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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간도수(艮度數)

by 바로요거 2007. 10. 9.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지은이: 박 현

발행처: 두산 동아

 

(이끄는 글)

이 글을 써보라고 부탁 받은 것도 벌써 한 해 전의 일이다. 그러나 글은 느리기만 했다. 글이 느린 만큼 많은 일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고전을 다시 살펴보고 옛 시대의 몸공부를 정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공부한 내용을 이곳저곳에서 강의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었다. 천 번도 넘게 읽었을 "대학"과 "중용"을 두어 곳에서 강의했으며, "용호비결"과 같은 책도 수십 년의 짧은 경험과 천박한 알음알이로 다시 풀어가고 있었다. 틈틈이 이 나라의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계시는 훌륭한 어른들도 몇 분 찾아 뵈었다. 그러다 보니 염치없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갔고, 이제야 글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글에 대한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출판사가 주는 보이지 않는 압박도 적지 않았지만, 더불어 공부하는 분들의 관심이 더욱 크게 압박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날 때마다
그분들은 "이제 그 글 다 쓰셨습니까?"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 주제가 우리 겨레의 축소된 영토만을 다루는 문제라면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적임자가 될 수 없다. 이 방면의 전공자들이 즐비한데다 그 문제는 나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변변치 못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아마 그 책들 때문에 앞으로 많은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만큼 나에게 짐을 지운 경우는 없었다. 불교의 교과서 격인 "선가귀감"을 풀이하거나 확인하기 어려운 먼 시대의 지성사를 서술할 때도 이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한반도가 작아졌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역사가 작아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나는 이러한 의문들을 '사람됨의 사회적 크기와 그 사회의 역사는 무슨 관련을 가질까'하는 것으로 바꾸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관련성을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했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화두였으며, 나의 묵은 빚이었다.
  이끄는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그 화두를 다 풀지 못했으며, 묵은 빚도 시원스레 털어버리지 못한 탓이다.
  지금 우리는 분명 작은 민족이다. 제 옷을 벗어버리고 제 음식을 내다버리며 제 말조차 뜻없이 쓰는 우리는 분명 작은 사람이다. 한배에서 난 형제끼리 철조망 너머에서 핏발을 세우고 멀거니 앉아 있는 우리는 분명 못난 사람들이다. 부모 형제조차 챙기지 못하면서 세계화를 이야기하고, 황폐한 정신은 가다듬지 못하면서 경제적 부만 찾으며, 멀쩡한 땅조차 죽임의 영토로 만들어가면서 독도를 이야기하는 우리는 참으로 서글픈 고행자들이다.
나무에서 숭늉을 찾고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줄도 모르고, 이리 비틀 저리 덥석 과학시대의 쳇바퀴를 도는 날다람쥐들이다.
  이 글을 오늘날의 작은 우리를 역사적으로 찾아보는 역사수필이며, 그 역사 속에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설계해보는 조감도가 되고자 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도 뒤집어 해석해보았으며,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일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우리 역사를 고생대의 화석마냥 사건과 사건이 축적된 무생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몸처럼 하나의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로 보려 했다는 점이다. 각 사건 또는 각 시대별로 끊어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렇게 연구된 결과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역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보통 하나의 사건 또는 하나의 시대를 유기체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체 역사를 그렇게 보아왔던가? 나는 어설프게나마 총체적인 역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체라는 관점에서 각 주제들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적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단일민족이라는 구호의 허구성도 보게 되었으며, 실학이 고려 르네상스의 부활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그런 측면에서 '역사에 생명심기' 가운데 걸음마 격이 될 것이다.
  스물한 가지 주제 가운데는 독자들에게 낯익은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 주제는 독자들에게 낯설고 거북스런 느낌을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독자들을 난해함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덫은 없을 것이다.
  이제 염치없는 눈빛으로 감사의 말을 더듬거려야겠다. 사실 이 글은 출판사의 김현정 씨가 직접,간접으로 협박하지 않았으면 탈고하기가 어려웠던 글이다. 생명의 한 조각을 나누어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만날 때마다 인사말로 압박을 했던 나의 도반들께도 묵은 감사를 드린다.

          병자년 십이월   북한산 아래에서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허울좋은 반만년 역사

  오늘날 우리 겨레는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내세운다.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체적인 겨레 역사는 겨우 2천여 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2천여 년 이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몇 가지 설화와 신화 그리고 땅바닥에서 캐낸 몇 점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란 우리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앎이나 생각에 따라 뒤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의 앎이나 생각에 따라 뒤바뀔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며, 우리가 모를 경우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오늘날 우리 겨레가 내세우는 반만년 역사를 과연 진정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반만년의 구체적인 역사를 내놓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필요하고 유익한 도움을 얻어야 한다. 역사의 가치는 바로 그런 데 있다. 역사는 이런 가치를 활용할 때만 단절되지 않으며, 이런 가치를 활용하지 않을 때에는 서서히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게 된다. 참으로 '역사는 그것을 누리는 자의 보물창고'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겨레의 옛 역사가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사라진 것도 우리와 우리 선조가 그 역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탓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만 반만년 역사를 떠들고 실제로는 그 절반 이상을 잃어버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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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로 대체된 몇천 년 역사

  '우리 겨레의 첫 조상은 누구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늘 등장하는 한 인물, 그는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단군 왕검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역사적 인물이 아닌 설화적 인물로 생각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와 관련된 신화 하나가 무려 천년 이상의 세월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땅으로 내려온 한님의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그가 나라를 세워 1천여 년이나 다스렸다고 함으로써 천년의 세월이 설명되고 마는 것이다.
  황당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군 왕검이 겨레의 조상으로 공인되는 데는 또 얼마만큼의 세월이 걸렸던가. 고려 승려 일연이 침침한 눈으로 "삼국유사"를 짓기 전까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문헌에서도 단군 왕검이라는 인물은 이름을 내밀지 못했다.
  왕검이 겨레의 공식적인 조상으로 자리잡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타산 선비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였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지배에 맞서 고려의 독자성을 드러내고 나아가 부패한 고려사회의 개혁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저술된 이 서사시의 둘째 권에 이르러, 단군 왕검은 비로소 우리 역사의 공식적인 첫 지도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저항하고 우리 자신의 역사로부터 근대사회의 이념을 제시하기 위해 저술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이 나온 다음에야 단군 왕검은 움직일 수가 없는 역사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나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신화가 역사적 사건으로 복원된 것이다.
  이런 일은 주관적 의지와 심리적 소망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위와 같이 신화나 설화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에 이루어진 단군관계 기록, 곧 "조선상고사"가 나온 이후에 씌어진 많은 단군관계 기록들은 나름대로 치밀한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신화적 이야기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단군 왕검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그 언젠가 오랜 세월에 걸쳐 단군신화로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화와 설화로 남아 있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주 그런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가능성이야말로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이었다고 믿는다. 거기에는 과거를 현실적 삶의 지표로 되살리지 못하고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소극적 삶의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 겨레의 시원이라고 믿고 있는 단군 왕검이 과연 우리의 첫 조상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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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의 시작은 누구부터인가

  중국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와 공자가 엮은 "춘추" 및 "상서"이다. 그 가운데 역사서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가장 어려워한 주제는 중국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기"의 첫 부분에서 그런 고민의 결론부터 밝히면서 '황제시대'를 중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유적이나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고, 전해지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다고 보았던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은 우리가 "사기"의 이 부분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기"의 첫 부분인 "오제본기"의 첫 문단은 황제의 내력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소전'의 후예로서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황하 중상류의 한 갈래인 희수 근처에서 자랐기 때문에 뒷날 성을 희(제비라는 뜻)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황제의 내력을 밝힌 뒤 사마천의 붓끝은 황제가 황하 유역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은 탁록이란 벌판에서 벌어진 치우와의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수십 번의 패배 끝에 외부세력("사기"에서는 신적인 힘으로 표현되고 있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황제뿐만 아니라 치우란 인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를 달아놓았는데, "사기"에 붙어 있는 그 주들의 내용을 종합,정리해보면, 치우는 '하늘의 아들'이었으며, 풍백과 우사 등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삼국유사"의 단군사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내용이다. 심지어 공안국은 "치우란 구려(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옛이름)의 임금 이름이었다"고 단정짓기도 했다.
  그러면 뒷날까지 동아시아의 전쟁신으로 받들어진 치우가 활동했던 중심무대는 어디였을까? 치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안다면 그의 활동무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군주들은 대부분 그 세력중심지에 묻히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의 주민들은 매년 시월 상달에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기록이 타당하다면 치우의 세력중심지는 산동성 근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떤 종족에 속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기"의 주에서 치우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당시 '하늘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동아시아 기마종족만의 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구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래 우리 겨레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기마종족을 표현하는 이름이며, 실제로 한나라 사람은 여러 기마종족의 연맹체였던 고구려를 곧잘 구려라고 불렀다.
  계연수가 엮은 "환단고기" 또한 치우를 단군시대 이전에 살았던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성기'에는 치우가 배달나라의 14대 환웅인 자오지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치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구전이나 설화 및 신화 등 이곳저곳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심지어 그의 초상을 본뜬 귀신 얼굴은 오랫동안 일종의 액막이 부적처럼 기와에 새겨지기도 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을까?
  은허(은의 유적지)의 발굴로 유명한 둥쭤빈이 "갑골문단대연구례"에서 밝힌 연표에 따르면 황제인 공손헌원은 서기전 269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전쟁을 벌였던 치우도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환단고기"의 '삼성기'에서는 치우가 서기전 2707년에 환웅이 되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연도까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고, 그것을 믿는 대신 다른 것을 의심할 따름이다.
  '이때 이미 그런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이 어떻게 그 뒤 4백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가상의 신화적인 단군시대를 열었단 말인가?'
  의심 뒤의 결론은 명백하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치우를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할 때, 왕검 이후 단군의 시대는 이미 치우의 시대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을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치우가 도읍을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가리키는 바가 크다. 아울러 "환단고기"가 비록 구전 등을 정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 상당한 진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이겼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공손헌원계와 치우계는 틀림없이 나누어졌을 것이고, 그 뒤 그들의 세력중심지는 새롭게 설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치우계는 중국 동북부의 기마종족계로 남았고, 공손헌원계는 황하 중서부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이루게 되었다. 공손헌원은 중국 북동부의 기마종족계에서 확인되는 고유한 성인 공손씨에서 다시 희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희는 황하의 중서부와 관련된 지명으로 그곳이 바로 그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치우의 무덤이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 '지리지'의 기록은 치우의 근거지가 어디였는가를 말해준다. 물론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더라도 대략 그 시기부터 두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한편 서로 닮았고, 한편 서로 다르다.
  본래 치우계나 공손선원계는 모두 기마종족 내부의 세력이었지만, 이들은 기마종족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주도권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체분화를 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편의상 공손헌원계와 관련된 세력을 '중국계 기마종족'이라 부르고, 치우계와 관련된 세력을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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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겨레는 기마종족의 한 갈래

  그렇다면 기마종족이란 어떤 종족을 말하는 것일까?
  기마종족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해서, 각 개념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기마종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각 개념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기마종족은 말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교통혁명'을 일으킨 우수한 종족이며, 나아가 북반구의 고대세계를 설명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주체였다는 점이다.
  기마종족을 이해하는 개념이 매우 다양해진 데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다양한 관점도 한몫을 했을 터이지만, 체계적인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한 형편도 그만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기마종족의 갈래가 원래부터 다양했고 그들의 생활양식 또한 너무 다양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어떤 갈래의 기마종족은 이동범위가 매우 넓은 유랑목축인이었던 반면, 이동범위가 거의 없는 목축인도 있었고, 또 주기적으로 이동을 하는 농경생활인이 있었는가 하면 거의 모든 지역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과연 누가 기마종족의 원류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인간의 사회적 생활이 가족이나 씨족 등 혈연적인 작은 단위로부터 차츰 확대되어왔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예컨대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부족사회에서 다시 초기국가로, 초기국가에서 고대국가로, 그리고 고대국가에서 근대국가를 거쳐 세계사회로 확대,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기마문화가 없는 근,현대 원시종족들(특히 아프리카 종족들)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적 연구결과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상식을 뛰어넘어 교통혁명의 위대함을 이해해야만 기마종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식적 원리를 뛰어넘기 위해 먼저 현대적인 연방국가와는 다른 특이한 연방국가를 가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적인 연방국가는 자율권(또는 준자율권)을 갖고 있는 지역국가들의 자율적인 합의에 의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국가를 가리킨다. 예컨대 50개의 주로 구성된 미국이나 스위스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연방국가는 결국 땅과 땅의 연방인 셈이며, 이 국가체계에서 영토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기마종족들이 세웠던 고대세계의 연방은 고정된 영토를 가진 국가체계가 아니었다. 고대세계의 여러 기마종족들은 종족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연방은 특정한 지역이 아닌 특정한 종족을 중심단위로 이루어졌다. 기마종족의 연방은 땅과 땅의 연방이 아니라 종족과 종족의 연방으로서 이들의 영토는 늘 유동적이었던 셈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세계는 이처럼 여러 기마종족들 사이의 공존과 갈등관계에 따라 크고 작은 연맹체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던 세계였으며, 교통혁명과 농업혁명의 혜택을 고루 받지 못한 여러 토착종족들이 그들의 손에 정복되고 동화되어가던 세계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기마종족들은 차츰 강해졌고 어떤 종족은 도태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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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레의 뿌리

  우리 겨레의 혈통적 뿌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학술적 견해가 제시되었다. 예컨대 어떤 이는 고아시아족(Paleo-Asiatics)의 후예라고 했으며, 어떤 이는 알타이족의 한 갈래라 말했고, 다른 어떤 이는 스키토 시베리안(Scytho-Siberian)의 한 갈래라고 주장했다. 물론 옛 문헌에 따라 예족이나 맥족 또는 예맥족 등으로 겨레의 뿌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확정된 견해는 아직 없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교통혁명의 혜택을 누렸던 기마종족이라는 점이다.
  겨레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런 혼란은 우리 민족 자체가 한 갈래의 종족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유사한 종족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여러 종족들이 오랫동안 어우러져 살다가 마침내 하나의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 태어났다는 말이다.
  작은 연맹을 맺고 있던 여러 기마종족들이 점차 큰 연맹관계 속으로 얽혀들면서 기마종족 대연맹을 이루어낸 과정이 있었다면, 이와 아울러 그 대연맹이 분열되는 과정도 있었다. 고조선의 형성과 붕괴는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고대세계의 기마종족들은 이런저런 여건에 따라 연맹과 분열이라는 두 과정을 거듭했다.
  이런 분열과정, 특히 고조선의 붕괴과정에서 일부 종족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생활무대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선택된 주요한 개척지가 바로 만주벌판과 한반도였다. 그리고 이 개척지를 찾아온 기마종족은 한 갈래만이 아니었으며, 바로 이들이 공존과 갈등, 발전과 도태 등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이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종족으로 융합되었다. 그들이 바로 우리 겨레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은 융합을 통해 단일화된 이후의 우리 겨레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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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검은 치우의 후예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며 고조선의 첫 단군이었던 왕검은 바로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을 크게 통일시켰던 인물이며, 치우계로부터 정통성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실린 내용에서 왕검은 한님의 후예, 곧 환인(한님의 음차어)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표현된다. 즉 왕검은 하늘의 후예를 자처했다는 데서 치우계와 공통성을 가지며, 오늘날 발굴된 유물의 지역적 분포에서도 치우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만 그 사이에 몇백 년이라는 세월만이 가로 놓여 있을 따름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범의 이야기도 환웅의 시대, 곧 치우의 시대에 이루어진 종족분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연구결과에서도 산동성을 중간지대로 하여 그 동북부에서는 곰이 등장하는 종족 성립 신화가 많고, 서북부에서는 범과 관련된 종족 성립 신화가 많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환웅시대의 마지막 군주인 거불단의 형제)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로서, (왕검은) 신묘년(서기전 2370 년) 5월 이튿날 인시(동틀 무렵)에 박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하늘사람과 같은 진리스러움이 있어 모두 존경하고 따랐다. 14세 되던 갑진년(서기전 2357 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평을 듣고 그를 추대하여 '작은 임금'으로 삼아 부족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무진년(서기전 2333 년)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한님의 아들'로 추대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아홉 환족이 통합되었고, 신과 같은 그의 가르침이 널리 퍼졌다.

  이 기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왕검은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인품 때문에 지도자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왕검의 건국이념과 관련해볼 때, 이런 이야기는 왕검을 중국의 요임금처럼 꾸미기 위한 겉치레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건국이념과 관련된 왕검의 정신세계를 통해 당시의 문화수준을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왕검의 정치구호는 "널리 사람을 두텁게 한다"는 것과 "세상에서 진리를 구현해낸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구호에는 '삶의 주체'와 '삶의 방향'이 보이고 있는데, '홍익인간'은 삶의 주체가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재세리화'는 삶의 방향이 진리(하늘의 이치)와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서로가 이익 되는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사람이 하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왕검의 정치철학이었다.
  조화를 중시한 것은 단군시대에서 종족 내부의 운영원리를 밝힌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 단군조선이 여러 기마종족들로 이루어진
다종족연맹체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세계의 모든 사물이 그렇듯 종족과 종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연맹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왕검 이전의 시대는 분열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분열에 대한 반성이 건국이념에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분열에 대한 반성이 건국이념에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본질은 같으며 진리에 따라 조화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도 결국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종족과 종족 사이의 차별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연맹체 속에서 통일시켜내려는 원리였던 것이다. 물론 단군이 하늘의 후예를 자처한 이상 그 진리의 근거는 하늘의 뜻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왕건이 환인의 손자이고 환웅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단군조선이 전통을 존중하는 사회였음을 드러낸다. 즉 조상은 보다 하늘과 가까운 존재이며, 따라서 조상을 존중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중요한 행위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이처럼 왕검의 사고체계는 다종족연맹체라는 여건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회적 환경은 그의 사고체계를 더욱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원리, 곧 하늘(우주)과 인간의 동일성, 인간의 주체성, 인간과 인간의 조화, 현상보다는 당위를 향한 인간의 실천 등의 원리는 단군시대의 사회철학으로 계승되었고 그런 관점에서 고조선의 문명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단군시대와 가까운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먼 훗날까지 이런 사고방식은 면면히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곧 한님'이라는 동학의 사고방식도 이런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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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을 잃으면 커질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의 드넓은 초원과 거친 사막지대를 중심으로 특별한 지역적 경계조차 없이 살아가던 기마종족들이 청동기문화(한반도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서기전 10세기부터 청동기시대가 되었다는 주장은 교통혁명의 위력을 무시한 매우 어리석은 견해이다)의 형성과 함께 더욱 활발한 내부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종족들 사이의 계통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황제계와 치우계의 전쟁은 그런 분화의 상징이었으며, 그 이후 아시아 기마종족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두 갈래 속에서도 다양한 작은 갈래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도 꾸준히 분화되어갔다. 옛 시대를 서술하고 있는 기록에서 종종 보이는 다양한 종족의 명칭도 그런 분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누어 진 후에도 기마종족들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이 남아 있었으며, 문명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치우 이후 4백여 년이 채 지나지 못한 단군 왕검의 시대도 문명권의 분화가 초보적으로 이루어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을 관찰해보면 단군계는 기마종족의 주류로서 황하의 중상류 유역에 묶여버린 중국계보다 여전히 발전된 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중국계의 역사와 달리 우리들의 역사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중국이 역사를 자랑할 때 우리는 겨우 신화를 들먹거려야 했고, 중국이 호화로운 문화적 성과를 내세울 때 우리는 경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읊조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외부종족인 한족이나 경쟁종족인 일본인의 탓도 적지 않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까닭은 우리의 조상들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제대로 누릴 줄 몰랐던 것이다. 중국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길 때,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숨겨왔던 것이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짓밟고 왜곡시킬 때, 우리는 중국 역사를 우리 역사인 양 앵무새 짓을 하면서 겨레의 영웅들을 무식한 원시 괴물로 만들었던 탓이다. 그래서 치우는 자기 후손들에 의해 액막이 귀신 노릇이나 도맡았고, 왕검은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단골배우 정도로 잊혀져갔던 것이다. 자신의 후손들이 '요순시절'이나 들먹이며 자신을 야만인 대접할 때, 그 역사가 어찌 온전한 것이랴! 탄생기와
성장기가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으며, 배꼽 없는 역사를 가진 겨레가 어찌 제대로 커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결과 우리는 겨레 역사의  '알'(모든 사물의 원초적 뿌리)을 키워내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작아져왔다. 그것은 뿌리를 잃어버린 겨레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알을 상실하면 겨레의 힘도 그만큼 줄어들고, 마침내 나라땅마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겨레의 초기 역사가 바로 오늘날의 작은 한반도를 상징하는 첫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보통 한울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합성어이다. 우리말에서 원래 남성은 임(님)이라 했으며, 여성은 뉘(누이, 누리, 눌)라고 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님이라 하는 말은 남성을 가리키며, 누이라고 하는 말은 여성을 가리킨다. 그런 구분마저 불분명해진 것은 오늘날의 형편이다. 우리 조상들에게서 하늘은 남성의 상징이고 땅은 여성의 상징이었다. 즉 하늘은 큰 남성이고 땅은 큰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한임 또는 한님이라 했으며, 땅은 한눌(한뉘, 한누리)이라 했다. 우주를 가리킬 때에는 이 둘을 합쳐서 한눌님이라 불렀고, 남성적 하늘을 가리킬 때는 한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기자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잘 알려진 대로 기자는 은나라 말기의 지성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 역사에서도 한동안은 왕검 이후 천년의 세월을 감당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평가는 대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의문을 풀어가기 위해 먼저 우리는 기자를 높이 평가한 중요한 문헌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근조선(고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1392 년에 세워진 왕조를 근조선으로 부르기로 한다.) 중기의 당파정치에서 동인의 지도자였으며, 임진전쟁 때 재상을 맡기도 했던 윤두수는 "기자지"를 지었다. 또 '주기론'을 주장한 근조선의 이름난 성리학자 이이도 "기자실기"를 지었다.
  그밖에도 기자를 높이 평가한 옛 문헌은 상당히 많다. 직접적으로 기자를 다룬 문헌들 이외에도, 기자에 대한 이야기는 숱한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청주한씨와 행주기씨의 "세보"에서 41 대로 이어지는 기자조선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조상인 기자를 고조선의 정통 계승자로 설명하고 있다.
  관찬 역사서인 "고려사"에도 1102 년 10월 기자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평양성 밖 기림리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숭인전을 세웠다. 고려시대에는 그 사당에다 '유향전'이라는 이름으로 땅 50결에 대한 수조권(소작인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할 권리)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숭인전의 책임자를 숭인감이라 부르면서 기자의 후손인 선우씨 일가에게 그 벼슬을 대물림하도록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숭인전이 있는 자리가 기자의 묘터였다는 이야기를 마치 확실한 사실처럼 퍼뜨렸다.
  이처럼 기자에 대한 숱한 찬양기록과 여러 가지 숭배현상들이 근조선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나타난 점과 그 배경을 확인한 뒤, 그것을 근조선의 '기자증후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증후군은 주로 성리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렇다고 몇몇 성리학자들만의 특별한 증상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만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근조선의 통치자들은 앞장서서 이런 증후군을 부채질했으며, 마침내 기자를 왕검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왕검보다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즉 기자가 한반도로 이주한 덕분에 '동방예의지국'이 되었다고 하면서, 근조선이 '소중화'임을 자랑했던 것이다.
  기자를 우상화하는 일은 성리학의 정치적 명분, 곧 중화사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겨레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소중화 의식, 그 소중화 의식은 단순한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혈연적 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근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이다. 그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까닭이 '기자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기자의 한반도 망명설을 부정하고 기자를 배척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 또한 기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나라가 위기를 맞이하여 겨레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기자를 거부했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자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이 나라의 소중화적 정통성도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렸다.
  그렇다면 기자를 끌어들여 소중화의 구호를 합리화하려던 성리학자들의 이야기는 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기자를 겨레역사에서 몰아내어 민족의 자주성을 일깨우고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던 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은 모두 타당한 것일까?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주장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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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무덤

