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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독도와 간도에 대해서

by 바로요거 2007. 10. 12.
독도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 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작은 섬하나를 두고 일본과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서  애매하다고 하는 곳이 바로 간도입니다.. 하지만, 간도가 어디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조선 숙종(1712년, 숙종 39년)때 조선대표 박권과 청나라가 사신 목극동을 파견하여 서둘러 국경문제를 매듭짓고 정계비를 세웠으며,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한다."

   지금의 중국은 1880년대에 이르러 토문이 두만(頭滿)이라고 우긴다.. 하지만, 우리(조선정부)는 두만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점점 이상해 지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세종때에 김종서와 최윤덕이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로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배운 바로는 느닷없이 한참 후인 조선 숙종때에는 청나라와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조약을 맺습니다. 청나라도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이니 만주가 그들의 고향이고 따라서 그 쪽 경계가 민감한 사항이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당시 국경협약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과의 전쟁(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두 차례나 진 조선에서 만주땅을 떼주었다는 말입니까?  만주는 자신들의 고향인데? 이러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겠습니다.

         현재 간도의 위치를 나타내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만, 유일하게 남은 것이 로마 교황청에서 함경도 주교가 간도를 관할하라고 명한 지도에 간도에 위치가 나와 있는데, 한반도의 넓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우리가 발해의 땅이라고 알고 지역과 비슷합니다. 대륙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이 바로 간도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그들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영역은 고구려보다 넓었다는 것일까요? 그러면서, 왜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조선이 더 영역이 넓은데? 광개토대왕은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 숙종보다도 영토면에서 밀린 대왕이었던 것입니까?
        믈론, 종교적인 구역과 행정적인 구역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현재의 천주교의 관할지역을 봐도 굳이 행정적이 구역과 틀리게 구역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또한 행정적인 구역도 아무런 근거없이 막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간도(間島)"라고 하면서 그렇게 표시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세한 지도는 한단고기책 첫장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금의 백두산 정계비는 청나라에서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불리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화산족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간도는 조선통감부가 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철도를 타고 일본을 대륙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런 조약은 국제법적으로도 무효입니다. 즉, 사기, 강박, 착오로 인해서 식민정부가 체결한 조약은 무효입니다. 우리 정부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 중 아무도 간도가 우리땅이며, 어디라고 교육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땅 독도는 열심히 우리땅이라고 하면서 왜 광활한 간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심지어 국사책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까? 과연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인 것이 대한제국말기이라면 과연 조선의 강역은 어디까지였나요? 과연 김종서와 최윤덕은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만 간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는 지금의 압록과 두만을 하는 경계를 확정지어 준 일본이 고마운 것인가? 정말로 이러한 주장이 쓸데없는 민족주의의 발로인가요? 아니면 그들이 식민잔재인가요?

   

"간도 우리 땅" 19세기 獨지도등 공개  

 
   최근 중국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환인(桓仁)의 오녀산성과 집안(集安)지역의 국내성, 환도산성이 위치한 중국 간도지역이 18~19세기까지도 우리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지도 5점이 공개됐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김우준 교수는 7일(2004년 7월7일) 중국 청나라에서 1718년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의 유럽판 지도 원본인 듀 알드(Du Halde·1740년), 보곤 디(R.de Vaugondy·1750년), 윌킨슨(Wilkinson·1794년) 지도 3점과 19세기 독일지도 및 제정러시아지도 2점 등 총 5점의 지도를 공개했다. 김교수가 독일 등 유럽지역에서 매입한 이들 지도에는 환런과 지안지역이 모두 우리 영토로 표기돼있으며, 주변국가의 지형과 국경표기가 대부분 흡사하다.
   김교수는 “지난 1998년 발간된 ‘중한관계사’등 중국측 자료에도 서간도지역의 경비는 조선 관병이 담당했다고 기록돼 있는 등 간도가 조선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많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또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에 고구려 유적을 등재한 것은간도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으로의 조선족 편입을 정당화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 며,  “고구려, 간도 문제에 대한 각계의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4년 7월 10일 토요일 이규태코너등(각 방송에 모두 보도됨)

한(韓),중(中) 국경선

   19세기 초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유럽판 지도에 한, 중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그 강에서 100~200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려져 있어 국경선을 둔 논란의 불씨가 될 것같다. 국경을 가르는 성에는 토성(土城), 전성, 석성(石城)이 있고, 통나무를 엮어 잇는 책성(柵城)이 있다. 그 지도에 표시된 국경선은 당시 발해만에서 시작해 동해까지 이르는 2,000여 리의 책성을 따라 그은 것이다.  이 책성 이남(以南)은 청나라에서 공인한 한국영토요, 얼마 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구려 유적들이 집결돼 있는 집안(集安) 환인(桓仁)을 포함한  간도지방은 한국영토였다는 물증이기도 하다.


     연행기록들에 보면 압록강과 책성 간의 완충지대에는 "피인(彼人)"으로 불리는 야인들이 사냥을 하며 토굴에서 살고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피인이 왔다하면 울던 아기가 울음을 멈추었고, 계집아이 꾸짖을 때 피인한테 시집보낸다고 을렀던 바로 그 피인이다. 이 책성에 난 가장 큰 책문(柵門)이 압록강에서 120리 북쪽 국경마을에 있는 "고려문(高麗門)"이다. 중국에서 변방에 있다 해서 변문(邊門)으로 불리기도 한 이 마을 지명이 고려문인 것도 책문에서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고려문이 나 있는 산도 고려산(高麗山)이요, 많이들 기르고 있는 오리도 고려압(高麗鴨)이며, 그 고려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국화도 고려국(高麗菊)이라 했다. 연암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갈 때 집이 20~30채였다 했는데,  8년전 가보니 2,000여호가 들어선 국경도시가 돼 있었으며, 조선사행들이 유숙했다던 각씨루(却氏樓)의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들었다. 40여호의 조선인촌이 이 곳에 형성돼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피로인(被虜人)들 수용소가 이곳에 있었고, 그 후손들이 한마을을 이루고 살았온 것이다.
     이처럼 한,중간 완충지대를, 사대(事大)하는 조선의 열세를 기화로 18~19세기에 야금야금 저희네 땅으로 가로챈 것이며, 우리 조정의 불찰도 있긴 하지만, 고구려를 둔 역사 강도질을 당하고 있는 작금 이 국경의 원상복구를 국가차원에서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끝-

  필자주: 저와 같은 글을 쓰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나친 민족주의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식민사관옹호자라고 합니다. 의심이 나면 스스로 찾아보시고 의문을 가져보십시요..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증거가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