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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천부경(天 符 經)에 대한 모든 내용들

by 바로요거 2007. 11. 20.

天 符 經 천부경

현생인류 최고의 하나님 말씀



一 始 無 始 一  일시무시일,

하나님은 처음이시나 처음이 없는 하나님이니,


析 三 極 無 盡 本  석삼극 무진본

끝없이 나뉘어도 본디 모습은 다함이 없다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하늘 한님은 하나요, 땅 한님은 둘이요, 사람 한님은 셋인데,


一 積 十 鉅 無 櫃 化 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하나님은 끝없이 나아가 함 없이 사람이 되셨네.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하늘도 둘셋이요, 땅도 둘셋이요, 사람도 둘셋이라,


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대삼합육 생칠팔구

한 하늘 땅 사람 모여 여섯이 되고 일곱 여덟 아홉을 낳았네


運 三 四 成 環 五 七  운삼사성 환오칠

하늘 땅 사람 운행하니 넷을 이루고 다섯 일곱으로 둥글다.


一 妙 衍 萬 往 萬 來  일묘연 만왕만래

하나님은 오묘하시고 두루 다니시니 우주만물이 오 가고,

 

用 變 不 動 本 용변 부동본

그 작용은 변하시나 본디는 변하지 않으시니,


本 心 本 太 陽  본심 본태양 

본디 마음 본디 큰 밝음이시여,


昻 明 人 中 天 地 一  앙명인중천지일

우러러 밝으니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 된다.


一 終 無 終 一  일종무종일

하나님은 마침이시나 마침이 없으신 하나님





1. 천부경의 유래

천부경은 1만여년전 한국(桓國)에서 입을 통하여 말로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신시배달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1대 한웅천황께서 신지혁덕에게 명하시어 록도鹿圖글자를 만들어 기록하게 하였다. 단군조선 때에는 전문篆文으로 번역하여 비석으로 새겨 놓았다. 그런데 이 천부경은 두 경로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난다. 첫째, 신라의 최치원이 발견하여 다시 참글(한자)로 번역하여 돌에 새기거나 문서화한 것이 오늘날 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북한 묘향산 단군굴에서 한단고기를 편수한 계연수 선생이 단기 4249(서기1916.)9.9. 묘향산의 돌벽에 새겨져있는 천부경을 발견하고 이듬해 정월10일에 천부경을 떠서 서울의 단군교당에 보냈다고 한다.


천부경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부경은 최치원의 고운문집에 실려 있는 사적본과 묘향산의 돌벽본과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발견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의 천부경관련 기록을 보면, 한인(한님)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었는데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록도鹿圖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고운 최치원은 역시 일찍이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휘장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本朝-리성계 조선조에 이르러 뜻을 애오라지 유가儒家-변태유교에 두더니 다시 조의<조의선인을 이르며 고구려시대에 국가중추기관으로 기능함=신선도神仙道>와 더불어 의논하여 보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여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한단고기232쪽 임승국역주, 정신세계사)


둘째, 갑골문자 천부경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유명한 학자 농은의 류집에 수록되어 있던 것을 민안부에서 서기2002.9.29. 세상에 공개되었다. 갑골문은 흔히 중국대륙의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가 다 인줄로 알고 있었으나 갑골문자 천부경에는 은허 갑골문에서 나오지 않는 갑골문자도 나타나고 있다.



2.천부경 풀이


1) 기존의 천부경 풀이 서적에 대하여.

천부경에 대하여는 대한민국 서점가에 다양하게 풀이된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천부경을 풀이한 책자들의 저자들은 자기의 지식 범위 안에서 그 지식을 총동원하여 풀이한 것이라고 보는데 자기전문분야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써 나름의 가치는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천부경 풀이를 보면 말씀배치구조도 각기 다르며 심지어 천부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까지 있다. 또한 이러한 천부경 해설서들은 대부분 그 분량도 수백 쪽에 이르고 풀이라고는 하나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안 보느니만 못하다는 인상 마져 풍기는 실정이다.


그러나  천부경이 하나님(한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인데 진리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


 따라서 진리는 누구나 쉽게 소화할 수 있고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진리가 설해질 때, 기득권 지식인보다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무식한 밑바닥 생민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고 맛있게 마셨음을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그 진리는 오늘날 까지 전해져 왔다. 다만, 기득권(이미 먼저 권력과 부를 틀어 쥔) 세력은 다시 이를 기득권 수호유지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천부경에 대하여 풀이 할 때 삼태극도 본인의 지식 범위안에서 풀이할 것이다. 다만 약간의 직관을 보태고 기존의 천부경풀이서적과는 달리, 될 수 있는 한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풀이할 것이다.



2)천부경과 세계의 고등종교

천부경 하나님 말씀을 풀이하면서 필연적으로 언급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적으로 수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위력을 떨치고 있는 이른바 고등종교다. 기독교(유대교 이슬람교 포함), 힌두교, 불교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른바 고등종교들 때문에 오늘날 이 지구촌은 바람 잘 날 없다.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타난 이 종교들이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상쟁으로 얼룩져 있다. 특히 오늘날 바이블(기독교 경전)의 토대위에서 만들어진 서구기계물질문명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고 그 폐해도 하늘을 찌를 듯하여 급기야는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 고등종교를 천부경과 그리고 천부경의 바탕을 이루는 한겨레 무당 문화와 비교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3)천부경 본문 풀이


(1) 一 始 無 始 一 일시무시일, 一 終 無 終 一 일종무종일

  하나님은 처음이시나 처음도 없고, 마침이시나 마침도 없는 하나님


가. 하나 一은 ‘하나님(한님=한)’

가) 개요

본격적인 풀이에 앞서 천부경의 첫 글자 ‘일一’에 대하여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순수 우리말의‘한’에는 고 안호상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22가지의 뜻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1)크다(大) (2)동이다(東) (3)밝다(明 · 鮮) (4)하나다(單一 · 唯一) (5)통일하다(統一) (6)꾼,뭇(大衆) (7)오래(久) 참음 (8)일체, 전체  (9)처음(始初) (10)한나라, 한겨레(韓民族) (11)희다(白) (12)바르다(正) (13)높다(高) (14)같다(同) (15)많다(多) (16)하늘(天) (17)길다(長) (18)으뜸이다(天) (19)위다(上) (20)임금(王) (21)온전하다(全) (22)포용하다(包容)


그런데 천부경의 일一은 단순히 숫자로서의 하나라기 보다는 이것을 포함하면서도 무극(태극) 또는 무한존재로서의 한(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一을 무한 존재 하나님이라고 풀이한다. 한겨레 신의 이름은 잡다한 민간신앙의 여러 신들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모양새이고 보통 하늘님 한울님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라고 하였는지는 ‘할아버지’라는 말의 변천과정을 봄으로써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원래 ‘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편하게 소리 내려다 보니까, 할아버지라고 바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님이 하느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변천되어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은 물리적 개념인 하늘(sky)하고는 다른, 정신적 개념(heaven)으로 정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신 이름과‘하나님’에 얽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앞서 상세히 풀이 했듯이,‘한울님, 하늘님, 한(단=칸=간)님, 하느님’, 등과 같은 개념으로써 한겨레가 저작권(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범 우주적 신에 대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특히 서양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등이 기독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갓’을 <하나님 또는 하느님>으로 해 버렸다. 기독교 신은 야훼(갓)인데 이에 대응하는 마땅한 신칭을 찾다가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이라는 기가 막힌 신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목사)교 신 이름으로 가져다가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인구가 폭증하면서 오늘날 마치 기독교의 전유물 인양 인식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거듭 밝히지만 <하나님>은 한겨레가 태고적 부터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것이다. 기독교신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의 유래는 유대인들이 수렵유목생활을 하던 시절에 만든 ‘야훼’(여호와 또는 엘로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한겨레의 고유 이름, <하나님>을 찾아 와야 하며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나) 하나님과 천부경과 무당 문화의 주술(주문)

하나님 한번 부를 때마다 우리의 기운과 피는 팔팔하게 용솟음친다. 이것은 하늘자손의 유전자적 반응으로써 과학적인 사실이다.‘하나님’을 반복하여 부른다는 것은 주술(주문)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무당 문화의 주술을 말한다. 이 주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력한 힘을 갖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전에 하나님, 아침에 눈떳을 때 하나님을 마땅히 불러야 하고, 틈나는 데로 가슴속 깊이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정말 하나님처럼 변할 것이며 하나님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에게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천부경도 되풀이 하여 소리 내어 읽고 외우고 노래하기를 권한다. 이 천부경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기운이 들어가 있으니 천부경을 되풀이하여 읽고 외우고 노래로 부른다면 역시 하나님을 부를 때와 같은 주술적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본다.


 주술呪術 또는 주문呪文이라고 하니 무슨 미신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고등종교가 사실은 원시 미개인이나 하는 것으로 알려진 주술적 신앙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이 세상 모든 종교는 무당 문화에서 나왔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고등종교에서는 무당 문화인 이 주술(주문)을 적극 써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계통의 종교에서 찬송가와 십계명, 주기도문을 반복하여 부르고 외우는 것이 바로 주술행위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을 예불드릴 때마다 률 까지 붙여 반복하여 부르는 것도 주문을 외우는 것과 하나 틀리지 않다.


 더구나 고등종교의 목사나 신부 승려 등 사제들이 걸친 각종 례복과 장식물을 보면 무당의 의복과 장식물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제들은 모두 변형된 무당들이다. 또한 고등종교에서 행하는 타악기 관악기의 음악과 노래와 율동 그리고 소리 내어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것은 역시 변형된 주술적 굿판이다. 따라서 세계 모든 고등종교가 결국 우리의 무당 문화에서 새끼 쳐 나간 것임을 알고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하나님’과 ‘천부경’을 주문으로, 기왕이면 장단 맞춰 신나게 부르길 권한다.


이러한 천부경을 암송하는 주술행위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였다. 실제로 태평성대를 이룬 한겨레 나라에서는 제천행사를 하면서 이 천부경을 노래로 불러온 흔적이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제16대 단군 위나(서기전1610~1553)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원년은 단기724이다. 단기 751년 구한(九桓)의 여러 칸(한,Khan)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께 제사를 드렸는데 안파견 한인, 거발한 한웅, 치우천황, 단군한배검의 신주도 함께 모셨다. 닷새 동안 백성들과 더불어 잔치를 크게 벌였다. 불을 밝혀 밤을 지세며 천부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신명나게 벌였다.’


태평성대와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은 태평성대라기보다는 혼돈 속에서 남북으로 가라지고 남한은 다시 계층간 지역으로 찢어져서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있다. 또한 가정과 사회에서는 폭력과 폐륜, 불신풍조, 가치관의 혼란, 사기와 뇌물, 비리, 반칙 등 불법이 판치는 게 일상화 되다 시피하고 있다. 결국 한겨레가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런 뿌리문화와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 일一하나

이제 본격적인 풀이에 들어간다. 하나一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하나님(한님=한)’또는‘우주’로 해석한다. 먼저 하나님을 대입하여 위 말씀을 그대로 풀이하면, ‘하나님은 처음이시나 처음이 없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마침이시나 마침이 없으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이면서도 처음과 끝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 그러면서도 온 우주와 우리의 안과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정의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존재다. 처음도 하나님이고 마침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과 생사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아닌 것이 없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샘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숨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늘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이 생겨 날 수밖에 없다.


 이 천부경의 하나님은, 인간과 분리되어 감시하고 사후세계를 약속하며 조건부 증여계약을 강요하고 말세론을 펼치는 피곤한 신이 아니다. 이런 불완전한 신은 한겨레 하늘자손과는 유전자적으로 맞지 않는다. 만약에 이런 신이 수입되어 한겨레 속으로 들어온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개성을 말살하고 틀어놓은 녹음기나 걸어 다니는 시체로 변할 것이다. 이런 부류는 주로 성직자나 종교지도자들일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타고한 영혼을 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수입 신을 본래 한겨레 하나님과 같은 신으로 바꾸어 개량된 신을 믿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증명되는 바, 외래의 그 어떠한 고등종교도 한국 한겨레에게 들어오기만 하면, 모두 복락을 가져다주는 신, 기복신앙으로 변해 버린 다는 것이다. 고등종교라면 육신의 세계보다는 영혼의 세계에 더 중점이 가 있고, 자기보다는 이타적인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 기독교 기타 어떠한 외래 종교도 전문적 종교인 사제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가 그 신앙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내세보다는 현세의 복락에 기울어져 있다.



라) 세계 고등종교의 모순과 미신성

(가) 세계 고등종교의 모순

세계의 고등종교는 대부분 교주가 있고 교주의 말씀이 담긴 두꺼운 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종교는 일정하게 틀져진 사상과 고정관념을 주입하기 때문에 이와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와 풍속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그 내부에서도 자기들 끼리 서로 싸우고 핵분열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진리는 속성상 말이나 글자로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그래서 침묵과 침묵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겠다고 하는 성자도 나타난 바 있다.


석가모니가 말했듯이 각 종교의 책들은 달月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데 인간은 달을 보는 눈이 없기에 그 손가락에 매달리고 그 손가락을 보는 눈은, 자라온 환경과 지식의 습득 정도에 따라 오만가지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각 종교는 서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한 종교간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각 종교간  싸움의 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각 종교는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며, 각자 자기들의‘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이 시작된다. 오늘날 종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배다른 형제지간이다. 그런데도 혈육끼리 생판 남남보다 더 잔인한 살육전을 벌이고 있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살육전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아프리카 수단, 서아시아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이들의 연장선에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사이에서도 서로 죽이며 싸우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싸움이 그것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이들 두 나라는 하나의 조상, 하나의 나라였다. 그런데 영국이 떠나자 인도인민은 크게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으로 나뉘게 되었고, 서로 추구하는 이상세계가 다르고 각 종교의 문화상의 차이로 반목하더니 급기야 인도 독립의 비폭력 영웅 마하트마 간디까지 죽였고 결국 오늘날처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같은 종교 내부에서도 교주의 말씀이 적힌 책자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나올 수밖에 없고 각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각자 맞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종교단체가 만들어져 파당을 짓게 된다. 이것이 소위 고등종교라고 하는 집단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따라서 교주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이 있는 한  이러한 핵분열은 세상이 끝날 때 까지 계속될 것이다.


각 종교 내부에서의 싸움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내에서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고 있고, 개신교내에서도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며 싸우고 있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수니파니 시아파니 하며 지들 끼리 죽이고 있다. 불교의 경우도 서로 살육전은 벌이지 않더라도 수행방법이나 추구하는 방향에서 견해가 갈리고 서로 다투는 것은 마찬가지다. 소승불교니 대승불교니 하며 크게 나뉘고 대승불교에서는 또다시 천태종, 태고종, 조계종 등으로 나뉘고 같은 종파에서도 묵조선이니, 염불선이니, 화두선이니 하며 서로의 수행방법이 최고라며 양보하지 않는다.


