둔마는 살이 찌도록 잘 먹여 키웠다. 부여왕은 스스로 살찐 말을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쏜다고 하여 그에게는 화살을 하나씩만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잡은 짐승의 수는 항상 주몽이 더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몽의 모친이 이를 알고 은밀히 주몽에게 이르기를 "부여가 너를 해치려고 하니 멀리 가서 너의 재능과 지략을 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인과 오위 등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갔다. 중도에서 큰 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널수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은 그들을 바작 추격하고 있었다. 주몽은 물에게 "나는 태양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입니다. 추격하는 병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건널 수가 없겠습니가?"라고 했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오랄 그들을 위해 다리가 되어 주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헤어져 추격하던 병사는 건널 수 없었다."

-위서 고구려전-(554)

위의 기록을 보듯 매우 유사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사>의 기록은 <위서>의 기록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 할점이 있다. 이 고구려이 시조 추모왕의 건국 신화와 매우 유사한, 기본틀이 같은 기록이 있다. 그 기록들은 먼저 1세기의 <논형> 2권 길험편의 내용이다. 위의 <논형>의 기록을 적도록 하겠다. 또한 <논형>과 비슷한 기록들은 <위략>,<수신기>,<후한서>,<수서>,<양서>,<법원주림>,<통전> 등에 실려있다. 이것들을 적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따분할것 같아 몇편을 뽑아 적도록 하겠다.
대체적으로 <논형>의 기록이 나머지 기록들의 전체적인 것과 같기에 <논형>과<위략>,<수신기>를 인용하도록 하겠다.

 

저번에 말하길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추모왕 신화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그 기본이 같다 여겨지는 것을 소개한다 하였다. 그럼 이제 그것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위에 관련된 자료는 어려것이 있으나 다 내용이 <논형>과 비슷하기에 약간씩 <논형>과 차이를 보이는<위략>,<수신기>도 같이 적도록 한다고 했다.하지만 <논형>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 이제 <논형>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북이 탁리국 왕의 시비가 임시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죽이려 하니 대답히기를 "달걀만한 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까닭에 제가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그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안에다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그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 안에다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금 마구간 안으로 옮겨 말에게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않았다. 왕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미로 하여금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그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마소를 치게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은 남족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병은 건너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도읍을 정하고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북이(北夷)에 부여국이 있다. 동명의 어머니가 처음에 임신하였을 때, 기가 하늘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던 것인데,출생하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성?洋?왕이 죽이려 하자,활로 물을 치니,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성장해 왕이 죽이려 하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으니,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겨서였다. 그래서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하여 주어 부여에 도읍하고 와 노릇한 것이고, 물레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는 도움도 있었던 것이다."

-논형 2권 길험편 (1세기)

위의 것은 <논형>의 기록이다. 그럼 <위략>을 보도록 하자

"옛 기록에서 또 이르기를 옛나라 북쪽지방에 고리국이 있어 그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즈,왕이 죽이려고 했다. 시비가 이르기를 "계란 크기의 기운이 있어 나에게로 내려온고로 임신을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것을 돼지우리 가운데에 버리자.돼지가 입김으로 그것을 불어 주었고, 마구간에 옮겨 두었더니 말이 입김으로 그것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의아해 하기를 하늘의 자손이라 여겨 이에 그어미로 하여금 노예처럼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항상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그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부의 시엄수에 이르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더서 다리를 이루었고,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내 흩어져 추병이 건너지 못했다. 동명은 이리하여 도읍을 정하고 부여 땅에서 왕노릇을 하였다."

-위략 삼국지 30권 위오환전등-

<위략>의 기록이다.이제 <수신기>의 기록도 보도록 하자.

"탁리국와의 시비가 임신하자 왕이 그 여자를 죽이려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계란만한 기운이 있어 하늘로부터 내려온 고로 제가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디. 그것(아들)을 돼지우리 가운데 버렸는데 돼지가 그것에 입김을 불어 주었다. 옮기어 마구간 가운데 두니 말도 그것에 기운을 불어 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왕이 의심하여 하늘의 자식으로 생각하였다. 그 어미로 하여금 그것을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 짓기를 동명이라 하였다.항상 말을 기르게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 하여 동명을 죽이려 했다. 동명이 도망가 남쪽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쳤다. 물고기와 자라가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은 건널수 있었으나, 물고기와 자라가 해산하여 쫓는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도읍을 세우고 부여에서 왕이 되었다."