  결론부터 밝히자면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이주해왔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기자" '송세가'편에 달린 두예의 주에는 현재의 허난 성 지역인 양나라 땅 몽현 박벌성에 은나라 탕임금의 무덤과 함께 기자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자의 무덤 위치와 관련된 기록은 "대청일통지" 172권에도 남아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서화는 지난날 기라는 이름을 가졌던 땅인데 개봉부로부터 90리 서쪽에 있으며, 성인께서 처음에 송나라 기땅을 영지로 삼으셨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읍에는 기자대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은 모두 기자가 한반도의 평양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서화가 남북조시대에는 양나라 몽현이었기 때문에 두 기록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기자가 은나라 말기의 이름난 지성인이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가장 오래된 중국 고전의 하나인 "상서"를 보면, 기자는 감옥에서 풀려나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회남자"와 "대대례기", "사기", "죽서기년" 등의 귀중한 문헌에서도 기자는 모두 은나라 말기의 최고 지성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기자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어느 계통의 종족 지도자였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확인해보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기자는 결코 중국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그런 시기의 지성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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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기자가 역사에 등장할 당시 동아시아 사회는 어떠했을까? 한나라 때 유향이 편찬한 "설원"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가 죽은 뒤 많은 지식인들이 해설을 붙인 결과, 그 책은 일종의 백과전서적인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책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몇 구절 실려 있다. 간략하게 그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은나라 임금 탕이 하나라 임금 걸을 정벌하려 할 때, 이윤은 '정벌부터 하지 마시고 조공의 양을 줄여 반응을 살펴본 다음에 정벌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윤의 말대로) 그렇게 하자 걸이 화가 나서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므로, 이윤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잘못하면 우리가 화를 입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탕은 걸에게 잘못을 아뢰고 다시 (종정과 같이)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은나라가 다시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자, 걸은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는데,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이윤은 하나라를 정벌하고자 주장했으며, 탕이 이윤의 주장을 따라 걸을 정벌하자, 걸은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런 내용은 "상서"나 "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이 기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구이라고 부르는 세력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정세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구이가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들이 세운 연맹국가가 고조선임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노릴 무렵에 고조선은 이미 동아시아의 전체 판도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강성함은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자가 된 다음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은나라는 고조선과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은나라의 중심세력 그 자체도 기마종족의 한 계열이었다. 즉 이 시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문명주도 세력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마종족이었다. 요컨대 은나라도 여전히 기마종족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정치세력일 따름이었으며,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명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기록은 하족이나 은족 및 구이(고조선)가 모두 기마종족의 한 갈래이고, 그 가운데 은족과 하족이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 강력한 무력을 가진 구이가 은족과 손잡자 패배한 하족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남하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중국이 중국다운 독자적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남쪽으로 도망갔던 하족의 후예들이 은 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뒤의 일이다. 즉 백이와 숙제 및 기자 등 은족의 망명인들이 황하의 중상류로부터 황하의 하류 및 요동과 요서 일대로 밀려난 뒤에야 비로소 '한족'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종족 내부투쟁'에서 밀려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섰던 하족은 일찍부터 남부(물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살고 있던 토착 남방종족들과 완전한 혼거단계에 들어갔다. 바로 이 혼거,융합 과정을 통해 독특한 정치적,문화적 역량을 축적한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한 갈래인 서부의 주족이 다시 황하 중상류를 빼앗았으며, 다른 한족들을 통합하였다.
  따라서 주나라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혼혈 한족이 자신의 계보를 하나라에서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을 '여러 하족'이라고 불렀으며, 주나라 왕족은 자신의 성이 황제와 마찬가지로 희씨라고 주장했다. 그들을 문화적으로 훈련시킨 것은 하나라의 망명세력과 그 문화였으며, 그들의 그런 주장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혈연과 문명에서 절반만 하나라의 후예일 뿐이었다. 그들은 수백여 년에 걸쳐 이미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낸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융합한족이라 불러도 좋다)으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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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는 한족계 지성인이 아니다

  한족이 주나라를 앞세워 황하 중상류를 차지할 무렵, 은나라를 비롯한 기마종족들은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한걸음 더 발전해 있었다. 은나라의 유적지와 황하 중하류의 여러 지역에서 발굴된 당시의 수준 높은 유물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은나라와 혼혈 한족은 문화적인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발전의 단계에서는 한족이 크게 뒤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한족이 세운 주나라는 하나라를 자신의 정통으로 삼으면서도 은나라의 문화를 절대적으로 배척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에 황하의 중상류를 차지한 주나라가 벌인 첫 정치사업은 하나라의 원수였던 은나라의 유민들을 최대한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은나라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한족사회의 상층으로 남아 은족의 문명을 전승하고 그것을 재창조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러 자료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은나라가 멸망한 다음까지 잔류한 은족의 후예들은 주나라 속에서 제2차 혼혈과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족사회 속에서 그들의 문화적 우수성을 발휘하면서 '유'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화층을 이루었다.
  한편 한족과의 결탁을 거부한 세력들은 기마종족의 다른 원류인 고조선과 결탁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일정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황하의 하류 및 그 동북부 지역으로 옮겨와 살았다. 백이와 숙제가 도망가 살았다고 하는 '고죽군'이나 기자가 도망가 살았다고 하는 '서화'가 모두 그런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산둥 성, 허난 성, 허베이 성 일대가 거기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주나라 사이에서 중간지대를 이루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볼 경우 이 중간지대는 은나라에 대한 불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곳이었으며, 고조선의 입장에서 볼 경우 그곳은 중국계 기마종족이 일정하게 침입해온 것을 뜻했다.
  기자조선이라는 명칭은 뒷사람들이 은나라 유민집단을 높여 부르던 것이거나 중국 한족이 그 집단의 종족계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부르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조선이 바이칼 호 일대와 요동,요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기마종족의 구세력 곧 '치우계'의 정통세력이라면, 이른바 기자계(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는 황하로부터 밀려난 중국계 기마종족의 잔존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자는 원래 고조선의 지도자인 단군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단군이 되지 못했으며, 은나라 유민집단의 상징적 인물이었을 따름이다.
  이처럼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중국 한족의 지성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그는 원래 중국계 기마종족의 지성인이었으며, 단군이 다스리는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후예들이 육로나 해로를 타고 한반도의 남부로 이동했다는 점까지 고려할 때, 기자는 중국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기자(계)의 이주는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나라의 명망과 기자(계)의 이주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내부분열'(황제계와 치우계의 분열) 이후 독자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두 세력, 곧 중국계 기마종족과 치우계 기마종족이 다시 하나의 영역에서 통합을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통합과정과 더불어 중국적 문명이라는 것과 기마종족적 문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중국 한족은 동북아시아를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된 두려운 미정복지라고 생각했으며, 기마종족들은 중국 대륙을 되찾아야만 할 고토로 생각하게 되었다. 주나라 이후부터 한족의 통치자들은 동북부의 기마종족들을 '매우 발전된 두려운 오랑캐'로 묘사했는데, 이것은 기마종족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미정복지에 대한 적대심 및 경계심을 복합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기마종족들도 이때부터 한족과 금을 긋고 적대심과 경계심을 높이면서 수천 년 동안이나 끊임없는 정복사업을 시도했다. 그래서 중국 역사는 한편으로 한족과 기마종족 사이의 대립,투쟁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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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사상의 선각자, 기자

  이런 중요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후대에 전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기록을 남겼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의 저작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쳤다는 기록만이 "상서"등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홍범구주의 내용을 가지고 알아낼 도리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대로 홍범은 오행이론의 문헌적 효시가 되는 사상이다.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흙을 기본 요소로 하는 이 사상은 각 기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설명한다. 이 이론은 순수한 다원론이라기보다 다원적 일원론에 가까운데, 그것은 이 다섯 요소의 상호작용이라는 불가분의 총체적 덩어리가 곧 우주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손가락은 다섯이라도 결국 하나의 팔에 소속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홍범구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도 다섯 요소를 본떠 '다섯 가지의 일'로 판단하는데, '외모와 말과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홍범구주에는 오행을 기초로 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비 오고 맑고 따뜻하고 춥고 바람 부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 하늘의 기운을 파악하는 '서징'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세 가지 진리스러움'이라는 부분이다.
'정직과 강함과 부드러움'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덕목이다. 일의 종류에 따라 이런 덕목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면 재앙이 미치는 것으로 보는데, 이 재앙의 집행자는 바로 하늘이거나 하늘의 대리인이다.
  이 부분은 기마종족 특유의 하늘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즉 거기에는 인간을 주체적인 행위자로 설정하고 하늘을 그 행위의 근거로 삼는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주체성이란 부분이 좀더 구체적으로 이론화된 점은 왕검시대의 신앙적 관점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자의 사상은 왕검의 사상보다 훨씬 구체적,체계적으로 사물과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신앙적 사상에서 과학적 사상으로 한걸음 다가섰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범의 사상은 단군계의 제사장적 전통을 보충할 수 있는 이론이었으며 아울러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한' 이론이기도 했다.
  인간의 지위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서, 홍범은 기존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인간들 사이의 합의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홍범에 보이는 대동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동이란 임금에게 큰 의문이 있을 경우, 먼저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고 원로나 관리들에게 물어보며 백성에게도 물어보고 점치는 이에게도 물어보아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동에서는 제사장적 기능이 벌써 임금과 점치는 사람으로 구분될 뿐 아니라, 원로 및 백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홍범의 대동사상은 제사장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왕이나 원로보다는 점치는 이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제사장의 기능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홍범은 기자의 사상이 이미 신앙적인 권위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비신앙적인 사유체계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따라 사회가 운영되던 고조선에 거대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기자의 사상이 제사장적 전통에 안주하던 고조선을 뒤흔드는 순간, 제사장적 전통과 기자(계)의 전통은 한편 갈등하고 다른 한편 타협,융합하는 오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기마종족적인 또는 조선적인 문명'이 태동의 단계를 넘어 성장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기자는 겨레 역사의 '알'을 한걸음 키워낸 사상적 공헌자로 재부각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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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기자는 우리 겨레의 문명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중국 한족의 지식인도 아니었지만, 고조선의 단군도 아니었다. 그는 고조선과 계보가 달랐던 중국계 기마종족의 지식인이었으며, 혼혈 한족이 주나라를 세우자 고조선의 영역으로 망명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망명지도 물론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의 망명은 고조선이 다른 계열의 합류, 특히 문화적 합류를 통해 한층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요컨대 기자를 비롯한 중국계 기마종족의 이동,합류로 말미암아 고조선에서는 제사장과 다른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학문의 마당을 닦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기자의 혈통이나 기자의 망명지에 대해서만 호기심을 보일 뿐, 기자와 관련된 핵심적인 주제를 놓치고 있다. 그 결과 기자와 관련된 시대도 사실상 잃어버린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자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본 당시의 고대세계는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기자가 합류한 이후의 고조선이 바로 우리 역사의 기본 범위로서, 뒷날 이 범위 안에서 일어났던 기마종족 내부의 다양한 분열과 통합은 모두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자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우리 역사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잃고 나서 오로지 '삼국시대' 이후로부터 우리 역사의 범위를 찾고 있으니, 그 범위가 기껏 영토적으로 만주벌판을 꿈꾸는 데 그칠 따름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토가 아니라 그 영토 속에서 과연 누가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인데도 말이다.
  그 이전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와 함께 역사를 누려왔고 나아가 앞으로도 함께 역사를 누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기마종족 형제들을 '외적'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는 외부종족인 중국 한족과 결탁하여 우리의 기마종족 형제들을 외적으로 여기고 그들과 무분별한 싸움을 벌여온 '서글픈 국난극복의 역사'가 자주 눈에 띈다.
  송나라와 손잡고 형제종족인 거란족이나 몽고족과 혈전을 치르었으며, 명나라와 손잡기 위해 이웃인 만주족과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바로 이 모두가 역사를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단일민족의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온 병폐이며, 한반도(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또 하나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무나 길었던 삼국시대
  (700 년 동안의 분열이 가져다준 역사적 상처)

  고조선의 해체와 열국시대

  삼국의 성립은 단군조선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거대연맹체였던 고조선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을 때, 각 종족은 그 연맹의 구성원으로 존재했으며, 종족 독립을 위해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중국 한족이 진이라는 통일국가를 세우고 다시 한이라는 국가를 세울 무렵, 고조선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중국계 기마종족(기자계의 은나라 유민)을 중심으로 세워진 연나라가 한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자, 그 유민의 다수가 고조선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다. '위만조선'은 바로 그들이 고조선의 영역에 세운 또 하나의 독립국가를 가리킨다. 즉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계승자가 아니라 고조선과 동시에 존재하던 별도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자 고조선 내부의 일부 세력은 이들과 대립,투쟁했고, 이 대립에서 패배한 세력은 다시 한반도로 들어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마한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만이 조선으로 공격해오자, (고조선의) 왕 (가운데 한 명)이었던 준이 궁인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 무렵 한반도에는 이미 다른 세력들도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크게 보아 두 갈래의 세력이 이미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기자계의 초기 이주자들로서 이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 변한이라는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부여계의 독립과 함께 밀려내려온 원부여계의 이주자들로서 이들은 혁거세를 지도자로 하여 토착 6부촌을 통합하고 신라를 세웠다.
  기자계의 후기 망명인들까지 모두 위만과 함께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이주해왔는데,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진한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나라 때의 망명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살기도 했는데, 마한이 동쪽 지역을 쪼개주었으며, 그들은 서로를 도(두레의 음차어로 오늘날 복수형을 나타내는 우리말의 '들'과 같다)라고 불렀는데, 발음이 중국인과 비슷해서 때로는 진한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조선이 구심력이 약화되자, 각 종족들은 나름대로 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 가운데 단군의 후계자를 자칭하던 가장 큰 독립국가는 해모수의 북부여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전 239 년 4월 8일에) 하늘의 군주(해모수)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흘승골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우고 북부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북부여에 의해 기존의 연맹체인 고조선은 거의 무너졌으며, 그 자리를 위만조선과 북부여가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왕조인 한나라와 맞서면서 때로 영토가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 내부분열도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분열된 세력이 이른바 '한사군'이었다. 따라서 한사군은 실제로 한나라에 소속된 군이 아니었고, 그 위치도 산동성 근처였다. 그들이 형식적으로 한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뒷날 중국인들이 이들 4군에다 임의로 '한'이란 말을 덧붙인 것이다.
  위만조선처럼 북부여도 내부의 세력경쟁 과정에서 다시 분화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의 후계자였던 부루의 세력은 동쪽으로 밀려나 가섭원이란 곳에서 동부여를 세웠으며, 고주몽의 세력이 그 세력권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졸본이란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 나라가 바로 '졸본부여'라고도 불리는 고구려이다.
  고구려에서도 고주몽의 후계권을 둘러싸고 분열이 생겼는데, 후계자가 되지 못한 비류와 온조의 세력은 독립해서 각각 요서지역과 한반도 중서부에서 십제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점차 커져서 백제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여 또한 계속 분열되어갔다.
  당시에 독립한 세력은 그뿐이 아니었다. 말갈이나 발해(고구려 멸망 이후의 발해가 아님), 옥저, 동예, 낙랑, 몽골, 선비, 돌궐, 흉노 등의 세력이 모두 독립을 내세우며 나름대로 작은 연맹체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해체되면서 각 종족이 복잡하게 분열,독립해간 이 시기를 삼한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옳지 못하다. 삼국 이전의 시대라는 뜻으로 '원삼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분열의 시대라는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열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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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는 반환점

  열국시대가 고조선의 해체와 함께 이루어진 분열기였다면, 삼국시대는 분열에서 다시 통합을 이루어가는 반환점이었다. 삼국 가운데 신라가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세워지기 전에 6부촌이 있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은 미리 이주해온 가자계의 정착민들과 토착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이주해온 세력을 받아들이고 그 지도자였던 혁거세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웠는데, 이 과정이 신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추대한 지도자의 호칭이 거서간이고 그것이 진한 사람들의 용어라고 했으므로, 진한인들 또한 신라라는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38 년조에도 진한인들이 신라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중국에서 살던 사람들(중국지인이라고 하였고 중국인이라고 중국인이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 진나라의 건국으로 살기가 어려워 동쪽으로 건너왔는데, 대부분 마한 땅 동쪽에서 살며 진한인들과 섞여서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건국과 함께 이미 세 갈래 이상의 종족이 연맹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 정착자인 6부촌 계열과 중국계 기마종족의 이주자(진한인) 및 지도자로 추대된 혁거세 계열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기마종족으로서 일찍이 고조선의 구성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는 또 다른 이주집단인 석탈해계를 받아들였고, 뒤에 다시 북부여계의 이주집단인 김알지계를 받아들였으며, 뒷날 가야계까지 받아들여 여러 갈래의 종족이 공존하는 연맹국가를 발전시켰다. 즉 신라는 초기부터 그 이전의 다른 독립국과 달리 분열을 마무리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성격을 띠었던 셈이다.
  그런 성격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내부의 5부족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연맹국가로 출발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또 고구려는 건국 이후 왕성한 정복사업을 벌임으로써 종족통합을 시도했는데, 옥저나 동부여 및 낙랑 등이 모두 무력에 의해 통합된 나라였다.
  백제의 경우 비류와 온조를 각각 지도자로 하던 초기의 두 세력이 점차 통합되었으며, 나아가 마한까지 통합함으로써 서서히 큰 국가로 발돋움해갔다. 또 백제는 강력한 해상주도권을 가지고 중국 대륙의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의 주민들까지 통합해나갔다.
  이처럼 삼국의 건국 시기는 각 나라의 독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계 가마종족의 해체,분열기를 통합기로 전환시키는 반환점, 곧 열국시대의 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문화적 내용이 결국 통합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삼국 이후의 역사는 삼국의 사상과 문화라는 압축 프로그램이 풀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의 분열기간이 너무 길었던 데서 비롯된다. 무려 7백여 년이 넘어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기나긴 세월은 통합의 근본 범위가 흔들리고, 통합의 방향이 비뚤어지며, 통합의 성격이 변질될 수도 있는 그런 과정이었다. 즉 분열이 굳어지고 전통이 위협받기에 충분한 세월이 지루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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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고,동맹 등에서 확인되는 제사의식과 하늘사상

  복잡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삼국은 모두 고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였다. 또 그들 국가는 모두 고조선과 같은 거대한 연맹을 주도적으로 세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삼국은 나름대로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문화적,사상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여 통합의 역량을 키우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 및 유학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 각 나라가 가장 먼저 발전시켜내려고 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삼국의 뿌리가 되는 고조선의 하늘사상과 하늘숭배 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사기"에도 그런 내용의 기록이 자주 보이며, 중국 역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자주 보이며, 중국 역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구려와 신라에는 도리에 맞지 않게 세운 사당이 있다"고 서술한 기록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기마종족과 계보가 달랐던 한족의 역사가들은 오만방자하게도 하늘사상에 뿌리를 둔 우리 겨레의 문화적,사회적 전통을 천박하고 무식한 행위로 평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책임편찬자인 김부식도 그런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편에 보이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북사"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늘 10월달(우리 겨레는 원래 봄을 계절의 출발로 삼지 않고 겨울을 출발로 삼았기에 10월이 첫달이었으며, 12월은 세 번째 달이라는 뜻에서 섣달이라 불렀다)에 제사를 지내는데 도리에 맞지 않는 귀신집이 많다. 신을 모시는 두 개의 사당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로 조각한 여인네의 우상을 받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시조 부여신의 아들을 받들었다. 이 두 곳에 모두 관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보내어 지킨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의례에 대한 기록이 서너 대목 더 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차이점이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백제의 조상신 이름이 구태로서 신 이름이 다를 따름이다.
  김부식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마종족의 하늘숭배는 이처럼 조상신에 대한 숭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자신들의 조상신을 받듦으로써 삼국 공통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상들이 모시던 하늘님도 여전히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이 또한 동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등에서 확인이 된다. 신라의 경우에도 그런 의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늘과 조상신에 대한 숭배의식뿐만 아니라 삼국은 사상적으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기자계 이후 형성된 오행사상을 중시했다. 즉 삼국은 제사의식을 비롯한 사상적 측면에서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경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오행사상이란 기자의 홍범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모든 사물을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흙의 다섯 가지 요소로 설명하는 사상이다.

오행사상은 기본요소설로부터 시작하는 이론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적용이 되었는데, 방위를 나타낼 경우 동서남북과 함께 중앙을 포함하여 '오방'이라 했다. 또 색깔을 나타낼 경우 풀색, 노을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을 들어 '오색'이라 했고, 소리에서는 궁상각치우의 '오음'을 내놓았으며, 맛에서는 시고 쓰고 달고 맵고 짠맛을 들어 '오미'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별을 관찰할 경우에도 각 요소에 부합하는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을 기본 행성으로 설정했다.
  삼국에 이런 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삼국사기" '잡지' '관직'편에서는 "북사"를 인용해서 백제의 관직을 설명하는데, "서울에는 방을 두고 방마다 오부로 나누었으며 이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라 했다. 또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서 평민들이 살았으며, 부는 군사 500 명을 거느렸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모든 지방조직은 다섯이라는 숫자에 따라 틀이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다섯 부족 연맹체계나 5부 욕살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런 조직체계는 고구려나 백제가 오행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북사"의 다른 기록에서 "백제에는 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한 부분이나, "삼국지" '위지' '종회전'에서 왕필이 "주역"을 해석하면서 고구려 역학자들의 오행사상을 인용하였다고 한 부분도 모두 오행사상이 백제나 고구려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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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오행사상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우리 역사에서 오행사상은 '한사군'(왜곡된 표현이지만) 시기에 처음 들어왔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유행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행사상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추연이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이론이라고 한다. 또 중국 후한 때 살았던 장형이란 인물은 오행사상이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럴 경우 삼국시대에 오행사상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은 삼국이 중국사상에 너무나도 빨리 물들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오행사상의 내용과 사상적 계보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기자(계)가 제시한 단군조선의 오행사상에서 오행은 각각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한 사물의 내부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예컨대 기자(계)의 오행사상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다섯 가지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으며, 이 다섯 가지 기운(물:끌어내리는 힘, 불:끌어올리는 힘, 나무:오르내리는 힘, 쇠:오므리는 힘, 흙:퍼지는 힘)이 사물 내부에서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각 사물의 성격이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 따르면 실제의 불 속에도 불을 제외한 네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으며, 물이나 나무 등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즉 기자(계)의 오행사상은 다원론이 아니라 다원론적 성격을 가진 일원론인 것이다.
  그런데 추연이 제시한 중국적 오행사상은 오행의 각 요소를 독립적으로 설정했다. 즉 불의 성격을 띤 사물과 물의 성격을 띤 사물 등이 별도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추연은 그런 사물들 사이의 상생,상극관계에 의해 우주의 운동을 설명했다. "나무는 흙을 이기고,
쇠는 나무를 이기며, 불은 쇠를 이기고, 물은 불을 이기며, 흙은 물을 이긴다"고 하는 '오행상승설'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불기운을 띤 사람은 물기운을 띤 사람과 상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오행사상은 이름만 같을 뿐이며, 내용상 기자(계)의 오행사상과 크게 다르다.
  중국에서 전국시대 말기와 진,한 초기에 오행사상이 성립되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오행사상이 유행하게 된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히 추연류의 오행사상이 "상서"의 오행사상과는 별도로 성립된 시기를 말할 따름이다. 중국에서도 춘추시대 이전부터 이미 오행사상이 있었음을 "상서"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행사상이 중국에서 수입되었다는 추측도 잘못된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수입된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오행사상은 근본적으로 기마종족계가 중국으로 수출한 사상적 요소였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계 기마종족이 은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국의 혼혈 한족에게 전수해준 사상이 바로 오행사상이다.
  오행사상은 이론적 성격으로도 기마종족의 사상일 수밖에 없으며(그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모자라는 글 "한국 고대지성사 산책"에 정리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 그들의 종족적 특징에 맞게 나름대로 이론을 변화시켜 잠시 동안 유행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기마종족 고유의 오행사상을 '일원론적 오행론'이라고 하고, 잠시 유행했던 중국계의 오행사상을 '다원론적 오행사상'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름대로 구분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무덤이 그 시대의 문화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과 관련된 의식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설령 죽은 이의 몸을 사막에 내버리고 그 시체를 새들의 모이로 삼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진지함이 있다. 그래서 무덤에는 항상 그 시대가 묻혀 있다.
  그런데 중국의 무덤에서 음향오행과 관련된 흔적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산동반도나 만주지역 등 기마종족이 활동했던 지역에서는 그런 의식과 관련된 무덤이 자주 나타나지만, 그것은 지난날 그 땅에 살았던 고구려나 대진(발해) 사람의 것으로, 중국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에서 오행사상은 잠시 유행하던 하나의 철학 분파에 지나지 않았으며, 무덤을 장식할 만큼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마종족의 과거 역사, 특히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가 묻혀 있는 무덤에는 늘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예컨대 거의 모든 고구려의 무덤들에는 죽은 이의 시신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사신도를 그려놓았다. 쌍영총이나 무용총 및 강서대묘 등 모든 시기에 걸쳐 고구려의 무덤에는 사신도가 남아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그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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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듬어지는 겨레 문화

  삼국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삼국시대의 임금(임검, 사람을 뜻하는 임과 신을 뜻하는 검의 합성어)일 것이다. 비록 독재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임금은 각 국가의 최고권력자임과 아울러 그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의 임금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제사의식의 최고 책임자이자 여러 제사장들의 대표였다. 그는 하늘을 숭배하는 국가적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조상신의 대표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듯, 그는 오행사상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고 통치를 하는 등 오행사상의 신봉자 또는 집행자이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기자계의 이주 이후 형성된 지식인적인 문화와 기존의 제사장적인 문화가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 두 갈래의 입장이 통합됨으로써 우리 겨레의 '알'이 문화적으로 한층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들이 마치 종교인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행사상의 계승자들은 철학자를 닮은 듯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관점이 통합되지 않을 때, '정교일치'는 실제로 신앙이 지배하는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통합될 때, 정교일치는 신앙과 철학적 이론이 함께 지배하는 정치가 된다. 즉 두 관점이 통합되면 정치의 내용이 질적으로 성숙됨과 아울러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하며, 문화 또한 질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셈이다.
  중국에서도 정치와 문화가 질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제사장적 권위와 맞서는 학문(철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기마종족이 남겨놓은 오행사상을 습득한 '유'라고 부르는 계층이 바로 그런 요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컨대 공자라는 위대한 지성인도 그런 사람으로서, 제사장적인 전통과 지식인적인 요인의 융합을 주장한 위대한 선각자였다. 실제로 그가 남긴 역사서와 철학서는 그런 융합의 입장을 서술한 선구자의 유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행사상은 우리 역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변화를 몰고 왔다. 따라서 오행사상이라는 지식인적 요소와 하늘숭배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통합되는 삼국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경우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 화랑이라는 교육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의 교육내용 또한 그런 통합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시대 초기는 기마종족적 문명이 체계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통합된 기마종족의 정신세계는 제사장적 전통이 오행사상가적 전통을 포용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는데, 제사장적 전통은 통합의 정신적 방향이 되었고 오행사상가적 전통은 통합의 실용적 근거가 되었다.
  아울러 고대국가라는 보다 폭 넓은 국가체계도 통합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요컨대 고대국가의 임금과 귀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 한편 제사장적 전통을 이용했지만, 더욱 복잡해진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다른 한편 실용적 지식을 활용했던 것이다. 삼국시대는 이 두 부류의 지적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제공한 최초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화적 통합과 비례하는 현실적 통합국가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세 나라의 경쟁관계는 너무나도 균형 잡힌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특별히 앞서가지 못했던 탓이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하고 문화의 내용이 통합을 추구할 경우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실체가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삼국시대는 그런 일반론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시대였다. '삼국시대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긴 안정된 분열의 시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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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수입을 위한 두 가지 관점