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교라고 하지만 사실 종교라기보다는 유학이라고 하는 견해가 많다. 어쨌든 이 유교도 교주 공자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각 시대에 다가오는 맛이 틀려서 새로 개량된 해석이 나오고 이에 따라 분파가 생겨난다. 주자학이니 성리학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사단칠정론이니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하는 소리를 해대고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별나라, 뜬 구름잡는 얘기로 들리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이 유교의 폐단이 극에 달한 때는 리조선시대이다. 유교 성리학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면 ‘사문난적’이라고 하여 기독교에서처럼 이단으로 지목하여 마녀사냥식의 처단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유교로 조선을 통일하여 자칭‘유교 천국’을 건설하자, 할일이 없어진 유교양반 지배세력은 내부에서 파당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인 서인으로 갈라지고 다시 북인 남인으로 찢어지더니 또 다시 소론 노론으로 핵분열을 거듭했다. 그리고 왕후의 제사와 관련하여 의복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더니 살육전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각 종교 간의 상쟁과 같은 종교내부에서의 핵분열은 교주와 교주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을 절대시 하며 자기 것이 절대 진리라고 우기는 한, 계속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교주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에서는 소위‘하나님(진리)’에 대하여 너무나 자세하게 기록해 놔 서 새로운 하나님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의 운신의 폭이 좁기 때문에 개인에게 맞는 하나님을 찾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기꺼해야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모두 억누르고 두꺼운 책자에 기록된 과거 수 천년전 사람에게나 통하는 하나님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는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다. 이 분이 만약 기독교를 몰랐다면, 아마 예수 이상 가는 중세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나왔을 것이다. 즉, 마호멧과 같은 수준이었음으로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를 탄생시켰으리라 추정해 본다.


이에 대하여 천부경 하나님을 토대로 하는 이 세상 모든 종교의 뿌리, 무당 문화를 보자. 무당 문화에는 교주가 없다. 그리고 교주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도 없다. 그래서 인지 무당 문화만이 현생인류가 지상에 출현한 이래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현대 인류의 정신적 토대가 되고 있다. 천부경이나 삼일신고 그리고 참전계경이라는 한겨레 원전이 전해 오고 있지만, 이것은 교주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해혹복본(解惑複本-마고시대 신인神人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이라는 인간사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짧은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특정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지 않다. 고등종교의 두꺼운 책과 비교하면 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간략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 말씀이 짧으면 짧을수록 개인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이렇기에 한겨레의 하나님과 무당 문화에서는 무한한 상상력이 가능하며, 수천년 전의 어느 특출한 개인에게 임한 하나님만 고집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일어 날 수 없다. 각자 타고난 개성에 따라 무한한 하나님이 현시되는 길이 활짝 열려있다.



(나) 세계 고등종교의 미신성

먼저 미신이란 무엇인가, 나는 미신迷信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미신이란 오늘날 일류 보편적 가치인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믿음이다.


그럼 이른바 고등종교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를 살펴본다.


첫째 기독교다. 기독교의 신관은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우주어디에선가 인간을 내려다본다는 인격신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이 실제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기독교인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이 우상숭배 금지 이야기는 기독교의 두꺼운 책 ‘구약’바이블에 나온다. 유대인들이 금송아지를 섬기자 령이신 유대인의 신이 노하였고 벌을 내리며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령인 자신을 섬기라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초상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미남형으로 그려놓고 모시고, 원래는 있지도 않았던 십자가와 예수의 처참한 십자가 처형장면을 형상화한 십자가 그리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 물건들을 자신들의 신과 거의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우상의 원조 위 금송아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즉 위 금송아지가 십자가나 성모상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이는‘하나님은 령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령이신데 마치 보이는 것처럼 격하시켜 물건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진짜 우상숭배이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기독교 신에 대한 도전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물건은 우상이 아니고 자기 뿌리문화인 단군상이나 장승, 솟대 기타 전통 뿌리 문화적 요소를 우상이니 공중권세 잡은 마귀니 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독교가 사용하는 위 물건들은 기독교 신을 신앙하기위해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겨레 뿌리문화인 단군상이나 장승 등도 역시 한겨레 하나님을 신앙하는 데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똑 같은 논리로 반박할 수 있다. 오히려 장승이나 서낭당 같은 것이 경제적인 면에서 기독교의 거대하고 호화찬란한 성당이나 교회보다 훨씬 비용 절감적이고 신앙적 측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이고 개방적이며 상징 집약적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미신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즉 보편적 가치인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상식에 비추어볼 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미신이다.


둘째, 이슬람교다. 이슬람교의 두꺼운 책 ‘코란’을 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아내를 네 명까지 취할 수 있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돼지에 병균이 많으니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이유라면 사정에 따라 다른 식용 동물도 병균이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돼지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인들은 돼지고기외의 동물은 아주 잘 먹는다. 그리고 돼지고기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아주 예민해 진다. 아내를 네 명까지 가질 수 있다고 한 것은 마호멧이 생존할 당시에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많이 사망하자, 과부가 많아졌고 당시는 여자혼자서는 생존하기가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과부를 최대한 거두게 함으로써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변하여 네 명까지 아내를 취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도가 남아있고 여전히‘알라-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한 분파는 해마다‘아슈라 축제’라고 하는 행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철재로 된 채찍으로 자신의 등짝을 끝임 없이 내려친다. 피범벅이 되어도 내려친다. 이것은 자기분파의 우두머리가 찢겨 죽임을 당한 것을 기념하여 자신들도 그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역시 미신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써 이슬람교도 결국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힌두교다. 힌두교에는 카스트제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계급신분제도인데 4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맨 위의 제1계급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맨 아래 계급인 제4계급은 가장 천한 취급을 받으며 숙명이 되어 살아간다. 제4계급 신분은 ‘불가촉천민’이라고 하여 여타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접촉하기조차 꺼리는 신분이다. 이들은 분명히 제1계급과 똑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 기타 재능과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이러한 계급을 만들 당시에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고도로 발달한 개화된 문명세계에서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


또한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한다. 그래서 소고기는 먹을 수 없다.이런 이유로 인도의 소는 도심의 복잡한 도로에서도 아무데나 똥 싸고 아무데서나 눕고 휘 젖고 다녀도 누구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차와 사람들이 소를 피해서 간다. 인도에서는 매년‘쿰푸멜라’라는 행사가 열리는데 이는 갠지스 강에 자신의 몸을 담그는 일종의 침례식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가 모두 씻겨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또한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갠지스 강물을 보면 물이 산업화 공업화로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오직 위와 같은 염원하나 때문에 기쁘게 몸을 담근다. 이는 미신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힌두교도 미신이다.


넷째, 불교다. 티벳 불교를 보면 불교경전이 적혀있다는 통이 사원에 줄지어있다. 그런데 이것을 돌리면 직접 불교경전을 읽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 신도들은 이 통을 돌린다. 또는 갖고 다니는 것도 있어 그것을 돌리고 다닌다. 눈으로 직접 불교경전을 보지 않고 간단하게 손으로 통을 돌림으로써 읽는 효과가 있다고 가리치고 믿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나무아미타불 관세움 보살 이라고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개신교의 외침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한편, 불교는 전생과 윤회를 이야기한다. 전생에 누구는 무엇이어서 지금 그 연장선에 있다보니 그의 생활이 어떻다고 하는가 하면, 누구는 전생에 신분이 무엇이었다 하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그리고 현생의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나려면 덕을 많이 쌓으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전생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전전생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전생이 있었다면 그 전전생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먼저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전생을 밝히려면 다시 그 전전전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러다 보면 죽을 때 까지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또한 지구의 인구는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수없이 불어나서 수십억이 되었다. 그럼 초창기 인간들의 전생은 무엇이며, 오늘날 수십억 인간의 전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이 아닌 령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이 령으로서의 인간은 독특한 존재로써 처음부터 개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고의든 실수든 낳는 데로 육체의 수에 따라 각각 새로 령이 생겨나는 것인가! 전생을 이야기 하려면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령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물질이나 동물이 선업을 쌓아서 인간으로 진화하여 태어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 물질이나 동물의 령들은 또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이다. 따라서 아무리 교리와 이론을 개발해도 논리적 반박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시 불교도 미신의 정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불교도 이런 점에서는 미신이다.


그럼 천부경 하나님에 뿌리박은 무속(무당 문화)은 미신인가, 교주가 없고 교주의 말씀이 기록된 두꺼운 책이 없는 오늘날 무속(무당문화)의 주요기능은 예언(점占)과 질병치료라고 볼 수 있다.실제로 무巫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의사醫師라는 뜻도 있다. 어쩌면 무당이 현생인류 최초의 의사인지도 모른다. 무속에서는 사기꾼 가짜무당을 제외하곤 분명히 예언이 적중하고 있고, 질병치료도 실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증명으로 그 과정을 검증하기는 힘들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객관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무속을 천박한 미신으로 무시하는 게 오늘날의 풍토지만 사실은 미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물론 무속(무당 문화)이 완벽하다고 보지 않는다. 일정부분 미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속이 고등종교보다 미신적 요소가 적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무속을 완전히 미신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결국, 무당 문화와 함께 하는 천부경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은 끝도 시작도 없어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고 증명도 되지 않는 먼 훗날의 내세來世가 아닌, 지금여기here and now, 이 세상에서 인간과 함께 먹고 마시며 호흡하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세계 모든 인류의 뿌리문화인 무당 문화에서 말하는 소박한 현세중심의 기복 신앙적 흙냄새 나는 하나님이시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하나님의 피가 흐르는 당신, 하늘자손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겸허하고 당당 하라!


다) 천부경의 말씀구조와 신관神觀

현생인류 최고의 말씀, 천부경은 一 始 無 始 一  일시무시일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一 終 無 終 一  일종무종일 하나님으로 맺는다. 이러한 말씀구조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치밀하게 꾸며진 완벽한 구조라고 본다. 이런 구조의 말씀전체를 보면 형상화된 우주와 무형상의 우주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이것은 천부경의 일一(하나님)이 인격신이 되기도 하고 고도의 과학적인 ‘진리’가 되기도 한다. 천부경의 처음과 끝 부분 그리고 다른 몇 구절의 말씀은 인격신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머지 말씀은 비 인격신 냄새가 강하다. 이는 인격신을 모시는 기독교적 신도 될 수 있고, 신 개념이 없는 불교의 ‘진리(붓다)’도 될 수 있는 사상이다. 따라서 천부경 하나님은 다가오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낮아지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하는 만능 하나님이다. 감성이 넘치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하늘 아버지 또는 어머니처럼 인격신으로 다가 올 것이며,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에게는 비 인격신인 ‘진리’리로 다가 올 것이다.


천부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개념의 표현 방식도 기가 막히다. 부정어 무無를 사용한 반어법이다. 이것은 언어로 표현할 때, 가장 오류가 적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하여 가장 실체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표현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 그것이다. 즉 눈,귀,코,혀,몸,마음이 없으니, 이에 대응하는 현상계(색,소리,향기,맛,부딛침,법)도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 반야심경의 경구 절반이상이 이러한 반어적 표현으로 채워지고 있다. 또한 천부경에서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 하나임을 말하는데, 반야심경에서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여 진리의 눈으로 보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고 하여 같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가 천부경의 사상을 알든 모르든 이어받아 되풀이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한편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도道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한다. 규정지을 수 없는 존재가 천부경의 하나님인데, 도덕경에서도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하니 결국 양자는 통한다. 이 도덕경도 현생인류 최고의 경전 천부경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정의한다(신약-요한게시록). 이는 신은 처음이과 끝이라는 소리다. 이러한 신 개념은 틀 지워진 것이며, 반어법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계를 그은 신 개념이다. 그런데 천부경의 하나님은 이러한 신 개념을 포함한 더 넓은 개념이다.


구약 바이블을 공통의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 제한되고 틀 지워진 신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신의 이름이 마치 고유명사처럼 특정 지워져 있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약에서는 이들 삼교의 신의 이름은 ‘야훼’또는 ‘엘로힘’이다. 신을‘갓God’이라고 부르긴 하나, ‘하나님’이라는 범 우주적 칭호와 비교해 볼 때, 한참 아래의 신 개념인 ‘주主Lord’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예수’라는 특정인을 ‘갓God'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역시 신의 이름이 특정 지워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힌두교의 신이 비슈누, 시바 등 여러 신으로 나누어져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에서는 신의 이름을 ‘알라’라고 부른다. 마호멧을 신과 동일시한다는 점과 이슬람교의 일반적인 신 개념인 ‘알라’는 마호멧의 코란을 통해서만 기능한다고 볼 때,‘하나님’이란 개념이 있 다기 보다는  특정화 된 신 개념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불교의 경우 인격적인 신 개념은 없지만 석가(고오타마 싯달다)를 일반적인 신칭으로 볼 수 있는 ‘붓다(부처)’와 동일시 한다는 점에서도 신 개념을 특정지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천부경의 한겨레 하나님은 특정 불특정, 형상 무 형상 모두를 아우르는 신 개념을 가지고 있어 세상의 모든 종교개념의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천부경이야 말로 진정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다.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문명에 이르러서도 고등종교라고 하는 세계적 종교들이 아직도 경직된 신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신적 수준에서 크게 못 벗어나고 있는데, 최고의 하나님개념과 말씀을 우리 한겨레는 1만년전부터 민족의 심훈心訓으로 삼아왔다. 1만년전이라고 하면 얼핏 가늠이 잡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소위 신석기시대로 일컬어지는 시대이다. 미개한 원시인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러한 최고도의 하나님 개념과 사상 그리고 이에 기초한 신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면 천부경이 1만년전의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나타났으니 바로 ‘갑골문자 천부경’이다. 고려시대 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 갑골문자 천부경이 수록 되어 있었고 이것이 2002.9.29.‘일요시사’에 공개 된 바 있다. 이는 고려의 민안부閔安富 문중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갑골문자의 고고학적 유물이 은(상)나라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이 은나라가 동이한겨레가 세운 나라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현재 만주 료녕성에서 발견되는 유물에서도 갑골문자가 은나라보다 1천년이상 앞선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천부경에 대하여는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한국시대부터 입으로 전해오던 것을 신시배달국시대에 이르러 글자 화하여 전해 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서두‘천부경의 유래’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러한 정황은 천부경이 1만여년전 한국시대에서부터 있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철학 음악 복식 체육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서양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서양인들이 산업혁명을 먼저 성공시켜 기계문명을 전 지구에 깔아 놓고 물질적으로 잘 사니 나머지 것도 서양 것이 우월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심지어 정신세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조차도 우리 것 보다는 서양 것이 세련되고 발달한 고등종교라고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 것은 미개한 습속으로 천시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깰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제 서양 중심으로 세뇌되고 틀 지워진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깨버려야 할 당위성이 생겼다. 