-수신기-(4세기)

위의 세 기록들을 보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추모왕의 건국 신화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신비한 탄생이 그러하며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동물의 비호가 있었다. 혹은 신하들에게 시기를 받았으며 마구간에서 말을 키웠고,활을 잘쏘았으며,남쪽 물가에 이르러 신비하게 물고기와 자라가 올라 다리가 되어서, 무사히 건너 나라를 세운점들. 매우 추모왕의 기사와 유사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위의 기록들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와전된 것이라고 이병도를 위시한 주장들이 지금까지의 형세였다.(이병도의 주장은 단지 자기 스승의 주장을 이은것에 불가하다.) 하지만 위의 기록들을 단지 추모왕의 건국신화와 비슷하다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는 잘못된 점이 있다. 내가 저번에 이어 위의 기록들을 인용할때 옆에 적혀진 시기를 적어 놓았다. 보듯이 부여의 신화를 나타내는 <논형>의 기록은 후한 당시 1세기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북사의 기록은 6세기의 기록이다. 물론 그 이전에 고구려의 건국신화가는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 일례로 광개토태왕릉비에 보면 5세기 당시에도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확실히 자리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 한번 광개토 태왕릉비에 관하여 보도록 하자.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조하시었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
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을 지니고 계시었다. 수레를 타고 남으로 순행하다가, 길에서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길,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녀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 올라라." 하니 소리에 응하여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 올랐다. 그러한 연후에 건너가 되고, 비류곡의 홀본 서쪽의 성위에서 도읍을 정하였다. 세상에서의 위치를 즐기지 않아,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왕을 영접하니, 왕이 홀본동쪽에서 용의 머리에 올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위에 보면 광개토태왕릉비의 전체적인 비문과 <위서>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물론 그당시 고구려가 국력이 강해지자 위나라 사람들이 와서 들을 가망성이 매우 크다. 위나라와 교류가 활발 했기 때문이다. 그러했기에 위나라의 역사서에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실린것이고.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점은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동명(성)왕이라 말한 기록들이 없다. 모두 주몽왕 혹은 추모왕이라 기록하고있다. 그리고 위의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만약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추모왕이 동명(성)왕의 휘를 가졌다면 광개토 태왕릉비에 추모왕이라 하지 않고 동명(성)왕이라 기록하여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다. 자료의 확실성을 위해 또 고구려 당시의 금석문인 모두루의 묘지를 보록 할까 한다. 모두루는 북부여자사 로서 광개토태왕당시 부터 장수왕까지 산 인물이다. 그의 기록에서 또한 고구려 건국 신화의 축 요약 단면을 볼수 있다.

"하백의 손자시오 해와 달의아들이신 추모성왕 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나오셨도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최고로 성스러움을 알았다."

위의 기록을 보듯이 이 모두루란 사람도 동명(성)왕이라 말하지 안하고 추모성왕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건국부터----6세기 까지는 동명(성)왕이라 하지 않고 추모왕 본이름 그대로의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만약 5세기 당시에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불리었다면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대무신왕)이라 불렀듯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6세기(위서)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부터 추모왕이 동명(성)왕이라 불리었을까? 이것은 다시 차후에 논하도록 하자.


