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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스크랩] 제2부[하下]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신동아 2007년 9월호)

by 바로요거 2007. 12. 13.

 

 

2007.09.01 통권 576호(p628~658)

 

 

[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 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 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계속)

 

1979년 조병윤씨가 출판한 환단고기의 판권 부분. 조씨가 단단학회의 대표로 돼 있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씨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桓檀古記跋이라고 된 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글자는 이유립씨가 오자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本)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계속)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년,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단(丹)’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년 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 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년 4월18일).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 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 간판을 내걸었다.

   (계속)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다.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사(史)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元)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환단고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한중 국경선 부근에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가, 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이, 태천엔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다.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계속)


보현사가 있는 북한 묘향산에 ‘단군사’란 사당이 있다. 보현사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단군사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길림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 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황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계속)

 
 

전형배씨가 밝히는 ‘이유립 사관’
“영락대통일은 오늘날의 민족통일 사상”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사진)은 이기 선생이 만든 단학회를 이끌고 있다. 단군교와 합치기 전의 단학회는 1909년 이기를 회장으로 해 설립됐다고 한다. 2대 회장은 계연수 선생이 맡았고, 3대는 최시흥, 4대는 이덕수, 5대는 이용담, 6대는 이유립, 7대는 전형배씨가 회장이다. 전씨에게서 이유립의 사관에 대해 들어보았다.

▼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3개의 조선으로 돼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유립 선생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신조선과 막조선 불조선이 있었는데, 만주의 신조선이 가장 강력했다. 그리고 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쿠데타를 당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했다. 이 기준의 무리가 한강 이남에 삼한을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은 단군조선의 세 조선을 ‘전(前)삼한’, 기준 무리의 3한을 ‘중(中)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후(後)삼한’으로 불렀다. 이 선생은 이러한 3국 체제는 3수론을 가진 천부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하셨다.

▼ 환단고기에 북부여기가 별도의 책으로 들어 있는 이유는.
“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로 들어가는데 이때 북부여가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본다. 단군조선처럼 전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것을 북부여로 보는 것이다. 북부여는 여섯 왕이 내려가다가 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바뀐다. 이 때문에 이유립 선생은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고구려를 본고구려, 대진국(발해)을 중고구려, 고려를 후고구려로 보았다. 북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보면 이 나라는 900년을 이어간 것이 된다.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이 부른 것이지 우리가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진국으로 불렀다.”

▼ 이유립 선생은 광개토태왕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안다.
“이유립 선생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광개토태왕을 매우 높게 평가해 영락대통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 백제와도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한 군주다. 그러나 3조선 개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존속시켜주었다.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음에도 백제를 멸하지 않았고, 신라 왕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 신라를 존속시킨 것이 바로 영락대통일 개념이라고 이유립 선생은 강조하셨다.
영락대통일은 지금으로 말하면 연방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고구려는 말갈족과 함께 중국과의 전쟁에 나섰는데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 속에 있던 연방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영락대통일은 연방제국 개념

▼ 이유립 선생은 중국인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봤나.
“고구려 제국 안에 있던 우리 민족을 말갈 여진 옥저 읍루 등 별도의 이름을 붙여 기록해놓은 것을 대표적인 왜곡으로 보았다. 말갈은 고구려 말로 ‘강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역사서는 이들을 말갈족이라고 적어 놓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족과는 별종인 것처럼 묘사했다고 비판하셨다.”

▼ 이유립 선생의 사관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일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영남인과 호남인이 자꾸 싸운다는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고 가정해보자. 먼 훗날 이 기록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영남인과 호남인은 종족이 달랐던가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선생은 중국의 사서들이 옥저 여진 말갈 읍루로 자꾸 나눠서 기록해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지금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일본이 우리 민족을 둘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북한 사람은 조선인, 남한 사람은 한국인으로 적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이 쌓이다 보면 남북한 사람은 별개의 종족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영락대통일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까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거대한 통일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 계연수 선생은 묘향산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탁본해 대종교에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유립 선생께서는 계연수 선생이 약초를 캐서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때 대종교에서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아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했다는 말을 약초를 팔면서 퍼뜨렸다고 하셨다. 그런 소문을 내야 대종교가 천부경을 빨리 인정할 것으로 보고 그렇게 했다고 이유립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끝)

출처: 신동아

출처 : 한민족 미스테리
글쓴이 : 뾰족한수 원글보기
메모 : 환단고기의 진실이 밝혀집니다! 위대한 한민족의 상고시대 역사의 혼이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