다. 일은 우주宇宙

가) 끝도 시작도 없는 우주

일一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또는‘우주’로 해석한다. 이제 천부경의 처음과 마지막 말씀에 우주를 대입하여 풀어본다. 우주는 시작이 있다. 그러나 시작도 없다. 우주는 끝이 있다. 그러나 끝도 없다. 이것이 1만년전 우리 조상님들이 갖고 있던 우주관이요 우주생성론이다. 얼마 전까지 물리학에서는 우주생성론과 관련하여 대폭발(빅뱅)이 대세였다. 우주는 아득한 옛날 어느 시점에서 대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로 인하여 지금도 우주는 계속 팽창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 대폭발설을 접고 우주를 다르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우주관은 시작만 있고 끝은 말하지 않았다. 일직선적인 팽창만 말하고 수렴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우주는 시작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다고 한다.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물리학에서 수많은 물리학적 검증과 가설의 대립을 통해서 이제사 우주의 본질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부경은 이미 1만년전에 우주의 본질에 대하여 단 열마디로 정확하게 꿰뚫어 밝히고 있다. 오히려 현대물리학에서 밝혀낸 것 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하게 우주의 본질을 분석하여 밝혀내고 있다.


      一 始 無 始 一  일시무시일, 一 終 無 終 一  일종무종일


 이것은 현대문명의 복잡한 계산과정과 기나긴 세월을 거쳐서 알아낸 것이 아니다. 귀납적인 계산과 논리를 통하여 알아낸 게 아니다. 딱 보고 알아낸 것이다. 신선神仙들이 넘쳐나던 그 시대의 직관이다. 이러한 우주의 본질을 밝혀준 실증적 증거는 우리 한겨레의 세계최초 최고의 천문기술이다. 북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용덕리 별자리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석판 천문도로 밝혀졌다.


더구나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경북 울주의 천전리 바위의 동심원과 함안의 도항리 도동 고인돌위에 동심원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이 태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소용돌이치는 천체를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 이것은 19세기 유명한 화가 고흐의<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이 동심원 암각화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고흐가 “나는 종교에 대해 처절한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별을 그리러 밖으로 나간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에서 우주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할 때, 나선형의 우주를 말한다. 이 모양은 삼태극 문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개의 태극무늬가 꼬리를 물고 끝임 없이 돌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소용돌이치는 나선형 우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소위 최첨단을 달린다는 현대 서구기계물질문명이 요새 와서 밝혀내는 우주의 모양을 우리 한겨레는 이미 1만여년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 천문왕국과 무당 문화

우리 한겨레는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하면서부터 하늘자손으로써 하늘(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셔왔다. 그래서 하늘을 끝임 없이 관찰하고 하늘을 향하여 끝임 없이 제사를 지내왔다. 그리고  끝임 없이 춤과 노래로 하늘(하나님)을 기쁘게 하여왔다.


첫째, 하늘을 관찰하는 것은 고인돌 천문도를 거치며 고도로 발달된 천문학으로 나타났다. 한겨레는 가히 천문왕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선 무당이 무악을 하면서 사용하는 명두明斗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천부삼인(칼, 북 또는 방울, 거울) 이라고 하는 구리거울로써 여기에 별자리를 새겨 놓았다. 또한 신선도의 선인들도 천문에 능통하였다는 것이 자부선인紫府仙人라는 신선의 이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자부紫府라는 말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한겨레가 천문을 현생인류 최초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물증이다.


그래서인지 한겨레의 삶의 구석구석엔 천문으로 가득하다. 농사지을 때도 별자리를 보고 하였고, 국악인 악학궤범에도 천문적 요소를 도입하여 율과 려를 정하였다. 또한 옷자와 떡살, 왕검에도 별자리를 새겼다. 대금에도 구멍을 칠성공으로 하였고, 악기인 월금도 천문인 달을 본 떳으며 왕실에서 사용하던 연적에도 별자리를 그렸으며, 전통 윳놀이도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심지어 죽어서도 북두칠성를 상징하는 칠성판에 누웠다. 불교사찰 전각 위쪽에 칠성각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날(일)로 정하고, 달이 차고 기움을 기준으로 달(월)을 정하였다. 그리고 해의 고도변화에 따른 계절의 반복을 기준으로 해(년)을 삼았다. 또한 목성의 공전주기(목성이 태양을 한 바뀌 도는 기간) 12년을 따라서 십이지와 12개띠를 정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각 구간마다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한해를 24절기로 나누어 절기마다 수많은 세시풍습을 지냈다.


한겨레의 고대 풍습과 관련하여 쌍어문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고대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던 문화다. 그런데 이 쌍어문이 부적의 의미 이외에, 우주의 북극이나 은하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장자의 말 중에는 ‘곤이라는 큰 물고기가 우주의 북극에 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곤에서 ‘고사’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천문문화가 얼마나 깊이 우리의 삶속에 파고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단군조선의 3연방국 중에 중심 국인 진한의 진辰도 별을 뜻한다. 최근에는 새로 발행된 한국의 1만원짜리 지폐에다 고구려 천문도 천상열차분야도를 새겨 넣었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위해 정책으로 그리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잠재의속의 하늘을 사랑하는 하늘자손의 강한 유전자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 외에 천문관련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결국 우리 한겨레는 태어나면서부터 별의 정기를 받아 이 세상에 나왔고 천체와 숨쉬며 살다가 죽을 때도 별과 함께 하며 하늘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천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미 한겨레가 서기전부터 지구가 둥글고 해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구태여 지동설이니 하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서양인들이 지들의 관점에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게 코페르니쿠스라고 떠들어 대지만 우리 한겨레는 이미 서양보다 수 천년전에 지동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자손, 한겨레는 이러한 고도의 천문문화를 중공 지나화하족과 일본에게 전해 주어 저들로 하여금 야만에서 문명인으로 깨어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저들은 거꾸로 우리가 저들의 천문을 베끼거나 훔쳐온 것으로 조작날조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세력도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둘째,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인돌과 피라미드 및 제천행사와 고사문화로 나타났다. 한겨레는 제사문화를 가지고 세계로 배달 나가면서 높은 곳에서는 작은 제단을 쌓았고 드넓은 평지에서는 거대한 피라미드 제단을 쌓아 하늘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한겨레를 낳아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였다. 이 제사를 지낼 때 절을 하는데 단군세기에는 삼륙구배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한겨레 전통 절 의례로써 한겨레 나라인 청나라의 황실에서는 칸(황제)에게 례를 드릴때, 특히 규범으로 지켜왔다. 영국의 대사 메카트니가 칸을 알현할 때, 이 규범을 요구하였으며, 리조인조가 서울 송파구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 칸에게 항복을 할도 이 삼륙구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군세기에 삼륙구배를 하는 제천행사가 기록되어 있다면 그 제사장은 누구였을까, 단군조선시대의 제사장은 당연히 단군이라는 왕이었다.


그런데 이 단군이 동이한겨레의 고대풍습인 령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편두를 하고 고깔을 쓴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깔은 현재 무당이 굿을 할 때 머리에 쓰는 뾰족한 모자로써 하늘 하나님과 교신 하는 송수신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단군檀君은 사실 무당巫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무당이라는 글자에 주목해 보자.


현재 무당을 참글眞書(이른바 한자)로는 巫堂이라고 하여 무인의 집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무당의 원래 이름은 단군의 단에서 유래한 무단이 아닌가 한다. 즉 무단(巫또는 巫檀)으로 보는 것이다. 먼저, 무단巫을 살펴본다. 실제로 무단의 단壇은 무당의 당堂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단壇은 흙을 쌓아올린 단이라는 뜻이 있어 옛날 제천행사나 고사를 지내는 제사단 임을 알 수 있다. 무당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당은 원래는 무단壇으로 불려졌음이 분명하다.


한편 무당을 무단巫으로 보더라도 제사장과 이 제사장이 신과 교통하는 제천행사와 관련이 있음을 발견한다. 단檀단군인데, 이 단檀자는 영어로 birch로써 자작나무이며 옥편을 찾아보면 박달나무라고 나온다. 그런데 사실은 자작나무나 박달나무는 같은 나무다. 자작나무를 흰색birch(자작나무)라고 하고 박달나무는 그냥 birch(자작나무)라고 한다. 즉 이 두 나무는 같은 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작나무는 신령스런 나무인 신목神木으로써 북방시베리아 무당 문화에서 제천행사나 굿을 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이며 북방 한겨레가 제일 신성시 하는 나무다. 그리고 거기서도 우리의 서낭당(성황당)의 나무와 같은 기능을 한다. 또한 강릉단오제에서 보면 신이 내린 나무를 숲속에서 가져와 모시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도 역시 신목을 뜻한다.


 신정神政일치 또는 제정祭政일치 시대에 단군(무당)이 국가의 최고지도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신)과 교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다스렸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볼 때, 오늘날 무당은 처음에 무단으로 불렸고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음하기 편한 ‘무당’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따라서 무당은 원래 무단이었고 단군은 무단이었다. 한단고기에는 단(단군)들이 틈만 나면 하늘에 제사를 하는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이것은 단군이 무단(무당)이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다.


참고로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birch버취에는 회초리로 때려 벌준다는 뜻도 있다. 이것도 위 무당의 신 또는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극동아시아 한겨레는 예로부터 자식이 잘못하면 싸리나무로 종아리를 때려 벌을 주었는데 이 싸리나무에도 깊은 상징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싸리나무에는 악귀를 퇴치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벌을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식을 잘못되게 하는 악귀를 자식에게서 내쫓는 신성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싸리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울타리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악귀가 싫어하는 나무를 사용함 으로써 악귀의 접근을 막겠다는 뜻이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싸리비찌락이 잘 쓸린다. 이것도 악귀를 쓸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따라서 벌은 원래 형벌이 아니라 더 잘되라고 하는 교화수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권리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체벌행위는 이 하나님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악귀를 쫓아내는 상징적인 수준에서 그쳐야 하고 이는 사랑의 매일 수밖에 없다. 결코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지 오늘날 국가에서도 형무소가 아닌 교도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형벌적인 면보다는 교화 개선하는 데에 더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교도행정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겨레는 우리 자신과 모든 사물에 깊은 상징을 새겨놓고 살았던 종교적인 겨레요, 고도의 령적인 겨레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영어birch버취에는 회초리로 벌준다는 뜻이 있고 이는 우리 한겨레의 벌줘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match맷취맞춰에서 유래한다고 하듯이 말이다. 이외에 우리말로 영어를 풀이할 수 있는 낱말은 굉장히 많다. graphic그래픽그림에서, many매니많이에서, why와이에서, jeopardy제퍼디자빠지다에서, sex섹스색色에서, terror때려에서 왔다고 보며, go고우 가우에서, geography지오그래피표면을 그려서 다룬다는 의미의 지리학과 소리가 닮아 있다. 이러한 례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자세한 것은 따로 논문형식으로 정리하여 참역사동아리 다음까페 삼태극의 ‘말.언어방’에 올리고자 한다.


한편 제사는 제祭와 사祀로 나뉘는데 제는 하늘의 신에게 하는 것이고, 사는 땅의 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천행사는 제이고 고사는 사라고 한다. 대한제국시절에 와서는 국체를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으로 바꾸면서 하늘에 제를 지내겠다고 하며 제천단인 원구단과 황궁우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전에는 중공 화하족 명나라를 조상으로 모시며 궁궐에서 명나라 위패에 제사지내며 제천행사는 천자국인 명나라만 할 수 있다며 감히 하지 못하였다. 대신에 땅의 곡식의 신에게만 사를 지냈는데 이게 종로에 남아있는 사직단이다. 네모꼴을 하고 있는데 리조선의 왕들은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에게만 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현재는 전주이씨종친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사직대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사와 관련하여 제천행사의 제단의 원형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둥근 원구단으로 본다. 실제로 한국 문명으로 알려진 내몽골 홍산지역의 홍산문명권 유적에서 직경이 1백미터가 넘는 둥근 제천단으로 추정되는 제단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늘에 지내는 제는 제천의식으로 불리며 그 제단은 둥근 원구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땅에 지내는 사는 고사로써 그 단은 네모꼴의 방구단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문화는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주로 네모꼴을 기본으로 하는 피라미드 방구단(각종 신전)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반도 한겨레도 네모꼴의 상을 차리는 고사가 하늘과 땅 모든 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오늘날 민간에서 통일된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우리 반도 한겨레는 원구단과 방구단을 모두 계승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위패를 모셨다는 황궁우를 보면 방구단보다는 둥근 원구단에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겨레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자녀라는 기록이 독단(채옹이 씀)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는 하늘신과 땅의 신에게 각각 제와 사를 지내는 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라고 본다. 이렇게 원구단과 방구단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반도한겨레가 하늘자손이고 세계 모든 겨레의 종가집으로 그 원형을 보존해오는 것으로 파악하면 될 것 같다.