그럼 위의 기록을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불리지 않고,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매우 유사한 이 부여의 건국 신화인 동명신화는 동명이란 자가 부여를 세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탁리국(고리국,색리국)에서 태어나 왕의 미움을 받아 도망쳐 나와 부여를 세운 건국왕이자 부여의 영웅이다. 그의 이름은 동명(東明)은 동방의 빛이란 의미로 영웅이라 불릴수 있는 최대의 이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그당시 최고의 명칭이자 이름이라 생각된다. 동방의 빛이란 옛 단군을 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동명이란 이름은 동방의 빛이란 이름하에 천손의 자식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방의 빛이니 만큼 그 이름을 가진 이(동명)는 종교적 재사장 기능도 겸직으로 가지게 되었다. 단군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동명이란 이름(명칭)은 하늘의 아들(천자)이기에 존귀한 존재이며 또한 하늘과 이야기를 할수 있는 한마디로 최고의 극 존칭이라 할수 있을것이다.한마디로 다른 이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하며 또한 그를 배반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도 되기에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어 버리기에 그에게 복종할수 밖에 없는 명분을 만들어 버려 왕권 강화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였을 것이 그러하기에 부여의 건국자의 이름이 동명(東明)인 것이다. 고구려 건국자 추모의 뜻이 의미하는 화살을 잘쏘는자 처럼(옛날에는 화살을 잘쏜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었다.그러하기에 고구려 건국자가 추모라고 이름이 지어진것은 대단한 명예인것이다.그리고 부여의 건국자 동명도 활을 매우 잘쏜 사람 처럼 나온다)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추모왕은 <동명왕편>의 송양왕과 대결에서 신과의 대리자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부여의 건국자 동명이 신과 대리자의 역활과 같은 것이다. 즉 추모왕도 동명왕과 마찬가지로 활을 잘쏘면서도 천자의 자식이고 또한 신과의 대리자 역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동명왕편에 보면 송양왕과 추모왕과 도술대결이 나온다.

 

추모왕이 연승을 하지만 송양왕이 항복을 하지 않자. 흰 사슴[매우 진귀한 짐승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동물로 본다. 왜냐하면 사슴의 뿔은 하늘로 솓아 있고 또한 우리민족이 믿는 나무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그러하기에 하늘로 통하는 동물로 사슴을 보았으며 그럼에도 횐 사슴이기에 그 진귀함과 신성함은 더했다.]을 추모왕이 잡아 거꾸러 매달아 놓고 비를 내리지않으면 너를 풀지 않는다고 말했다.[여기서 사슴을 거꾸로 매단것은 하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이제 더이상 추모왕을 제외하고 하늘과 닿을 방법이 없어진것으로 매우 불길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역활을 한다.] 그러자 흰 사슴은 울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송양왕의 수도를 잠겨 없에버리게 하였다. 결국 송양왕은 항복하였고 추모왕은 송양왕을 합쳐 고구려를 더욱 튼튼히 할수 있었다.) 추모왕도 위의 동명왕의 이름고 마찬 가지 역활을 한 것이다.


그럼 위에 기록에서 보듯이 동명왕은 추모왕과 다른 인물로 나와있다. 물론 그 신화 형태는 매우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인물이다. 이것은 두 신화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인용하였거나 위서인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논형>은 1세기로 후한시대이다. 그 당시 후한과 부여는 매우 친한 상태였다. 그러했기에 <논향>에 부여의 신화가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부여의 건국 신화가 맞는 것이다. 즉 이말은 고구려가 부여의 건국 신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그런데 이것을 다만 후대의 추모왕의 신화와 비슷하다 해서 고구려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엄연한 추모왕 신화와 동명왕 신화는 구분된 것이니깐 말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것을 오기 아니면 고구려의 신화를 잘못적은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추모왕 신화와 맞추기 위한 것일뿐이다. 도리어 말하자면 추모왕 신화는 동명왕 신화를 빌린 부분이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지금까지 논했듯이 부여의 건국 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비슷하다 하여 그 부여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라고 오인되었었다. 하지만 역사서의 기록처럼 그것은 분명 아니었다.다만 고구려 건국신화로 본것은 후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일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부여의 건국신화가 고구려의 건국신화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것일까? 아까서도 말했지만 광개토태왕릉비가 세워진 5세기와 <위서>의 기록처럼 6세기 까지는 아직 추모왕을 부여의 건국왕 동명(성)왕이라 불르지 않았다. 즉 6세기까지는 아직 이란 말이다.그럼 언제부터 되었을까? 그런데 결정적으로 고구려 당시 즉 7세기 후반까지는 아직 부여의 건국왕 동명(성)왕이 추모왕의 시호가 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천(연)남산의 묘비이다. 이 천(연)남산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아들이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고구려의 공식적 역사적 관점을 잘 아는 사람중 한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럼 그의 묘비의 글을 보도록 하자.

"옛날에 동명은 기운에 감촉되어 호천을 넘어서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서 도읍을 열었다."

