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백제26대 聖王은 일본 ‘비타쓰왕’의 生父

by 바로요거 2007. 12. 26.


백제와 일본왕실의 血緣 실체 규명

백제26대 聖王은 일본 ‘비타쓰왕’의 生父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신찬성씨록] 고증, 기타 고대문헌 고찰

         홍윤기 한국외대 교양[일본사회와 문화]담당교수

                         문학박사/일본센슈대학 국문학과

                         왕인문화협회 회장

-------------------------------------------------------------

 필자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속 백제왕국’의 비장 고대 일본 문헌들을 중심으로 문헌사학으로 고증하면서 그 실체를 규명하련다.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 아시아사학회장, 1927~) 박사는 지금부터 31년 전에 일본 최초로 [백제 칠지도(七支刀)]가 백제왕으로부터 백제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하사되었다”([倭國の世界],1976)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 이후 우에다 박사의 자택(교토부 가메오카시)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이 밀어닥쳤다. 그들은 “우에다 박사님, 이번에는 과자가 들었지만 다음에는 다른 것이 들게될 것입니다”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약 8년전에 우에다 박사는 필자에게 자택에서 말해주었다. “과자 대신에 상자에 다른 것이 들어있을 것”이란 무슨 뜻인가.
 

 또한 최근이다.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東京都立千歲高校 敎諭,1926~ ) 씨는 “저는 일본 문부과학성(교육부)으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2007.7.24)라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씨는 저서[구다라(백제)에서 건너 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을 저술하여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 받고도 있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현대 일본에서 어째서 이렇듯 일본 사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는 것일까.
 

 우에다 박사는 금년(2007) 봄인 지난 5월14일 자택에서 일본 국보급인 일본 고대 왕족과 귀족 족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서기815년 일본왕실 편찬)을 필자에게 직접 꺼내서 보여주며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왕족입니다”라고 우리 일행 앞에서 증언했다.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비타쓰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일본서기’).


 

백제 제26대 성왕은 서기544년 신라군과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며, 이 당시 장남 창(昌)을 백제 제27대 위덕왕으로 계승시키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그 이전 서기539년부터 일본제29대왕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왕실에서 서기794년 교토(헤이안경)로 새 왕도를 천도해왔을 때 성왕의 일본왕실 사당(平野神社)을 왕도 북쪽에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성왕의 사당(京都市平野宮本町)은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袋草子’ 1158).


 

 필자는 일본 고대역사 고증학자로서 일본 문헌들을 제시하며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고견을 바라련다.

----------------------------------------------

일본의 백제인 ‘오진왕’의 직계 계보

----------------------------------------------

백제 곤지왕자→日本에 건너가서 日本의 오진왕이 됨(4C 후반경)

日本 닌토쿠왕(오진왕의 제4왕자)→형제간→日本왕실에 살던 무대왕/우시왕(뒷날의 백제24대 동성왕이 됨)

백제24대 동성왕(日本서 옴)의 왕자→백제25대 무령왕(사마)→친동생/日本의 남제왕/계체왕

백제25대 무령왕(日本서 옴)의 왕자→백제26대 성왕

백제26대 성왕→日本에 건너가서 킨메이왕이 됨(日本王을 겸임한 백제 성왕)

백제27대 위덕왕(성왕의 장남)→위덕왕의 친동생(성왕의 차남)이 日本의 비타쓰왕(‘신찬성씨록’이 입증함)


 ‘백제궁’을 짓고 살았던 비타쓰 왕과 그의 손자왕

 지난 5월14일 오전 10시경에 필자 일행은 일본 교토부의 한적한 도시인 가메오카(龜岡) 전원 지대로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댁을 심방했다. 이 날 우에다 박사는 조상 대대로 서재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일본에서 두 번 째로 오래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을 꺼내다 필자에게 쥐어주며, 그 내용을 이모저모 상세하게 설명했다.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王都)였던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들 1182가문의 신분을 기록하여 입증해주는 중요한 역사 계보서이다. 이 역사서는 백제계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의 왕명으로 왕실에서 직접 편찬되었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는 우리 일행들에게 “홍교수는 저와 30년 간이나 한일간에 학문을 교류하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신찬성씨록]의 첫대목(第一帙)인 즉, 일본 왕도의 최고위 왕족(左京皇別) 항목들중의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왕족 30개 가문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대목을 펼쳤다. 그리고는 그 중의 하나인 12번 째의 [대원진인](大原眞人)이라는 왜왕실 왕족 가문의 대목을 손으로 짚었다. [대원진인]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이냐고 하는데 관해서는 다음처럼 한자어로 그 내용이 또박또박 씌어져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바타쓰<민달>이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다시 풀이하자면, “대원진인의 조상은 일본 제30대 비타쓰(민달)왕이며 그는 본래 백제왕족이다”라는 고증이다. 이 귀중한 역사 문서는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책(서기797년 왕실에서 성립)과도 내용의 사실이 부합된다고 확인마져 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원진인’이라는 일본 왕족이 된 백제인 출신의 왕족 보다, 그의 친할아버지인 조부 제30대 일본왕인 “비타쓰(민달)왕은 그 출신이 본래 백제 왕족이다”라는 사실(史實)이다. 그러므로 민달왕의 후손인 지금의 일본 왕실도 백제왕족 비타쓰(민달)왕의 후손이며, 동시에 백제인들의 후손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는 [대원진인](大原眞人) 대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비타쓰천황은 백제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라고 필자에게 단정해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우리 일행은 저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비타쓰(민달)천황은 백제왕족”이라는 사실보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학문적 양심에 대한 뜨거워지는 존경심이었다.
 