셋째, 춤과 노래라는 풍류(굿)는 원래 무당 문화의 중심구성요소이다. 우리 한겨레는 하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찬양하기위한 방편으로 춤과 노래를 이용해 왔다. 이는 굿판 속에 종합예술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였기에 한겨레의 말에도 절대적인 음악성이 있다고 까지 한다. 말까지도 노래로 하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글을 보더라도 눈으로만 보고 의미 파악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노래하는 무당, 가수 송창식-서기2007.1.31. kbs2 낭독의 발견 중에서)


무당 문화는 이 풍류를 포함하여 위에서 열거한 천문과 제천행사 및 고사문화를 다 포함한다. 현생인류가 나타나게 된 강력한 토대가 사실은 무당 문화다. 무당 문화의 원형인 주술문화가 60~70만년전 한반도에서 존재 했다는 것이 공주 석장리 전기 구석기 유물(동물석상, 선각화)을 통해서 밝혀졌고, 이 시대 사람들이 홍적세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열어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참고로 빙하기에는 지상의 모든 생물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유난히 다습하고 따듯한 기후가 지속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나타난 인류가 진화하여 한겨레의 직접적인 조상이자 현생인류(슬기슬기 사람=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오늘날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가 되었고 이들이 무당 문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무인지경인  전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이 무당 문화를 심었다. 그리고 무당 문화는 수많은 문명(불,도구,글자 등을 요소로 하며 세계주요 문명은 황하,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으로 알려짐)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분화된 세계 민족들은 무당 문화 속에서 미개와 야만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무당 문화가 오늘날 모든 민족과 국가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는 세계 각국이 사용하는 국기색깔에서도 보인다. 무당 문화의 상징인 오방령기색(빨강,파랑, 노랑,하양,검정)에서 세계 각국의 국기는 자유로울 수 없다. 가로줄로 국기를 만들든 새로 줄로 국기를 만들든 어떤 상징물로 국기를 만들든 그 국기 색깔은 오방령기색 범위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세계 대다수 국가의 국기가 색줄로 되어 있는데 무당의 옷소매에 그려진 색동 줄에서 새끼 쳐 나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왜 일까! 결국 이 한겨레 문화는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의 뿌리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천부경을 탄생시킨 천문학과 무당 문화를 바탕으로 하늘우주와 한겨레의 삶은 둘이 아닌 하나였고 그 결과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자손임을 알려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기독교처럼 단순히 선택받은 선민選民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통 자녀인 천손민족(天民)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서기2005.에는 이러한 사실을 세계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가 강릉단오제를 세계주요무형문화 걸작으로 등록한 것이다. 강릉단오제는 현생인류의 뿌리문화인 무당 문화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겨레 한국이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라고 사실상 인정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겨레는 천부경을 통하여 1만년전에 이미 이 우주의 실체를 밝혀놓고 있었던 것이다.


마. 일은 물질의 최소단위,‘의식’

가)현대물리학의 물질의 최소단위와 천부경

천부경은 일을 처음이라고 하면서도 끝이라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10은 1일이 열 번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100은 1일이 1백번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만물은 어떤 최소단위가 있고 이것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기계물질문명은 서양의 물리학에서 출발하였다. 서양 근대물리학은 뉴톤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작 뉴톤은 서기 1687.<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라는 책을 펴냄으로써, 중세기독교 세계의 사슬을 끊어내고 산업혁명을 여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뉴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주만물을 이루는 최소단위는 물질 즉 질량을 가지는 입자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은 질량이 에너지와 같다고 선언한다(E=mc제곱). 그리고  20세기 말에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최소단위를 ‘쿼크’라고 이름 지었다.

 

옛날에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소립자라고 하여 어떤 고체덩어리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쿼크는 소립자라는 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뭔가 움직이는 유동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입자론이 힘을 잃고 파동이론으로 굳혀지고 있다. 즉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끝에 까지 가 보았더니 양파껍질을 죄다 까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 형태를 찾아볼 수 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무엇인가 파동과 같은 것만이 남는 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로 꽉차있는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에 속하는 의식에 가깝다.


불교에서는 공空을 말한다. 그런데 이 공은 액면 그대로 물리적인 텅 빈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것 같으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로 꽉 찬 공을 뜻한다. 천부경의 일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의식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기氣라고 해도 좋다. 이 의식이 우주만물을 이루는 처음이다. 즉 최소단위라고 한다. 결국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은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쿼크’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며, 동양철학과 종교에서 말하는 ‘기’라는 것이다.


이 의식은 온 우주에 꽉차있고 이것으로 우주만물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라는 무형의 것이 유형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계를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의식이다. 그래서 우주만물이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주만물을 생명체라고 한다. 무생물로 분류하는 바위나 돌조차도 의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무생물이 의식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일화는 많다. 예수가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고 고요 하라’고 하자 곧 잠잠해졌다는 이야기, 중세 카톨릭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성 프란시스코가 바위와 대화를 하였고 없던 물을 생기게 하였다는 이야기, 우리의 경우 옛날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다녔던 것으로 그리는 만화이야기, 불교의 고승들이 불속으로 걸어 다녀도 전혀 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은 사람과 무생물의 의식의 주파수가 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의식의 수준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던 존재들이라, 필요에 따라 무생물에게도 그들의 수준으로 의식을 바꾸어 동조현상을 일으켜 무생물조차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던 것이다. 소위 염력(念力)으로 오늘날도 가끔식 초능력이라는 것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은 초능력을 행사하는 주체와 객체사이에 의식의 동조현상을 이용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사례는 모두 우주만물은 살아있는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해 준다.


앞서 이 의식은 물리학으로는 파동이라고 했다. 파동은 운동성을 갖는다. 우리가 어떤 일에 지나치게 신경(마음)을 쓰면 피곤해진다. 이것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고 생각이 운동성(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운동성은 물리적 차원의 존재이다. 이는 생각(의식)이 얼마든지 물질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파동의 성질을 안다면, 평소에 우리가 어떠한 마음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당장 자신과 상관없는 일 같아도 파동으로 온 우주는 이어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가 의식 무의식 가운데 쏘아대는 온갖 종류의 사념파는 파동을 이루어 순식간에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가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천부경의 하나님관과 우주론에 의하면 의식동조를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특별난 게 아니다. 물질계와 정신세계(의식계)를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인식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의식의 동조를 통하여 자연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조달하였다고 본다(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친화적 문명). 그렇기에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외부 지향적 물질문명을 크게 발달시킬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 기계물질문명이 만들어낸 비행기나 자동차라는 이차적 운송수단이나 전화나 기타 통신수단은 사실상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서양은 고대 거대 인공시설물이 많은 반면에 동양 특히 극동아시아의 한겨레는 대규모 인공 시설물을 갖춘 도시국가가 드물다. 그리고 이런 것이 없어도 당시 사람들의 삶은 충분히 행복했고 오늘날 물질에 종속되어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 기계문명인들보다 더 행복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는 것을 알고 싶으면 아프리카나 북극권이나 남미 아마존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종족의 삶을 보면 된다. 이들은 대부분 현대 기계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의 의식수준을 보면 현대인의 의식수준 못지않게 높다. 모양만 달랐지 현대인에게 있는 기본적 뿌리문화도 다 있다.

 

또한 인간생존에 필요한 것도 다 갖추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기계물질문명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분노, 긴장, 초조, 피곤, 갈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천진난만에 가깝다. 그리고 소수부족은 아니지만, 기계물질문명이 덜 발전된 나라들이 평균적으로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례를 들어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대인은 자연을 비롯한 우주만물을 자신과 분리하여 주체와 객체로 설정해 놓고 객체인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반면에, 이들 소수부족들은 자연을 개발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어우러지며 상생하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소수종족에게 소위 정령신앙이 있다는 게 이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현대인들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 필요한 만큼만 얻고 나머지는 다른 생명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여기서 이 소수종족들이 천부경의 하나님 (一)사상을 실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이 소수종족들은 사실은 한반도에서 발원한 현생인류의 후손들이고 천부경사상을 체화한 우리와 한 갈래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문화인 무당 문화가 우리의 것과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소수종족들이 천부경의 하나님 사상을 실천해 오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이 실천하는 삶의 방식은  서양문명처럼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격 착취 하는 일방적 삶의 구조가 아닌, 너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라고 인식하는 문명이다.


 천부경 구조자체가 하나로 시작하여 하나로 끝을 맺는다. 물론 그 사이에 무수한 일들이 생겨나고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사라진다. 그러나 처음과 같이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상생과 조화의 상징인 하나(一)로 돌아온다. 이 소수종족들이 삶의 지표로 삼는 천부경의 한사상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서양기계문명의 일방통행식 1차원적 삶이 아니라 수렴이 가능한 다차원적인 삶을 추구한다.


오늘날 일방통행식 공격착취구조의 문명을 앞장서서 퍼뜨리는 세력은 미제다. 이제는 소위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것을 내세워 결과적으로 약자인 상대방을 거덜 내고 있다. 그렇다면 서양의 물질문명으로 무장한 현대인과 이 소수부족 중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가, 의식수준은 현대인이 오히려 저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생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는 무자비한 현대기계문명, 외부 지향적, 물질지향적인 이러한 문명은 하나님 또는 삶의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는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오늘날 광우병과 조류독감 등 희귀질병의 발생으로 인간은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걸리면 죽는다. 그런데 이러한 병이 생기는 원인을 찾아보면 인간의 무지막지한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량생산체제의 현대기계문명답게 고기도 대량생산을 강요하고 이에 수요를 맞추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에 이르렀다. 소는 초식동물이라서 풀을 먹고 자라야 된다. 또한 최소한의 쾌적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닭 등의 가금류도 마찬가지다. 이게 자연계 곧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어 기르다가는 대량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거덜 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수익성이 없어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부족한 풀 사료 대신 고기사료를 멕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쾌적한 환경조성보다는 최소한의 운신만 허용하는 빽빽하게 틀져진 닭장식 사육환경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육환경이라면 아무리 강한 동물이라도 엄청나게 열 받아(스트레스) 면역력이 떨어지고 결국 미치거나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소 한 마리 키워내는데 들어가는 풀이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목초지를 개간하면서 뒤따르는 것은 자연파괴다.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하기 전에는 동물과 목초지의 균형이 맞아 자연파괴는 잃어나지 않았다.


결국 현대인은 자신의 미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결과적으로 독극물을 먹게 되었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천부경의 하나님 한사상, 한문명을 떠난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양의 외부 지향적 물질중심의 이기적 문명은 특히 우리 한겨레에게 지독한 독극물로 작용하고 있다. 하늘자손이라는 풍요로운 정신을 상실케 하였고 대신에 쪼들리고 불안하고 초조한 거지 노예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명품족, 성형열풍, 출산기피현상, 농촌기피현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래 한겨레의 인생관은 이런 외부(외모)지향적 물질중심의 이기적 노예문화가 아니었다.


우리 한겨레의 삶의 초점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가치관 보다는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과 다시 하나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이를 위해 춤과 노래 등 풍류 무당 문화와 신선도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각 시대에 따라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풍류관련 기록과 무당 문화, 신선도 관련 기록이 이것을 말해준다. 풍류를 풍류도라고도 부르는데 이때에는 신선도와 연결되며 춤과 노래는 제천행사와도 관련되고 이때는 제사장(사제)인 무당으로 이어져 결국 무당 문화가 된다.


제천행사(굿)는 국중대회라고 하는데, 전 국가적 대사여서 각 시대별로 한겨레 나라에서 행했던 제천행사 이름이 전해지기 까지 한다. 단군조선의 무천(수두제천), 마한의 소도(제천,천군), 부여의 영고, 고구려,발해의 동맹, 신라의 화랑(도천,제천,영성제), 백제의 교천郊天, 가야의 계략, 고려의 팔관회, 요(거란)의 요천繞天이 그것이다.


제천행사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게 춤과 노래다. 이는 삼신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로 정의된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신시개천, 배달국시대에)무리가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는 기록이 이것을 뒷받침 한다. 또한 단군세기에는 제16대 단군 위나(서기전1610~1553)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원년은 단기724이다. 단기 751년 구한(九桓)의 여러 칸(한,Khan)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께 제사를 드렸는데 안파견 한인, 거발한 한웅, 치우천황, 단군한배검의 신주도 함께 모셨다. 닷새 동안 백성들과 더불어 잔치를 크게 벌였다. 불을 밝혀 밤을 지세며 천부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신명나게 벌였다.’


 결국 천부경이 말하는 인생관도 하나님(정신)이 먼저지 물질(외모)이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삼극으로 나누어져도 그 본체는 없어지지 않는 다는 말씀이 그것이다(析 三 極 無 盡 本석삼극 무진본). 삼극이 무수히 변하는 삼라만상을 표현한다고 할 때, 이는 물질외모일 수밖에 없고 이것도 무수하게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바다에서 무수한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파도조각은 찰라에 나타났다가 찰라에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외모도 개인에게는 긴 세월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화살 같은 세월이라고 하듯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 시간이 찰라와 같다고 한다.


따라서 어차피 흙으로 살아질 외모 몸에 집착하여 목숨 걸기보다는 이 몸, 외모를 인식하는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내면여행을 떠나다 보면, 외모에 쏠려있는 생활에서 좀 자유롭게 되리라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화두를 하나 던지면, 외모를 인식한다는 것은 외모가 내가 아니라는 것이며, 분명 인식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누구인가!


천부경이 외모(물질)지상주의 보다는 변하지 않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홍익인간의 다른 측면인 실사구시 주인정신과도 통한다. 사실 성형수술, 명품치장을 안 해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오히려 분수를 모르는 지출로 인해 실제 삶이 고달파 질 수 있고, 이는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또한 자주적인 삶이 아닌 남의 관심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 주인정신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더불어, 꽉 끼는 옷, 뾰족구두, 무릎위로 올라가는 아주짧은 치마, 미용을 위한 화장, 심지어 가슴덮개(브라)도 실사구시에 어긋난다. 건강(웰빙)측면에서 볼 때, 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역사를 볼 때, 실사구시 주인정신으로 충만한 나라나 민족이 장수하였고 강성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실사구시가 몸에 밴 나라라고 볼 수 있겠다.


나) 서양 기계물질문명의 비극

한편, 외부 지향적 기계물질문명의 산실인 서양의 종교와 문화는 신의 섭리를 말하고 신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서양종교의 대표주자인 기독교의 바이블에 기초한 정복과 무차별적 개발로 인해 이미 신의 변형인 자연이 파괴 오염됨으로써 그런 소리는 파탄을 맞이했다고 할 것이다. 환경파괴와 이로 인한 지진, 해일, 기상이변, 치료가 불가능한 기괴한 질병의 발생 등의 재앙은 기독교 경전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기계문명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온 서양문명 탓이다.


‘자연을 정복하라(subdue earth. subdue는 그것을 내리 짓눌러 뭉개버리라는 뜻으로 풀이됨 창세기1장 28절), 번성하라, 구하라, 두드려라, 그리하면 줄 것이다. 열릴 것이다.’라는 게 기독교 경전의 주요골자다.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기독교사상에 바탕을 둔 서양문명은 첨단을 달리는 기계물질문명의 성과를 자랑한다.


 그러나 땅이 한번 흔들어 버리면 하늘을 찌를 듯한 문명의 상징 고층건물은 순식간에 재로 변한다. 생명을 더 연장시키고 잘 보호해 줄 것 같은 서양의 기계물질문명은 이런 자연재앙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오히려 원시인이라고 비하하는 밀림속의 소수종족이 이런 자연재앙 앞에서 더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을 잔인하게 정복, 착취한 물질로 고층건물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자연재앙이 일어나도 수많은 인명피해나 질병을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자연)는 기상이변과 지구단층의 활성화를 통해 기독교사상에 기초한 서양의 물질문명에 경고를 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서기2040년경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아버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웬만한 저지대 나라는 모두 수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는 캐나다 북극권에서 서울 여의도 면적 8배 크기의 빙하가 떨어져 나가 캐나다의 지도를 바꾸었다. 현재 이미 해수면이 높아져 남태평양의 한 섬나라는 물에 잠겨 사라져 가고 있다. 그 지역 나라 사람들은 인근 나라로 피신하고 있다.