-천남산 묘비(702)
묘비의 내용을 보면 동명왕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추모왕이 언급되어 있어 분명히 그의 묘비에는 추모왕과 동명왕을 다르게 적어놓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 말기의 역사적 관점과 같다고 봐야 한다 말했듯이. 아직까지는 고구려의건국시조인 추모왕의 휘가 동명(성)왕이 되지 않은 결정적 증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어느시대부터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왕의 휘가 동명(성)왕이라 되었을까?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고구려 멸망까지는 아직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남북국시대부터 되었지 않았나 한다. 왜냐하면 고구려 멸망후 30년뒤에 생긴 대진(발해)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라 말했으며 또한 국서에서도 고려(고구려)왕이라 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전체적인 나라의 구조도 5부로 하였던점 등. 그당시 아마 대진국에서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동명(성)왕으로 만든것 같다. 대진이 스스로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하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 대진도 요(거란)에게 망해 고려에게 왕족과 귀족들이 항복하자 그 동명(성)왕과 추모왕이 같다고 하는 것이 고려당대 초기에 펴졌을것이다. 그래서 고려 초기 사서인 <구삼국사>에 추모왕이 동명왕이라 적혀지게 된것이다.(현재 <구삼국사>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구삼국사를 보고 적은 <동명왕편>에서 알수있듯이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 하는 것과 또한 구삼국사를 보고 적었을 <삼국사기>등의 기록을 봤을때 추모왕이 동명(성)왕이라는 기록들은 분명히 고려 초기 기록인 <구삼국사>에서 봤을 확률이 높다.)즉 대진에서 고구려 건국왕인 추모왕을 더 신성하게 하여 동명(성)왕이라 ?構?된것이고. 그러고 또한 그 추모왕=동명(성)왕의 내용은 대진 멸망 후 고려에게 전해져 고구려의 후손이기를 스스로 말한 고려에게도 그 내용은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것이다.(추모왕은 천손이기에... 아마도 이 천손이란 것은 부여의 영향이 강한 것같다. 위에서 계속 살펴봤듯이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인용한것이 분명하다.왜냐하면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고 또한 추모가 하늘의 아들이란 것을 강조할 경우 왕권 강화가 되었고 또한 고구려를 이었다 하는 대진과 고려는 그 천손의 뒤를 이은 또하나의 천손이 된것이기 때문이다.)그러하기에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의 기록을 믿는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잘못 전해진 하나의 신화로 보고있게 된것이다.
그런데 또 알아봐야 할게 있다. 그렇다면 이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언제부터 부여의 건국신화와 그 형태가 매우 유사하게 되었을까? 한번 그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부여와 같아 진것이 언젠가 알아보도록 하자.


고구려가 부여의 건국신화와 매우 유사하게된 과정은 고구려가 부여보다 이제 확실히 우월적이라 생각되는 시기라 본다. 고구려가 부여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부여인들을 설득시킬 그 무언가가 필요했을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여의 건국신화와 비슷한 고구려의 건국신화 였던 것이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도 하늘의 아들이다.(태양의 자식).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도 하늘의 자식(천자이자, 태양의 자식. 모두루묘비를 보면 추모왕이 태양과 달의 아들이라 표현하고 있다.)인 것처럼 두사람의 유사성을 말하고 또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가 고구려란 것을 강조하여 하나의 공통심을 발휘하게 링怜痼甄? 그렇다면 어느 왕때 이런 부여의 신화가 추모왕의 신화와 같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왕은 위에서 말했듯이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하게 되어 두나라의 통합을 유지할수 있을정도의 시대의 왕으로 나는 태조대왕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태조대왕은 내가 예전에도 말했듯이(고구려초기 왕조 교체 관하여 참조) 계루부 고씨이다. 그러니 추모왕과 같은 부출신이다 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혁명적 위치로 오른 왕위를 굳건히 지킬수 있어야 하는 하나의 일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건국왕인 추모왕을 높이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당시 부여에 가서 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묘에 제사를 지낼 정도로 부여를 무력화시킨 태조대왕이 자기의 왕권 강화와 부여의 민심 통합이라는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이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부여의 건국신화를 같게 만든 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이 건국신화는 그당시에 완전히 퍼져있었다고는 할수 없겠다. 물론 이 태조대왕 이전에도 추모왕을 신성시 하기 위해 추모왕 건국신화를 점점 높이다가 태조대왕때 이것을 정치적 목적상 이용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그것을 국가 내에서 확실히 퍼져있었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럼 이 것을 국가 전체로 퍼지게 만든 왕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소수림왕 이었다고 나는 생각된다. 왜냐하면 소수림왕은 그 이전 왕인 고국원왕당시 두번의 엄청난 전쟁패배로 인한 왕실 힘의 약화를 바꿔야 했으며 또한 그 여파로 인한 민심의 동요도 해결해야 했다. 그러하기 때문에 소수림왕은 태조대왕때 거의 완성되었던 고구려 건국신화를(부여신화를 통합한.)더 확실히 전 백성들에게 알려야 했고 또한 그것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백성들을 잘통치하기 위해 이 것을 모든 이에게 확실히 고구려건국신화를 백성들에게 입력한것 같다. 그 이유로는 먼저 위에서 말했듯이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고구려의 상황, 그리고또한 고구려 역사서라 알려진 유기가 써진 시기가 이 소수림왕대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고구려 건국신화의 대중화와 왕권의 강화(민심 확립)를 위해 유기를 적었을 가망성이 있고 또한 그것을 율령반포나 태학의 설립으로 이어져 고구려 건국신화(부여의 신화가 뻐대가 됨)는 그당시 이제 정착하게 되었고 결국 소수림왕 다음인 고국양왕을 지나 광개토태왕을 지나 장수왕 당시에는 광개토태왕릉비를 보듯이 확실하게 모든 백성이 알수 있고 또한 고구려 정부의 공식적 입장인 광개토태왕릉비에 적혀있는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때와 고구려 멸망까지는 아직 추모왕이 부여의 동명왕의 명칭이 휘로 되지는 않는다.