 ‘일본서기’(서기720년 일본왕실 편찬)라는 역사책에 보면 “제30대 비타쓰(민달) 천황(敏達, 572~585 재위)은 나라(奈良) 땅에서 ‘구다라 오이궁’(百濟大井宮, 백제대정궁)을 지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즉 비타쓰(민달)왕이 나라 땅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인 ‘구다라오이’(百濟大井, 백제 대정)이라는 곳에다 왕궁을 지었다는 기사이다. 이것도 왜나라 비타쓰(민달)왕이 백제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비타쓰(민달)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서명)왕(舒明, 629∼641 재위)도 나라땅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천)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 백제궁)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 백제사)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서명)왕은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는 ‘구다라노 오모가리(百濟大殯, 백제 대빈)’로 장례를 치렀다”(‘일본서기’)고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교수는 ‘일본서기’의 조메이(서명)왕 대목인 죠메이기(舒明紀)의 주해(註解)에서,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그 의식(儀式)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백제대빈’이란 본국인 백제 왕실에서 거행해온 성대한 왕실 장례 의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백제인들이 정복의 땅 왜나라에서도 ‘백제대빈’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그당시 나라(奈良)땅을 지배한 한국인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이었던 것을 추찰케 한다.
 

 이 일본왕들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부연할 여지도 없다고 본다. ‘백제 대빈’이란 백제 왕실의 3년상 장례로서,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년 재위)이 백제 왕도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치룬 것도 오늘의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1971년 7월8일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에서 입증되고 있다.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학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서명)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백제천황)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新撰姓氏錄硏究], 1970년)라고 연구 발표해서 일본 사학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연할 것도 없이 비타쓰(민달)왕과 그의 친손자 조메이(서명)왕이 생존시에 ‘백제왕’ 소리를 들었음을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가 지적하는 것도 양심적인 학구 자세다.
 

 서기572년에 제30대 왜왕으로 등극한 비타쓰(민달)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 대정) 땅은 어느 곳인가. 그 터전은 지금의 나라현의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현재(2007.11)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 백제우편국)도 영업중이다. 고료초 구다라(백제)의 땅 명칭은 현하 일본 정부의 ‘백제’라는 행정 지명(行政地名)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두 곳 중 하나이다. 현재 남아있는 또 다른 한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우리말로는 ‘백제사정’이다.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의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백제사 때문에 행정지명조차 ‘백제사정’이다. 이 사찰의 명칭은 ‘샤카산(석가산) 햐쿠사이지’(百濟寺, 백제사)로 부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사를 일컬어 어느 곳에서나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백제사’라는 한자어를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르고도 있다. ‘데라’는 말은 평안도 시투리 ‘뎔'에서 ‘뎌르’로 발성이 변화된 것으로 본다. 6세기 말 일본에 건너갔던 고구려승 혜자(惠慈, 출생년 미상~622) 등 고구려 승려들의 ‘뎔'이라는 호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해도 일본 각지에는 ‘구다라군’(百濟郡)이다 ‘구다라촌’(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등등 수많은 ‘백제’라는 행정 지명이 일본 오사카며 나라 등 각지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4세기부터의 난바(難波, 오사카) 일대는 이미 ‘구다라스’(百濟洲)였다고 하는 것이 일본 고대 오사카 지도인 ‘팔랑화도’(八浪華圖)로서 알려져 온다. 이 지도는 11세기말인 서기 1098(承德二年)년에 처음 그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도의 원도는 지금부터 벌써 9백여년 전의 난바(오사카) 중심지대를 가리키고 있다. 지도에 쓰여진 지명 등도 ‘구다라스’(백제주)를 비롯하여 ‘난바지’(難波寺, 난파사), ‘구다라리’(久太郞里, ‘백제리’라는 이두식 한자 표기) 등등 현재(2007년)의 오사카 중심지의 지명들이 이미 그 당시로부터 오늘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져오고 있다. 더구나  그 당시의 ‘구다라 고우리(百濟郡, 백제군) 지역은 지금의 오사카시의 중심 시가지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며 이쿠노구(生野區) 또한 텐노지구(天王寺區) 등등 광대한 터전이다. ‘구다라 고우리(くだら こうり’의 “고우리는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일본고어대사전’ 松岡靜雄 교수, 1937)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본 제2의 대도시 오사카는 ‘구다라스’의 이름아래, 백제인 왕가에 의해 발전해 온 사실을 ‘팔랑화도’가 살피게 해준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북백제촌)?‘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 남백제촌) 등의 행정 구역 지대였다”(井上正雄『大阪府全志』1922). 그러나 오사카의 여러 가지 백제 관계 지명은 일제 치하에 행정 당국자들이 거의 모두 지금처럼 바꿔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터전에서 ‘나니와쓰’(難波津, 난파진)의 지명을 최초로 그의 시가인 와카(和歌)로 지은 박사 왕인(王仁)의 위업도 다시금 음미해 보는 것이다. 지금의 오사카 중심 번화가 ‘난바’(難波)는 그 옛날 “왕인이 닌토쿠 천황(仁德, 5C)을 왕위에 천거하며 와카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 난파진가)를 자었다”(紀貫之『古今集』서기 805년 저술)는 왕인이 지은 지명 그대로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 후 계속 그런 '백제' 연고의 행정 지명들은 일제에 의해 각지에서 제거 개명되고, 현재는 두 곳만이 일본 정부 행정 지명으로 남아 있으나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알길 없다.
 