올해 서기2007.에 들어서도 벌써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독일은 서기2007.1.에는 기상이변으로 겨울이 사라졌다고 할 정도이다. 서기2007.2.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엄청난 폭우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한반도에서도 겨울 같지 않은 날씨와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서기 2007.1.유엔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IPCC)는 지구를 살릴 시간은 앞으로 10년 남았다고 한다.


 이 시기를 넘기면 이산화탄소를 마심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데 기여를 한 나무들조차도 이산화탄소가 포화상태가 되어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한다. 또한 바다도 이산화탄소 흡수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 되고 이로 인하여 북극의 얼음이 녹고 지표면이 건조해 짐에 따라 적도의 여러 나라들은 모조리 물에 잠기고 수억명이 대륙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으며 지구 곳곳에서는 기상이변으로 폭염과 화재 폭풍으로 시달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들이 계속 지구를 파괴하고 오염시킨다면 지구는 불가피하게 자정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징조가 최근에 세계각지에서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대규모 지진과 화산활동이다. 지진과 화산활동이야 말로 파괴되고 오염된 지구를 정화시키는 최고의 치료제다. 드럽혀지고 지나치게 쌓여있는 것들을 모조리 깊은 땅속에 묻어버리고 녹여버리면 지구는 다시 깨끗해진다는 것을 지구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지구라는 물질도 결국 의식인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상징되는 서구기계문명을 일으킨 서양인들은 오로지 오관에 의지하여 외부 지향적 문화와 가치관을 중시하며,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물질계(현상계)에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오관에 기초하여 시간과 공간적 제약을 받는 세계를 끝없이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이런 외부 지향적 서구기계문명은 무엇인가 끝임 없이 일을 벌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세계의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성장률 몇 할에 온 신경을 쓰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그렇기에 자전거 패달을 끝임 없이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명은 피곤하며 진정한 휴식을 모르는 불행한 문명이다. 이 문명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강요함으로써 빠르게 지구를 고갈 시켜나간다.


그런데 미제라는 거대한 단일국가가 이러한 절망적 문명을 선도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미제는 전 세계 오염원인 일(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할을 내 뿜고 있다. 통제능력과 자정능력을 상실한 기계문명은 지구를 다 갉아먹어 가며 이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열렬한 분석적 탐구정신이 하늘에 가 닿았는지, 물질계(현상계=상대계)의 끝에서 비 물질계(절대계=의식계)를 발견하는 쾌거 아닌 쾌거를 이룩하였다. 앞서 말한 파동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폭주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외부 지향적 기계문명이 멈추지 않는 한 이러한 귀한 발견도 그 빛을 잃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조상님들은 천부경을 통하여 물질의 최소단위까지 이미 밝혀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소단위는 고체덩어리가 아닌 유동체로써의 ‘파동’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의식’이다. 또한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一(하나님)은 의식(파동)이면서 동시에 가시적인 물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도 천부경의 하나님은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인격적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물리학이 이제사 밝혀내는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1만년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원시시대를 살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인 것이다. 이 수준은 그리스도의식이나 부처의식과 동일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신선들이 흔한 세상이었고 이들 신선들이 그리스도나 부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의 본질을 꽤 뚫고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천부경으로 전해져 온 것이라 하겠다.


 참고로 그리스도나 부처는 어느 특정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의식수준을 가진 존재를 말하며,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건너간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역사발전단계에 대하여 도구사용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석기시대, 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 짓는 서양식 잣대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다) 파멸로 치닫는 인류를 살릴 겨레는 한반도 한겨레

이제 외부 지향적 물질중심의 현대서구문명으로는 인류의 미래는 없다. 파멸로 치닫는 서구문명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려면, 현재의 외부 지향적 물질 중심에서 정신중심으로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물질계는 서양문명으로 인하여 충분히 발전하였으니 이제 이를 통제하고 제어할 정신계의 힘을 길러야 한다. 정신이 중심이고 물질은 부가 될 때, 모든 게 제자리를 잡고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해결의 실마리는 천부경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 그리고 멸망 속으로 치닫는 세상을 구원할 겨레는 한겨레가 될 것으로 믿는다. 한겨레는 원래 정신문명이 중심이었고 물질문명은 이 정신문명에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파멸로 치닫는 인류를 살리려면 우선 우리의 경제체제부터 서서히 바꾸어 나가야 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체제를 완화시키고 현재의 있는 부로도 충분히 생물학적 생존을 뛰어넘어 정상적인 고급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음으로 전 생민의 조화롭고 고른 부의 분배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장 우선주의가 만병통치약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성장하고 아무리 떡을 키워놔도 현재의 경제체제로는 가진자는 더 많이 갖고 없는 자는 더욱 쪼들리는 국면이 더욱 고착될 것이다.


금 모으기 운동, 2002. 월드컵 때의 단결심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늘자손만의 소질이다. 여기다가 세계에 대하여 비교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첨단 정보통신기술 등의 문명의 이기를 잘만 활용하면 현재의 부만으로도 반도한겨레는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물질의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행복지수도 최고에 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하면서 국가 전체구조를 자연조화, 환경친화적 상생구조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반도 한겨레가 갖고 있는 첨단기술로 충분히 가능하다. 이게 성공하면 세계로 전파시켜 결국 전 세계를 한문명으로 다시 깔아 지구를 구하는 초석을 다질 수 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한지 불과 반세기만에 기계문명을 전 세계에 뿌려 놓은 것을 보더라도 일단 성공만 하면 영국 보다 더 빠른 기간 안에 뿌려질 것으로 본다.



(2) 析 三 極 無 盡 本  석삼극 무진본

   끝없이 나뉘어도 본디 모습은 다함이 없다


위 말씀 중에 삼三셋과 본本에 주목한다. 여기 삼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부경 첫 번째 말씀인 일시무시일에서 마지막 일一이 하나님(우주)이니 이것을 이어받아 하나님은 3극으로 나누어진다고 풀이한다. 3극은 삼태극이라고도 해석이 되는데 빨강 파랑 노랑으로 이루어진 삼색 자체에 주목해 보면 이는 우주삼라만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무수한 현상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누어져 현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체(본질) 본래의 속성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무진본 無盡本). 여기서 서양물리학의 에너지 보존법칙을 보는 것 같다. 에너지는 사용하면 사라지고 없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했을 뿐이라는 것이 그 유명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론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미 천부경에 다 나와 있다. 아무리 쓰고 써도 여전히 그대로인 하나님, 기, 에너지라고 한다. 천부경에 현시되는 하나님, 그이가 지금 당신, 하늘자손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일석 삼극은 하나가 셋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고 셋은 삼태극의 각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삼태극의 각 색깔은 각기 고유한 특성과 개성을 살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각자 고유의 영역을 파괴하거나 침탈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은 한분(원-일태극)이시나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은 무수하고 다양하다는 말이다.


 구약 바이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통한다. 그리고 노아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그리고 신약의 예수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데 이것도 역시 삼태극과 통하는 개성 넘치는 다양한 하나님의 현시를 말하는 것이다. 즉 각 사람의 그릇에 맞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한겨레의 천부경 무당 문화와 한가지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무속에서도 신은 여럿으로 나타난다. 산신, 조왕신, 최영장군신, 미륵신 등이 그것이다. 다만, 기독교계통의 신은 인물 중심으로 나타나지만 한국 한겨레의 하나님은 인물뿐만 아니라 장소적으로도 나타나신다. 본체는 하나이신 하나님이 현시되는 모습은 천차만별임을 이처럼 동서고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명백한 상식이다.


그런데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유대인에게서 파생된 종교들은 과거 수천년전의 한 개인에게 현시된 신만이 진짜라며 강요한다. 특히 기독교 경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기독교는 이것을 이론화 교리화한 박제된 신으로 만들어 이 인공적 신으로 세계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파괴하며 그 인공 신으로 전 세계를 통일하고자 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를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하면 복음적인 세상으로 변하여 천국 지상낙원이 도래 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삼태극의 각 색깔이 각기 고유한 특성과 개성을 살려주고 각자 고유의 영역을 파괴하거나 침탈하지 않는 것을 뜻 한다’는 하나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이게 완전히 잘못되었고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양인들의 중세시대가 이것을 말해 준다. 당시는 분명히 전 유럽이 기독교로 통일되었다. 이 들의 믿음대로 라면 천국 지상낙원이 도래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다. 콜럼버스가 신항로 개척을 하기 전이라서 그런지 더 이상 전도할 땅을 찾지 못하자 자기들 끼리 잡아먹으며 변태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마녀사냥이니,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마리 앉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 고급 논쟁거리로 된 것, 천국 가는 표나 면제부를 돈 받고 파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서양중세시대는 흔히 말하듯이 정신적 암흑기였다. 결국 이런 압제에 시달리다 못해 그 기독교 지상낙원 천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소위‘종교개혁’이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세력인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오늘날에는 또 다른 기독교 왕국을 꿈꾸며 전 세계 정복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다양하고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사탄 마귀, 공중권세 잡은 마귀, 우상숭배라고 하며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서양 중세시대의 기독교와 하나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제사를 금하고 장승이나 단군 상을 파괴하고 심지어 판소리 등 전통무형 문화까지도 이것이 무당 문화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공중권세잡은 마귀 짓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따진 다면 한국의 전통무용, 민요, 국악, 탈춤, 댕기머리, 딴머리, 한복, 궁중 음악, 화장하고 싶은 본능, 옷을 이쁘게 설계하고 악세사리를 하고 다니는 행위 등 뿌리문화 및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거의 모두 무당 문화에서 나왔으니 모두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신교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중공 화하족을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던 리조선과 한겨레의 혼을 말살하려던 일제에 의해서 한겨레 뿌리와 혼이 거덜 나 있는 데 개신교의 이런 무지한 행위로 남은 씨 마저 말라가고 있다. 이렇게 개신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현지 전통문화와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인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보다는 형식적인 율법과 교리 전파에 치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소위 고등종교라고 하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얼마나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이며 일당 독재 공산당 문화로 사람의 다양한 정신세계와 개성 넘치는 하나님의 출현과 진화를 방해하고 있는지 례를 들어보겠다. 이들 종교의 사제와 신도가 입는 종교복식과 종교음악이다. 복식은 단색으로 통일 되어 있는데 보통 하얀색, 검은색, 노랑색, 회색이다. 그리고 종교음악은 엄숙하고 엄격한 틀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다양성과 풍성함 창조성을 그 본성으로 하는 진정한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서기 2005.의 경우 세계무형문화 유산 걸작 심사에서 기독교나 이슬람문화권 국가에서 이들 종교에 바탕을 둔 전통문화를 내세웠는데 모두 단조로움과 획일성을 면치 못하여 예선에서 다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공산주의나 공산당을 욕할 것이 못된다. 공산당은 총칼로 다스리지만, 이들 고등종교는 신의 말씀이라는 무형적인 마취제로 신도들을 통치한다. 이 양자는 본 바탕은 같고 입은 옷 색깔만 다를 뿐이다.


 반면에 진정한 하나님의 현시인 천부경 무당 문화를 보면 복식과 음악만 하더라도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풍성함과 다양성을 자랑한다. 먼저 무당의 복식을 보면 휘황찬란하다. 오방색 또는 무지개 색으로 장식된 옷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다운 풍성함과 다양성을 모두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상 모든 문화와 풍습 철학 사상 종교 등 그 어떠한 것도 다 품겠다는 하나님다운 여유로움이 넘쳐난다. 그래서 불교가 들어오자 불교에 동화되었고, 유교가 들어오자 유교에 물들었으며, 기독교가 들어오자 기독교로 동화되었다. 불교, 유교로 동화된 사실을 확인하려면 강릉단오제를 보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로 동화된 것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기복신앙과 성가대의 노래와 춤, 통성기도, 부흥회를 보면 된다. 이것들은 변형된 무당의 굿판이다.


무당 문화의 또 하나의 화려한 례는 우리의 전통 상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하는데 그 화려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지막 가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손으로 풍성하고 화려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의 모습이 원래 그렇게 풍성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는 음악인데, 태초의 소리요 진동인 률려가 무당의 굿판에서 나왔다. 서양의 엄격하게 규격화 되고 틀 지워진 음악이 아니라, 신명이 시키는데로 두들리고 튕기는 무정형의 음악이다. 특히 타악기를 사용하는 장단이 고도로 발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영혼에 감흥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지 향후 서양의 ‘락'이나 기타 다른 음악을 대체하는 것으로, 무당문화에 뿌리박은 풍물놀이(풍물굿) 등의 타악기가 주축이 된 우리 한겨레의 장단이 거론되고 있다. 타악기 음악장단인 ‘난타’는 이미 세계 주요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처럼 무당음악은 태초에 하나님과 교감하던 음악으로써 신명 그 자체다. 한마디로 무당 문화는 자연스러움이다. 있는 그대로 타고난 개성과 소질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을 추구한다. 교리라는 틀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벽돌 찍어내듯이 하여 사람을 고문하지 않는다.


 한국 한겨레가 산업화한지 수십년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첨단과학기술에서 다양한 응용기술력을 발휘하고, 다양한 문화적 상상력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앞서가는 것은 이 창의력과 독창성과 다양성을 본질로 하는 무당 문화가 우리의 피 속에 흐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천부경 하나님에 바탕을 둔 무당 문화는 이렇게 풍성함과 창조성 독창성 다양성을 두루 갖추어 있어서 인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기2005.에 세계주요무형문화 걸작으로 당선되기에 이른다.(무당문화인 강릉단오제) 따라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최고라는 말이 옳다.


참고로 현재 이러한 화려한 무당 문화를 잘 전승해 가는 민족들은 주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소수민족과 원시부족이다. 중원대륙의 소수민족과 몽골 등 북방 시베리아권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의 소수민족을 보면 복식과 음악에서 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프리카나 미주대륙의 원시부족이나 인디언 인디오의 전통문화를 보면 역시 우리 무당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하늘 한님은 하나요, 땅 한님은 둘이요, 사람 한님은 셋인데,


이 말씀은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다양한 팽창과 변화와 작용을 알리기 위한 기본 개념을 설정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위 말씀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수는 하나님 수인 하나一다. 그리고 천지인이 등장하는데 우주를 이루는 상징적인 요소를 천지인으로 설정하고 각각 천지인 수를 정해놓고 있다. 하늘의수는 1이고 땅의 수는 2이며 사람의 수는 3으로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우주는 크게  하늘(무수한 천체 포함) 땅(무수한 생물 무생물 포함)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들도 현대과학지식을 배제하고 순수 오관만을 작동시켜 우주의 구성요소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이기도 하다.


