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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이제 ‘동양의 영혼’을 배우려 한다

by 바로요거 2008. 11. 28.

이진우 계명대 총장 특별기고

믿었던 자본주의와 과학의 배신…
소외·상실의 끝에 선
서양이 이제 ‘동양의 영혼’을 배우려 한다

 

 계명대 이진우 총장

서양이 몰락하고 있다.’ 새로운 시작을 확신하는 현대인에게 이 말은 분명 선동적으로 들리겠지만 그 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대성으로 점철된 이 사회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터에 누가 감히 선동의 수사학을 구사하겠는가?

서양은 여전히 새로운 시대와 사회, 즉 현대와 현대사회를 대변하며, 지상의 많은 사회와 문화들은 서양을 모방하거나 능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서양의 몰락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느 한 문명의 몰락은 결코 재앙과 전쟁의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몰락은 오히려 정점에서 시작된다. 파국과 몰락의 기운이 유령처럼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할 때이며, 우리 사회가 다른 어떤 대안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이며, 그래서 우리가 결국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할 때이다.

서양의 자신감이 흔들린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양의 자유질서를 위협하는 테러만큼이나 대테러 전쟁조차 서양의 자유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구원해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서양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서양에 대한 서양의 불신’이다.

서양은 이제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서양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합리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현대성의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을 철저하게 추방시켰다고 진단하면서,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이렇게 말한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종교적, 도덕적 전통 자체와 철저한 모순관계에 있는 문화가 동시에 발전하였다.”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합리화시킨 과학과 기술, 자본주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킨 서양은 한때 다른 문화를 오직 지배와 교화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였다. 제국주의가 그 결과였다. 그 다음 서양은 자신의 자본주의를 지구 전체로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와 문화를 그 자체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문화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이제 서양은 자신이 발전시킨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양 자체에 대해서도 대립관계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서양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서양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서양이 무엇으로 인해 몰락한단 말인가? 서양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유’를 떠올린다. 모든 개인이 집단과 공동체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되기보다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대접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이다. 자유라는 낱말은 금방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서양의 자본주의는 점차 서양의 문화적 핵심가치인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경제 질서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체제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가 자본주의의 폐지라는 정치적 환상에 매달렸다면, 오늘날에는 동일한 환상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자유만이 모든 문제의 유일하고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성장은 점점 더 증대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정이라는 높은 대가를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주변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자유와 복지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항상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잉여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무용(無用)의 공포가 우리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을 대변하는 자유의 문화는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묻는다. “자유인가 자본주의인가!”

인류의 존재와 삶의 심층적 의미를 더욱 더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은 오히려 현대 과학에 의해 가능해진 기술문화다. 서양의 기술문명은 자연과 생명을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근거를 과학적으로 해독하고 또 우리의 존재를 조립할 수 있는 유전자 기술을 발전시킨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절대자의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인간기술의 산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속화된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는 이렇게 신(神)의 문제를 인간의 의식에서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서양은 인간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그 자체로 완전한, 그래서 다른 문화적 가치는커녕 신의 보완마저 필요로 하지 않는 합리적 이성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250년 전 리사본의 대지진이 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경험한 지진해일(쓰나미)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과학기술적 맹신에 커다란 의문표를 붙인다. “생명인가 아니면 과학기술인가!”

서양의 몰락은 이렇게 서양과 동일시되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에 대한 회의로 시작한다. 서양의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며, 기술문명은 생명의 심오한 의미를 일깨워주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왜 불필요한 존재가 될까봐 불안해하는 것인가? 그것은 재앙과 파국이, 니체가 말하는, ‘죽은 신(神)의 사회’인 서양의 현실이며,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결코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보다 깊은 문제들과 접촉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서양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영적이고 정서적인 닻이다. 영성을 갈구하는 서양이 이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동양에서 배우려 한다. 그렇다면 여전히 서양을 배우는 데 정신이 없는 우리는 서양의 몰락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 대답이 어떠하든, 우리가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신으로부터의 철저한 인간해방은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가?”

 

 

출처:개벽실제상황 http://gaebyeok.jsd.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