  삼국시대는 사상적으로 제사장적인 전통과 지식인적인 요소를 공존,통합시킨 시대이면서 분열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삼국 각 나라는 좀더 유리한 입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축적하는 데도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삼국 각 나라는 천여 년간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중국의 사고체계를 받아들였으며, 기마종족적 사고체계와는 상당한 이질감이 있던 불교까지 받아들여 활용하려 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유교나 불교 및 도교 등을 도입한 사실에 대해서 사대주의적 해석을 내놓는다. 즉 중국이나 인도의 높은 문명이 비로소 도입될 정도로 삼국시대의 문화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였으며, 문화적 주체성도 허약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삼국시대 이전의 겨레 문화가 주로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등 원시적인 신앙체계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의 뒤편에는 편견으로 무장한 사회이론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일면적인 논리로서, 높은 문화가 낮은 문화를 흡수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 물론 삼국시대의 문화 도입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문화가 흘러들어온 듯한 측면도 있고, 삼국이 중국 문화를 흡수한 듯한 측면도 있는 탓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마종족의 정치,군사적 실력이나 문화적 발전도가 결코 중국 한족보다 낮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두 개 이상의 문화가 만날 때 그들 문화는 서로 닮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한 측면만이 역사에 부각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 때문이다. 이런 자기 경멸감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점차 역사적 편견으로 굳어져간 것이다.
  첫째 요인은 삼국 이전의 우리 문화를 파헤치는 작업이 예로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 시대를 제대로 연구한 기록을 보지 못했다. 삼국 이전의 시대에 관심을 기울인 작업들도 영토 문제에만 집착하기 일쑤였다. 그런 것은 심리적 위안감이나 민족패권주의만 부추길 뿐, 겨레의 진정한 역량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요인은 중국 한족의 농간과 거기에 빌붙은 눈먼 사대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대주의자들은 자신의 전통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비록 일시적 필요성 때문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강자이니 중국 한족과 결탁함으로써, 자신의 겨레를 오랑캐라는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더 더욱 중요한 점은 삼국시대가 고조선 이후의 분열기였다는 데 있다. 당시 중국 한족은 오랜 분열 끝에 통일을 이루었고 기마종족은 거꾸로 연맹이 해체되어 분열됨으로써, 동아시아의 현실적인 강자가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분열된 뒤 재통합을 추구하던 삼국은 치열한 내부경쟁을 벌여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각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나름대로 현실적 강자와 결탁해야만 했다. 사대주의는 바로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분열의 시대는 길었다. 무려 7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분열은 끝나지 않았다. 즉 사대주의의 처음은 정치적 임시방편이었으나 결국 너무나도 오랜 분열이 계속됨에 따라 그 임시방편이 결국 자신을 작게 만드는 굴레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서 문화적 주체성이 상실되거나 변질되었다. 요컨대 삼국시대라고 하는 오랜 안정적인 분열기가 결국 작은 겨레를 만든 주요한 요인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국시대라는 긴 분열기에서 분열과 통합의 시간적 함수관계를 읽어냄으로써, 민족분단의 장기화라는 우리 겨레의 현실적 처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세월의 흐름이 빠른 것을 고려한다면, 700 년과 50 년 가운데 어느 것이 길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분열의 끝이 빠를수록 역사적 상처는 적다. 분열의 일차적 끝은 한반도의 통합이겠지만, 그 다음에도 통합의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삼국시대 이후 잃어버린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대통합'이라는 과제를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로 부활시켜낼 현실적 가능성이 이런 각도에서 충분히 타진되어야 할 터이다.

    4. 외래사상에 흔들렸던 세 나라
  (전통사상을 버리고 수입사상에 의존한 삼국의 집권층)

    외래문화의 수입

  서양 문명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 아시아인들은 깊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분명 자기 고유의 문화가 있었지만, 새로 밀려온 서양문명은 그 고유 문화를 파괴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서양 문명을 배척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실용적인 측면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중국인들은 "중국적인 뿌리에 서양의 쓰임새를 결합하자"고 했고, 일본인들은 "일본의 혼과 서양의 재능을 결합시키자"고 했으며, 조선인들은 "동양적 원리에 서양문화의 기능을 결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루한 삼국시대에서 각 나라가 유학과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보여준 입장도 아마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불교를 수입할 때, 그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유학에 비해 불교는 전통문화와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기마종족의 한 갈래인 은나라 유민들이 주도한 사상이었지만,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탄생시킨 문화적 배경은 우리 겨레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유학도 중국 한족이 세운 주나라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기마종족 고유의 문화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즉 유학은 여전히 기마종족 문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기마종족 문화의 제사장적 측면을 줄이고 지식인적 기능을 늘린 것이었다.
  우리 겨레는 유학은 전통문화와 특별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한자도 원래부터 동아시아의 공용어였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외래문화라는 의식조차 없이 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는 유학과 다른 조건에서 우리 겨레와 만나게 되었다. 설령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불교의 창시자들도 우리 겨레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맺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의 사상적 내용성은 기마종족의 문화적 취향과 크게 다른 것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비록 중국이 먼저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경전을 한자로 옮겼으며, 삼국 각 나라는 한자로 된 경전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는 데 근본적인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들이 그것을 일러 어떤 이는 큰 밧줄이라 하고 다른 이는 큰 기둥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큰 부채 같다고 했듯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큰 사상은 현상적으로 다르게 표현될 뿐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문화적 배경에 따라 표현의 방법과 양식 및 그 깊이가 달라, 그 깊은 곳에 이르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차이를 둘러싸고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기마종족의 전통문화와 불교사상도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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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공인과 도입

  한반도에서 불교가 처음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 년인 372 년이었다.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이보다 12 년 뒤인 침류왕 원년에는 백제에서도 불교가 공인되었다.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오자, 임금이 그를 궁궐 안에 모시고 성심껏 경배하였으며, 마침내 불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그 뒤 150여 년이나 지나서야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 14 년인 527 년 이차돈이 순교를 함으로써 비로소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삼국은 모두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다. 366 년에 죽은 진나라의 승려 지둔과 고구려의 도인이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양고승전"이나 "해동고승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공인 수십 년 전에 이미 불교가 전파되고 있었던 셈이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아도와 같은 인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이처럼 불교는 공인되기 훨씬 이전에 삼국에 전파되었지만, 각 나라의 사정 때문에 공인이 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백제나 고구려의 경우 침류왕과 소수림왕 초기에 각각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로운 임금이 등장하면서 나름대로 혁신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 불교를 공인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불교가 공인되는 데 보다 어려운 여건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삼국에 전파됨으로써 그 시대의 지성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또 외래적인 신앙인 불교의 사고체계가 기마종족의 사고체계와 어떻게 갈등했으며, 마침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마종족 고유의 사상이 가지는 특성을 보여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며, 우리 문화사에서 거대한 흐름을 보여주는 갈랫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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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삼론종

  삼론종이란 인도 승려인 나가르주나가 지은 "중론"과 "십이문론" 및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데바가 지은 "백론"을 주요 경전으로 모아 성립된 종파이다. 이 종파는 중국 남북조시대 말기에 성립되어 수나라 때 크게 번창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및 일본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삼론종이 얼마나 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중국 삼론종의 집대성자가 요동 태생의 고구려 사람 승랑(일명 도랑)이고 삼론종을 일본 승려에게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된 이도 고구려의 혜관이란 사실로 미루어보아 삼론종은 고구려 내부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지 않고 외국에 포교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국가의 공인을 받을 정도였으니 상당히 성행하는 종파였다고 볼 수 있는 탓이다.
  중국의 경우 512 년에 양무제가 승려 열 명을 선발하여 승랑에게 불법을 배우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사상적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더구나 양무제가 선발한 승려들 가운데는 이미 승정이라는 최고위 승직에 오른 지적 같은 이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승랑의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혜관이 건너가 삼론학을 가르친 이래 고구려의 도등 등이 계속 초빙을 받아 삼론학을 강론했다.
  그러나 이런 유행은 수나라나 고구려, 백제나 일본 할 것 없이 일정계층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남북조와 그 뒤 수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철학은 여전히 유학이었다. 또한 후한 때 만들어진 도가풍의 오두미교를 신봉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구려에서도 불교를 공인한 왕실과 일부 지식인층 및 승려층이 불교계를 이끌고 있었을 뿐이었다. 불교는 아직 신흥종교였으며, 대부분의 지식인과 대중들은 기존의 전통적 사고체계와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불교는 일부 세력의 의도에 휘말려 급격히 수입되었을 따름이다.
  종족연맹을 벗어나 더욱 강력한 단일집권체제를 세우려던 고구려의 왕족에게는 새로운 질서를 뒷받침할 철학이 필요했다. 고구려의 왕족이 그런 배경에서 찾아낸 탁월한 사상이 바로 불교였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인간의 근본 이상과 일치하는 뛰어난 사상을 갖추고 있었지만, 왕족을 비롯한 소수층은 자신들의 권력독점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언가 다른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불교를 공인한 세력은 주로 왕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서 불교를 공인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이차돈을 사형시켜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렇듯 불교의 수입은 왕권 강화라는 측면과 기존 연맹체제의 고수라는 측면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상사적 쟁점이었다. 고구려 출신의 탁월한 불교이론가인 승랑이 고구려에서 그 꿈을 펴보지 못하고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 것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 속에서 불교가 받은 압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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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미륵불교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적 계보를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오는 기마종족 고유의 제사장적 전통을 거의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라라면, 백제는 상대적으로 그런 전통의 굴레가 약한 나라였다.
  백제를 세운 온조나 고구려의 둘째 임금인 태조 유리는 모두 주몽의 배다른(어머니의 종족계보가 서로 다른) 아들이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유리는 북부여에서부터 주몽을 찾아와 권력을 이어받음으로써 북부여와의 졸본부여의 제사장적 전통을 모두 이어받아야 했던 반면, 온조는 그런 전통을 상당히 가볍게 여겼던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온조와 열 명의 추종자들 및 그들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와 다른 새로운 사회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백제에서는 전통사상과 불교 사이의 갈등이 훨씬 적었으며, 왕권 또한 고구려보다 상당히 강력했다.
  백제에도 고구려처럼 부족회의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부족회의체도 고구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각 부족들은 왕의 부족과 거의 동등할 만큼 독립적이었으며, 부족들의 연맹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처음부터 하나의 부족이 세운 국가였으며, 그 부족이 영토를 넓히면서 부족의 수가 늘어나거나 초기 부족에 의해 정복된 부족이 생겨 그 수가 늘어났다. 그러므로 왕의 위치는 처음부터 고구려보다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임금의 욕망은 권력독점이 아니라 이미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백제에는 왕권의 강화를 확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백성들을 대상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확보하는 이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서 백제의 왕족들이 관심을 기울인 종파는 바로 계율종을 표방한 미륵불교였다.
  기마종족 연맹체의 경우 왕권 강화는 여러 종족의 공존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았다. 왕권의 강화될수록 종족 사이의 평등은 파괴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왕권 강화보다 종족 사이의 합의와 공존을 존중하는 기마종족의 전통적 사상은 왕권 강화를 절대적으로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임금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전통사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의 대리인이기보다 정치경제적 강자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서서히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시키고, 나아가 종교를 정치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백제의 임금들은 오히려 교정일치의 원칙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등식을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여전히 교정일치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등식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존중하는 입장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점에 서 있지만,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주장은 미륵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는 미래를 강조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통치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임금들은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을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미륵불교를 널리 알리는 한편 그 권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법왕이 왕흥사를 세우려고 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왕흥사는 결국 법왕의 아들인 무왕 때 완성되는데, 무왕은 완공된 왕흥사를 아예 미륵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틈틈이 미륵사로 행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제에서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불교 사찰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곰나루(웅진) 가까운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들, 예컨대 금산사의 창건만 하더라도 백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더구나 곰나루가 백제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징하는 곰강(오늘날의 금강으로 곰은 신의 겨레말이다)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고 미륵이라는 등식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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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불교와 백제의 운명

  도솔천에 있는 미륵이 이 세상으로 내려와 다시 부처가 될 때, 함께 살던 그 시대 사람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륵신앙이다. 그러므로 미륵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함께 태어나서 그와 함께 부처가 되려는 것이 이 신앙의 초점이다. 즉 미륵신앙은 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 다음 세상에 그렇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내세구복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미륵신앙은 내세구복적이라기보다는 현세구복적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륵은 이미 인간세상에 나타났으며, 도를 얻어 미륵사라는 절에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세상은 바로 미륵을 믿음으로써 그와 함께 부처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의 기회를 놓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시기로 묘사되었다.
  더구나 이 신화는 미륵사를 임금이 세우고 임금이 먼저 그의 사회적 대리인이 되었으므로 임금에 대한 철저한 믿음만이 구원의 방법이 된다고 말한다. 즉 백제라는 나라는 이제 미륵사를 세움으로써 현실적 구원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백제 미륵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정리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미륵신앙과 정치의 일원화라는 측면이다. 즉 왕에 의한 정치는 미륵을 대신하는 구원의 방법이라는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백제의 현실을 합리화시켜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둘째는, 구원의 구체적 방법, 곧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곧 계율의 준수라는 등식이다. 즉 미륵과 그 대리자인 임금에 의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임금이 밝혀준 미륵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불교가 계율을 중시하는 미륵신앙임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측면은 바로 백제사회의 정체성과 폐쇄성을 상징한다. 이미 구원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는 백제의 현세구복적 미륵신앙은 진보에 대한 더 이상의 갈망이 사라진 것을 뜻하며, 정치와 신앙의 일치라는 강력한 등식은 미륵신앙 이외의 사상적 측면을 배타시하는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마종족 계열의 문화와 예술 작품은 강건하고 패기가 넘친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그것은 진보와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평가된다. 그런데 같은 기마종족 계열의 나라였던 백제의 문화적 특성은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특성은 백제 후기의 것이며, 미륵신앙에 의해 사회가 폐쇄적인 완성도를 보이고 더 이상 진보를 갈망하지 않는 단계에서 나타난 것이다. 백제는 미륵신앙 이후 기마종족 고유의 사고체계로부터 상당히 이탈해버린 셈이다.
  세력 사이의 철저한 조화라는 원칙은 미륵의 대리자인 임금의 독단으로 대체되어버렸고, 경험의 중시와 끊임없는 개척정신은 현실 안주적인 의식으로 대체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백제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짜임새 있는 나라가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진보를 기약할 수 없는 경직된 나라로 바뀌고 말았다. 백제에는 더 이상 통합과 개척의 가능성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폐쇄되고 독단화 되어버린 문화는 백제의 흥망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타락과 신하들의 무능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표면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백제 사회가 왜 그토록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째서 그런 타락이 교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요컨대 백제가 멸망한 것은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사상을 버리고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려 했던 일부 지배층의 지나친 욕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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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래사상과 사회의 운명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백제와 운명을 같이했다. 고구려 역시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힌 뒤 점차 왕권 강화에 눈을 돌렸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교 및 전통사상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과정에서 고구려를 구성하던 여러 종족들과 왕족 사이에 틈바구니가 생겼으며, 이것이 국력을 약화시켰다.
  사상적 혼돈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무덤은 주로 전통사상에 따라 고안되었는 데 비해 그 이후의 무덤에서는 사상적 혼돈이 자주 발견된다. 예컨대 같은 시기에 만든 무덤들에서조차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가 곧잘 나타난다. 사신도와 신단수를 고집한 무덤과 더불어 불교식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벽화와 천장을 장식한 무덤이 같은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문화적 혼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상과 사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들어오자 어떤 세력은 전통사상을 버리고 불교를 신봉했으며, 다른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기만 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기도 했지만, 도교도 결국 또 다른 갈등의 불씨만 지폈을 따름이다.
  광개토왕 이후의 고구려 역사는 그런 갈등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갈등은 결국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문화적 통합력이 작은 사회가 고조선의 부활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럽 문화의 주류는 그리스 문화와 게르만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는 이런 세 가지 문화적 요소가 갈등과 통합을 겪은 시대였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이들 세 요소가 나름대로 융합되면서 '유럽 시대'를 열었던 계기였다. 그런데 만약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배척을 받았더라면 유럽의 운명이 과연 오늘날과 같았을까? 그리스 문화의 합리성과 게르만 문화의 진취성과 기독교 문명의 근본주의가 융합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며, 백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이들 문명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동유럽은 서유럽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외래문화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쉽게 숭배하는 것은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줄이게 된다. 외래문화를 무조건 배척한 사회도 유지되기 어려우며, 그것을 쉽게 숭배하고 자신의 전통문화를 저버린 사회도 유지되기 어렵다.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시켜낸 사회뿐이었다.
  고구려가 외래사상을 둘러싸고 지나치게 대립,갈등했다면, 백제는 지나치게 외래사상에 의존하려고 했다. 그런데 삼국 가운데 가장 힘없던 신라의 경우는 달랐다. 신라는 외래사상(특히 불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받아들인 뒤에는 그것을 자신의 문화적 역량으로 녹여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고, 나아가 이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문장 하나가 신라의 그러한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의 도가 있는데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 그 도의 연원은 선가의 사적에 잘 밝혀져 있으며, 사실상 세 가지 사상(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원리는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기록을 남긴 최치원이 비록 남조신라 때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신라가 외래사상을 대했던 기본적인 자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 사실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풍류란 다른 모든 훌륭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원리였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 높은 차원의 사상적 원리로 간주되었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서도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불교와 심각하게 대립했지만, 마침내 그것을 전통문화 속으로 포섭해버렸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불교와의 근본적인 대립이나 불교에 의한 자기 문화의 근본적 변질이라는 측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원광법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마침내 불교가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으로 포섭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또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도 불교사상을 깊이 있고 독특하게 이해한 지성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신라가 가지고 있던 전통사상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으나 이렇듯 정신적으로 이미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벌판을 휩쓸었던 고구려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모든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에까지 담로를 설치했던 백제의 멸망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허약함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백두대간 끝머리에서 남한 땅의 절반도 안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눈치만 살피던 신라의 성장 역시 그들의 강력한 문화적 주체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외래사상에 대한 자세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삼국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강성했던 두 나라의 그릇된 선택이 결국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낳았고, 나아가 영토적으로 작은 한반도가 만들어지는 최대의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숱한 외래사상을 만나 허덕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처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5. 통일 아닌 통일, 삼국통일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1)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

  사람들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때로 영웅을 들먹이면서 그가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영웅으로  칭송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조차 자신의 자전적 수필 속에서 자신이 역사적으로 너무 왜소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명제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이며,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개인의 역할은 반드시 사회 전체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들의 거대한 역할도 그 시대와 떼놓고 평가할 수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영웅의 전기를 쓰지 않고 시대사를 쓰며, 개인을 연구하는 경우에도 그의 역사적 행위를 사회와 함수관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떤 것인가? 수많은 역사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아직 그 함수관계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법칙적으로 정리해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개인과 사회의 함수관계를 법칙적으로 정립할 수 있더라도, 미래 역사는 아마 그 법칙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찰나찰나 이루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의 상호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더라도 사람은 이미 그 법칙 자체를 선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법칙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모두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삶과 관련된 분야만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역사에는 법칙이 없으며, 선택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인과관계들이 있을 따름이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선택은 늘 뒷사람들의 공부거리가 된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그런 선택이 그 미래를 너무나 다르게 만들었다고 보는 탓이다. 사람들의 이런 관심은 '역사적으로 만약 그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론적,해석적 역사가를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삼국시대 말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들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들 가운데 대부분은 잊혀졌으며, 일부는 충분히 역사적 사실로서 평가받아 여러 가지 해석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그의 강한 의지 때문에 이루어진 선택도 있지만, 때로는 그의 의지와 그다지 관련없이 이루어진 선택도 있다. 또 그 가운데는 자신의 의도와 관련없이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종말을 불러온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일시적으로 영광을 불러왔지만, 뒷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천추의 한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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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추의 선택

  김춘추라는 인물도 삼국의 흥망과 관련하여 깊은 관심을 끄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의 선택은 삼국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고, 이 마침표의 색깔이 뒷사람들에게 중요한 올가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임금이 되었으며, 그의 선택에 따라 한족이 세운 당나라와 연합했고, 그의 선택에 따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람이다. 그는 협조자로서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선택했으며,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선택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 복잡한 관계를 일일이 정리하자면 끝이 없겠기에, 이제 그의 개인적 선택이 우리 겨레의 뒷날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김춘추에게는 사랑스런 딸이 있었고 그 딸은 화랑 출신의 품석이라는 젊은이이게 시집을 갔다. 품석이라는 사람은 재능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 재목이었지만 오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그를 더 큰 재목으로 다듬어 자신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 국경지대인 대야성(오늘날의 합천)의 성주로 발령을 내린다.
  그러나 오만한 품석은 자신이 작은 성의 성주가 된 데 불만을 품고 주색잡기에 빠져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제 장군 윤충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대야성을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제 대야성은 대대라는 비장한 애국자를 탄생시킬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군 내부에서 협조자까지 얻은 윤충은 642 년 기습공격을 해서 대야성을 철저하게 함락시키고, 품석 부부를 죽임과 아울러 끈질기게 저항하며 투항을 거부하는 대대마저 죽인 다음, 1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김춘추의 역사적 선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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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고구려의 만남

  사위와 딸을 잃었을 뿐 아니라 국경의 요충지대를 잃어버린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응징을 주장했다. 그는 단순 응징의 차원을 넘어 그 기회에 백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러자면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춘추는 곧바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하고, 동지인 김유신의 동의를 얻은 뒤 개인적으로 고구려를 방문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했다. 연개소문은 거대한 해양국가인 백제와 손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터라 백제와 신라 사이의 분쟁에 끼여들기를 꺼려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위험인물로 판단하여 그를 감금해두고 신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기대와 달리 김춘추에게는 고구려와 대결조차 마다하지 않는 뒷세력이 있었다. 그의 동지인 김유신이 바로 그런 세력의 지도자였다. 김유신이 무력대결까지 각오하며 고구려의 국경으로 군대를 진출시키는 바람에, 신라와 전쟁을 바라지 않던 연개소문은 마침내 탈출이라는 형식을 빌려 김춘추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고구려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계획이 어긋나자, 김춘추는 이제 '비상식적인' 계획을 써서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는 기마종족의 적이었던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즉 신라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백제 땅을 차지하며, 당나라는 대륙의 백제 땅을 차지한다는 계책을 세우고 당나라와 군사적 외교를 벌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연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당나라도 해상왕국인 백제를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싶었기에 사실 이 연맹은 신라의 뜻대로 맺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를 압박했으며, 마침내 660 년 백제의 중심지였던 사비성(부여)을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고의 해양왕국을 멸망시켰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는 이제 고구려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이 죽자 권력욕에 찌든 그의 아들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결탁하기도 했으며, 또 그의 동생은 신라로 망명했으니, 신라와 당나라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만남 셈이었다. 광개토왕 이래 기마종족의 거대 연맹체로 군림해왔으며, 북부여족을 중심으로 무려 700여 년이 넘도록 예맥족,말갈족,돌궐족,거란족 등의 삶터였던 고구려도 결국 내부권력의 공백 때문에 허무한 종말을 눈앞에 맞이했던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668 년 나,당 연합군의 손에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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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꿈

