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 중
[단군세기(檀君世紀) 서(序)] 앞부분.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10월 3일에, 행촌(杏村) 이암(李嵒) 지음.
爲國之道(위국지도)가 莫先於士氣(막선어사기)하고 莫急於史學(막급어사학)은 何也(하야)오.
나라를 위하는 길은 사기(士氣)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사학(史學)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나라를 위하는 길이 민족지도자들(국민)의 기상을 높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게 없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爲國: 나라를 다스림. 莫: 없을 막. 士氣: 민족 지도자들의 기상. 急: 급할 급)
史學(사학)이 不明則士氣(불명즉사기)가 不振(부진)하고
士氣(사기)가 不振則國本(부진즉국본)이 搖矣(요의)오 政法(정법)이 岐矣(기의)니라.
사학(史學)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수 없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됨이라.
(振: 떨칠 진. 搖: 흔들 요. 岐: 갈릴 기)
盖史學之法(개사학지법)이 可貶者貶(가폄자폄)하고 可褒者褒(가포자포)하여
衡量人物(형양인물)하고 論診時像(논진시상)하니 莫非標準萬世者也(막비표준만세자야)라
대저 사학(史學)을 하는 법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찬양할 것은 찬양하여
인물을 저울질하고 평가하며, 시대의 모습을 논하고 진단하는 것이니, 이는 만세의 표준이 아닐 수 없으리라.
(貶: 깎을 폄. 褒: 기릴 포. 衡: 저울질할 형. 診: 진찰할 진. 論診時像: 시대적 상황을 논하여 파악함. 像: 형상 상.)
斯民之生(사민지생)이 厥惟久矣(궐유구의)오 創世條序(창세조서)가 亦加訂證(역가정증)하여
國與史(국여사)가 竝存(병존)하고 人與政(인여정)이 俱擧(구거)하니
皆自我所先所重者也(개자아소선소중자야)라.
이 민족의 삶은 참으로 유구하도다. 세상을 개창한 내용이 바르게 밝혀져 있어
나라와 역사가 같이 존재하며, 사람과 정치가 함께 열거되어 있나니
이 모두 우리들이 알아야할 우선의 과제요 소중히 여겨야할 문제로다.
(斯: 이것 사. 厥: 다할 궐. 創世條序: 태초의 역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 訂證: 틀린 것을 바로잡고 증거를 확보하는 일. 俱: 함께 구, 擧: 들 거.)
嗚呼(오호)라 政猶器(정유기)하고 人猶道(인유도)하니 器可離道而存乎(기가리도이존호)며
國有形(국유형)하고 史有魂(사유혼)하니 形可失魂而保乎(형가실혼이보호)아.
오호라! 정치는 그릇(器)과 같고 사람은 도(道)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으며, 나라는 형체(形)와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으리요.
(嗚: 탄식할 오. 呼: 탄식할 호. 猶: 같을 유. 有: =猶 같을 유)
竝修道器者(병수도기자) 我也(아야)며 俱衍形魂者(구연형혼자) 亦我也(역아야)니
도와 그릇을 같이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아울러 발전시키는 자도 나로다.
(衍: 펼 연.)
故(고)로 天下萬事(천하만사)가 先在知我也(선재지아야)니라.
然則其欲知我(연즉기욕지아)댄 自何而始乎(자하이시호)아.
그러므로 천하만사 가운데 먼저 할 일은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한즉 나를 알려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사학(史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행촌(紅杏村) 이암(李?): 본관 고성(固城). 초명 군해(君). 자 고운(古雲). 호 행촌(杏村). 시호 문정(文貞). 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걸쳐 충혜왕 때는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儀)가 되었는데, 1332년 충숙왕이 복위했을 때 유배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충혜왕이 복위, 다시 불러들여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제조(政房提調)에 임명되었는데,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은 뒤 충정왕을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원(元)나라에 갔다와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고 후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략하므로 왕의 안동 몽진에 호종하고, 이듬해 좌정승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363년 시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 익조공신(翊祚功臣)의 호를 받았다.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특히 예(隸)·초(草)서를 잘 써, 조맹부(趙孟)와 쌍벽을 이루었으며,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1375년(우왕 1) 충정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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