가. 삼(완전성)사상

여기서 현생인류 최초의 삼三사상이 태동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를 천지인이라 하여 그 수가 3이 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왜 인간의 수를 3이라고 정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3이라는 숫자가 보이고 3과 관련된 물건과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물건은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각종 그릇이 있다.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그릇과 관련하여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것이 끝임 없이 등장한다.


 그 력사歷史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세발 토기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발견되고 있다. 학자들은 초기 청동기시대 백제와 신라의 유물이라고 하지만, 훨씬 앞대의 유물로 보인다. 왜냐하면 대륙의 한겨레 나라로 확실시 되는 주나라시대의 청동기유물 중에서도 세발을 한 향로 비슷한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외에 중남미의 마야 잉카문명권에서도 세발을 한 정교한 그릇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고구려 고분에서도 세발달린 삼족오가 보인다. 여기서 삼족에 얽힌 얘기를 살펴본다. 이 삼족오에 대하여 이게 봉황이냐, 아니면 단순한 까마귀냐에 대하여 다툼이 있다. 먼저 봉황이라고 보는 견해를 본다. 단군세기에는 날개가 석자나 되는 삼족오가 궁안으로 날아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삼족오를 자세히 보면 실물 까마귀의 모양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새의 머리에 길고 커다란 무엇인가 달려있다.


이것은 봉황의 머리에 달린 길다란 깃털을 연상케 한다. 단군세기에 기록된 삼족오를 보면  까마귀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데 크기가 석자(1자가 약30센치이니 석자는 90센치)인 새를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까마귀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아무리 수 천년 전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에 그렇게 큰 까마귀가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삼족오는 한겨레의 신성한 새, 봉황으로 본다. 실제로 새鳥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봉황이라고 풀이가 되어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 될 수 있다. 검은 색은 요즘처럼 죽음이나 절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어머니와 같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스러움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징성을 주는 새는 까마귀였을 것이고 거기다 발도 세 개로 하여 더욱 완전한 길조를 창조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까마귀는 현재처럼 흉조로 알려진 게 아니라, 동서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똑똑한 길조로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흉조로 인식된 것은 리성계 조선이 세워지면서 유교(유학)를 국시로 하면서부터다. 유교를 개량한 주자학의 교주 주자(朱子)가 까마귀를 흉조로 보았고 이것을 리조정권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전 생민들에게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자가 까마귀를 흉조로 보게 된 연유를 한겨레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 발해의 피를 이어받은 한겨레정권 금金나라가 중원의 동북방에 세워지고 다시 중원대륙의 고토회복에 나서면서 조의를 입었다. 조의는 검은 옷을 뜻한다. 이 조의는 조의선인이라 하여 고구려시대에는 신선도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중추기관 내지 중추세력이었다.


 이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금나라 조의부대가 당시 대륙의 동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지나족(중공화족)의 송나라를 몰아내면서 송나라 황제를 잡아다가 목을 쳐 죽여 버렸다. 이것을 기억하는 주자는 검은색만 보면 기겁을 하고 공포에 떨며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 그래서 검은색을 하고 있는 애꿎은 까마귀에게도 흉물스런 새라고 하였고 이것을 자기의 저서에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오늘날 초상나면 초상집 문상을 갈 때, 검은 옷을 입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위 송나라 황제를 조의부대가 목 쳐 죽인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기억에 상여가 나가는 한겨레 전통 장례행렬을 보면 여자는 흰색, 남자는 연노랑색의 옷을 입은 것을 보면 전통 장례에 입은 옷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장례식 때 검은 옷을 입는 것을 보면 아마 서양에서 건너온 최근의 풍습이 아닌가 한다.


 한편, 삼과 관련된 이야기는 동서양 모든 종교에서 등장한다. 불교에서도 삼세제불이라고 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 경전인 구약 바이블에서도 요나라는 사람이 물고기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나온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외에 구약과 신약바이블에는 3과 관련된 이야기가 수 없이 나온다. 기타 다른 경전에서도 3 숫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리라고 본다. 오늘날에도 3과 관련된 이야기와 풍습 제도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운동경기의 삼세판과 세계 여러 나라가 삼색 줄로 된 국기를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럼 왜 이처럼 천부경과 이를 이어받은 전 세계 민족과 지역 그리고 정신문화인 종교 등에서 3이라는 숫자를 애용하는 것일까, 그릇의 경우 세발의 지지대를 달아 놓았을 때, 가장 안정된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삼三셋은 완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나 물건에 삼三사상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것을 만든 주체가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것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냈다는 뜻이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천부경에서는 사람의 수를 삼三이라고 하고 있는데 삼은 완전함을 나타내므로 사람은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것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나. 삼신일체 하나님사상

위 말씀은 일로 하나님을 표현하면서도 하늘 땅 사람에게 하나님 수, 일을 넣음으로써 삼신을 말한다. 하늘 하나님, 땅 하나님, 사람 하나님이다. 천부경 처음 말씀에도 하나님이 삼극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 본체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삼신일체사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一)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가서도 하나님(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도 삼신일체사상을 뜻한다.  하나는 같다는 뜻도 있는데,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에서 알 수 있다. 하늘땅 사람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천신 지신 인신으로 삼신을 나누면서도 이 셋이 결국 같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명확하게 알려면 삼태극의 형상을 보면 된다. 삼태극은 빨강 파랑 노랑(금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태극을 보면 셋으로 보이나 둥근 원인, 일태극으로 보면 하나다. 셋이면서도 하나고 하나이면서 셋이다.


이 삼신일체사상(삼태극)은 우주작용원리와 인간의 삶의 원리 및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녹아있다. 한겨레는 삼신일체사상을 삼태극(천부도天符圖)이라는 문양으로 표시를 하여 누구나 가장 쉽게 알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그 속에 담겨있는 모든 것 뜻을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삼신일체사상은 가장 진화된 신관神觀이다. 이는 전무후무한 신관으로써 앞으로도 이렇게 진화된 신관은 나올 수 없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 한겨레가 본래 하늘자손임으로 이러한 신관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삼신일체사상을 다른 종교에서 차용한 것이 보이는데 지금까지 발견되는 것은 기독교다. 소위 삼위일체신관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나오는데 이것을 삼위라고 하며 성부라는 신속에서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경전에 써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교리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독교 전체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카톨릭과 러시아 정교회를 뺀 개신교(목사교)의 교리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천부경에 직접 나온다. 일一과 삼三이 그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여 신의 이름을 붙여 신 개념을 한정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삼태극 문양을 사용함으로써 제한을 두지 않는다. 천부경에서는 물론 천지인이라고 하여 신의 이름을 제한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우리의 삼신은 이렇게 하나로 고여 있지 않다. 삼신은 마고 궁희 소희도 될 수 있고 한인 한웅 단군도 될 수 있다. 천. 지. 인 도 될 수 있다.


 이렇게 삼신일체 하나님 사상의 핵심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와 처한 환경에 따라 융통성 있고 탄력적으로 다르게 불려지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기독교처럼, 수 천년전에 만들어져 그 당시에나 통하는 신 개념을 첨단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에 까지 강요함으로써 잔혹한 비극을 불러오지 않는다. 또한 꼭 인격적인 신으로만 제한하지 않는다. 상징물로 나타냄으로써 삼신일체하나님과 생활속에서 하나가 된다. 풍장(풍물놀이)을 보면 기본색이 빨강 파랑 노랑이다. 이것은 삼태극을 뜻하는데 이게 삼신일체 하나님을 생활속에 적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편, 우리의 무당 문화와 고사문화에는 물고기가 나온다. 고사지낼 때도 북어 같은 말린 물고기를 실로 묶어 고사상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악귀를 쫓는 부적으로 집 출입구 안쪽에 말린 물고기를 실로 묶어 걸어 놓는다. 그런데 눈은 하나인데 몸이 세 개인 일목삼신어一目三神魚라는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부적으로 사용되어 온 흔적이 보인다.


지금은 흔하지 않지만 여전히 일목삼신어를 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느 기업은 회사의 문장으로 일목삼신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일목삼신어가 무당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연구 자료가 발견된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반도 한겨레를 말살하기 위해 한국을 전 방위적으로 연구하였는데 한국의 풍습도 포함시켰다.‘우리역사의 비밀’누리집에 올라온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본의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 등 여러 가지 우리의 문화와 풍속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는데 여기에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汝自三身一目魚/一目有難況又針/ 汝今拔去吾目針/吾亦拔去汝目針」


눈병을 앓았을 때 삼신일목(三身一目)의 그림을 그리고 눈에 바늘을 찌르면 낫는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한국학자 저서에서도 발견된다.(졸저 "한국의 부적" 1987년 보림사 간행 P167~168참고)


이 일목삼신어는 삼신일체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북어 같은 물고기를 실로 묶어 집 출입구에 달아 놓는 것과 일목삼신어가 부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위 기록, 그리고 대문 등 출입구에 삼태극 문양을 그려놓는데 이것들 사이에는 모두 악귀를 쫓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것은 삼신일체 하나님의 힘으로 악귀를 쫓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본다.


그런데 일목삼신어 문양이 한반도와 수억만리 떨어진 이집트 고대왕국의 창건자인 왕들의 그릇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이 이집트 피라미드를 일으킨 주인공들인데 이들의 모습을 보면 당시 이집트 피지배세력인 오늘날 이디오피아인의 모습과 다르다. 그리고 나중에 들어선 혼혈왕들의 모습과도 사뭇 대조적이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상대적으로 작고 째진 눈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한겨레의 얼굴을 닮아 있다.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이집트 고대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동방에서 온 정복자들이라는 것 까지 감안하면 이들은 분명히 한국에서 문명을 가지고 배달나간 우리의 조상들이다.


그리고 일목삼신어 문양은 Triqueta (트리케타-트리는 3을 의미한다)라고 하여 유럽 겔트족의 성스러운 상징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일목삼신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이른바 쌍어문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지역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한반도와 중원대륙 하나라와 인도, 이란 이라크지역의 메소포타미아, 중남미의 마야 잉카 등 고대 문명권에서 모두 발견된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의 차량을 보면 뒤쪽에 물고기문양이 간간히 눈에 띠는데 이것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변질되기 전부터 원래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였다. 로마제국에게 박해받는 기독교를 그린 서양의 영화를 보면 기독교인임을 알리는 수단으로 물고기 표시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재도 로마가톨릭의 교황이나 대주교가 쓰는 모자(관-갓)를 보면 입을 약간 벌린 물고기 머리부분을 연상케 하는데 사실은 이것도 물고기 모양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불교의 경우에도 불교사찰 전각의 처마에 물고기를 달아놓고 있고 종과 연결되어 있어 바람이 불면 부딛쳐 청량한 소리를 낸다. 또한 물고기 형상을 한 목각사이에 두드리게 둘을 넣고 두드리며 불교의식을 한다.


결국, 편두풍습도 한겨레 동방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전 세계 피라미드를 비롯한 거석문화의 조상도 한반도 한겨레라는 점을 함께 고려 해 보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문화의 뿌리가 한겨레의 삼신일체 한문명에서 자유로울 수 가 없다. 이것은 우리 한겨레가 현생인류의 어버이나라요, 종가집 임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라 하겠다.


한편, 이 세상은 사실 이분법적 원리와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양자간의 끝없는 투쟁과 대결, 갈등과 긴장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음과 양, 천국과지옥 등이 그것이다. 또한 서양문명은 자유 평등 정의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오늘날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혼돈과 모순이 생기는 지 알 수 있다. 또한 평등도 사실상 공허한 소리가 된지 오래다. 그리고 정의도 진정한 정의의 실현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끝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삼신일체사상이다. 삼신일체사상에는 앞서 언급한 우주생성작용의 원리 외에 조화와 균형 그리고 상생의 원리가 작용한다. 천부경에는 하늘과 땅이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한다(人 中 天 地 一 ). 이는 음과 양으로 분열된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 안에서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본다.


삼태극문양도 보면 빨강과 파랑으로 양분된 대립구조를 노랑이 개입하여 중화시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결국 삼신일체 하나님 사상은 끝없는 대립으로 치달으며 상대방의 피와 땀을 제물로 하여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 서구기계물질문명이라는 살벌한 세상을 꽃밭으로 가꿀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다. 신선도神仙道

삼신일체 하나님사상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선도(仙家)와 한겨레 전통수련법이다. 신선이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이슬 같은 것을 먹고 살며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존재다. 불교사찰 가장 위쪽에 모셔져 있는 산신각에 보면 신선과 호랑이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맹금수류와도 의식의 동조를 통한 교류가 있었고, 호랑이도 당시에는 교통수단으로 쓰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불로장생이 신선과 관련이 있고 진나라 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불로초(仙藥)를 구하러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海東해동 즉 한겨레 신선이 사는 나라로 가는 장면이 ‘진용’이라는 중국영화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정말 신선은 있었고 지금도 신선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신선은 있었고, 지금도 신선이 될 수 있다.’이다. 신선의 존재에 대하여는 중국측 사료와 우리측 사료에 분명한 기록이 있다. 더구나 고구려시대 까지 만 해도 조의선인조衣仙人이라는 국가기관이 있었다. 이것은 국가기관이기에 앞서 이 기관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신선도와 관련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다. 태백일사 한국본기에는 처음한인(안파견 한인 서기전7197.)께서 득도장생得道長生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태백일사 신신본기에는 신시개천 5대한웅 태우의(서기전3512.)때에, 태우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바, “반드시 묵념默念(생각이 가라앉은 무념무상의 상태)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조식보정調息保情케 하시니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술術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연히 신선도와 관련이 있고 더구나 신선이 되기 위한 수련법중의 하나인 조식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단군세기에도 4세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원년(서기전2137.)에 삼신께 제사를 했다는 것과 선약이라는 말과 신선불사라는 말이 나온다. 또한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제5에는 선인 발귀리, 자허선인, 자부선생(자부진인紫府仙人), 신지선인이 나오고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는 을밀선인이 등장한다. 이는 실제 신선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실마리다.