즉 이제 결론을 내자하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부여의 건국신화는 별개의 신화였다. 하지만 고구려측의 왕권 강화속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하나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두 신화를 하나의 신화(고구려)로 만든것이고 그것은 소수림왕당시에 전왕대에 꺽어진 왕권과 민심을 잡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고 장수왕당시에는 이미 모든 이들이 알수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공식적인 고구려 정부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추모왕=동명(성)왕이라 하지 않았지만 고구려 멸망후 대진이 고구려를 이으게 되자 추모왕의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또한 그뒤를 이은 대진의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추모왕=동명(성)왕이라는 두사람이 한사람이 되어 버렸다. 결국 대진의 멸망으로 인해 대진과 같이 고구려의 후손이라 하는 고려에 의해 그 신화와 추모왕=동명(성)왕으로 둔갑하게 되었고 <구삼국사>에 의해 그것은 완전히 굳게 되어버려 후대의 기로인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의 인용에서 <구삼국사>의 추모왕=동명(성)왕이 같다는게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대로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모든이들이 추모왕=동명(성)왕이라 보지 않았다. 조선의 후대 실학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다른 신화라 보았지만 사회 전반으로 퍼지지 않았으며 결국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그것은 다시 흐지부지 되었고 이병도(이병도의 추모왕=동명(성)왕은 그의 일본 선생의 주장과 같다. 그 일본 선생의 주장에 살을 조금 붙인것에 불가하다.)와 그 측근들에 의해 추모왕=동명(성)왕은 동일인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책들에서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기록하지 않게 되어버린 하나의 역사 왜곡을 낳아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수정되어야 하며 또한 부여의 건국왕인 동명왕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추모왕과 다르다는 것도 말이다.또한 동명왕이 추모왕과 다르다는 것을 안이상 더이상 백제가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낸것은 추모왕이 아니라 바로 부여의 건국왕에게 제사지낸다는 것이라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당시 백제는 부여의 후손이라 말했지 고구려의 후손이라 하지 않았고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한점과 또한 백제가 후대에 가서 성왕당시 남부여라 국호를 바꾼것도 부여의 동명왕을 믿는 것이지 추모왕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만약 동명(성)왕이 추모왕이라면 백제는 남고구려라 해야 했을것이다. 결국 백제의 嚥痢보듯이 추모왕은 동명왕이 아니라는 결과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고구려와 백제를 위해서라도 이제 바른 역사 정립에 이 고구려의 시조와 부여의시조 동명왕은 다르다는 것을 바르게 밝혀야 할것이다.

 

출처:(ㅡ▽ㅡ*)v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KG&qid=2e4Y4&q=%B5%BF%B8%ED%BC%BA%BF%D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