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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스크랩] 제2부[상上]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신동아 2007년 9월호)

by 바로요거 2007. 12. 13.

 

2007.09.01 통권 576호(p628~658)

 

[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상上]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故) 박창암 장군.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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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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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지.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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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 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 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는 ‘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에 실린 계연수에 대한 기록. 그러나 이 책자에 실린 계연수 기록엔 틀린 부분이 있다.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곤(坤)’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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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남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세,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계속)

 

출처: 신동아

출처 : 한민족 미스테리
글쓴이 : 뾰족한수 원글보기
메모 : 동북공정 저리가라! 환단고기 나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