  백제는 수만은 자치영역을 가진 연방국가였으며, 그 연방에는 상당히 다양한
종족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 25사 가운데 하나인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에 22개 담로가 있었다고 한다. 담로는 백제의 자치기구를 뜻하며, 당시의
발음으로는 다물(담울, '담'은 달처럼 둥글다는 뜻이며 '울'은 울타리를 뜻한다)
또는 다리라고 불렀다. 성을 가리키는 담이나 담울(타리)이라는 오늘날의 말도
물론 다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제의 다물에는 백제의 중심종족이었던 북부여족뿐만 아니라 말갈족과 왜족
및 장족까지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북부여족 중심의 다물은 대개
한반도와 요서지역 등에 있었지만, 요서지역에는 말갈족 등의 다물도 있었다.
일본 열도에는 다물과 왜족의 다물이 있었고, 이들이 공존하는 다물도 있었다.
백제의 다물은 중국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고루 퍼져
있었으며, 심지어 오늘날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백제 다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백제는 해양국가였다. 백제는 일찍부터 온조의 세력과 비류의 세력이
한반도의 중서부와 요서지역에 각각 세웠던 나라이며, 마침내 요서지역의
백제가 한반도와 백제와 통합되면서 황해(서해, 서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영역을 한반도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이다)를 중심으로 그 세력권을
넓혀갔다. 백제는 산동성 일대와 광서성 일대까지 영역을 넓히는 한편, 뛰어난
조선술을 기반으로 일본 열도와 류쿠 지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다물을
설치했다.
  일본의 다라나 지역도 백제 다물이 있었던 유적지였음은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전방후원분(앞면은 모가 나고 뒷면은 둥근모양의 고분)과 전남
영암에서 발굴되는 전방후원분의 관계를 통해 입증되었다. 또 일본 열도에
남아 있는 백제와 관련된 많은 지명과 광서성에 있는 백제성도 백제 다물의
분포를 알려준다. 물론 한반도에 남아 있는 대문이나 대수라는 지명도 모두
다물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일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제 다물은 근초고왕때 설치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건국과 동시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백제라는 이름 자체가 그런 여러
다물들의 연맹체를 뜻하며, 그들이 처음 십제라고 하다가 백제라고 고쳐부른
것은 다물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는 건국과 함께 차츰 고조선의 해상지배권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신라와 고구려는 물론 중국의 수,당나라를 제치고 절대적인
해상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서 백제는 기마종족의 옛
해상권을 상징하는 나라였으며, 해상권을 기반으로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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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와 천리장성

  백제와 달리 고구려는 육상지배권을 키워온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였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북부여족이 이끄는 나라로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여러 기마종족의 연명체였다. 고구려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고조선의 영역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광개토왕은 그 가운데
뚜렷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마종족 전사들이 대륙을 누빌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하게 뒤바뀌고 있었다. 고조선이 무너질 때까지 동아시아의 주도권은 분명
기마종족에게 있었지만, 고조선의 붕괴와 더불어 그 주도권이 중국 한족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한번 넘어간 주도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고구려가 처음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내부분열에 시달리던 기마종족이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왕성한 정복력으로 끊임없이 고조선의 영역을
회복하고 분열된 여러 기마종족을 어느 정도 통합함으로써, 잃어버린 주도권이
고구려의 손아귀로 상당히 되돌아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광개토왕 이후에도
주도권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삼국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부경쟁(삼국
사이의 경쟁)까지 치러야 했던 고구려가 주도권을 완전히 되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대륙에 대한 공세보다 수세를 중심으로 주도권 경쟁에
나섰다. 삼국 사이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한층 뚜렷해졌다. 고구려 말기에 완성된 천리장성은 이런 경향이 국가적
정책으로 공식화되었음을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7세기 이전까지 고구려는 요동성,백암성,안시성,비사성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그 거점들을 중심으로 방어 위주의 대륙진출을 시도했다.
즉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방어에 치중하면서 기회가 생기면 때로 공격에서
나서기도 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대륙 통치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수나라나 당나라도 이 거점을 파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력을 쏟아
부으면서 이 거점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거점들은 부분적으로
무너졌을 뿐이었다. 예컨대 당나라가 침공했을 때도 요동성과 백암성만
함락시켰을 뿐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함으로써, 결국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침공을 받은 뒤 고구려는 거점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거점과 거점 사이에 성을
쌓아 거대한 방어선을 만들려 했으며, 마침내 20여 년의 대공사 끝에
천리장성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고조선이 누렸던 주도권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을지라도 고구려는
분명 고조선의 정통 후계세력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육상세력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부활을 꿈꾼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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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신라의 선택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세력의 손에 나란히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백제의 경우 부흥세력이 곳곳에서 저항을 계속하며 백제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들은 투항을 하거나 일본 열도로 물러나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따름이다. 중국 대륙의 해안 근거지를 잃어버린 백제의
잔여세력이 그 거대했던 해양왕국을 다시 세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던 탓이다.
더구나 부여족의 지나친 권력독점으로 말미암아 다른 종족들의 호응을 쉽게
얻을 수 없었으니, 백제연맹체의 부활은 현실성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의 유민들도 저항을 계속했고, 그들은 나름대로 고구려를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북부여족의 지도자 대조영이 손을
잡았으며, 말갈족과 돌궐족도 후원세력이 되어 대진(발해)을 세웠다. 고구려가
부활한 셈이었다. 해상세력과 달리 육상세력은 쉽게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는
점과 고구려 귀족의 권력독점이 아직 지나치지 않았던 탓으로 고구려는 이름을
바꾸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진은 고조선이 누렸던 주도권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가 누렸던
주도권조차 제대로 되찾지 못했다. 그런데 대진이 세워진 뒤 한족의
정치세력도 분열되기 시작했고, 대진은 이 기회를 틈타 잃어버린 주도권을
차츰차츰 되찾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기마종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고조선의
부활을 머나먼 꿈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로 한정되었듯, 다른 기마종족들 또한 한반도와 관계없는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거란족은 거란족대로,
말갈족은 말갈족대로, 돌궐족은 또 그들대로 독립적인 역사를 만들어가야 했던
종족분화의 중요한 계기가 바로 삼국시대의 종언과 남조신라의 등장이었다.
  우리가 진정 고조선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면 우리 역사는 마땅히 동아시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여야 한다. 즉 우리는 '자랑스럽지 못한 단일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조화를 추구하는' 여러 민족의 공존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당연함마저 잊혀지고 그런 주장은 헛소리로
치부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고구려,백제의 멸망이 진정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은 김춘추라는 인물의 선택과 결정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그가 힘없는 신라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에게는 그리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탓이다. 신라도
백제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경쟁자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과 통합을 하거나 그들을 정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신라의 감싸안을 만큼 높은
문화적 수준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힘없는 신라가 더 뛰어난
정신문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그 정신문화는 고조선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의 비극이었다. 거대한 해양국가였던
백제, 줄기찬 정복사업으로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영토도 좁고
대외진출로마저 봉쇄당했으나 높은 정신문화를 누리던 신라, 이들의 균형이
결국 우리 역사에서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강건한 기풍으로 평가되는 고구려의 문화, 섬세하고 화려한 기풍으로
평가되는 백제의 문화는 결국 조화와 경건함을 중시하는 신라의 문화에 비해
현실적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셈이다. 강건하지만 조화롭지 못하며, 화려하지만
소박하지 못했던 문화 대신에,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 같은 문화를 누렸더라면,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의 부활시기가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기마종족의 조화로운 역사를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열이란 언젠가 통합을 낳게 마련이다. 지루했던 삼국시대도 결국 통합의
물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신문화라는 측면에서 신라가
통합세력으로 등장한 일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물리적
힘이 약했던 신라가 그 통합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비극이 생겼고, 마침내
우리 역사가 작아지게 된 것이다.
  신라는 약한 물리력(특히 군사력)을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마침내
선택하지 말아야 할 상대와 손을 잡았고, 그 상대를 자신의 영역에서 제대로
추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삼국시대는 끝이 났지만 종족의 통합은 더욱
멀어졌으며, 고구려의 계승자인 대진이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고 신라와
맞섬으로써 두 나라는 다시 경쟁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즉 삼국시대
대신에 남의 신라와 북의 대진이라는 남북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신라를 편의상 남조신라라고 부른다.
    6. 신라의 청해진 폐쇄
  (대륙진출을 포기한 신라와 역전된 해상지배권)

    봉쇄되는 대륙진출로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국가와 민족이 세워졌다 사라져갔지만,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한 가지 언어와 문화권 및 민족, 비슷한 규모의 국경을 유지해온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면 아마 한국뿐일 것이다. 신라 이후 한국은 오늘날까지
민족과 국가의 동질성을 지탱하고 있다.

  이 구절은 일본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기도 했으며,
"일본의 역사"를 쓴 라이샤워(E. O. Reischauer)가 그의 한 저서에서 쓴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묘한 느낌을 준다. 얼핏 우리
겨레의 문화적,혈통적 순수성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
겨레를 '외곬'이나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탓이다.
  실제로 우리 겨레는 혈통이나 문화적으로 같은 계열에 해당하는 나머지
기마종족들과 사뭇 다른 역사적 행보를 걸어왔다. 몽고족이나 만주족 및
거란족과 달리 우리 겨레는 대진이 멸망한 뒤에 단 한 번도 중국 대륙의
패권자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파도 높은 흥망의 굴곡을 겪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는 전체 기마종족의 배신자나 마찬가지였다.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한족과 맞서 패권을 다툴 때 고려는 한족의 송나라와 손잡고
거란족의 등을 쳤으며,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치달을 때도 여전히 한족과
어울렸고, 몽고족이 대륙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때 유감스럽게도
한족의 명나라 편들었다. 청나라의 깃발을 든 만주족이 대륙을 제패하려고 할
무렵 근조선은 멸망해 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려고 삼전도에서 임금이
직접 무릎을 꿇는 치욕까지 무릅썼다.
  이런 현상 뒤에는 힘없는 겨레의 어쩔 수 없는 아픔도 있었지만,
사대주의라는 깊은 늪이 가로놓여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서글픈
국난극복의 역사, 대체 어째서 이런 비극적 희극이 벌어졌던 것일까? 더구나
오늘날 그런 일을 놓고 대학총장쯤 되는 사람조차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현명한 외교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 비극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인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우리 겨레의 대부분은 대륙의 귀퉁이인 한반도에서
살게 되었다. 그 북쪽으로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살고 있었으며, 더 멀리로는
몽고족과 돌궐족 등이 우리 겨레의 대륙진출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우리 겨레의 대륙진출로는 오로지 바다밖에 없었다.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도 백제는 바다를 주요한 대륙교통로로 삼았다.
백제는 황해를 가로질러 요서 등 대륙의 해안지역을 경영했으며, 대진에 의해
육상진출로가 가로막힌 남조신라도 바다를 통해 대륙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강성한 기운이 남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대진이 직접 한족과 맞섬으로써 국방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정토불교라는 나약한 정신문화에 매달려 진취성을 잃어버린 신라는 더
이상 대륙진출로를 넓히려 하지 않았다. 대륙진출로를 정비하기는커녕 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엄청난 사찰을 지었으며, 배를 만들고 말을 키우는 대신
백성들을 동원해서 거대한 부처 조각과 탑을 다듬었다.
  이에 비해 하늘과 조상을 모시는 소박한 신전을 세우고, 그것을 공동체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으면서 능동적으로 삶을 돌보는 건강한 전통문화는 점차
뒷전으로 밀려났다. 마치 백제 말기와 같은 증상이 남조신라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남조신라의 불교 미술품은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그것과 비슷한 화려함과 섬세함을 자랑한다.
  인간 본질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수행을 통한 능동적 실천이라는 불교의
교리는 이런 외형적 성장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타락해갔으며, 지역적 차별과
신분계급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갔다. 지역 실력자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독자적
세력을 일구어갔고, 시달리다 못한 주민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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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지리로 시대를 안다

  풍수지리는 얼핏 집 자리와 무덤 자리를 잡아주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겨레가 체계화를 시킨 뛰어난 자연과학이자 사회과학이고
아울러 인문학이다. 여기에는 인문 지리적인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나아간
인간의 사회적 삶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결과가 포함되어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명체로 바라보는 위대한 철학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풍수 지리적
관점에서도 국가와 시대의 운명을 읽어볼 수 있다.
  풍수지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장풍과 득수라는 내용이다. 장풍은 바람이 흐리지 않고 잘
감돌며 기운이 반듯해야 좋은 땅이라는 이론이고, 득수는 이런 땅이 적당한
물을 얻어 다른 곳과 알맞은 상호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생명체로
말한다면 장풍은 생명체가 숨을 얻은 것이고, 득수는 핏줄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장풍과 득수가 잘 어루러지면, 그 땅은 비로소 살아 잇는 '용'이 된다.
풍수지리는 결국 '용을 읽어내는 과학'인 셈이다.
  장풍이 용이라는 생명체의 내적 기반이라면 득수는 용의 외적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장풍은 되었으나 득수가 되지 않았다면 고립된 생명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득수는 되었으나 장풍이 되지 않았다면 주체성 없이
남의 힘에 딸라 흘러 다니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즉 전자가 우물에
갇혀버린 개구리 신세라면 후자는 화병 속의 뿌리 없는 꽃으로, 모두 용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셈이다.
  풍수지리가 생명 공학적 이론인 이상, 그것은 개인이나 국가와 운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안으로 생산력을 높일 터전이 있지만 밖으로 진출한 길이
없다면 그 나라의 운명이란 보잘것없는 것이고, 밖으로 진출할 길이 있어도
안으로 힘을 키울 수 없다면 그 운명이란 바람 앞의 등불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그런 지역에는 큰 나라가 유지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내적인
힘을 기를 수 없는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이나 모든 교통로가 끊겨버린
산간오지에 큰 나라가 세워진 적은 없었다.
  이런 측면은 지리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여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힘을 키우지 않을 수도 있으며, 스스로 대문을 걸어 잠글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풍요한 들판이 경작되지 않은 채 황무지로 버려질 수 있으며,
드넓은 교통로도 발길조차 닿지 않은 채 잡초만 우거질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이나 국가의 운세도 늘 그런 법이다. 처음에는 내적인 힘을 기르는 데
관심을 두고, 힘이 쌓이면 서서히 교통을 하려고 한다. 즉 장풍이 먼저요
득수가 다음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경우에는 득수와 관련된 형편만
살펴보더라도 그 처지를 알아챌 수 있다. 교통로의 성격은 그 사회의 힘을
재는 잣대가 되고도 하는 탓이다.
  남조신라의 경우에도 그런 잣대로 흥망성쇄를 짐작할 수 있다. 백제를
멸망시키기 이전에 신라는 장풍만 얻었지 득수는 제대로 얻지 못했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에도 이미 한강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바다는
여전히 거대한 해양국가의 백제의 독무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안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득수의 형세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 뒤 남조신라는 대륙의 여러 곳에 신라방을 두는 등 백제를 대신해서
대륙진출의 꿈을 펴고자 했다. 그렇지만 기마종족 전체, 특히 우리 겨레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기는 해상진출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때였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해상주도권은 신라에게만 넘어 간 것이 아니라 신라와
연합했던 당나라에게도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백제처럼
강력하게 바다를 통제하지 못하자, 차츰 해상권을 기반으로 하는 지방
실력자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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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의 무역왕

  후당 황제로부터 오월왕이라는 칭호를 인정받았던 전류나 9세기 중엽의
쾌속항해가 장지신이 중국 해안을 근거지로 삼은 한족 출신의 지방
실력자였다면, 청해진의 장보고나 혈구진의 계홍은 남조신라의 해안을
근거지로 삼은 지방 실력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쌓았던
막강한 실력자는 신라인 장보고와 중국의 전류였다.
  이들 둘 사이에는 한 세대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존재한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9세기 중엽의 해상왕국이었다면, 전류는 10세기 초반의
해상왕이었다. 즉 장보고의 청해진이 851 년에 폐쇄됨으로써, 주인을 잃은
해상지배권이 반세기를 방황하다가 중국 한족의 손아귀로 들어간 셈이다.
  장보고의 해상세력은 처음부터 불안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것은 장보고의
신분 내력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남조신라의 평민이었다. 그는 왕족이나
6 두품 귀족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에 정년이라는 벗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군대에 몸을
던졌고, 능력을 인정받아 무령군의 고급장교가 되었다. 무령군의 장교가 된
장보고는 다시 남조신라로 돌아왔고, 청해진에 자신의 세력근거지를 마련했다.
그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상당한 해상세력을 쌓자, 남조신라는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았다. 즉 남조신라도 마침내 그의 실력을 인정한 셈이었다.
  당나라와 남조신라로부터 두루 능력을 인정받은 장보고는 먼저 자신이
무령군 장교로 있던 대륙의 해안지역과 청해진을 잇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했다.
그는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용해서 무역을 했으며, 무역으로 얻은
이익은 다시 군사력을 키우는 데 투자했다. 물론 늘어난 군사력은 청해진과 또
다른 지역을 연결시키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런 방법으로 그는 마침내 일본
열도와 류큐 및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교통로를 독차지했다.
  무역으로 얻은 엄청난 이익과 끊임없이 늘어나는 군사력은 청해진을
독립적인 왕국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그러나 청해진은 여전히 불안한 신라
내부에도 그럴듯한 근거지가 없었다. 그리고 장보고는 여전히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이런 불안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장보고는 먼저 중국 내부의 신라방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어나갔으며, 영암지역 등 한반도 내부에도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어나갔다. 중국 적산현에서 발굴된 장보고 관련 유물이나 청해진
유물이 모두 영암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장보고는 청해진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격상시키려고 했다.
적산현과 청해진에 법화원이라는 가람을 지었으며, 저명한 승려들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 승려 원인이 장보고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장보고는 또한 남조신라의 왕위쟁탈전에도 관여했는데, 그가 군사력까지
지원해서 왕위에 앉힌 인물이 바로 신문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신문왕의 후원자가 됨과 아울러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지난날 백제가 누렸던 해상주도권 전체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게는 백제와 같은 영토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의 군영에
비록 1 만 명이 넘는 군대가 있었지만, 군사를 계속 징발할 합법적 영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해진의 무역왕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더구나 장보고가
남조신라의 자객에게 갑작스런 죽임을 당하자, 청해진은 크게 흔들렸다. 영토
없는 해상왕국의 한계가 한꺼번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청해진은 남조신라군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장보고의 기반이었던 청해진 일대의 주민들은 모두
내륙지방인 김제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마침내 미완의 해상왕국은 폐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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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성의 해상왕국, 청해진

  청해진의 해상권과 백제의 해상권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와 어른의 힘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백제의 해상권은 한반도의
중서부와 중국 대륙의 드넓은 해안지역 및 일본 열도 등에 수많은 다물이
설치된 데서 드러나듯, 거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을 뒤집으면 백제의 해상권은 수많은 다물을 설치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제의 해상주도권은 풍수지리적으로 비유컨대 장풍과 득수를
모두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청해진은 실로 얼마 안 되는 작은 토를 점유하고 있었을 따름이며,
그 땅마저 공인되지 못한 불법 점령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청해진의
해상지배권은 백제의 완벽한 지배권과 달리 무역을 중개하는데 그쳤다. 즉
백제가 바다를 자신의 영토처럼 소유했다면, 청해진은 바다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뿐더러 백제와 달리 청해진은 자체 생산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백제는 대륙과 반도의 중서부에 공인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이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군사력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해진은
장보고가 남조신라로부터 식읍으로 받은 토지 이외에는 공인된 영토가
없었으며, 그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로부터 노동력을 징발할 수는 있었지만
군사력을 징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륙과 반도 등의 영토를 가진 백제에게
황해는 자기 영토 안의 호수나 다름없었지만, 영토가 없었던 청해진에게
황해는 결코 완전한 소유물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제가 차지했던 해상주도권과 청해진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청해진 당시의 황해는 언제든지 새로운 실력자에 의해 점령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백제가 해상교통로를 해상영토로 바꿀 수 있었던 데 비해
청해진은 바다를 자기 영토로 바꾸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셈이다.
청해진이 미완성의 해상왕국이었다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대륙진출에 대한 진취성이 없던 남조신라가 청해진을 폐쇄시키자, 이
미완성의 왕국이 만들어 놓았던 대륙의 거점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청해진이 가꾸어놓은 해상교통로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제
바다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주인이 바로 오월왕 전류였다. 그는 중국 대륙의 남부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고 그것을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공인받는데 성공했으며,
이 영토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차츰 해상교통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청해진이
가꾸어놓은 해상주도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비해 남조신라는 오월왕 전류가 만들어놓은 교통로를 이용하는
수동적인 처지로 바뀌고 말았다. 백성들이 근해에서 생업을 유지하는 것
이외의 모든 장거리 해상활동은 이제 남조신라의 능력 밖이었다. 요컨대
청해진이 폐쇄된 뒤 우리 겨레가 주도하는 해상교통의 역사는 차츰 막을
내렸으며, 마침내 해상을 통한 대륙진출의 길은 봉쇄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때부터 우리 겨레는 풍수지리적으로 비유컨대 득수를 하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역사에도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역할분담이 있다. 우리 기마종족의
역사에도 늘 그런 역할분담이 있었고, 기마종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역사에도 늘 그런 역할분담이 있었다. 모든 존재의 진정한 존재가치는 아마
그런 역할분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조선이 무너진 이후 우리와 비슷한 혈통을 가진 기마종족들은 중국 대륙의
동북부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족은
대륙의 남서부에서 차츰 대륙 전체로 자신의 삶터를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대륙은 점차 기마종족과 한족의 각축장으로 바뀌었으며, 삼국시대 이후
이 각축장의 주도권은 한족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육로를 통해, 백제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삶터를 지키고
되찾으려 함으로써 절묘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한반도는 육로를
통하지 않고도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엄청난 전략적 근거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삶터로 하는 기마종족은 대체적으로 바다를 통해 대륙진출을
꿈꾸었으며, 한반도 북부나 지도상으로 그 위쪽에 거주하던 기마종족들은 주로
육로를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했다. 삼국시대는 바로 그런 역할분담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조화롭게 이루어짐으로써, 기마종족의 안정적 번영과 함께 안정적
분열이 함께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런 역할분담은 대진,남조신라 남북국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진은 주로 육로를 통해 대륙진출을 꿈꾸었으며, 남조선이라는
바다를 통해 대륙진출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남조신라의 경우 청해진의
폐쇄와 더불어 그런 역할분담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만큼 청해진의 폐쇄는 겨레 역사에서 치명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대진과
대립관계를 맺음으로서 육로를 통한 진출로마저 봉쇄된 남조신라가 바닷길까지
잃어버린 것은 겨레 역사에서 진취성을 거세해버린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 이후로는 바닷길과 물을 통한 침입의 역사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다른 기마종족(주로 일본족)이 바닷길로 침입해오고, 북방 기마종족이 뭍으로
침입해오는 역사를 겪은 것도 바로 청해진이 폐쇄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7. 대진(발해)의 멸망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2)

    '해동'이라는 말

  오늘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해동'이란 말을 곧잘 쓴다. 해동은 말 그대로
바다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이때 동쪽은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 동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해동이란 말은 동방이란 말과 더불어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언어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은 고조선의 멸망 이후 우리 겨레를 바다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 동방 혹은 해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그들은 대진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이런 동방이나 해동이니 하는 이름에는 우리 겨레의
땅이 원래 바다 동쪽이며,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들어
있다. 즉 대륙의 임자는 원래부터 자신들 한족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선전술이 그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은 중국 한족만이 아니었다. 우리 겨레도 그런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한족에 대한 사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그런 표현을 썼다.
  백제인들은 의자왕을 '해동증자'라고 불렀으며, 남조신라를 일러
'해동신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최충은 '해동공자'라고 불렀으며,
1102 년(고려 숙종 7 년)에 만든 화폐는 '해동통보'라고 했고, 각훈이 엮은
승려들의 전기는 "해동고승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 밖에도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 등 해동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고려 말기 이후에 사용된 그런 표현에는 한족의 논리를 인정하는
측면이 대체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실증을 앞세운다 하면서 중국측 역사서는
맹신하고 우리 역사서는 이리저리 불신한 나머지 너무나 확연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중국측의 잘못된 연대기를 그대로 사용한 "해동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심지어 한무외가 엮은 "해동전도록"은 도가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단학의
원류를 중국으로 설정하는 사대주의적 편견을 드러냈다. 즉 남조신라 때
당나라 유학을 했던 최승우가 중국의 종리권으로부터 단학을 배워 최치원
등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동이라는 표현 속에는 한편 우리 겨레의 꿈도 들어 있다. 근조선을
해동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말 속에는 중국에 예속된 동쪽의 작은
나라 조선이라는 뜻도 있지만 해동조선과 달리 대륙조선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원래의 조선이기에 해동의 조선을 바탕으로 대륙조선을
회복하겠다는 뜻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이들은 해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역사의 연원을 대륙으로 잡으며, 그 뿌리를 고조선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정약용의 외손자가 쓴 "해동기략"이나 홍만종이 지은
"해동이적" 등은 해동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도 모두 우리 영토를 만주나
중국 대륙까지 설정했으며, 우리 정신의 연원을 고조선에서 찾았다. 특히
"해동이적"은 "해동전도록"의 사대주의와 달리 우리 단학의 연원을 고조선의
단군에서 찾았다.
  "해동악부"라는 제목을 가진 문헌도 10여 종이나 남아 있는데, 거기에서도
지은이에 따라 해동이라는 의미가 다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담촌거사의 저작과 이복휴의 저작은 해동이라는 말에 뼈가 있음을 보여준다.
담촌거사의 저작은 세 권 가운데 앞의 두 권이 사라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복휴의 저작 첫째 권에는 고조선의 영광을 노래한 '환웅사'나
'북부여' 등의 가사가 실려 있어 해동이라는 말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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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의 정체