 일본의 백제인 비타쓰왕, 그는 누구인가

 일본의 구다라(백제) 불교 문화는 6세기 초엽(538년)부터 일본 나라땅 아스카(飛鳥) 지역에 위치했던 백제계 왕실에서 서서히 꽃피기 시작했다(‘元興寺緣起’ 등). 일본에 백제 불교를 전파시킨 것은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이다(‘일본서기’). 백제 성왕은 직접 일본을 넘나들었으며, 554년 이후에는 제1왕자였던 벡제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완전히 백제를 떠나 나라땅 아스카에 건너가서 왜왕인 킨메이왕(欽明, 흠명왕, 539~571 재위)으로 군림했다(홍윤기 ‘일본 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일본학]24집,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발행 논문집, 2005.12.). 일본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씨도 “백제 성왕은 일본왕을 겸임했다”는 연구론을 펼쳤다(‘百濟王. 聖王は欽明天皇’1991).
 

 성왕의 조부왕인 ‘동성왕’(479~501 재위)과 성왕의 부왕인 무령왕은 두 인물 모두 백제왕이 되기 이전에는 왜왕실에 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전혀 기사가 알려지고 있지 않다. 동성왕과 무령왕, 이 두왕은 각기 일본서 백제로 귀국하여 차례차례 백제왕으로 등극했다(‘일본서기’). 즉 성왕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계 왜왕실에서 살다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서도 백제 성왕이 왜왕실에 건너가 왜왕을 겸임할 수 있는 확고한 입지가 굳혀 있었던 것을 살피게 해준다.
 

 한가지 더 중대한 사실을 밝혀두자면 일본 고대 왕도 교토에는 왜왕실에서 직접 관장하는 백제 성왕의 큰 사당(‘袋草子’ 1158)인 히라노신사(平野神社, 서기794년 설립~현재)가 현재까지도 엄존하고 있다. 일본 고대의 역대 왜왕실에서 백제 성왕의 큰 사당 ‘히라노신사’에 제사드려온 사실은 10세기 초에 왜왕실에서 제정한 왕실 법도인 [연희식](延喜式, 서기927년 왕실에서 제정)에 그 명문이 실려 있다.
 

 이곳 성왕의 사당 히라노신사는 일본 고대의 백제계 제50대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의 칙명으로 그 당시 새로히 천도해온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의 새왕궁 북쪽에 세웠다. “제50대 간무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서기797년 왕실 제정)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한국과의 혈연이 있습니다”(2001.12.23.)라고 지금의 일본 아키히토(明仁, 1989 즉위~현재) 일왕이 그의 68회 생신 기자회견 석상에서 당당하게 공언한바 있다. 그러자 황거(왕궁)를 관장하는 궁내청 고관들이 매우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그 때문인지 이 날의 아키히토 일왕의 기자회견에 대한 각 신문 보도는 한국 혈연 관계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을 보도한 것은 [아사히신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