참고로 지나 화하족이 자기들의 최초조상으로 모시는 황제헌원도 자부진인에게서 신선도를 배워 간 것으로 중국 측 기록에 나온다(진나라 갈홍의 포박자). 이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한국시대 신시배달국시대 단군조선시대 모두 신선도가 있었고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국가지도자부터 신선도에 정통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가 있다. 이는 우리 한겨레의 나라가 신선의 나라였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오늘날처럼 복잡하게 세분화된 법제도를 만들어 인치人治 또는 법치法治를 즐겨했다기 보다는, 척하면 통하는 신이 다스리는 신정국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신선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수련법은 전해져 내려오는가, 우선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는 “대개 선인의 수련법에는 참전參佺(계경-한겨레 3대경전중의 하나)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불교에서도 계율이 있고 기독교에서도 율법이 있듯이, 신선도에서도 수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계율이 필요하고 이것이 참전계경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윤리도덕적인 인간은 될 수 있어도 신선은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수련법이 있어야 한다.

 

현재 국내에는 신선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수련단체가 몇 개 보인다. 국선도國仙道와 단월드(구-단학선원)가 대표적인 단체라 할 것이다. 신선도 수련법은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된 삼일신고三一神誥(삼신일체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삼일신고 제5장 인물편에 나온다. 사람과 만물은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는데 성품 목숨 정기라고 한다. 이는 수행의 세 가지 줄기를 말하고, 성품=심=성, 목숨=기=명, 정기=신=정 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각 줄기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지감止感(성품) 조식調息(목숨) 금촉禁觸(정기)이다.


여기서 각 수행방법을 차례로 설명해 보면, 첫째, 지감이다. 지감은 감성 즉 마음을 그친다는 뜻인데, 마음은 생각의 다발이라고 했으니 결국 생각을 그치는 수행법이 된다. 그럼 과연 생각을 그칠 수 있는가,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나’라고 하는 자체가 생각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내면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생각을 빼놓고는 자신을 정의내릴 수 없다.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어쩌면 아상(에고)의 죽음일지 모른다. 실제로 수행자들 중에 생각이 멈추었을 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갈파했는지 모르겠다. 이 말을 반대로 보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죽음).’가 된다.


 그런데 일상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지감은 생활에 필요한 생각은 하되 망상을 없애라는 것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생각은 하루에 하는 생각의 량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생각은 질량을 갖는 에너지라고 했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에너지의 방출에 해당한다.


 따라서 잡념,망상을 제거하게 되면 힘을 불필요하게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은 힘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의 량이나 잠자는 시간을 줄여도 된다는 것과도 통한다. 실제로 망상과 잡념이 사라지면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머리도 너무나 맑아진다. 자신과 세상모든 것이 항상 신선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게 경험자들의 고백이다.


그럼 망상과 잡념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각성하고 있으면 된다. 꼭 필요한 생각을 한 후에는 수시로 자신을 점검한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에 달라붙어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을 들인다. 이것을 ‘알아차리기’수행법이라고 해도 좋다. 반대로 이렇게 해도 좋다. 자기 호흡과 몸을 적극적으로 느끼는 연습이다. 쉴 때, 걸어갈 때 자신을 느끼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둘째, 조식이다. 조식은 의식을 배꼽 밑, 아래 배에 두고 호흡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하는 수행법이다. 날숨부터 시작하는데 날숨과 들숨길이를 처음에는 각각 3초로 하면서 무리가 안가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그 길이를 늘려간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는 입술을 약간 뗘서 입으로 내쉰다. 여기에 숨을 들이쉬고 2~3초 멈추었다가 내 쉬는 과정을 집어넣어도 된다. 또한 내 쉰 다음에도 2~3초가량 멈춘 후 들이쉬어도 된다.


 따로 장소를 정해서 할 때는 무릎을 꿇은 자세가 가장 효과적이다. 무릎을 꿇되 궁둥이에 닿은 양발은 포개지 말고 나란히 11자로 한다. 양 엄지발가락도 나란히 붙게 한다. 그리고 허리아래를 지긋이 앞으로 민다. 이것은 숨통이 잘 트이고 깊게 하기 위함이다. 목을 앞으로 빼지 말고 턱을 당겨서 허리와 목 머리가 곧게 펴지게 한다. 손은 자연스럽게 무릎에 올려놓으면 된다.


손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모양새가 있다. 무릎에 올려놓되 달걀을 쥔 듯한 모양을 하여 무릎위에 올려놓기, 양손을 포개어 타원형으로 만들되 왼손이 위로 올라가고 양 엄지는 끝이 서로 닿게 하여 아랫배에 갖다 놓기 등이 있다. 숙달이 안 되어, 다리가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편한자세를 취하면 된다. 의자에 앉아도 좋다.


이것은 일할 때도 가능하며 매일 따로 시간을 내서 집중적으로 하면 수행의 효과를 빠르게 맛 볼 수 있다.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라든가, 아침에 일어난 후라든가 기타 자신에게 맞는 시간대를 정해서 하면 된다.


이 수행법은 장생불사로 가는 직접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가 처음에 태어나면 태식胎息을 한다. 즉 엄마 자궁에서 태줄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 하였던 것처럼 막 태어났을 때도 탯줄은 아니지만 호흡의 깊이가 탯줄이 있던 깊은 아랫배까지 이른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숨 깊이는 점점 짧아지고 결국 숨이 목구멍에 이르러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이 호흡법은 갓난아기 때 하던 원래의 호흡상태로 되돌리는 것과 같다.


셋째, 금촉이다. 이것은 감각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생활을 금하라는 뜻이다. 술에 약한 사람,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 담배를 못 끊는 사람, 기타 여러 가지 감각을 통제 못하여 의식이 온통 밖으로 만 쏠려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은 금촉이 무척 힘들 것이다. 그러나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단계별로 통제 절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현대인은 워낙 외부 지향적으로 길들여져 있어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위와 같은 수행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따라서 위 수행법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어 내면으로 들어가기 쉽게 해야 한다. 이것을 예비운동이라고 부르겠다.


이를 위한 비교적 쉬운 길잡이는 ‘웃음’이라고 본다. 웃을 때, 온 세포가 진동한다. 웃을 때, 막힌 기가 뚫린다. 웃을 때, 막힌 혈관이 뚫리고 피가 잘 돌도록 하여 만병을 예방해 준다. 웃을 때,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이 활발하게 움직여 굳은 몸을 풀어준다. 웃을 때, 만병의 근원인 노폐물이 쌓인 내장을 진동시켜 청소를 해준다. 변비를 없애준다. 젊어지게 하고 늙음을 늦춰준다. 사실, 십(성교=색色스 sex)과 함께 웃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좋은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건강을 위하여 구태여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거나, 기타 어떠한 것도 웃음만한 게 없다고 한다. 암 환자 치료에도 웃음이 동원된다. 액운을 차단하는 무형의 최고의 부적이 웃음이다.


 이 세상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도 최후에는 웃었다. 웃음이 되자, 깨달음이 왔고, 득도를 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니 웃음을 잃어버린 종교는 반생명적이며 진정한 종교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 표정이 너무나 심각하고 무겁고 굳어있다. 필자는 몇  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웃음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하회탈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경쟁과 상쟁으로 병든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현재는 거의 웃음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열을 너무 많이 받아 얼굴도 검게 변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흰머리도 생기고 머리도 빠지고 있어 열받는 일이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이 천부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수련법을 알아가면서 웃음을 되찾고자 한다. 잃어버린 웃음을 다시 찾는 데는 현재로써는 ‘전원주’아줌마의 통쾌한 웃음이 그만인 것 같다. 이 분이 통쾌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한바탕 웃어본다. ㅋㅋㅋㅋ,ㅎㅎㅎㅎ


보통 이유가 있어야 웃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낄낄낄 대며 웃으라고 한다. 이게 잘 안되는 사람은 필자처럼 우스운 일을 떠올리며 웃음의 물꼬를 트면 된다. 워낙 긴장되고 변태적 풍토 속에 살다 보니,  웃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웃음으로써 웃음이 웃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기 전에 낄낄대고 자고나서 낄낄대고 미친 사람 소리 들어도 좋으니 길거리에서도 낄낄낄 대기를 권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기회가 주어지면 낄낄대라고 한다. 아랫배가 진동하는 낄낄대는 웃음, 이것이 위 수행을 쉽게 하고 내면여행을 하는데 탁월한 도움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신선도의 수행법은 지감 조식 금촉, 세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게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이 수행의 끝을 삼일신고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고 한다. 또는 성통광명性通光明이라고 부른다. 수행방법이 세 가지로 나뉘고 수행의 종착점은 성통공완이다. 여기서 세 가지 수행법은 삼신과 연결되고 성통공완은 일신 즉 하나님과 같다.


수행을 하면 성이 통하고 성이 통했다는 것은 공이 완성되었다는 것으로써 곧 신아일체神我一體를 말한다고 하겠다. 결국 신선도의 수행방법과 목적은 삼신일체사상과 맞아 떨어진다. 이 신선도 삼법수행은 삼태극과도 연결된다. 삼색의 각 태극이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 데 이들이 이루어 내는 형상은 하나의 원이다. 즉 원인 일태극, 하나다. 신선도의 수행방법과 추구하는 목적이 여기에도 통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종교의 수행방법이 우리 한겨레 신선도에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지감은 인간의 마음(생각)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불교의 공부방법이다. 조식은 호흡법에 초첨을 맞추고 있는데 이것은 도교와 연결된다. 금촉은 인간의 오관을 통제 절제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윤리도덕과 관련되어있다는 점에서 유교와 연결된다. 또한 접촉에 엄격하다는 점에서 기독교 이슬람교의 금욕주의와 같다. 결론적으로  전 세계 모든 종교의 수행법은 신선도에서 파생되어 나간 것이라 하겠다.



(4) 一 積 十 鉅 無 櫃 化 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하나님은 끝없이 나아가 함없이 사람이 되셨네


위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은 쌓여 십으로 커지고 함에 담을 수 없다.그리하여 셋으로 화하였다.’ 로 풀이 하는 견해가 있고 필자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일적십거무궤는 하나님 또는 우주의 무한한 활동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무수한 변화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된 것이 셋이다. 여기서 셋은 사람의 숫자 삼三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며 바꿔 말해 사람은 곧 하나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표현어구가 화삼化三이다. 변삼變三이 아니다. 변삼은 물리적 변화다. 이것은 나무가 가구로 변하는 수준이다. 나무의 속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화삼은 근본적인 탈바꿈이다. 나무가 가구로 되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바뀌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탈바꿈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척 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인간으로 낮아져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는 기록이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 나온다.‘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三神이라고 한다’가 그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은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유일하게 한겨레 하나님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라는 1개인에 국한된 것이지 우리 한겨레의 하나님처럼 일반적이지 않다. 한겨레하나님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현신이요, 화신이라고 한다. 한겨레의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겨레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 그 말씀도 여타 종교처럼 무수히 세분화 되어 복잡하지 않다. 의식(의례)도 있긴 하나 이것도 엄격히 틀지워지고 복잡하게 세분화 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이쁜 짓을 하는 수준에서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처럼 신의 말씀을 빌어 종교지도자(교주)가 나타나서 독재하고 줄 세우고 계급과 차별적 신분을 만드는 일이 없다. 모두다 하나님의 현신이라서 다 같다.


한겨레 하나님 사상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반드시 교주가 있고 그 교주의 말씀이 있으며 강고한 교리와 엄격히 짜여진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담을 친 것이어서 타종교와의 교류를 차단하고 배타와 독선으로 치달아 종교간 분쟁과 갈등을 촉발 시키고 있다. 급기야는 피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종교에서는 신도들은 교화의 대상이고 복종과 믿음을 강요받는 종교적 통치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곳에 몰아놓고 한쪽은 강의하고 한쪽은 엄숙히 듣는 붕어빵 생산 공장에 가깝다.


외래 종교의 신은 계율과 율법으로 심판하고, 말 안 들으면 벌주며, 한손에는 천국을 다른 한손에는 지옥을 들고 말세론으로 협박하고, 계약을 강요한다. 또한 전생을 들먹이며 운명(숙명)론으로 기를 죽인다. 이런 신은 신이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마음의 투영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민들을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한 정치이론일 뿐이다. 또한 신의 말씀이라는 가면을 쓰고 각 종교 창시자들의 본래 뜻과는 다르게 인간을 착취하고 고문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신본주의’이다.


신본주의 종교는 현실보다는 미래를, 현세보다는 래세를 중요시 한다. 그래서 현실이 아무리 비참하고 어렵더라도 조금 참으라고 한다. 나중에 천국이나 극락에 가면 다 보상받을 것이라고 한다. 또는 현생은 이렇지만 다음 생에서는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날 것이니 견디며 순응하라고 한다. 그리고 현생에서 고생하는 것은 전생의 업보 때문이니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 보다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한다. 인간은 천하고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랑과 자비를 말하나, 사실은 비천한 인간, 죄지은 인간관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신본주의 종교가 내세우는 범 인류애 적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고 실재로 입 따로 현실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신본주의 신도들의 인격은 이중적이고 분열되어 현실과 종교적 가르침 사이에서 끝임 없이 갈등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것을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 신본주의를 앞세워 중생을 착취고 고문하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외친 말씀이 오늘날 다시 그 예수를 모시는 기독교에게 적용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가, 예수님은 소박한 인본주의 자였으나, 그 추종자들이 신본주의 종교로 타락시켜버렸다. 예수님은 대자유인 도인이었으나, 그 추종자들이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처절하게 피 흘려 죽은 불쌍한 청년, 엄숙하고 심각한 기독교 교주로 만들어 버렸다.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신본주의 종교는 서구기계물질문명으로 마음이 황폐화되고 군중속의 고독 속에서 괴로워하는 약한 사람들을 좋은 낚시 감으로 삼는다.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은 이들의 낚시질에 낚이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종교지도자(사실상 교주노릇 함)의 탐욕을 채워주는 ‘용사’들로 성장해 간다. 종교지도자의 마음에 안 드는 세력을 성토하고자 시청 앞으로 집합하라는 종교지도자의‘말씀’이 떨어지면 일사분란하게 행동으로 나선다. 이것은 성도들이 이익집단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겨레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화삼化三! 거룩한 인본주의의 선언이다. 사람이 먼저지 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소리다. 사람 있고 하나님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 있고 사람이 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허깨비 신을 위해 자기를 고문할 필요가 없다. 한겨레 하나님 안에서는 천국 가기위해 죽으라고 믿을 필요가 없다. 공덕을 쌓아 다음 생에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나려고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말세에 대비하여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원죄론에 시달리며 끝임 없이 예수의피로 씻을 필요가 없다. 고등종교가 갈등과 인격분열을 조장한다면, 천부경 한겨레 하나님은 통합과 화합을 유도한다.


한겨레 하나님은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아기자기하다. 소박하다. 아빠 냄새도 나고 엄마 냄새도 난다. 심지어 어눌하고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 않는다. 거룩함과 추악함, 성스러움과 비루함, 창조주와 피조물로 차별하며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다.


