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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갑골문자 天符經 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by 바로요거 2008. 1. 10.

 

갑골문자로 된 천부경이 발견되어 단군. 환웅 실재성이 높아졌다?

갑골문자 천부경이 발견 안 되어도

단군, 환웅은 원래 실재하셨다는 걸 모르시는군....

무지하게도....

갑골문자 天符經 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출처 :
대종언어연구소,일요시사 2002년 9월 29일자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 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것이다.

단군숭배를 기초로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 조화경인 "천부경"과
-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언급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 子)가 부여의 법학지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 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 중국갑골문의 한계 >

중국한자의 근원은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이다.
시기적으로는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은문에 비해 발전적인 형태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금문은 은문으로 칭해도 무방하다.

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있어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을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거나
불명(不明)으로 취급한 문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포함된 글자 중 미해독 글자는 총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와 같은 글자가 발견됐지만 중궁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는 본 글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표현한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 일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해독문자 또는 '그물견자’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설명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미해독문자로 분류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해독되고 있다.


< 기존 천부경과의 차이 >

"농은유집 천부경"을 발견.해독하기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모두 네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연수가 발견한 묘향산 석벽본,
둘째는 최문창전집 ‘고운(孤雲, 최치원)선생, 사적’ 편에 나오는 최고운 사적본이며,
셋째는 노사(盧沙) 기정진(1798~1876)으로 전유하여 내려오던 노사전본이고 ,
넷째는 조선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실려있는 태백일사본이 그것이다.

이중 태백일사본 또는 묘향산 석벽본은
한 자도 어긋남이 없이 전문이 일치하여 현재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잇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 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三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그러나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석벽본은 농은유집 천부경과 네 군데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석삼극(析三極이 아니라 新(새로울 신)자를 쓴 신삼극(新三極)이었으며,

두 번째는
대삼합(大三合)이 아니라 氣(기운 기)자를 쓴 대기합(大氣合)이었고,

세 번째는
무궤화삼(無 化三)이 아니라
종(從, 좇을 / 나아갈 종)자를 쓴 무궤종삼(無 從三)이었고 ,

네 번째는
衷(가운데 / 통할 충)자를 쓴 칠팔구충(七八九衷)이었다.

< 비교표 >


< 농은유집 천부경>


< 앞으로의 과제 >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일요시사 기사원문 >



   < 천부경 - 사진자료 >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문


[ 대종교 총본사 소장「천부경」-
 개천4446(1989)년 이홍재 作, 가로×세로 1.5m ]

 

 

 

 

 

 

 

 

민안부(閔安富) 1328∼1401. 고려 말기 충신.

  휘는 안부(安富)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과 지행이 높아 일찍이 별시(別試)에 등과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전리판서를 거쳐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30여 년간 관직에 있는 동안 처신과 성품이 처세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불의와 타협없이 충직하고 과묵하며 바르게 간언하고 국사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분이었으며 사림으로부터 육은(六隱,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농은 민안부, 수은 김충한) 중의 한분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그밖의 농은 선생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치적 혼란기였던 고려 말의 대부분의 충신들이 그러했듯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임을 스스로 생각하고 그 간의 발자취를 후세에 전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1392년(태조 1년)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구홍(具鴻)·박심(朴諶)·채귀하(蔡貴河)·이맹운(李孟芸) 등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경상남도 산청 산음현(山陰縣)의 대포리(大浦里)에 숨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망국을 추모하였다. 자손들을 경계하여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도록 하였고 현감에 기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하였다.

  영조에는 그를 비롯한 72현의 충신들이 은거하여 있던 그곳을 부조현에 봉하고 치제하는 은전을 내렸으며, 산청 영남 유림들에 의하여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고, 정조 때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

                           *출처: 경남도청 홈페이지 어린이도청 경남을 빛낸사람들


         출처 : 대종언어연구소,일요시사 2002년 9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