  대진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황무지나 다름없다. 대진의 건국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대진의 주요 종족이 누구인지 아직도 분명한 결론이 없는 상태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진이라는 공식 명칭을 버려둔 채 발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발해는 중국의 당나라와 남조신라가 대진을 부르던 이름이다. 대진은
"주역"의 괘 가운데 새로운 출발을 뜻함과 아울러 동방을 뜻하는 진에서 따온
이름으로, 시작은 동쪽에서 했으나 커져서 결국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담긴 나라 이름이다.
  대진의 건국자가 불분명한 것은 중국측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실린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당서"에는 "발해의 건국자가 고구려 별부
출신의 대조영"이라 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고구려에 속한 속말말갈 출신의
걸걸중상으로 그는 대조영의 아버지"라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을 놓고 어떤 이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같은
인물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또 대조영을 어떤
종족의 인물로 보느냐를 놓고도 많은 입씨름이 벌어져, 대진의 건국자가 과연
고구려 사람인지 말갈 사람인지 논의가 분분한 실정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대조영(또는 걸걸중상)이 고구려인이 아니고 말갈인일 경우, 대진의 역사는
중국 주변의 역사이지 우리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진을 우리 역사로 보는 데는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대진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는 결론이 이런
합의의 전제가 되고 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들이 대진의 지배계층이 되고, 말갈과 거란 등이 대진의 하층
구성원이었다는 주장도 이런 합의의 주요한 내용이다.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과 거란이 피지배층이 된 나라, 그래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부를 수 있는 대진. 그러나 교과서에까지 실린 이 내용은
사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갈이나 거란은 본래부터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는 북부여족과 거란족 및 말갈족이 원래부터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고구려 유민에는 마땅히 그들
거란족이나 말갈족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유민이란 고구려
왕족이었던 북부여족만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지배층이 된 고구려 유민을 북부여족으로 한정짓는다면, 논리상 성립은
된다. 그러나 그 넓은 대진의 땅을 과연 북부여족이 독단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의 실정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몽고족의 역사에서만 다룬다면, 중국사의 절반은
아마 식민통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식민통치의 역사라고 해서 자신의
역사가 아닐 수는 없다. 설령 대진의 중심세력이 고구려 왕족이었던
북부여족이 아니라 걸사비우가 이끈 말갈족이거나 심지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말갈족이었다고 하더라도, 대진은 분명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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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나와 큰 나

  당시 기마종족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서로 분화되지 않았었다.
가끔 적대적으로 대립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혈통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감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조선의 구성원이었으며,
고조선으로부터 갈라져나온 큰 범위의 한 동포였던 것이다.
  거란이나 말갈의 역사가 그들만의 역사가 된 것은 대진의 멸망과 더불어
기마종족 연맹이 파괴되고, 나아가 남조신라를 대신한 고려가 단일종족의
테두리를 고착화시킨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까지는 거란이나 대진의
역사도 분명 우리 자신의 역사인 셈이며, 이런 역사적 과정은 아직도 우리의
미래에 잠복하고 있다. 비유컨대 한집안 족보에 대동보(혈족 전체의 계보)와
가계보가 있다면, 거란이나 말갈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대동보가 되는 셈이고,
우리 겨레만의 역사는 그 가계보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역사가 대동보 차원에서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역사는 수백 년의 관성 탓인지 가계보만을 고집하는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고서야 나라가 작아지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를 고집하면 그만큼 작아지고, 큰 '나'를 일으키면 그만큼 커지는
탓이다.
  어쨌든 대진의 종족구성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역사의 소속이 바뀐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이 겨레의 역사를 작은 울타리에 가두려는 음모(비록
계획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대진의 중심세력이
북부여족이었다면 대진의 역사에서 우리 겨레는 맏아들 노릇을 한 것이고,
말갈족이나 거란족이 중심세력이었다면 우리 겨레는 그 역사에서 둘째나 막내
노릇을 한 셈이다.
  혈통과 문화가 크게 다른 종족끼리 서로를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식민통치는
문화의 뿌리가 같은 종족들끼리 연맹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몽고족의 폭압적 간섭이나 일제의 36 년 식민통치나 오늘날의 민족분단처럼
비슷하거나 같은 종족끼리도 연맹체가 아닌 적대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대진은 분명 각 종족의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종족연맹체였고, 그
연맹체의 대의는 멸망한 연맹체인 고구려의 부활, 나아가 고조선의
부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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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맹국의 흥망성쇄

  대진은 기마종족 연맹국가였던 고구려의 국가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라였다. 처음 대진을 세운 대조영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 및 거란족의
지도자 이진영과 더불어 건국운동을 한 데서도 대진의 종족연합적 성격을 알
수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대륙의
중심부에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요동으로
옮겨가서 후방을 차지하려 했다. 이에 후방이 염려된 당나라는 먼저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이라는 칭호를 주어 포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이를 거부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며, 그가 전사하자 대조영이 동모산을
중심으로 진국왕이라고 부르면서 새로운 나라 대진을 세웠다. 이처럼 대진은
대조영을 비롯한 여러 종족의 지도자들이 함께 세운 연맹국가였다. 그 가운데
어느 종족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대진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기마종족 연맹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수도를
옮겼는데, 초기의 수도였던 중경 현덕부는 종족연맹의 출발단계를 상징하며,
중기의 동경 용원부는 종족연맹의 전성기를 상징하고, 후기의 상경 용천부는
종족연맹이 쇠퇴하는 대신 왕족 중심의 국가체제가 발전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초기를 상징하는 인물인 대조영은 말갈의 대부분을 복속시켜 연맹으로
끌어들였고, 돌궐과 동맹을 맺었으며, 거란과 평화적 연맹을 이룸으로써
종족연합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중기로 넘어갈 무렵,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는 말갈 가운데 끈질기게 독립을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연맹에
복속시켰으며,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냈다. 바로 이때까지의
수도가 중경 현덕부로서 동모산 일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중기를 상징하는 대흠무는 안정된 종족연맹을 기반으로 수도를 좀더
내륙지방인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가 남조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남쪽인 동경
용원부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대진은 쇠퇴하기 시작해서
종족연맹조차 약해졌다.
  대진의 말기는 대인수라는 뛰어난 군주의 등장으로 다시 세력을 복원했으나
결국 쇠퇴해서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그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대로
"북쪽의 여러 종족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다시 넓혔으며", 북방의 강자였던
흑수말갈을 완전히 대진 연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대인수의 등장
이후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독자적인 외교사절을 보내지 않은 데서도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
  대인수는 대진의 영역도 재정비했다. 그는 종족 사이의 (준)평등한 연맹을
넘어 왕족권을 절대화하려 했으며, 영토를 5경 15부 62주로 구분하는
행정개편까지 단행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그런데
이것이 대진의 운명을 가르는 갈림길이 되었다.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한 것은 연맹에 참여한 여러 종족들의 독자성을 짓밟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인수가 죽은 뒤에 각 종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우선 거란족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대진과 돌궐이라는 두
연맹국가를 모두 거부했다. 흑수말갈도 다시 독립적인 세력으로
떨어져나갔으며, 대진의 주류였던 북부여족은 다른 기마종족들로부터 차츰
고립되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거란족의 지도자 야율아푸치는 대진을 무너뜨리고 거란족이
주도하는 새로운 연맹국가를 세웠다. 기마종족 내부의 질서가 재편된 것이다.
요라는 기마종족 연방은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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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번영과 연맹왕국의 황혼

  대진에서 불교의 전성기는 9세기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대진
수도였던 중경 현덕부나 중기의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의 유적에서는 불교적인
색채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데 비해, 후기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유적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경 용천부는 중기에도 한때 수도였던 적이 있으나, 후기의 수도로 사용된
기간이 더 긴 만큼 지금 발굴된 유적은 대부분 대진 후기의 것으로 평가된다.
요컨대 대진에서 불교가 번성한 것은 대인수가 수도를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긴 이후였던 셈이다.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긴 뒤, 대인수가 주력한 정치적 사업은 연맹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상적으로도 그가 선호한 것은 기마종족의 하늘사상이 아니라
권력의 중앙집중화에 걸맞은 다른 사상이었다.
  불교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 대진의 후기 권력이 내세운 사상적 대안이었다.
불교와 더불어 유교사상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수도를 옮기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진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규모와 짜임새에서도 그런 사실이
드러난다.
  대조영은 둘째 아들 대문예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거기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익히도록 하였으며, 유학생도 자주 보내 중국 문화를
공부하도록 했다. 물론 초기의 이런 작업은 중국 문화를 활용하기 위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문화를 배워온 그들이 대진의 중심세력이 되자
정치제도까지 중국식, 특히 당나라식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본받아 3성 6부 제도를 실시했으며, 당나라의 지방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무모하게 중앙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진 말기의 중심적인 이념은 역시 불교였다. 대인수는 백제의
법왕이나 무왕이 미륵불교를 내세웠던 것처럼, 당나라에 유행하던 화엄종을
받아들여 중앙권력을 절대화하려고 했다. 그 결과 상경 용천부에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규모가 매우 큰 가람이 여러 개 세워졌다. 화려한 탑과 석등도
세워지고 승려들은 국가의 외교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즉 말기의
대진은 마침내 오늘날 북방식 불교양식이라고 불리는 장엄하고 화려하며
기운찬 불교문화의 창조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독재왕권을 강화하다가 호족들의 거센 반발을 받아
비참한 패배자가 된 반면 조화와 연맹과 화합이라는 신라 전성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왕건이 고려를 세운 것처럼, 불교로서 기마종족의 전통을 대신하려
한 대인수의 후계자들은 마침내 패배자가 되었다. 요컨대 대진의 경우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의 대체기가 곧 문화의 전성기였으며, 문화의
전성기가 곧 나라(종족연맹)의 황혼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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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역사 작은 역사

  대진이 기마종족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한 뒤, 겨레 역사에는 두 가지
갈랫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연맹을 재구축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단일종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역사를 만드는 길이었다.
  고려왕조는 이 가운데 두번째 길을 선택했으며, 첫번째 길을 명분으로
남겨두었다. 고려는 한반도 내부에 살고 있는 부여족과 숙신족 및 예맥족 등을
조선족 또는 한족이라는 단일종족으로 통합하는 한편, 북진정책을 명분으로
내건 것이다. 요컨대 고려왕조는 대진 멸망 이후 단일종족 중심으로
축소지향의 역사를 펼친 셈이다.
  다른 한편 거란족이 주도하는 요나라는 첫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여전히 돌궐이나 여진족 및 말갈족 등과 연합하려 했으며, 그 내부에서 연맹을
이끌기 위한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 겨레의 역사는 무대를 바꾸게 되었다. 대진이 있을
때까지 우리 역사는 늘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고려
이후부터 우리 역사는 단일민족 중심의 한반도 역사로 줄어들었으며,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주변지 역사로 바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족은
그 주변지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발상을 바꾼다면, 그 뒤에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가 남의 역사일 수는 없다. 단일민족 중심의 겨레 역사가 우리의
'작은 역사'라면, 동아시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의 '큰 역사'가
되는 탓이다.
  대진 멸망 이후 고려는 우리 역사의 작은 무대였으며, 그런 고려의 입장에서
우리의 큰 역사는 남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관점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역사만이 우리 역사로 굳어져버렸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한반도가 오늘날처럼 작아진 까닭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또 있을 수 있을까?
    8. 한국사에 등장하는 두 개의 천리장성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장성과 영토를 축소시킨 고려장성)

    두 개의 천리장성

  우리 역사에는 두 개나 되는 천리장성이 등장한다. 하나는 고구려 말기에
연개소문이 지휘해서 쌓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11세기 초 고려에서 쌓은
것으로 고려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남쪽의 비사성에서부터 요동성을 거쳐 북쪽의 부여성에
이르는 성인데, 그것을 쌓는 데만 16 년이 걸렸다. 이 장성은 당나라의 침입을
예상하고 631 년부터 쌓은 것으로, 이미 있었던 주요한 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 방어체계와 보급체계를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장성으로 1033 년부터 1044 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성곽도 이미
1014 년(현종 5 년)부터 한반도 동서북 지역에 쌓아오던 성곽을 서로
연결시킨 것이므로 완공기간은 30 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장성은
잘 알려진 대로 거란족과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의도에서 쌓은 것이다.
  이 장성들은 모두 국방을 위해 엄청난 노동력을 들였던 역사적 흔적이다.
그런데 두 장성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장성이라 일반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주요한 거점을 연결시킨 성인데,
천리장성의 경우 그것은 각각 고구려와 고려의 국경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에 비해 고려장성이 축소된 영토를 상징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점은 다른 데 있다. 고구려의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반면에 고려장성은 오늘날의
휴전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나라를 세운 뒤 한족은 주변 기마종족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국방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점령자였으며, 대륙을 방어하기
위해 기마종족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방어선을 쌓아나갔다. 주나라를 거치고
분열의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이런 방어선은 꾸준히 관리되었다.
  한족 사이의 분열을 마무리짓고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진나라는 그
방어선을 본격적으로 정비해서 마침내 만리장성을 완성하게 되었다.
기마종족의 대륙진출이 두려웠던 진시황은 엄청난 국력 낭비와 정치적
파탄까지 무릅쓰고 이 장성을 완공시킨 것이다. 그 뒤 만리장성은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의 본격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같은
종족들 사이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적 경계를 분명히 하는
울타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조시대를 거치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만리장성은 더
이상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의 경계가 되지 못했다. 중국 한족은 이미
만리장성을 넘어 대륙의 동북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제 새로운 경계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이 세워질 때까지 기마종족은 공세를 펼치는 세력이었으며 중국
한족은 방어하는 세력이었기에, 방어하는 한족이 장성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공세와 수세를 펼치는 세력관계가 뒤바뀌자 방어를 위한 성벽을 쌓을 세력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기마종족의 연맹체였던 고구려가 만리장성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의 완공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에 이르는 수백 년 세월은 두 세력
사이의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말기는 그런
의미에서 기마종족의 퇴조기였다. 천리장성은 그런 퇴조현상을 막고 새로운
경계선을 확정하여 역학관계의 반전을 꾀하려는 것이었으나,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그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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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족분열의 장벽

  고구려가 멸망한 뒤 퇴조기에 접어든 기마종족들은 대진을 세워 중국 한족의
공세를 막아내고 고구려의 옛 전선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대진이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기도 했다.
한족이 대진에 붙인 '해동성국'이란 표현은 그런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진이 외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그 내부의 종족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대진은 성장하는 국력을 통합의 힘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왕족과
일부 귀족의 권력독점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같은 기마 종족으로서
대진의 날개 역할을 맡았던 거란족이 먼저 반기를 들었고, 마침내 대진은
기마종족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대진의 명망 이후는 기마종족의 분열기였다. 그 분열은 연맹이나 동맹의
해체에 그치지 않고 각 종족들 사이의 적대적 대립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분열된 각 종족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영역을 차지하고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는데, 고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는 먼저 거란과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대진 멸망 이후 거란은 다른
종족들과 화해하려고 했으며, 고려에도 낙타를 보내는 등 선심을 썼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화해를 거부하고 철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거란이 보내준
낙타를 받지 않고 굶겨죽인 것은 그런 적개심의 상징적 행위였다.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개심은 마침내 세 차례에 걸친 무모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결전은 두 종족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했으며, 고려의 경우
다른 기마종족으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소 종족적 정서에 치우친
편협한 정치노선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잘못된 노선은 끊임없이 잘못된 정책을 만들어냈다. 다른 기마종족(주로
거란족)과 대립하기 위해 중국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 결탁했으며, 마침내 다른
기마종족(주로 거란족과 여진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장성과 달리 같은 종족 내부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거란이 보여준 태도도 그런 분열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033 년 평장사 유소가 왕명으로 처음 성을 쌓을 대, 거란은 돌로 성을
쌓는 것은 우호관계를 위한 도로를 봉쇄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성을 쌓는
데 방해를 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현종은 성을 쌓은 유소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의 공로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추충척경공신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천리장성은 이처럼 거란 및 여진에 대해 국경을 확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문화적 경계를 획정한 것이기도 했다. 아울러 고려와 여진의 혼혈을
막는 구실도 이 천리장성이 담당하고 있었다. 국경이라는 측면에서 고려가
장성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면 거란족이나 여진족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그런 경계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고려왕조보다 월등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고려와 자신들이 같은 갈래의
형제종족이라고 여기면서 섞여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그것을
거부했다.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적 세계질서로 다가가고 있던 고려의 입장에서
그들은 야만족일 뿐, 더 이상 형제종족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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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족의 경계를 국경으로

  천리장성이 처음 축조될 때, 고려와 여진의 국경은 그 장성을 쌓은 곳이
아니었다. 장성 북쪽에 기미주도 당시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으므로,
장성 축조에는 종족적,문화적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 있었다.
  기미주에서는 여진족과 한족이 문화와 생활을 공유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문화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고려왕실의 눈에는 이미 이 지역은
오랑캐화된 곳이었다. 그래서 장성을 넘나드는 여진족을 정벌한 뒤에 고려는
이 땅을 오히려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만 것이다. 즉 고려는 장성이 국경선과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이런 입장은 외교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보인 것은 대진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고려는
멸망한 대진을 기마종족 연합의 유일한 정통으로 설정하고 그 유민들을
우대하는 한편, 대진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주도하는 연맹을 세운 거란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려는 북진을 통해 대진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진의 멸망하기 전인 922 년(태조 5 년)에 거란의 지도자 야율아푸치는
근처의 여러 기마종족을 통합하면서 고려와도 동맹하기 위해 낙타와 말 등을
보내왔는데, 이때만 해도 고려는 그들과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926 년 대진이 멸망하자, 고려의 외교적 입장은 돌변했다. 924 년에
거란이 다시 30 명의 사신과 낙타 50 마리를 보내왔는데, 고려는 대진을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는 굶어죽게 했다.
  여진에 대해서도 왕건은 비슷한 태도 변화를 보였다. 대진이 멸망한 뒤
방황하고 있던 여진족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혀나가는 한편, 거란과 결탁한
여진족에 대해서는 몰인정한 정복사업을 벌였다.
  그러므로 왕건이 죽기 전까지 고려의 북방정책은 대진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대진의 옛 영역은 거란족이 먼저 차지했고 그들이 주도해서 주변
기마종족을 통합하기 시작하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정벌계획은 중국 한족과 결탁함으로써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진의 영토를 차지하고 여러 기마종족을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것은
고려만이 아니었다. 여진족과 부여족을 비롯한 대진의 일부 후예들이
정안국(부여족의 대씨와 여진족의 열씨가 함께 주도하던 작은 종족연맹)을
세워 야심을 키웠으며, 거란과 한족의 송나라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야심이 서로 격돌하면서 대진의 옛 영역은 여러 세력들이 서로 나누어
가지는 형편이 되었다. 고려는 대진의 옛 영토 가운데 한반도 북부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거란은 그 동북부를 차지하였고, 송나라는 서남부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결국 이 땅의 상당 부분이 한족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태조 왕건이 죽은 뒤, 고려는 북방진출을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방진출이라는 명분을 유지하는 한편, 다른 기마종족과 끝내
통교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천리장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나머지
기마종족과 우리 겨레는 차츰 이 장성을 경계로 문화적 발전의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분열사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차츰
우리 겨레는 단일민족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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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글픈 국난극복의 역사

  고려가 대진의 고토 수복에 내걸고 거란족 등과 적대관계를 맺자, 거란도
고려를 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은 기마종족의 연맹체를 재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고려를 정벌하려 했으며, 고려도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첫 번째 침입에서 거란은 특별한
군사적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우호관계를 요구했다. 그들은 고구려의 땅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며, 고려는 마땅히 고구려의 계승자인 자신들을 따라야
하고, 중국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거란이 당장 영토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고려는 재능이
뛰어난 서희를 보내 교묘한 외교술로 전쟁을 끝맺게 했다.
  그러나 차츰 세력이 강해진 거란은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것을 구실삼아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거란의 전략적 목적은 고려와 송의관계를
확실하게 끊어버리고, 고려가 거란족이 주도하는 연맹에 참여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거란은 한 차례 더 군사력을 동원하였으나, 고려를
복종시키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고려가 거란족에 등을 돌린 것이 북진정책이라는 명분과 현실적 여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전쟁 또한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족이 세운
송나라와 손을 잡으려고 한 고려의 외교정책이 그런 상황을 재촉한 것도
분명하다.
  어쨌든 이때부터 기마종족의 내부투쟁사는 치열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해
기마종족들은 문화적,정서적으로 점차 분화되어갔고, 마침내 서로가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형제종족 사이의 서글픈 투쟁사는 중국 한족의
영역을 넓혀주고 그들에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우리 겨레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으로 이어오는 기마종족 연맹체에서
분명 주도적인 종족이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거란족에게 빼앗기자 그것의
회복을 둘러싸고 마침내 형제종족들이 역사적으로 갈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대진이 멸망한 뒤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천리장성을 쌓게 했고,
마침내 '큰 역사를 돌보지 않는 우리의 작은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 두 얼굴의 과거제도
    (획일적인 인재 양성)

    사람을 뽑아 쓰는 일

  한 사회의 저력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적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아울러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얼마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게 개발되어 있는가 하는 점도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런
판단기준은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도 관련되는데, 이런 문화적 수준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재를 어떻게
양성하며 인재에 대한 판단기준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제도인 탓이다.
  전근대사회의 경우 교육제도의 꼭대기에는 늘 관리선발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교육의 최고 목표는 대부분 관리가 되는
것이었으며, 관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자격을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전근대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살펴보려고 할 때, 그 시대의 관리선발제도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전근대사회의 관리선발제도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스스로 관리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천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에 의해 관리로
추천받는 타천이었다. 자천에는 일정한 시험을 거치는 과거와 재능을 시험받아
선발되는 취재가 있었고, 타천에는 혈통을 보고 관리를 선발하는 음서와
인물됨을 보고 남이 추천해서 관리로 선발되는 천거가 있었다.
  또 관리선발제도는 능력이나 인물됨을 보고 뽑아 쓰는 제도와 혈통에 다라
관리가 되는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에 비해 전자가 사회발전의 유리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능력이 인품을 보고 인재를
선발할 경우, 선발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이 세워져야만 한다. 과거제도는 바로
이런 기준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제도는
상당히 발전된 사회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과거의 시험내용은 그 사회의
문화적 저력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관리선발제도에 관한 한, 지식인적인 전통을 존중하던 한족이 기마종족보다
단연 앞서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6세기 말(587)에 이미
과거를 실시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400여 년이나 늦은 958 년(광종 9
년)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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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실시의 배경