한겨레 하나님은 우리와 24시간 함께 숨쉬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다. 우리의 사정이 곧 하나님의 사정이다. 하나님은 불두막에도 있다. 장독대에도 있다. 정안수 떠 놓고 비는 물 담은 그릇에도 있다. 성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려고 교회나 성당, 모스크 그리고 절간에 따로 시간 내어 갈 필요가 없다. 내 지금 서있는 곳이 거룩한 땅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과 만나려면 중보자나 대리자가 필요 없다. 만나고 싶으면 바로 만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한번 부르면 온 세포가 하나님의 주파수로 진동한다. 하나님과의 동조다.


천부경 하나님의 인본주의 신관은 무당 문화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준다. 무당 문화는 현세를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래서 지독한 현세 기복 신앙이다.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굿을 하고 노래하고 춤춘다. 복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고 불공을 드린다. ‘지금 여기’서의 행복, 복락을 원하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래세의 천국이나 극락에는 별로 관심 없다.


 지금 불행한데 어느 날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갑자기 행복해 질것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현세에서 행복해야 내세에서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현세에서는 엉터리로 살아 놓고 어느 날 한번 신을 믿음으로써 내세에서 그 사람의 삶이 단번에 다른 삶으로 변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게 사실임을 기독교 신약 책에서도 나온다. ‘너희가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현세와 내세가 따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라, 이 둘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세에서 행복할 때, 이것이 래세에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과거 죽은 자들이 만난 하나님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더 중요시 여긴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미 죽고 없는 예수님이 만난 하나님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우리의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 죽은 자들이 만난 하나님을 가지고 현재 살아있는 자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천부경 무당 문화에서 말하는 인본주의 하나님 관과 완벽 하리 만치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도 무당 문화와 통한다.


한편, 종교간 대립으로 세계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다. 그런데 반도 한겨레는 세계 고등종교가 모두 들어와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혼재해 있다. 그러나 종교 간의 갈등이 거의 없다. 이것은 우리 한겨레가 원래 세상 모든 종교의 뿌리 겨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세상의 어떤 종교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 혼재하는 수많은 종교는 천부경을 바탕으로 하는 무당 문화에서 파생된 종교가 그 모습만 바꾸어 다시 제 고향에 돌아 온 것에 지나지 않고, 이것을 한겨레는 무의식 가운데 느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기독교 개신교 세력만 뿌리를 잃어버리고 삐딱하게 나가고 있는 정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교로 미친 민족이라고 할 만큼 종교적이다.


 우리 한국말에‘신명 나게 한다’,‘신나게 놀자’,‘신바람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 한겨레가 얼마나 종교적인지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말이다. 의식적으로 종교적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속에는 해혹복본解惑複本이라는 간절한 염원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마고시대처럼 모두가 신인神人이 되는 그런 세상을 염원하는 강력한 유전인자가 우리에게 녹아 있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선언, 이는 홍익인간 사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우리 한겨레는 하나님과 하나임으로 홍익인간이라는 범 인류애 적 심성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임으로 내가 너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니 자신의 목숨과 같이 남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이 이러하니 전 세계 인민들은 우리 한겨레의 심성을 신기하게 여기며 동방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칭송하고 흠모하였던 것이다.


 불교 창시자 고오타마 싯달다(석가)는 불교가 있기 전에 전불시대가 한겨레에게 있었다고 고백했으며, 유교의 원조 공자, 인도의 시성 타고르, 25시의 저자 게오르규 등은 동방의 한겨레와 홍익인간 정신을 극찬하였다. 오늘날 서양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듯이 한겨레가 세계로 나가면서 인간답게 살도록 선진기술과 문화를 거져 전수토록 하였다. 홍익인간 사상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전설 같은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한국, 신시배달국, 단군조선시대에는 홍인인간 할 만한 규모의 나라였기에 이런 말이 나왔다고 본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심성이 한겨레의 피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우리 한겨레가 유일한 문명국이어서 농사짓는 법, 토목기술, 치수법, 가축사육법, 제천의식, 철강제련기술, 그릇제조기술 등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모든 방편을 어버이가 자식에게 가르치듯이 미개한 전 세계 토착 생민들에게 배달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무조건적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오늘날 그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 위, 사방에서 반도 한겨레를 동네북 취급하며 폐륜을 저지르고 있다. 미제(아메리카)를 위시한 서구인들, 중공 지나화하족, 열도한겨레(일본)가 그 폐륜을 저지르고 있는 세력들이다.


  

(5)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하늘도 둘셋이요, 땅도 둘셋이요, 사람도 둘셋이라,


앞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하늘도 이삼이고 땅도 이삼이고 사람도 이삼이라고 하여 천.지.인이 모두 같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를지 모르나 사실은 다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라는 자리에서 보면 구분할 필요 없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태어났을 때, 얼마동안 너와나의 구분을 못한다. 사회화 되기전의 단계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이것을 원시적 물아일체物我一體, 신아일체 神我一體 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에 지식이 쌓여가고 사회화 되면서 너와나의 구분이 생기고, 자아와 비자아의 분리현상이 나타난다. 자연과 나, 주체와 객체관념이 만들어지면서 아상(에고=자아)이 탄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기독교 구약 창세기에서는 선악과(지식의 열매)를 따 먹자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결국 낙원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표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상을 참나(眞我) 로 알고 한평생 살다 간다. 아상은 사람 머리수만큼이나 많고 다르며 똑 같은 아상은 하나도 없다. 또한  아상은 각기 실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이미지 관리로 나타난다. 이것은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아상들 간의 경쟁이 생겨, 끝없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상으로만 가득 찬 세상이 다 가 아니고 한 차원 높은 세상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제시하신다. 천부경에서는 이것을 후천적 물아일체, 신아일체라고 명명한다. 아상=자아를 극복하고 다시 물아일체, 신아일체를 회복하는 경우가 드물게 일어나고 있다. 원시적 물아일체, 신아일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지만, 후천적 물아일체, 신아일체는 아상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인간을 극복하여 인간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은 영원불변한다. 이러한 상태를 천부경에서는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라고 하여 분리되지 않은 모두가 하나인 존재라고 노래한다.


이는 아상이 사라져야 가능하다고 하는데, 기독교 신약성경에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가 인간적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예수는 어린애와 같이 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아=아상이 죽고 거듭난 존재를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부처(붓다)라고 한다. 이들은 아상차원에서 볼 수 있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서 인간의 가장 큰 욕망중의 하나인 성욕을 극복한 존재로써 이들을 신이라 부른다.



(6)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대삼합육 생칠팔구

한 하늘 땅 사람 모여 여섯이 되고 일곱 여덟 아홉을 낳았네


위에서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고 했다는 것을 볼 때, 여기의 대大는 같다는 뜻인‘한’으로 읽는다. 그리고 삼三은 하늘 땅 사람으로 풀이한다. 그래서 같은 하늘 땅 사람이 합하여 륙六이 되고 칠 팔 구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륙과 칠 팔 구가 무엇이냐고 할 때,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자신의 지식 범위 안에서 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맞다 고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말씀도 하나一하나님의 무수한 작용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천부경의 이런 숫자와 관련하여 어떤 견해는 한역易(주역)과 연결 시켜 보기도 한다.



(7)運 三 四 成 環 五 七  운삼사성 환오칠

하늘 땅 사람 운행하니 넷을 이루고 다섯 일곱으로 둥글다.


이 말씀도 위 말씀에서 이어지는 것이라서 위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풀이할 수 밖에 없다. 운運의 주어가 위 말씀의 칠 팔 구라고 해도 좋고 이것을 빼고 하나님을 주어로 넣어도 좋다. 삼은 하늘 땅 사람으로 밖에 볼 수없고 그래서 삼라만상의 운행의 중심에는 셋三 즉, 하늘 땅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삼재(천지인)가 넷四를 이루고 여섯 일곱으로 둥글다고 해석된다. 여기서도 숫자가 나오는데 이 숫자의 의미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견해로 나뉜다. 천부경에서 풀이가 명확하게 통일되지 않고 여러 견해로 나뉘는 숫자는 륙 칠 팔 구 사 오 칠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숫자를 해석하는 견해의 주요 공통점은 이 숫자를 우리 한겨레의 천문학과 관련짓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 공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24절기로 풀이한다든가, 해와 달 그리고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관련된 음양 오행론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음양오행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상징물은 리조시대 들어 왕이 앉는 대전이나 기타 정무를 보는 의자 뒤에 병풍처럼 그려진 그림을 꼽는다. 그 그림을 보면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고 그 위에 해와 달이 떠 있다. 이것은  음양오행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새로 나온 만원짜리 지폐에도 새겨 넣고 있다.



(8)一 妙 衍 萬 往 萬 來  일묘연 만왕만래

하나님은 오묘하시고 두루 다니시니 우주만물이 오 가고,


여기서 부터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는 냄새가 풍긴다. 천부경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이라고 하는 견해가 여기에서는 설득력을 갖는 다고 본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해도 될 듯싶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그 안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오고 간다고 풀이 할 수 도 있고, 우주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앞서 설명한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의 또 다른 측면을 좀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설명해 놓은 말씀이라고 본다. 천부경이 81자로 되어있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때, 81자라는 형식을 맞추기 위해 같은 내용을 반복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9)用 變 不 動 本 용변 부동본

그 작용은 변하시나 본디는 변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은 그 작용이 변하시나 원래 본체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 생활속에서 붙잡고 수행해야 할 말씀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생활이 아무리 정신없이 돌아가고 변하더라도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중심을 잡으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몸과 그 몸을 통해서 인지되는 세상과 북적거리며 웃고 우는 생활이 이어지더라도 본래의 모습은 항상 그대로니 이를 알아, 세상이라는 거친 강물에 떠내려가 중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육신에서나 일어나는 것이지 본래 나 자신은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항상 그대로라고 한다. 그러니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하는 그 어떤 것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이니 그냥 놀이터라고 여기고 기왕이면 신나게 놀다 가라는 것이다. 심각하게 한 평생 살든, 재미있게 한 평생 살든 우리 본래 모습은 늘 그대로 라고 한다.


이와 관련된 말이 평상심이며 동중정이며 시장속의 사원이다. 이러한 마음을 길러주는 수행법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위‘뉴에이지-새로운 세대’관련단체들이 많이 소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행법을 하나 들면 다음과 같다. 경계선을 그려 이것을 침범하지 않게 하고 서로 마주보고 서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짓을 다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직접 닿는 것을 제외하고 욕해도 좋고 흉봐도 좋고 그 무슨 짓을 해도 모두 허용된다. 그러다가 심판의 정지 신호와 동시에 멈춘다. 그리고 서로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준다.



(10)本 心 本 太 陽  본심 본태양 

본디 마음 본디 큰 밝음이시여,


하나님은 본래 마음이시고 본래 큰 밝음이시다. 하나님이 본래 마음이라면 인간이 곧 마음이라고 할 때, 하나님과 인간은 알고 보면 하나라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이‘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신 말씀과도 통한다. 이는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 유심조’와도 연결된다. 인간의 마음은 늘 움직이는데 그 마음씀씀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평범한 인간으로 머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게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현상계를 볼 때, 이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 마음이 만들어낸 작품이요, 세계다. 즉 과거의 마음, 생각대로 따라왔더니 오늘 내가 된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닌, 과거의 어떤 원인에 의해 오늘의 결과물인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 본 태양이라고 한다.‘본 태양’이는 다른 말로 빛이라고도 풀이 할 수 있겠다.빛은 많은 종교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다루는 것을 본다. 종교에서의 언급을 말 하지 않더라도 수행을 통하여 상당한 단계에 올라간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자신을 비롯하여 온 세상이 빛 자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경이라고도 하는데 대단히 유혹적이고 신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11)昻 明 人 中 天 地 一  앙명인중천지일

우러러 밝으니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 된다.


위에서 아무리 하나님에 대하여 온갖 듣기 좋은 말로 풀이하고 찬양하였어도 결국 사람이 없는 하나님은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존재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사람에게 구속되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도 결국 사람의 손을 빌려서 한다. 그래서 우러러 밝히노니 결국 사람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사람 속에 하늘도 땅도 구속되고 만물이 하나가 된다고 한다.


또한 앞서 보였듯이 예수님도‘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어떤 이는 말한다. ‘죽은 성자, 죽은 예수 천사람 보다, 살아있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가 더 낫다.’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이나 그 어떤 존재도 결국 살아있는 사람보다 앞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죽고 없는 그 어떤 것을 위해 산 사람이 고통 받거나 희생될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니 어떠한 명목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종교에서 자기들이 모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한다면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자기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범죄행위다.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는 선언, 한겨레의 천부경 무당 문화가 추구하는 제일의 목표다. 아무리 하나님을 말하고 우주만물을 말하였어도 결국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곳은 사람이다. 사람 안에서 모든 게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3. 천부경 결론

결론적으로 천부경은 현생인류의 뿌리, 무당 문화에 뿌리박은 한겨레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전 세계 모든 민족의 뿌리말씀이다. 지극히 현실에 뿌리박은 인본주의 신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인격신과 비 인격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각자 취향에 맞는 신을 모실 수 있다. 오늘날 서구기계물질문명이 인간과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가고 있는바, 이를 멈추고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천부경에 나와 있다.


과학과 비 과학을 모두 아우르는 천부경은 이제 파멸이냐 구원이냐의 갈림길에 선 인간에게 다시 원래의 자연 조화적인 생명의 삶으로 돌아오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살리는 정신과 문화가 피 속에 흐르는 한겨레가 무당 문화로 현생인류의 문명을 열었듯이 이제 파멸로 내달리는 현대기계문명의 인간을 구원해야할 사명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본다.



참고 및 인용의 주요출처:


한단고기(임승국역주-정신세계사)

실증 한단고기(이일봉-정신세계사)

한겨레 상고문화사(윤용빈,윤범하)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

부도지(박제상저,김은수역주)

무속에 살아있는 우리상고사(조성제)

고교 세계사(교학사)

서양문화사(민석홍,나종일)

개관 동양사(동양사학회)

NIV개신교 성경

불교반야심경

동서언어의 뿌리 천축실담어(강상원)

한국사통론(변태섭-삼영사)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박창범-김영사)

<우리역사의 비밀> 인터넷 누리집

무당이 내림굿, 明斗에 새긴 천부삼인 (노중평)

마음의 여행(천부경 해설 부분-구름 이경숙 저)

기타 인터넷 누리집과 인터넷 까페 및 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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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한국무당의 복식(춤새 송민숙님 연출)

 

 

 

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 삼태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