  잘 알려진 대로 고려는 여러 실력자들의 연합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지방 실력자(이른바 호족)들이 남조신라 말기부터
독자적인 세력권을 쌓으면서 서로 경쟁했고, 이런 경쟁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남조신라를 존중하는 세력도 있었고, 이미 멸망해버린 고구려나
백제를 동경하는 세력도 있었으며, 전통문화를 앞세우는 세력과 불교 및
유교를 존중하는 세력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세력근거지는 내륙과
바다에 고루 흩어져 있었다.
  이른바 '후삼국시대'(남조신라,대진 남북국시대 중에 '남조신라
분열기'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는 이런 세력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남조신라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던 시기였다. 이들은 먼저
자신들만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지역적인 연합을 시도했다.
  멸망해가는 남조신라를 중심으로 반도의 동남부가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남조신라의 권위를 자신의 힘으로 활용하려 했다. 다른
실력자들은 반도의 서남부에서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내세우며 상당한
세력권을 이루었다. 그리고 반도의 중북부에서는 고구려의 부활을 내세우는
실력자들이 연합해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조신라를 내세우는 호족들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남조왕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조신라를 내세우는 호족들은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도 없었고, 따라서 후고구려와 후백제 등 신흥왕조의 세력다툼에서
합당한 명분과 더불어 자신의 기득권까지 보장받을 수 있으면 언제든지 그들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호족대표로 선출된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그는 수수방관하던 남조신라계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마침내 남조신라의 모든 영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고려의 남조신라 통일과 더불어 반도 내부에 존재하던
친신라적,친고구려적,친백제적 갈등은 어느 정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들 호족들은 이제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내세우며,
새로운 왕조의 실력자로 등장하려고 했다. 고려의 임금들은 이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의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한 분열과 혼란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특히 초대 통합대표였으며 가장 강력한
실력자였던 태조 왕건이 죽은 뒤, 이런 위험성은 현실로 드러나 호족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왕위다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4 대 임금이었던 광종은 이런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 왕권을 한층
강력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는 먼저 호족들의 인력자원에 타격을 주면서
왕실의 수입원을 늘리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즉 호족에 의해 근거
없이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평민으로 복권시켜줌으로써, 호족에 대한 1차
견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왕실을 유지하고 왕조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인재들을 뽑는 일이었다. 그래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한지 두 해가
지나자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물론 호족들의 지나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호족들의 자제를 관리로 선발하는 음서를 아울러 실시했다.
  과거제도는 일반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이 제도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중앙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고려 광종도 한족
출신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려 건국에 참여했던 호족들이 유교를 그리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도 과거
실시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남조신라의 6
두품 출신들이 지방호족들과 결탁하기도 했지만, 지방 호족들은 대체로 불교와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있었다. 특히 남조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불교는
지방호족들의 이념적 토대가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학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할 경우 지방호족들의 이념인
선종불교를 견제할 수 있었고, 선종불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폐쇄성을
돌파할 수 있었다. 즉 유학은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지방색을 잠재웠고,
폐쇄적인 지방색을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쌓아가던 호족들을 악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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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권력의 강화와 지방색의 통합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의 사정으로 보아 매우 적절한 제도였다. 과거제도는
남조신라의 유물인 골품제도의 벽을 상당히 허물었으며, 지식과 능력의 기준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근거지인 왕실도 이 제도로
말미암아 상당히 인정되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지식인들은 모두
유학을 공부했으며, 유교의 경전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교과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과거시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어떤 사상통제보다 효율적인 것이었다.
  관리선발제도를 통해 국가가 사상을 통제한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중앙에서 모든 지방에까지 관료를
파견할 수 없던 초기의 고려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방을 통제할
수 있었다.
  과거제도는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도록 기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당시까지 상당히 남아 있던 지방 정서의 적대적 성격을 완화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각 지방 실력자들의 자제는 공통적으로 시험과목인
유학을 학습했고, 설령 과거를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료로 진출할 경우에도
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방색이 강한 선종불교에 기대어
지방을 독자적 세력권으로 가꾸어가던 호족들의 문화는 유교문화에 의해 차츰
압도되어 갔으며, 전통사상과 전통적인 생활습관 속에도 유교적인 문화가 깊이
스며들었다.
  고려의 과거에는 크게 제술과와 명경과 및 잡과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술과와 명경과는 모두 유학의 공부 수준을 시험하는 과목으로서, 여기에서
급제하면 문신이 될 수 있었기에 고려시대에는 이 두 과목을 일러 '양
대업'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과거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제술과는 유학이론의 창조적 적용능력을 시험했으며, 명경과는 유교 경전 그
자체를 시험했다. 대부분의 응시자들은 제술과를 지원했다. 고려시대를 통틀어
제술과는 급제자는 7천여 명인 데 비해 명경과 급제자는 겨우 400 명을 넘는
것에서 이런 사실은 잘 입증된다.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해 유교를 시험했다지만, 전통사상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거제도에는 그런 것을 시험하는 과를 설치하여 명분을
쌓았는데, 잡과가 바로 그것이다. 잡과는 전통사상과 관련된 실용적 지식을
시험하는 과목으로 처음에는 의업과 복업만을 시험 보다가 뒤에 많은 과목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과목들도 차츰 중국적 기준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고려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사회적 기능까지 표준화하기에 이르렀던 셈이다.
이런 기능들의 표준화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지위를 높이
끌어올리고, 지방색의 적대적,독자적 성격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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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획일화되는 사회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명품이지만, 오늘날 우리 겨레는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도 마찬가지이며, 그 밖의 숱한
기술들도 그런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재능을 거의 그대로 또는 좀더 발전시켜서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도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그 시험내용이 고려나 근조선에서처럼
획일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근조선의 과거제도는 매우 획일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더구나 고려시대의 제술과나 명경과 및 근조선의 문과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 밖의 다른 과목은 주목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다른 과목들도 그 나름대로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귀족 신분과 걸맞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신분적
지위를 지키고 사회적으로 많은 권리를 가지려면, 과거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유학자가 되어야 했다. 과거제도가
신분제도와 맞물리고 특정한 사상과 결합되면서, 마침내 사회사상도
획일화되어 갔다.
  과거와 관련되지 않은 공부, 곧 유학과 관련되지 않는 공부는 점차 퇴보되기
시작했다. 물론 과거가 처음 시행된 고려시대에는 아직 그런 현상이 눈에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부식과 같은 인물의 등장은 그런 추세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과거시험의 대상이 되면서 유학적 사상은 엄청나게 연구되었다. 그래서
유학이 성립된 중국보다 고려나 조선에서 엄밀한 이론적 성과가 나온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최충이 해동공자로 불리고, 뒷날 근조선에서 이황이나
송시열이 아성으로까지 숭앙된 것도 결국 과거제도가 물고 온 유학돌풍과
무관하지 않다.
  유학의 놀랄 만한 발전과 획일화된 사회상은 유학이 아닌 다른 사상과
중국적이지 않은 다른 뛰어난 재능의 쇠퇴를 몰고 왔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재능이라도 그것이 유학적이지 못하거나 과거시험의 기준과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 소멸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적 연구와 재능이
계승되지 못한 채, 획일화된 사회에 의해 천박한 것으로 배척되었다.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하늘사상은 유학자들에 의해 정도가 아닌 삿된 지식으로
배척받았고, 심지어 근조선에 이르러서는 불교조차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근조선의 경우 하늘사상의 계승자나 불교 수련인들은 (준)천민 대우를
받았으며, 전통적인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천민 대접을 받으면서 차츰
그 재능을 후대에 전수해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는 점차 획일화되어 다양하고 창조적인 사상을 내놓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근조선 중기의 사상적 정체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고려시대의 과거제도, 특히 유학만을
시험하는 시험제도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러므로 과거제도는 고려사회를
안정시킨 역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 다양성과 창조성을 잠재운 역할까지 함께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뛰어난 적응력과 우수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성과 다양성에 뒤진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어떤 면에서 1천여
년 전의 과거 실시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구나 어리석은 교육제도를 통해 그런
획일화가 거듭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과거 제도를 작은 겨레의 한
원인으로 꼽아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10. 묘청의 실패와 김부식의 승리
  (보수와 사대주의의 수렁에 빠진 고려 재건국의 실패)

    묘청의 정체

  묘청은 1135 년에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반란(아직 사건을 규정짓기
이전이므로 잠시 동안 이런 표현을 쓰기로 한다)을 일으켜 대위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그래서 반란자들이 늘 그렇듯 묘청이란 인물도 그
행적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묘청이라는 그의
법명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나 속명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정심이라는 또 다른 법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 따름이다.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그의 행적은 뒤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 가운데서 굳이 그의 행적을 들추어보는 까닭은 그의 행적과 그 역사적
위치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묘청의 반란은 겨레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때로
지역과 지역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혹은 문신과 무신의 세력투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층민의 옹호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민중항쟁의
지도자로 평가한 견해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다 종교갈등의 문제까지
추가하면 묘청의 반란은 참으로 복잡한 평가를 받는 셈이다.
  승려였다는 기록과 반란을 지도했다는 사실을 연결시킬 때, 묘청은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가권력에 맞서 반란을 지도한 역사상 단 한
명의 유일한 불교 승려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묘청은 스스로 도선의 후계자임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는
강정화라는 도선의 후계자로부터 '태일옥장보법'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강정화는 불교 승려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인물이고, 태일옥장보법도
불교와 무관한 것으로 사물과 사람의 기운을 일치시킨 어떤 사물을 멀리
옮겨다 놓으면 그 사물과 함께 사람의 위치도 저절로 옮겨지는 선교의 전통적
술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묘청의 승려였을지라도 불교사상에 얽매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서경에 지은 임원궁 팔성당에 모신 여덟 명의 성인을
살펴보면 그의 사상적 색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영산인 백두산(만주족은 청경산이라 불렀음) 신을
문수사리보살이라 이름 붙여 모셨고, 석가를 육통존자라 이름 붙여 그
다음으로 모셨는데, 이런 점에서도 그가 평범한 불교 승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묘청은 불교 승려라기보다 도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전통선교의 사상가였다. 물론 도선이라는 인물도 불교 승려였지만
불교적 사상의 테두리를 극복했던 것처럼, 묘청도 승려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그런 사상적 경향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도선의 경우 그의 출신 사문과 법맥이 그럭저럭 확인되고 있는데
견주어, 묘청의 경우 그러한 사항이 오늘날의 불교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오늘날 무속인이 임의로 승려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전통사상가요
선교의 수련인이었던 묘청이란 인물도 친불교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승려라는 신분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묘청이
도선의 경우처럼 불교와 선교 및 유교의 통합을 내세웠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
더욱 크다.
  그렇다고 도선과 묘청 사이에 사상적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신
사문과 법맥을 가진 도선이 사상통합의 중심축을 아무래도 불교에 두었다면,
출신 사문과 법맥조차 확인되지 않는 묘청은 그 축을 선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선과 달리 묘청은 자신의 교리와 정치의 일치를 한층 강력하게
내세웠으며, 내세지향적이기보다는 현세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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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조자와 반대자

  묘청은 처음부터 반란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현실적 여건과
최대한 타협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포부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의 계획은 먼저
고려의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즉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단군 왕검의 안식처라고 알려진 서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정치,사회적 상징성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튼튼히
하며, 이를 기반으로 고려를 고구려나 대진 같은 나라로 재건국하려고 했던
것이다.
  묘청이 처음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기록상 서기 1128 년 인종 6
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지지자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예컨대 정지상, 백수한, 김안,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과 반란의 지휘자였던
조광이나 유참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일 뿐, 묘청의 협조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임원궁을 짓고 팔성당을
지키며 반란에 참여했던 숱한 사람들 가운데도 많은 협조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정지상은 고려의 12시인으로 평가되며, 다섯 살 때 이미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정직한 인물이었으며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유교적인 관점에서 파악했던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장사상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역학이나 불교에도 사상적인 깊이가
있었다. "고려사"에 실린 그의 행적이나 "동문선"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린 그의 문학작품에도 이런 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백수한이나 다른
사람들도 정지상과 비슷한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묘청이 가장 먼저 내건 명분은 바로 서경 천도였다.
그들의 주장은 개경의 기운이 이미 약해진 반면 서경에 다시 왕업의 기운이
서렸으니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경지역 가운데서도
파발마를 설치했던 임원역 근처에 크게 번창할 기운, 이른바 '대화세'가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고, 나아가 그곳을 수도로 삼아 혁신적인 정치를 편다면
금나라를 비롯한 36개국이 모두 그 그늘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금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압박을 받고 있던 고려왕 인종은 묘청 등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임금은 먼저 묘청이 건의한 대로 1132 년 2월 서경으로
행차했으며, 다음 달 서경에서 기병과 보병의 열병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인종은 같은 해 동짓달 서경에서 묘청이 주관한 행사에 자신의 옷을
보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과 아울러 묘청의 말을 좇아 '혁구정신(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의 기틀을 세움)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묘청 일파에 대한 반대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핵심인물은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김부식이었으며, 그를 추종하는
임원개나 이중도 묘청의 추방이나 처형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들은 주로 옛
신라계의 실력자로서 정치적 보수성을 강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족 중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할 무렵 중국 대륙은 분열되어 한족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족을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으로 설정할 만큼
사대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1131 년 묘청 일파가 임원궁 공사를 시작하자 인종을
설득하여 노장사상의 연구를 금지시킴으로써, 묘청 일파의 기세를
주변에서부터 꺾어나가기 시작했다. 또 묘청 일파가 서경 천도를 내세우자
묘청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경의 궁궐을 수리하게 되자 개경의
궁궐도 수리함으로써 서경중심론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런 팽팽한 대립관계에서 인종은 먼저 묘청 일파의 주장을 존중했다. 1133
년 섣달에 이중이 상소를 올려 묘청의 추방을 주장하자, 인종은 오히려 다음해
정원에 묘청을 삼중대통 지누각원사로 삼아 더욱 존중하는 한편 다음 달엔
서경으로 행차했다가 3월에는 대화궁으로 거처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대파들은 더욱 강력하게 묘청을 규탄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지도자였던 김부식이 직접 나서서 서경 천도를 규탄했다. 김부식의 상소 이후
보수파의 세력이 결집되자 묘청 일파도 상소를 올려 '칭제건원'(황제가 되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을 주장함으로써 마침내 그 대립상태가 막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한 승리자는 김부식을 비롯한
반대파일 수밖에 없었다. 개경 관료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추종자였으며,
그들은 기득권을 지킨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강력하게 결집되어 있었던 탓이다.
김부식 일파는 자연적인 작은 재앙까지도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하늘의 상징이라고 주장했으며, 묘청 일파의 주장과 그들의 신앙적 행사가
민심을 현혹시키는 수단이라고 비방하면서 끈질기게 인종을
설득,협박했다.
  그 결과 정치적 분위기는 점차 묘청 일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묘청 일파는 실력을 행사해서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거나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일 가운데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은 실력행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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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인가 재건국운동인가

  1135 년 정월에 묘청 일파는 마침내 군사력을 동원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한편, 개경의 보수파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개경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개경 출신의 인사들을 감금했으며, 자비령 이북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서북 방면의 군대를 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이 사실을 스스로 중앙정부에
통보했다. 이것은 모두 매우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로서, 묘청 일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정지상 등도 미처 개경에서 탈출할 틈이 없었을 정도였다.
  묘청 일파는 이와 아울러 개경 중심의 보수적 정권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그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 불렀으며, 연호를 '천개'라 정했고,
편성된 군대를 '하늘이 보낸 충의의 군사'라 불렀다.
  이에 개경 정부에서는 김부식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겨 진압군을 파견했다. 김부식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투를 벌이기
전에 먼저 전투의 분위기를 자기편에 유리하게 만들어나갔다. 그는 진압군을
출발시키면서 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 등을 처형하여 진압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토벌문을 발표하여 묘청 일파에게 합류하려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협박함으로써 그들의 군사적 행동을 차단하는 한편, 서서히
군사를 늘려 서경 세력을 차츰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계속 전투를 미루면서 78차례에 걸쳐 투항을 권고함으로써 서경 군대의
강한 전투의지를 둔감하게 만드는 한편, 묘청 일파의 내부분열을 유도했다.
  김부식의 노련한 지휘는 그대로 효과를 드러냈다. 서경 군대의 핵심
지휘자인 조광이 마침내 칼날을 거꾸로 들이댄 것이었다. 그는 지도자인 묘청
등의 목을 베고 투항의 사자를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개경에서는 투항의
사자를 감옥에 가두고 조광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경 세력은 묘청이
죽은 이상 서경을 함락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이런 기회에 서경 세력을
아예 뿌리뽑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조광은 투항을 포기하고 다시 저항을 시도했다. 지도자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황한 개경 세력은 다시 투항을
권유하면서 협상을 시도했지만, 협상을 위해 서경에 파견한 사자는 죽임을
당했을 뿐이다.
  저항은 무려 1 년을 넘게 끌었다. 그러나 서경성 안에는 식량이 떨어졌고,
완전한 포위 때문에 외부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지도 못했다. 이에 개경
정부군은 총공격을 시도했고, 조광을 비롯한 서경 군대의 지휘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마침내 반란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묘청 일파가 일으킨 이 사건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임금을 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거사를
스스로 개경 정부에 통보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거사가 반란이 아니면,
그들의 거사는 다만 개경의 보수파를 제거함으로써 보수와 사대주의의 수렁에
빠진 고려를 재건국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묘청 일파는 유학만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개경의 기득권층에
의해 전통사상과 불교가 약화되는 현상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유학파들에 의해
고려가 중국화되어가는 현상을 뿌리뽑으려 했다. 그들은 고려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옳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친중국적,반기마종족적 유교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 뜻에서 묘청 일파가 일으킨 이 사건은 왕권에 도전하는 봉건시대의
전형적 반란도 아니었고, 천박한 이해관계로 말미암은 단순한 권력투쟁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화에 대한 기마종족 자주화의 운동이었으며, 작은
고려에 맞선 고려의 고구려화 운동이었다. 즉 그들은 고려가 중국적
세계질서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으며, 중국적 사상이 고려를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고려 재건국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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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건국운동의 실패와 무너지는 정통성

  묘청이 주도한 재건국운동이 실패하자, 고려사회는 표면적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장한 중국적 유교파들에겐 부담스런
견제세력이 사라졌고, 전통사상과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은 설 곳을
잃어갔다. 김부식을 비롯한 유학파는 한껏 세력을 자랑했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등용한 과거 출신의 관료들이 오히려 왕권을 짓누르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왕권 강화의 도구였던 과거 출신의 관료들은 중국화의 선봉부대가 되었으며,
귀족화된 그들은 과거의 호족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정치경제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차츰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으며, 도태된 호족 출신의 무인들을
무시하면서 그들만의 기득권을 최대로 누렸다.
  묘청 일파는 재건국운동을 파괴한 김부식은 중국적 관점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는데, 그는 이 역사서에 대륙에 있던 백제의 영토를 고의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으며, 대진을 우리 역사에서 아예 빼버렸다. 또 그는 중국적
세계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기의 삼국이 모두 중국왕조의 연호를 사용한
것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중국적 유교파의 정치경제적 독점과 그들에 의한 문화적 왜곡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고려의 임금들은 서서히 그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갔다.
어떤 부류의 세력이든 이들과 결탁해야만 기득권층이 될 수 있었다. 불교의
사찰도 이들과 결탁해야만 사원전과 노비를 비롯한 그 권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전통사상가들도 이들의 하수인이 되어야만 기득권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사상,문화들 상호공존과 상호견제에 의해 유지되던 고려왕조는
사실상 무너진 셈이었다. 요컨대 묘청의 재건국운동 실패와 더불어 고려왕조도
사실상 붕괴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서 중국적 유교파와 결탁하기를 거부하는
불교인이나 전통사상가들은 돌파구를 얻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으며,
이 대열에는 일부 유학자들까지 동참하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 의해
전통사상이나 불교계에도 차츰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렸다. 불교의 조계결사나
백련결사가 그런 기운의 실체였으며, 이규보와 금의에서 이승휴와 이암으로
이어지는 전통사상 연구 인맥도 그런 기운의 실체였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
유학자들은 성리학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인세력은 중국적 유교파에 대해 직선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고려를 재건국하거나 새로운 국가를 세울 만한 사상적 저력이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세력들의 울타리가
되는 일이었다. 무인정권 시기에 고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묘청 일파가 주도한 고려 재건국운동의 실패는 우리 역사를
중국화시키고 우리 겨레를 다른 기마종족과 문화적으로까지 구별짓게
만들었다. 고려의 건국이 비록 우리 겨레와 다른 기마종족을 갈라놓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경제적인 차원의 갈라섬이었다. 그러나
재건국운동의 실패와 함께 귀족으로 등장한 중국적 유교파는 이 갈라섬을
문화적 갈라섬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마침내 무인세력의 극단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혈통적으로는 기마종족임에 분명한 우리가 오늘날 다른 기마종족들과 상당히
다른 문화적 특징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재건국운동의 실패였다.
재건국운동이 실패한 뒤, 우리 역사는 마침내 단일민족의 테두리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중국화의 화려한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늘날의 겨레 형편을 떠올리면서, 묘청의 재건국운동 실패를
작은 겨레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꼽아본다.
  더구나 나라와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떠들면서 성급하게 핏대를 올리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설픈 운동의 실패가 얼마나 위험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새삼 되짚어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용 없는 개벽을 떠벌리는
사람들, 남의 예언이나 주워섬기는 부류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개혁론 등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묘청의 일그러진 초상을 떠올린다.

 

11. 실패한 고려 르네상스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고문운동과 중국 르네상스

  지루한 삼국시대가 끝난 뒤에 드러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중국 한족의 확고한
강세와 기마종족의 급격한 침체로 특정 지을 수 있다. 비록 대진이란 이름으로
기마종족 연합국가를 다시 세웠다지만, 이런 세력변화를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진이 멸망한 뒤에는 거란족 중심의 기마종족 연합국가인 요나라가 세워져 그
자리를 대신했으나, 그 또한 '백일몽'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기마종족의 탁월한 문명사적 업적들은 결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업적은 기마종족들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 및 대진의 중심세력이었던
조선족(고려 이후의 우리 겨레)에 의해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중국 한족도 그런 업적과 전통을 수입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기반을 드넓히려 하였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기마종족들의 위대한 문명사적 업적들이 중국으로
흘러들었고, 남조신라와의 교류에 의해서도 많은 문화적 업적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문화적 의욕을 가진 중국 한족은 여전히 문헌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에게 부족한 문헌들을 고구려부터 구해달라고 요청한 데서도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난다.
  사실 중국이 가지고 있던 문헌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헌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옛 문헌들로부터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참고가 될 만한 더욱 많은 문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근세의 출발점을 상징하듯 이 시기의 한족도
근세를 향한 시대병을 앓고 있었는데, 한유가 제창한 '고문운동'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한유의 고문운동은 당시 유행하던 문체인 사륙변려문을
반대하고 그 이전 시대에 많이 쓰였던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운동의 외형이지 본질은 아니었다.
  한유의 고문운동은 얼핏 문체의 복고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결합하여 새로운 사상적
방향성을 창조해내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고문운동을 통해 문체가 훨씬
자유로워짐으로써 사상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기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한유는
그의 수필집인 "창려집"에서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의 유명한 수필
'스승에 대하여'는 일정한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폭 넓은 배움의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중국 르네상스 시기의 개방적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문운동 시기의 중국 문화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유종원이나
유우석도 고문운동의 지지자였지만, 그들이 모두 한유와 같은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유는 유종원 등과 달리 사상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했다. 그래서 한유의 사상은 그의 동료나 후계자들에 의해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게 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리학파 또는 주자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고문운동과 함께 시작된 중국 르네상스는 먼저 유교라는 테두리를 넓히려고
애썼다. 그들은 불교의 문헌과 도가의 문헌 및 기마종족계의 문헌을 소화해냄으로써
그것을 유교 재무장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기마종족계의 문화유산이었다.
  원시 유교 그 자체가 기마종족적인 전통을 중국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를
중심사상으로 설정한 이상 그것과 호흡이 가장 잘 맞는 것은 기마종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실제로 고구려와의 전쟁 및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당나라로 흘러든
문헌들은 이런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했다.
  먼저 성리학자들은 일원론적인 음양오행설을 수용했는데,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태극도설'은 일원론적인 음양오행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정호,정이 형제를 거쳐 주희에 의해 방대한 사상적 체계로
발전했다. 당나라 후반기에 출발한 중국 르네상스가 송나라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요컨대 당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후기에 이르는 350여 년의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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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적 동아시아 질서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파의 사상은 유교를 중심으로 기마종족의 문화를 통합한
것이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는 불교와 도가까지 통합해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은 중요한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동아시아를 휩쓸 수 있었다.
  첫째 요소는 당나라 이후 중국이 아시아의 최강자로 부각되었으며,
사상,문화적 측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위진남북조의 제자백가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족의 지적 활동은 매우 왕성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적 경향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이후 통합된 사상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둘째 요소는 새로 체계화된 성리학이 기마종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어서
기마종족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유 등이 정통으로
삼았던 유학도 원래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을 담고 있는 것인데다 새로 추가된
핵심적인 요소도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이었던 탓이다. 그러므로 한족을 제외한
아시아의 주민 대부분이 기마종족의 후예였던 상황에서, 성리학은 이제 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중국적 세계질서를 세울 사상적 무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로 성리학은 그것이 성립된 중국에서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기마종족 국가에서
더한층 엄밀해지고 체계화되는 기이한 현상을 드러냈다. 중국에서 성리학은
체계화됨과 동시에 섭적이나 왕수인 등 한족 고유의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지식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고, 뒷날 고증학파로부터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수입한 근조선에서는 별다른 비판조차 없이 찬란한
발전을 거듭했다.
  뒷날 권근은 주돈이의 태극도를 계승하여 '천인심성합일도'를 그렸고, 이황은
천명도를 내세워 주리론 철학을 가장 높은 봉우리로 끌어올렸으며, 이이는 주기론을
상당한 경지로 끌어올렸는데, 이 모든 것도 결국 이런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성리학은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으로 구분되어 살아오던 문화적 경계를
허물어내기 시작한 엄청난 사상적 업적이었다. 실제로 성리학을 통해 동아시아
사회는 마침내 하나의 문화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성리학이 중국에 의해 체계화된 사상이고, 그 이후 동아시아의 주된 생활양식이 이
사상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또는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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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 늦는 습관

  정약용과 그의 동료 및 후계자들이 성리학을 개혁하는 새로운 사상을 제기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할 때, 그 개혁보다 한 발 빨랐던 것은 서구 열강들과
일본 군국주의였다. 즉 사상의 내적 재정비와 자생적 성장보다 외세에 붙어온
외래사상의 한 발 빠르게 이 나라의 지성계를 강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문화적 진로는 갑작스레 뒤틀리고 나아가 삶의 양식도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개항기의 이 나라 정세였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이미 그 이전에도 있었다. 성리학이 이 나라의 지성계를
강타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일연이나 이규보, 금의나 이승휴 같은 지성인들이
했던 작업은 불교와 유교(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유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기마종족의 지나간 역사를
정리하고, 수필과 소설 및 시 등을 통해 다양한 사고방식을 검토하였다.
  이규보는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어 겨레 역사의 전통을 다시 세우려 하였고,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지어 그 작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들은 작품을
쓰면서 한족 문학의 형식성을 거부하는 한편, 보잘것없어 보이는 설화들까지
정리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중국 문학이 아닌 전래의 향가를 수집하고,
나아가 그것을 발전시켜 '경기체가'라는 자주적 형식을 만들어낸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안이 성숙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동아시아 정세 및 고려 내부의
사정과 맞물려 밖으로부터 그것을 대체할 사상이 수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350여 년
동안 숙성된 한족의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먼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기마종족의 후예인 몽고족의 나라(원)를 정신적으로 삼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원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운 몽고족은 성리학을 아시아 전체에 전파하는 '기막힌'
역할을 맡고 말았다.
  비유컨대 당나라가 차려놓은 사상의 공장에 기마종족은 재료를 제공했고, 한유는
기획을 맡았으며, 주돈이는 상품 설계도를 그렸다. 마침내 350여 년이라는
숙성기간이 지나자 주희는 조립품을 완성시켰으며, 몽고족은 상품의 수입, 판매권을
독점하여 아시아의 주민들에게 그 상품을 판매했는데, 고려와 조선은 자기들의
조상이 원료를 대어주어 만든 사상적인 상품을 구매한 셈이다.
  성리학의 재료가 기마종족, 특히 고구려의 것이라고 해서 기마종족의 문명사적
쇠퇴가 변명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뛰어난 지적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사상사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기마종족의 역사에 치명적 상처가 생겼음을 뜻할
따름이다.
  또한 뒷날 성리학의 주요한 발전단계가 중국이 아닌 근조선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런 결점이 변명되는 것도 아니다. 이 결점은 오로지 기마종족적인 전통을
복구하여 전면적으로 자기다운 지적 전통을 세워내고 그것을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사상으로 승화시켜낼 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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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의 동거시대

  앞에서 몇 차례 강조한 대로 고려시대는 문명의 혼거단계였다. 고구려적인 전통과
백제적인 전통 및 신라적인 전통이 융합되지 못한 채 뒤섞이고, 나아가 말갈이나
거란 및 여진의 문화까지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온갖 사고방식이 혼거하면서 갈등을
겪던 때가 바로 고려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다시 몇 가지 문화적 요소를 앞세워 더욱
혼란스런 상황을 연출했다. 기마종족의 지적 전통을 계승한 흐름과 유학과 도교 등
중국적 색채를 이어받은 흐름 및 불교적 색채를 고수하는 지적 흐름이 서로
견제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발버둥쳤던 것이다. 도선에서 묘청으로 이어지는
하늘사상적인 흐름과 최승로에서 김부식으로 이어지는 유교사상적인 흐름 및
의천에서 지눌로 이어지는 불교사상적인 흐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기마종족적인 전통과 불교적인 전통이 사회사상으로서 강세를 보였으나, 유학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리는 등 강력하게 반기를 들었다, 또 중기부터는
유교적인 전통이 불교적인 전통과 함께 지성사의 쌍두마차를 이끌었으나,
전통사상가 묘청 등이 반란까지 불사하며 충격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문화적 전통이 서로 투쟁하면서 공존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고려라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300여 년 동안, 사상의 공존을 강조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느 사상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13세기 이후 는 이런 공존과 투쟁이 통합사상에 의해
정리되어야 할 시기로서 고려 왕조의 황혼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통합사상의 수립은
새로운 사회체제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요구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왕조의
성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일반적으로 중국과 달리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차이에 대한 설명에서도 우리는 두 문명 사이의 주요한 역사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중국 대륙에서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 하나는 중국 한족과 기마종족 사이의 끊임없는 주도권 투쟁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한족이 보여주는 기민한 문명사적 전환 때문이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 사이에는 때로 긴밀하게 때로 느슨하게 서로 연결된 측면이
있다. 중국 문명은 기마종족계 왕조의 수립으로 말미암아 기마종족 문화로부터 늘
일정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그 영향력을 자신의 문화적 자양분으로 활용했다. 즉
중국 한족은 자신의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주변 종족을 동화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죄래 왕조가 수립될 때마다 신선한 충격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 일이나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선 일,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일은 크게 보아 기마종족과 중국 한족
사이의 대립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세워진 일,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일,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일은 중국 문명의 발전단계에서
일어난 내적 전환과 관련이 깊다. 마지막으로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가
들어서며 위진남북조가 망하고 나라가 들어서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것은 위의 두 가지 상황이 긴밀하게 맞물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왕조의
흥망이 곧 문명사적 변화와 연결되었다고 볼 때, 우리나라의 과거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중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우리 역사에서 일어났던 왕조의 교체는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한 만큼 왕조의 교체과정을 기민하게 보이지 않은
만큼의 변화된 내용은 더욱 뚜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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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조교체와 문화변동

  왕조의 흥망이 늘 문명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왕조가 교체되지
않으면서 문명사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문명사적 변화를 거의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주나라나 고조선처럼
유지기간이 길었던 시대가 대체로 앞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중국의 신나라나
후삼국처럼 존립기간이 매우 짧았던 나라의 흥망은 대체로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길게 유지되었던 왕조, 예컨대 주나라의 경우 그 후반기를 춘추시대라고
하여 별도의 시기로 구분하게 되며, 신나라의 경우 시대 구분(또는 시기구분)의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평가를 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고조선은 그처럼
나누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후삼국의 경우는 하나의 시대로 간주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조건까지 감안하여 우리 겨레의 왕조사를 살펴본다면, 첫째 고조선의
전반기는 기마종족계의 문명이 성립되는 시기였으며, 후기는 기자계의 이주와 함께
갈등을 겪으면서 기마종족계의 문명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열국시대는 주로
이 같은 문명이 통합,체계화되는 시기였고, 열국시대의 휘기인 삼국시대는
불교적,중국적 문명이 도입되면서 다시 문명사적 발전이 촉진된 시기였다. 또
나진남북국시대는 세 갈래의 문명, 즉 기마종족적 문명과 불교적 문명과 중국적
문명이 주도권을 놓고 투쟁하는 시기였으며, 고려왕조는 이들이 외형상 통합되어
혼거상태에 들어간 시기였고,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대체적인 통합이
실제로 진행된 시기였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세워질 때부터 가장 분명한 멸망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왕건의 훈요십조는 바로 그런 위험성에 대한 예방책이자 나아가
지연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기마종족적인 흐름은 묘청
등을 내세워 그 위험성에 불을 지피려 하였고, 불교적인 흐름은 의천과 같은 인물을
내세워 사상치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유학은 최승로와 같은 이론가를
앞세워 강력한 사상적 견제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모든 사건들이야말로 문명의 공존과 혼거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 단계가
문명사에서 과도기일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상의 근원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고려왕조를 위기와 불안에서 구해낼 수 없었으며,
통합 그 자체도 고려왕조의 폐허 위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고려시대의 지식인들, 특히 무신정권의 칼자루를 울타리로 삼아 새로운
통합사상을 찾아보려던 사람들은 고려왕조의 그런 위험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즉 전쟁과 같은 외부적 조건이 없는 한, 고려 후기사회를 위협하는
근본적일 요소는 사회경제사관에 의존하는 연구자들의 주장과 달리 백성들의 반란이
아니라 사상계의 불안정한 혼거였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도
전에 나라의 바깥으로부터 성리학이라는 엄청난 결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외부조건에 따라 사상의 혼거상태가 정리되는 순간,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운명 곧 문명의 과도기라는 제한된 운명을 벗어나면서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성계라는 야심가의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성리학
수입업자들은 단번에 고려왕조를 뒤엎고, 성리학을 내세워 다른 사상들을 '깨끗이'
정리해버렸다. 그리고 성리학이라는 수입된 통합문명의 깃발 아래 5백여 년의
근조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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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사상통합의 말로

  인류역사에서 자주 확인되는 것처럼, 수입된 사상과 무력을 동반한 문명사적
전환은 매우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수입된 통합사상인 성리학은 고려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던 사상통합의 맹아들을 모질게 짓밟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적지 않은 사상사적 결점이었다.
  성리학이 수입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지적 전통을 지키려는 불교 지성인과
기마종족적 지성인들은 끊임없이 사상적 이의를 제기했으며, 때로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이 같은 반란에 대한 동조자가 생겨났다. 그럴 때마다 성리학자들은
권력과 지위를 내세워 그들을 탄압했으며, 마침내 자신들의 교과서인 "맹자"의 일부
내용과 "소학"까지 금서목록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 불교 승려 태고 보우와 청허당 휴정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사상통합안을 제시했으며, 서경덕이나 정렴 같은 기마종족적인 지성인들은 그들
중심의 사상통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박세당이나 윤휴 같은 지식인들은 성리학
내부에서 사상통합의 반란자로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통합이론을 자체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들은 주장했다. "현실에 근거해서 기존의 통합 사상인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자!"
  실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근조선 후기의 사회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오늘날 우리 역사의
한계를 보여줄 따름이다. 사실 우리 역사는 여러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시대사별
연구결과를 시간순으로 엮어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학은 어디까지나
근조선의 범위에서만 연구될 뿐이다. 진정 모든 시대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역사적
안목은 아직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모든 시대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 역사를 좀더 길게 볼 때,
실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르네상스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려사회 내부에서
진행되던 르네상스가 성리학이라는 수입사상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괴된 두, 탄압과
함께 잠복해 있던 그 기운이 마침내 몇백 년 뒤에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학은
이승휴와 이규보 등이 주도했던 고려 르네상스의 계승과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실학 또한 외래 수입사상에 의해 주체적 발전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 과제는 새로운 조건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즉 우리의 시대에도 현대
르네상스가 진행되어야 할 당위가 존재하며, 따라서 현시기를 그 당위의 잠복기
또는 발현기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는 우리 역사를 일정하게 공회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어떤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대응할 문화를 마련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서 공회전이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고려 말기의
사상통합운동이 실패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문화적 핏줄기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대주의란 정신적 자세만 가지고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성리학을 채택한
근조선이 비록 단군 왕검을 공식화시키고, 세종 임금이 우리글을 재창조해서
반포했다 해도, 그것은 오그라붙은 나라 문화가 만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대주의를 대신할 주체적 문화를 활짝 꽃피울 수도 없었다. 사상과 종교에 대한
탄압은 끝이 없었으며, 정신적인 폐쇄성은 정치적,사회적 폐쇄성을 불러왔고,
마침내 나라는 남의 강제력에 의해 세계무대로 나섰으니, 이어진 작은 나라의
뿌리가 깊지 않다고 할 것인가!
    1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새 왕조 설립의 욕망이 부른 반원친명정책)

    작은 섬의 큰 사건

  여의도가 한강 하류의 작은 섬이듯, 위화도는 압록강에 있는 작은 섬이다. 그러나
작은 이 섬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근조선의 건국을 예고하고, 나라 역사의 큰
물줄기를 소용돌이치게 한 곳이다. 서기 1388 년(우왕 14 년)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4 만여 명의 군대가 이성계의 명령을 받아 말을
돌린 곳이 바로 위화도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시 고려 임금이던 우는 폐위되었고, 고려 왕조 최후의
수문장이었던 명장 최영도 유배살이를 거듭하다 결국 목베임을 당했다. 실권을 손에
쥔 이성계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서 대토지소유자를 축출하는 등 차츰 새로운 왕조를
위한 기반을 닦아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한차례 뒤틀어놓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현실성을 들어 이성계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민족자주성을 들어 그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 전에 이미 더 이상 진군할 생각이 없음을 우왕과
최영에게 거듭 밝힌 바 있었다. 그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작은 국가가 큰 국가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왜구가 침입할 가능성이
높고, 무덥고 비가 많이 내려 아교가 녹아 활이 못쓰게 풀어질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휘계통상 상급자였던 최영과 우왕은 이성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을 서둘렀다. 이에 이성계는 위화도에 머무르고 있던 군대의 공동 지휘자인
조민수를 설득해서 군대를 돌렸으며,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당시 이성계의 지휘에 따르던 군대는 4 만여 명에 가까웠으며, 최영이 거느린
군사의 수는 1 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성계가 지휘하는 군대는 절반 이상이
정예기병이었지만, 최영이 거느린 군사는 대부분 경비 보병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인지라 승리는 당연히 이성계의 몫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과 함께 요동정벌의 계획표는 백지장이 되었으며, 외교노선도
완전히 바뀌었다. 명나라는 정벌의 대상이 아니라 사대와 동맹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원나라는 보복과 응징의 대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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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과 이성계의 이력서

  최영과 이성계는 모두 고려 말기의 명장이다. 고려 말기의 불안한 정세에서
내우외환을 받을 때마다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무공을 세울
기회는 물론 나이가 19살이나 많은 최영에게 더 많았고, 실제로 지휘계통에서도 늘
최영이 상급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먼저 1316 년에 태어난 최영의 군사경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로를 세워 벼슬길에 나섰으며, 1352 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여
호군이 되었고, 1354 년에는 원나라를 지원하는 원병 지휘관으로 출정하여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무인이 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1358 년에는 400여 척의
병선을 끌고 온 왜구를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고, 1359 년과 1361 년에는 홍건적을
격파하여 수도를 되찾는 데 결정적 공로를 세웠다. 또 1363 년에는 '김용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1364 년에는 처음으로 이성계와 함께 '최유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1376 년부터 5
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왜구를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1335 년에 태어난 이성계의 군사경력도 화려한 편이다. 그는 1361 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로를 세웠고, 같은 해 홍건적과 싸워 개경을 탈환하는 데도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개경을 탈환할 때 가장 먼저 개경성에 입성한 인물이었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무장 나하추가 이끄는 수만 명의 군사를 맞아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끝에 그들을 대파하기도 했으며, 1364 년에는 최영과 더불어 최유의 모반을
진압했고, 여진족을 눌러 복속시키기도 했다.
  1377 년에는 지리산 동부를 약탈하던 대규모의 왜구를 물리쳤고, 1380 년에는
전라도 운봉에서 아기바투가 지휘하는 대규모의 왜구를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일러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또 1382 년에는 여진을, 1384 년에는 왜구를 각각
물리쳤으며, 그런 공로로 말미암아 그는 늙은 최영의 다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업적을 세운 무인이었지만, 그들의 근본은 상당히
다른 편이었다. 최영이 순수한 무인관료였다면, 이성계는 자신의 통치지역과 사적
군사기반을 가진 무인문벌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국가에서 동원시킨 군대를
지휘하는 관료적 지휘관으로 별도로 사병을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1361 년 개경 탈환에 참여할 때도 이성계는 자기 집안의 세력근거지인
영흥지역에서 2천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왔으며, 그 이전에 박의의 난을 진압할
때도 사병을 동원했다. 그 뒤 그의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그의 사병도 계속
늘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여진족의 거주지역인 간도지역에서 원나라의
지방관리를 지낸 조상들의 세력을 이어받아 그곳에서 독자적인 실력을 기른
인물이다. 그는 원래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의 천호였지만,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반도에서 몰아낼 때 내응을 해서 공로를
세움으로써 고려 정부가 주는 벼슬을 받게 되었다. 고려 정부는 그의 공로와 세력을
고려하여 그에게 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임명하여 그를 동북지대 최고 실력자로
인정했다. 이성계는 바로 그런 배경을 업고 군사적 공로를 세움으로써 중앙정부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성계의 출발점은 처음부터 최영과 달랐으며, 정치적 선택도 최영과 같을
수 없었다. 자기 힘의 근거가 고려왕조였던 최영은 고려왕조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밖에 없었지만, 독자적 세력을 가진 이성계는 상황에 따라 고려왕조를 전복시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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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동아시아 정세

  14세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내부분열과 한족의 저항으로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몽고족의 위세에 눌려
신음하던 여러 종족들도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고려의 경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찾았으며, 원나라의 감시기구인
정동행성을 없애고, 원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거부했다. 여진족은 차츰 독립의 기세를
드러내며 자신의 세력권을 넓혀 갔다.
  중국 한족은 곳곳에서 저항을 했으며, 원나라의 통치영역 속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의 지휘자들은 때때로 황제나 왕을 자칭했다.
1353 년 고우에 근거지를 둔 장사성은 스스로 성왕이라 불렀으며, 1360 년 한왕을
자칭하던 진우량은 마침내 자신을 황제라 불렀고, 1368 년 오왕을 자칭하던
주원장도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명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주원장의 세력은 장사성의 세력까지 항복을 받으면서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원나라를 북원이라 부르게 된다.
명나라는 1371 년에 대륙의 서부지역을 차지한데 이어 요동지역까지 점령했음,
고려마저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들은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의 징발을 요구했다.
  1372 년에는 형식적으로 50 마리를 받아갔지만, 고려가 군사력을 늘리는 기미를
보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384 년부터 매년 1천 마리에서 5천 마리에 이르는
말을 강제 징발하거나 수입해갔다. 명나라는 고려뿐만 아니라 여진족으로부터 많은
말을 징발해갔으며, 말과 함께 많은 양의 금과 은 및 가는 베를 받아감으로써,
고려와 여진의 군사적 행동을 예방하려고 했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대륙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해졌지만, 명나라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명나라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대륙
남부의 경제적 어려움이 전혀 치유되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흉작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내부기반이 불안했으며, 이에 따라 자주 모반이 일어났다. 1380 년에
있었던 호유용의 반란이나 1385 년에 일어난 반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명나라의 주요한 경제기반인 해변지역에서는 왜구가 대규모로 출몰했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 경제적 사정에 걸맞지 않은 군사비 지출을 감당해야만
했다.
  고려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해마다 왜구들이 침입해왔고 그들을
물리치느라 군사력을 증강해야 했으며, 홍건적의 침입과 내부의 반란까지 겹쳐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1378 년에는 정부가 강제적으로 물가를 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경제사정이 그런 형편이나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는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1382 년에는 영해와 합천에서, 1383 년에는 평창과 영주 및
순흥(지금의 풍기) 일대에서 각각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정부는 지방세를 더 추징하기 위해 국가기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심지어 1387
년에는 사전에서 소출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거두어 군수비로 충당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느 곳 가리지 않고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대륙에 대한 패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실제로 이 시기의 정세는 군사력과 교섭력이 아니면
어떤 것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명나라와 원나라의 대결, 그 대결에 고려와 여진 및 왜구가 개입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던 일본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려에서는
외교노선상의 분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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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친원론'과 '신친원론'

  1372 년 11월 나하추가 이끄는 세력이 요동의 우가장을 공격했고,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명나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요동을 차지한 지 1 년이 지나지 않아
그런 공격을 받았으므로 요동의 민심은 흔들렸고, 명나라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그런데 명나라는 나하추의 공격이 고려의 부추김을 받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명나라는 외교문서를 보내 고려를 비난하면서 이 추측을 공식적인 외교문제로
발전시켰다. 이듬해 그들은 고려와 국가사절이 요동에 드나드는 것을 막았으며,
나아가 고려를 위압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했다.
  요동을 통과하려던 두 차례의 외교사절이 모두 봉쇄되자, 고려는 명나라의 속뜻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맺는 것이 과연 국내외 정국을 안정시키는
합리적인 방편인지에 대해서도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다. 즉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외교방향이 장기적 우호관계인지 그렇지 않으면 고려를 고립시키고 무력화시켜
무너뜨릴 시간적 여유를 벌기 위한 전술적 우호관계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374 년 명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고려가 기병을 키우지 못하도록
견제할 속셈으로 탐라(제주) 말 2천 마리를 요구했다. 그런데 탐라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 정부는 최영을 파견하여 탐라를 치게 하는
한편, 명나라의 행위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처럼 고려는 차츰 명나라를 경계하게 되었고,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입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원나라와 동맹해서 명나라와 대항해야 한다는
친원론도 다시 제기되었고, 명나라와 친교를 맺어 원나라를 몰아냄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여 불안정한 고려 정세를 안정시키자는 친명론도 줄기차게 제기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환간인 최만생이 철저한 친명파인 공민왕을 살해했다. 역사적
기록에야 공민왕의 변태행각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얽혀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대립을 감안할 때 공민왕은 세력투쟁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 누구나 공민왕이 죽기 열흘 전에 친원파의 모반이 발각되어 그
주모자들 일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개경 중심의 중도파는 우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으며, 다른 친원파는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심왕 탈탈불화를 추대하려 했고, 친명파는 제3의 왕족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인임 일파가 내세운 우가 결국 임금이 되었으며, 새로운 임금의
등장과 함께 외교정책에 대한 논의가 한층 활발해졌다.
  중도파인 이인임이 실권을 잡으면서 고려의 외교정책은 이중성을 띠었다. 고려는
공민왕의 죽음과 관련된 외교사절을 명나라에 보내는 한편, 원나라 나하추가 보낸
사절을 영접하고 단절된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이런 이중성에 대해 정도전을 비롯한 친명파는 강경하게 반발했다. 또 고려의
이중외교로 말미암아 대륙에 대한 확고한 패권을 잡지 못한 명나라도 끊임없이
고려를 압박했다. 명나라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외교사절을 구금하기도 했으며,
말을 비롯해서 무리한 조공품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고려 정부는 이중외교라는 외줄타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억압은 고려의 경제기반과 민중생존을 위협했다. 명나라의 무리한 조공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사회적 분위기는 명나라에 대해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영을 비롯한 무인들은 '신친원론'을 제기했다. 이 주장의 요지는
원나라와 전술적으로 제휴한 뒤 명나라와 일전을 벌임으로써 북방진출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주장은 원나라에 대한 굴종을 전제하는 그
이전의 친원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성계를 비롯한 친명파도 이 주장을
전면적으로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
  신친원론의 지도자인 최영은 서서히 전쟁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1387 년
그는 사전 소출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거두는 임시조세법을 실시함으로써 군비확충을
서두르는 한편, 여러 곳에 있던 둔전병을 전투태세로 돌입시켰다. 그리고 명나라가
요동을 평정한 뒤, 철령위 설치를 주장하며 철령 이북지역을 빼앗으려고 하자,
고려는 드디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기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 정월에는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어 민중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관료들의 복장을 기마종족풍으로 바꾸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한 정신무장을 가다듬게 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친원론을 그 이전의 친원론과
마찬가지로 대토지소유자의 보수적인 외교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친명론이 정세의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인
외교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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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모함에 대해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나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운 친명파는
친원론이 현실을 무시한 외교노선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학자들도
대체로 그런 비판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나 당시 신친원론자들의 요동정벌
계획이 과연 현실을 무시한 결단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 정책은 어느 시대에나 위험부담을 지게 마련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확장도 늘 큰 부담을 안은 채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진의 영토확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려보다 더 작은 기반을 바탕으로 드넓은 나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영토의 확장은 직간접적인 전쟁행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고려 말기의 경우에도 위험부담만 감수했다면 영토확장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 당시 원나라는 대륙에서 완전히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고려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으며, 여진족도 한족이 자신의 영역을 짓밟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 통제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요동지역에서 장기전을 치를 형편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고려는 정예기병을 중심으로 장기전을 벌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방의 안전은 각 지역에 주둔한 둔전병과 최영이 거느린 예비부대로써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또 왜구는 계속된 패배와 고려의 전시체제로 말미암아 1380 년
이후에는 주로 중국의 해안지역을 약탈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오히려 이때부터는
일본 정부가 포로로 잡혀간 고려인들을 돌려주는 일이 잦았다.
  더구나 명나라 내부에서 반란의 가능성이 일상적으로 남아 있던 탓에 100 만
대군을 자칭하는 군대를 요동으로 동원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1377 년에 평정된
토번이나 1379 년에 평정된 비주번 및 송주번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했으므로,
거기에도 늘 군대를 주둔시켜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탕화가 이끄는 군대는
왜구를 막는 데 주력하고 있었으며, 원나라도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명나라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정예기병인 고려의 4 만 대군이 요동을 공격했다면
명나라는 쉽게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며, 장기전이 될 경우 요동이라는 지역은
주민의 구성상 명나라보다 고려에게 훨씬 유리했다. 전투경험이란 측면에서도
고려군은 명나라 군대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원나라와 연맹해서 명나라와
전쟁을 벌인 경험도 축적되어 있었고, 왜구를 상대로 한 전투경험도 충분히 쌓여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내적으로 궁핍했으며, 각 나라의 사회경제적 기반도
매우 허약했지만, 고려의 경우 요동정벌은 그런 사정을 극적으로 반전시킬
가능성까지 안고 있었다.
  물론 요동정벌을 실제로 진행했을 경우, 어느 누구도 그 승패를 단언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전투력이란 군사력뿐만 아니라 지휘능력 및 보급능력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실체는 실전에서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요동정벌이 무모했다고 하는 것은 대륙진출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없고 정국의
안정을 바라는 친명파의 소극적 논리가 5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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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진출이냐 새로운 왕조냐

  이성계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왕조를 꿈꿀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해 금산에서 왕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만약
왕이 되면 그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싸겠다는 욕심을 부렸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성리학파와 결탁했고, 그들이 대부분
소토지소유자였으므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견에 따라 명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이성계의 입장에서 요동정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성리학파와
결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럴 경우 그의 야망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이라는 중국화된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과
요동정벌은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는 왕조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성리학파와 결합했을 뿐이다. 명산마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거나 풍수지리를
신봉하고, 근거 없는 예언서를 믿거나 성리학파가 배척하는 불교 승려를 스승으로
삼았던 그의 행적이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최영은 그런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묶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고려를 지키고
거대하게 키우는 데 전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력서'에서 드러나듯 이성계나
기존의 친원파와 전혀 다른 참된 공인이었다. 그러므로 대토지소유자의 대변자라는
작은 잣대로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부패한 대토지소유자였던 이인임을 권력에서 몰아내고도 처단하지 않은 행위를
때로 그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와 관련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실상 요동정벌 기간
사이에 있을 대토지소유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요동정벌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은 요동을 원래의 주인인 기마종족의 무대로 확정하되,
고려가 그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뒤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계획의 좌절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모험이 좌절되었음을 뜻하며,
패배주의와 사대주의가 터전을 잡았음을 뜻한다. 이 계획의 실패로 말미암아
성리학을 비롯한 중국 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왔으며, 전통사상과 전통문화는 우리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나 탄압까지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위화도에서 돌아온
이성계가 관료들의 제복을 명나라 형식으로 바꾼 것은 이런 사정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진 뒤 정치적 수순을 밟아 세워진 근조선은 외래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기마종족 고유의 진취성을 거세해갔고, 이에 따라 '작은
나라, 작은 역사'의 답답한 굴레가 500여 년 동안 우리를 짓눌러왔던 것이다.
    13. 훈민정음이 몰고 온 파도
  (한글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한글은 어디에서부터

  훈민정음은 오늘날 우리 겨레의 언어생활에 바탕이 되는 한글의 모태로서, 1443
년 섣달에 반포된 문자체계다. 1940 년 안동에서 발견된 원본 "훈민정음"은 서문과
본문 및 해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세종 임금이 쓴 것인데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28자의 발음법을 한자로 풀이해놓았고, 해례는 다섯 가지 용례를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서문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자.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어긋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글자로서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그 사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를 위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힘으로써 일상생활이 편리해졌으면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훈민정음이 새로 만들어진 글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만물 가운데 참으로 새로운 것이 있을까?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문제는 늘 창조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훈민정음 역시 느닷없이 세상에
튀어나온 완전한 창조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대체 무엇을 참고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어느 정도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는, 첫째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 둘째 성리학과 주역의 원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 그리고 음악의 원리를 응용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까지 제시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창조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것으로는 '고전'(고대문자)을
본떴다는 견해와 더불어 범어, 몽고글자, 서장문자, 여진문자, 거란문자, 팔리어,
일본 신대문자 등을 본떴다는 견해가 있다.
  물론 이 가운데 대부분의 기원설(창문 상형설과 팔리어 기원설은 제외)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고 사실에 가까우며
문헌으로도 확인되는 것은 고대문자를 본떴다는 견해이다. 물론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거나 철학적 원리를 이용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은 고대문자를
다시 체계화하고 재창조하는 원리를 이용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은
고대문자를 다시 체계화하고 재창조하는 원리로서 훈민정음의 직접적인 자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기원이 된 고대문자가 이미 발음기관의
모양을 응용하고 있었다면, 발음기관 상형설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견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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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있었던 나라말씀

  훈민정음의 기원과 관련지어 살펴볼 만한 몇 가지 명제부터 정리해 보기로 하자.
  가. 임금께서 손수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시대의 전자'를 본뜨신
것이다("세종실록", "청장관전서").
  나. 훈민정음은 몽고글자와 같은 모양이다("성호사설", "언문지").
  다. 동방에는 옛날부터 일상생활에 쓰이던 문자가 있었다.("훈민정음운해")
  라. 일본에서 발견된 비석의 신대문자와 한글은 체계가 거의 같다.
  마. 서장족의 문자가 여진문자 및 거란문자도 훈민정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명제들은 서로 상통하고 있다. 먼저 일본의 신대문자는(아직 완벽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백제의 문자'로부터 내려온 것이고, 서장족도 백제의 다물을
구성하던 종족의 하나로서 서장문자도 백제 문화라는 틀에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또 몽고족이나 거란 및 여진족도 동아시아 기마종족들로서 모두 고조선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거란이나 여진족은 고구려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즉 이
명제에서 등장한 종족들이 모두 같은 문화를 가꾸어온 고조선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시대의 전자나 일상생활에 쓰이던 동방의 옛 문자도 이 종족들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까지 선교의 도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이런 옛
문자를 '하늘문자'라고 하는데, "해동전도록" 등에서도 '천전'이라는 문자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전' 또는 '천전'이라고 하는 글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중국 한자의 전서체를 가리키는 것일까? "훈민정음"에서
중국 한자와 우리말이 다름을 밝혔고, 또 동방에 그런 문자가 있었다고 했으므로, 이
고대문자는 중국 한족의 문자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 대륙의 옛 주인이었던 은나라가 이미 문자(갑골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들도 기마종족의 한 갈래였음을 감안할 때,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고조선에도 그
나름의 문자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은나라 때 사용되던 문자는
은나라의 뒤를 이어 대륙의 주인이 된 한족에게 전수되었으며, 은나라 유민의
망명과 더불어 고조선에도 전수되었다. 즉 한자는 원래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중국계 기마종족이었던 은나라의 문자였으며, 은나라가 무너진 뒤 한족과
기마종족이 공통으로 사용하게 된 문자였던 것이다. 물론 은나라 멸망 이전부터 이
문자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공용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환단고기"에서도 고조선에 고유한 문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가림토'라는 이름을 가진 문자인데, 그 글자들은 우리 한글이나 일본의 신대문자와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문자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들이 마땅치 않다.
만주에는 가림토로 된 비석이 있다면 그 탁본까지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그 탁본에
있는 문자와 "환단고기"의 가림토가 같은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남해군
양하리에서 고대 암각문자가 발견되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이 역시 가림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산청군에서도 풍화된 비석에 새겨진 가림토와
비슷한 옛 글자가 발견되었지만, 그 또한 가림토와의 관련성을 확인받지 못했다.
불교 이전의 가람이 있던 터라고 전해지는 천보산 달굼바위에도 암각문자가 남아
있지만, 아직 가림토와의 관련성 및 그것을 암각한 시기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환단고기"에서 말한 가림토의 존재를 정확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옛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옛 문자들은 세종이 손수 만든 글자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비교언어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동아시아 여러 기마종족들의 문자는
나름대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문자가 아닌 말에서도 많은 공통점이
확인된다. 물론 일부 기마종족의 경우 한자를 뒤집어서 쓴 것과 비슷한 글자를
사용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공통의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뿌리는 어디일까?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알고는 있어도 증거가 없고 시간의 세월을 거슬러 살펴보기는 했으나 그런 방법이
아직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이니 만큼, 주춤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졸렬한
추론을 빌려 말을 매듭지을 수밖에 없다.

  한글을 비롯한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언어들은 모두 고조선의 문자를 그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종족들 사이의 분화가 차츰 촉진되면서 문자 또한 분화되어갔다.
훈민정음이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의 옛 문자를 기반으로 우리 겨레의 글자로
재창조된 언어체계를 가리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에는 알게 모르게
기마종족의 분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는 한편,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작은 겨레의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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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구성원리

  우리는 훈민정음이 성리학적인 원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일반론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근조선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수입사상인 성리학 속에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성리학을 만병통치약처럼 이곳저곳에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예컨대
훈민정음의 문자체계에 역학적 원리가 있다거나 음양오행의 원리가 적용되었다고
해서 성리학과 관련짓는 것은 너무나 편의적이다. 물론 성리학에도 역학적인 원리가
있고 음양오행적인 원리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성리학의 독자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문자체계를 이해할 때 그 민족의 고유한 독자성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으로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편협한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어떤 사회를
자본주의 문화나 사회주의 문화로써만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훈민정음은 근조선의 순수한 창작품도 아니고 예로부터 내려오던 문자를
재정비하여 반포한 것이므로, 성리학과의 상관관계는 상당히 부차적이다. 고려시대의
자료를 가지고 고려시대를 연구할 경우, 그 연구자가 비록 현대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고려시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것이
언어체계일 경우 그 영향력을 이루 말할 수조차 없다.
  훈민정음에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삼재상생'의 원리가 들어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융합 원리가 한글의 모음구조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모음의 구성요소인 'ㅣ'는 하늘을 상징하고, 'ㅡ'는 땅을 상징하며, '.'는 사람을
상징한다.('^123456,135^'가 사람이고 '^123456,246^'가 땅이며 '.'가 하늘이라는
이론도 재검토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은 주로 전통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 전통사상에서는 사람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글자의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을 사람으로 보는 게 옳다.)
  모음에는 삼재상생의 원리뿐만 아니라 '음양조화'의 원리도 포함되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123456,135^' (임, 하늘)는 양을 상징하고 땅을 상징하는 '^123456,246^'
(뉘, 땅)는 음을 상징하며(알, 사람, 변화의 주체)는 그 위치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상징한다. 예컨대 '^123456,126^'는 하늘의 밝은 기운을 받아 생성하는 기세를
나타내며, '^123456,134^'는 땅의 어두운 기운을 받아 소멸하는 기세를 나타낸다. 또
'^123456,345^'는 하늘의 밝은 기운을 받아 성장하는 기세를 나타내고,
'^123456,2456^'는 하늘의 밝은 기운과 땅의 어두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생성도
소멸도 없는 기세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의 자음에는 오행의 원리가 적용하고 있는데, 어금닛소리와 혓소리,
입술소리와 잇소리 및 목소리는 각각 오행의 기운과 연결된다. 물론 오행의 각
성격과 이 소리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방법에는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몸공부의 차원에서 소리를 배워온 선교의 수련자들과 학술적인
차원에서 소리를 연구해온 학자들 사이에서 오행과 소리의 함수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음을 오행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이처럼 삼재와 음양 및 오행의 융합으로 구성된 훈민정음은 성리학 사상의
창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의 오랜 문화적 전통과 관련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알'에서 시작하며, 하늘의 세우는(ㅣ) 기운과 땅의 눕히는(ㅡ) 기운의 조화에
의해 변화를 겪게 되고, 나아가 끌어올리고(불) 끌어내리고(물) 오르내리고(나무)
오므리고(쇠) 퍼지는(흙) 각 기운이 그 변화에 결합함으로써 숱한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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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과 성리학

  그러나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성장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성리학과 훈민정음
사이에는 떨어질 수 없는 함수관계가 있다. 이 두 가지는 근조선을 상징하는
문화적인 두 개의 기본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전문가들에게 냉대를 받은 역사가 토인비는
'독자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역사적 단위'(intelligible field of study)를 설정한 바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독자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역사적 단위란 나름대로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문화를 누려온 문명권을 가리킨다. 그는 그런 단위를 24개의
문화권으로 설정하고,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라는 방대한 저작물을
내놓았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단위가 만들어진 시기를 찾는다면(미련한 토인비는 한국을
그런 단위로 보지 못했지만), 고려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이런 단위가
만들어지는 엉성한 출발점이었으며, 이런 단위는 근조선에 이르러 나름대로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이전까지 우리 역사는 우리 겨레만의 독립적인 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였다. 고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와 백제 및 대진 등에서
우리는 우리 역사가 바로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역사이며, 단일민족의 독립적 역사는
거짓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달라졌다. 우리 겨레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다른
기마종족과 분리되어 독립적인(그러나 비극적인)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독립성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였다. 정치경제적으로는 독립적인 역사를
꾸리고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독립성보다 기마종족으로서의 공통성이 훨씬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극적 독립성이 완성된 것은 근조선에 들어와서였다. 성리학이 그런
독립성의 근거로 작용했으며, 훈민정음이 독립성의 영역을 확고하게 다졌다. 즉
성리학을 수입해서 기마종족적 문화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훈민정음을
반포해서 중국 문화로부터도 자신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적
독립단위가 되는 데는 물론 더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지만, 이 두 가지만큼 두드러진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는 사실 이때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성리학은 많은 문화적 변화를 몰고 왔다. 남녀평등을 남존여비로 바꾸었고, 청자를
백자로 바꾸었으며, 합의 중심의 활동적인 문화를 권위 중심의 소극적인 문화로
바꾸었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은 장옷을 입고도 눈치를 보며 바깥
출입을 해야 했고, 더 이상 부모로부터 재산권을 상속받을 수 없게 되었고, 조상의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푸른색을 좋아하던 문화(송나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아님은 고구려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흰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바뀌어, 마침내
푸른 옷을 천한 사람의 옷으로 돌렸으며, 옷의 생김새마저 활동을 제한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소박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던 모자조차 크고
직선적이며 권위적인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를 탈 기마종족화라고 한다면, 훈민정음은 그 기세에 제동을 걸면서
근조선을 중국과 독립된 나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성리학과 훈민정음은 우리 역사를 단일민족의 독립된 울타리에 가두는 역할을
분담하면서도 그 역사적 성격은 전혀 달랐다. 성리학이 기마종족적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면, 훈민정음은 기마종족적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근조선의 역사에서 공존과 대립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자들은 훈민정음을 성리학 전파의 대중적 수단으로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언서라 부르면서 천시했고, 근조선의 공식 문서에서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성리학자들은 오로지 '진서'라고 부르는 한자만을 썼으며,
한글은 일부 여성이나 아동 및 평민이 사용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은 서서히 언어적으로 발전해갔다. 훈민정음으로 된
문학작품이 여성이나 일부 문인들에 의해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훈민정음의 의의를
이해하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어문학적 연구가 거듭되었을 뿐 아니라 '실학'이라는
장을 열어갔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근조선의 세종은 매우 뛰어난 지도자로서 다양한 사상을
익혔을 뿐 아니라, 현실적 재능을 존중하는 개방성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훈민정음의 반포를 반대했으며, 그것이 대중화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들이 글 읽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한자 이외에 특별한
글자가 필요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역사적 만약'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만약 훈민정음이 없었고 성리학자들에 의해
한자가 점차 널리 사용되면서 오늘날까지 고유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 뜻에서 훈민정음이 비록 작은 겨레를
기정사실화한 측면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 고유의 역사를 지켜온
주춧돌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늘 작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겨레를 살피면서 굳이 훈민정음의
원리와 뿌리를 들먹인 것도 그 반대자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글전용을
주장하면서 한자를 중국 글자라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나, 한자에 대해 어설픈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 외국어의 조기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어가 한 겨레
역사의 크고 작음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은 탓이다.
    14. 조선의 금서목록
  (전통사상에 관한 서적들로만 꽉찬 금서목록)

    금서목록

  금서란 국가기관에 의해 출판이나 판매(거래) 및 소유와 탐독 등이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금지된 서적을 말한다. 금서는 일반적으로 정치, 안보, 규범, 사상, 신앙,
풍속 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법률이나 법률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에서 지정하게
마련이다. 금서를 규정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책을 태우는 '분서'를 비롯하여 반포금지나 소유금지 및 판매금지와
열람금지 등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금서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경우 서기전 213
년 진시황이 제정한 '협서율'에 따라 이루어진 분서갱유가 문헌상 최초의
금서조치였다. 서양의 경우에는 서기전 411 년에 프로타고라스가 지은 "여러 신에
대하여"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불태워진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금서가 지정된 것은 근조선에 들어와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금서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자료를 통해 확인된 바는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말과 글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말과 글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언어생활이 발전된 모든 사회가 금서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개방된 사회에서는 금서가 자리잡을 공간이 없는 탓이다.
  우리는 금서라는 비극의 역사 속에서 공통적으로 사상탄압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금서로 지정한 까닭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모두 사상탄압의
도구였다. 금서가 지정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시대적 전환기였으며, 전환기의 사회가
대개 그렇듯이 당시의 사회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리학이라는 외래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설정한 근조선이 금서를 지정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마종족의 하늘사상을 하루아침에
배척하고, 천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서 발전해온 불교까지 무모하게 배척했으니
근조선은 금서를 지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근조선에서 금서를 규정한 법률은 '요소율'로서 이른바 요사스런 서적을 금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근조선이 세워진 것은 1392 년의 일이지만, 태조나 정종 때만
하더라도 정부는 쉽게 금서조치를 내릴 형편이 아니었다. 나라를 세운 첫해에는
나라 이름조차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고려라고 불렀으며, 성리학도 독단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힘으로 임금자리에 오른 태종 이방원 때에 이르면 성리학파의 독단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상탄압을 위한 어두운 중국제 장막이
펼쳐지게 되었다. 정종 11 년(1411)과 세조 3 년(1457)에 금서조치가 내려졌으며,
성종과 연산군 때에도 같은 조치가 내려진 바 있다. 근조선 초기에 금서가 없었던
시기는 오직 세종 때 뿐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종 임금의 개방적 성격과
뛰어난 역사적 감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 탄압을 받은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당시의 금서목록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시기마다 내려진 금서목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시대별로 탄압대상이 조금씩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세조 때의 금서목록을 살펴보면, 탄압대상이 주로 기마종족의 전통적
하늘사상과 그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징기", "통천록"('천통서'라고도 부름) 등
19종의 금서가 대부분 하늘사상과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들이다.
  "대변설"은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역사서이고, "조대기"는 고조선 역대
단군들의 역사이며, "지공기"는 고조선의 정신문화원장 격인 신지들이 남긴
기록이었다. 또 "표훈천사"는 고조선의 사상,이념적인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삼성밀기"는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문헌이며, "도징기"와 "통천록"은 전통적
심신수련법과 그 역사를 서술한 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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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르네상스의 타율적 종언

  19종의 금서 가운데는 "안함로원동중삼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안함로와 원동중은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전통사상가로서, 이 책은 그들의 역사연구
성과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들도 고려 르네상스 시기에 편찬된 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금서목록들을 통해 우리는 근조선의 성리학파가 저지른 사상적 범죄행위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과 함께 중국적 세계질서라는 관념을 지키기
위해 그것에 위배되거나 그 권위를 무너뜨릴 만한 사상을 탄압한 것이다.
  그들은 근조선이 멸망시킨 고려시대의 역사연구서들을 '요사스럽다'는 명분을 달아
탄압했으며, 나아가 고려 르네상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고려 내부에는 계승할
만한 사상이 없었음을 강변하려고 했다. 즉 그들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사상체계, 특히 전통적 사상은 그다지 계승할 가치가 없으며, 중국에서 받아들인
성리학만이 위대한 사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려 르네상스를 부정함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전통적 사상가들이 발굴한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마저 부인했다. 자신은 비록 단군의 피를 물려받은
기마종족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주희의 아들임을 주장한 셈이다. 한족이 서술한
역사서에 철저하게 세뇌되어버린 그들로서는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역사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구전에 따르면 "도징기"와 "통천록"도 고려 말기의 저작들이다. 그리고 구전으로
전해오는 부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에는 하늘과 정신적으로 교통하며 글이
아닌 몸으로서 인간의 근본을 닦아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이 사실일 경우, 글과 사회적 규범을 통해 인간됨을 닦아가는
성리학자들로서는 그런 서적을 이단적인 '요서'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처럼 근조선의 성리학파는 우리 기마종족의 오랜 역사와 뿌리깊은 사상을
부정했고, 그것을 연구한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업적들을 은폐하려 했으며, 전통적
인간수련법마저 사악한 것으로 매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런 입장을 절대적
진실로 조작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상탄압을 했다.
  특히 그들이 고려 르네상스를 부정한 것은 미완성의 르네상스가 부활해서
성리학적 가치관에 도전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위적인 사상조작이
진실을 완전하게 가릴 수는 없다. 사상탄압에 의해 많은 정보를 잃어버림과 아울러
많은 정보가 왜곡되었지만, 결국 미완성의 르네상스는 부활하고야 말았다. 뒤에서
살펴볼 실학은 바로 그 미완성의 역사를 완성시키려 한 작업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들의 금서목록은 왜 전통사상에 관한 서적들로 꽉차 있는 것일까?
불교나 도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은 배척한 성리학파가
왜 불교나 도교의 서적은 금서목록에 담지 않은 것일까? 왜 그런 사상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사상의 경우 가람과 승려를 중심으로
사상이 유지,발전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성리학파는 가람과 승려를
직접적으로 탄압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사찰을 수색하여 불경과 경판을 불태우는
연례행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지어 불교 가람으로서 경치가 좋고 마을과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완전히 불태우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학교인 서원을 세우거나
심지어 놀이터인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도교의 경우 철학자인 노장사상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신앙적 노장사상은 불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신앙의 대상을 탄압할
수 있었다.
  유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외래사상인 양명학도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양명학은 아직 수입단계에 있었으므로 수입의 길목만
차단하면 쉽게 탄압할 수 있었다. 즉 국경지대의 관문에서 짐을 검사할 때, 양명학
관련 서적이 발견되면 그것을 불태우고 그 소지자를 처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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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화와 당쟁의 본질

  오늘날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명분 아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근조선 때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나 당쟁도 그런 관점에서 재평가되곤 했다.
그래서 사화와 당쟁은 일제 식민사학자의 주장과 달리 우리 민족의 고질적 분열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평가는 물론 옳다. 근조선의 당쟁에 분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우리 민족의 특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세계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어쩌면 세계사 그 자체가 민족과 민족,
종족과 종족, 국가와 국가, 신분과 신분, 가족과 가족, 개인과 개인의 분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그런 단위의 통합과 융합의 역사인 것이다.
서로 편을 짜고 험악하게 싸우다가도 공통의 문제가 생기면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힘을 모으는 것은 어느 한 민족사나 종족사의 특징이 아니라 인류역사
전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이니 단결이니 하는 무의미한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발빠른
반박이 아니라 그 분열과 단결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적 성격이다. 근조선의
사화와 당쟁도 그런 점에서 이제 좀더 본질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사화와 당쟁의 밑바닥에는 늘 성리학이 깔려 있었다. 성리학은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를 배경으로 한 근조선의 통치이념이었다. 근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성리학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상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정해버린 독단적 이념이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성리학은 매우 체계적이고 폭 넓은 사상이었다. 성리학파가
배척한 전통사상과 불교 및 도교 등의 요소가 성리학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될 정도로
폭 넓은 사상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은 그 내용적 폭과 체계성에 반비례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성리학의
폐쇄성은 여러 요소를 일원론적으로 꿰고 있는 줄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 줄의 첫째 특징은 한족과 한족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관점이다.
한족의 관점에서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이다. 오랑캐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족을 닮아가면서 '작은 중화'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버리고 중국의
사상과 문화만을 따라야 했다.
  둘째 특징은 성리학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요소의 사상적 뿌리는 모두 한족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을 경우, 자기
겨레의 뿌리깊은 역사는 거짓이 되게 마련이다.
  셋째 특징은 기초원리가 매우 주관적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현실적 문제를 해석할 경우 서로의 입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더구나 주희의 심법(주희가 사물을 보았던 마음으로써 다른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과 문법(주희 등이 남긴 문헌을 그대로 따르는 방법)이 복잡하게
얽히면, 같은 문헌을 놓고도 서로 다른 주장을 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정통은 하나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늘 독단적,배타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탄압했을 뿐 아니라, 성리학파 내부에서도 정통론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근조선의 사회는 바로 정통을 세우기 위해 내부투쟁을 벌인
사건들이었다. 물론 네 차례의 사화가 모두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음모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본질은 성리학파가 자신의 유일 정통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김종직 일파가 희생된 무오사화와 조광조 일파가 희생된 기묘사화는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라는 성리학의 정통 학맥이
세워졌다.
  이에 비해 당쟁은 이미 세워진 학맥의 계승권을 놓고 벌인 치열한
내부투쟁이었다. 이 투쟁도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졌으며,
현실에서 제기된 중요한 안건이 대부분 그런 투쟁의 소재가 되었다. 때때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상대방을 모함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누가 성리학의
정통 교의를 따랐느냐에 따라 그 승패가 갈라졌다.
  물론 이런 당쟁은 실학으로 불리는 르네상스의 부활을 맞으면서 그 명분을 잃고
정치투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근세 르네상스의 부활이 사회적 설득력을 얻으면서,
성리학적 정통론은 이미 정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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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탄압과 작은 겨레

  사상에 대한 탄압은 늘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상을 탄압하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사상은 내부숙청을 동반하게 마련이며, 그 결과 자신의 논리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근조선의 성리학파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전형적이다. 자기 고유의 역사와 사상을 탄압했고, 앞시대의 사상사적 업적까지
감추는 한편, 이미 토착화된 불교까지 모질게 탄압한 성리학파는 결국 내부분열
과정에서 자기 사상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사화를 통해 자신의 정통을 세우는 동안 성리학파는 성리학 속에 시대적 대안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정통이 세워진 뒤 당쟁을 통해 정통을 가리는 동안
성리학이 역사를 거슬렀음을 알게 만들었다. 즉 성리학은 사상탄압과 비례하는
내부투쟁에 시달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근조선의 진정한 시대적 과제는 미완성의
고려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것임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실학파는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바로 고려 르네상스의 계승자였던 셈이다.
  혹독한 사상탄압과 엄청난 내부투쟁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론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사화와 당쟁을 통해 정통을 세우고 지키는 동안 이황,
조식, 이이, 송시열과 같은 이론가들이 학문적 완성도를 자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성리학파는 역사적 걸림돌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유교적 예법을 대중화시킨 것처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성리학이 '살부살조'해서 우리 겨레를 중국화시킨 것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다. 또 그것은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고려 르네상스를 파괴함으로써
겨레 문화가 주체적으로 높은 꼭대기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을 모르는
생각이다.
  예법과 도덕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들의 미풍양속이 과연 성리학적인 것인지
충분히 의심해볼 일이다. 예컨대 농촌사회에서 두레가 먼저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성리학자들의 환난상휼이 먼저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덕목인지도 살펴볼 일이다.
  성리학이 한족의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래사상의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외래사상을
수입하는 태도가 과연 주체적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도 외래사상이었으며, 초기에
수입된 유학도 외래사상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겨레 조상들은 그것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겨레 문화의 자양분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고려
르네상스는 바로 그런 자양분을 융합시켜 스스로의 것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그런 작업을 파괴하면서 들어왔을 뿐 아니라, 겨레의 뿌리까지
도려내려 했다. 그 결과 성리학파는 몇몇 빼어난 성리학자를 배출하는 대신 겨레
문화를 왜소하게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외래문화에 대한 태도에서 그런
잘못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와 같은 '작은 겨레 만들기'나 '작은 인간
만들기'가 없어야 하겠기에 성리학의 전통문화 탄압과 잘못된 내부투쟁을 작은
겨레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아본다.
  사상에 대한 탄압이야말로 작은 역사의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정은 작은 역사의 종착점이 될 것이다.
    15. 못다 핀 꽃 한 송이, 실학
  (3 대 전쟁으로 드러난 성리학의 한계)

    임진전쟁과 예고되는 사회변화

  사화를 거쳐 성리학의 정통을 형성하고 당쟁을 벌여 그 정통 시비를 가리는 동안,
근조선의 국력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200여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어 군사력도
약해졌고, 국방 관념도 희미해졌다. 명나라를 정점으로 하는 중국적 세계질서는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기반을 공고히 한 명나라의 그늘 아래서 성리학파는 기마종족
특유의 진취적 기상을 거세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다.
  권력과 사상을 독점한 성리학파는 소모적인 자체 경쟁을 벌였고, 이에 따라
민중생활을 어려워지기만 했다. 잘 알려진 임꺽정이나 홍길동이 유랑민을 끌어모아
의적을 자칭했던 것도 모두 이 무렵의 일이다.
  근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들도 기마종족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했으며, 차츰 부패와 타락의
징조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여러 기마종족이 여진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길러가고 있었으며, 섬나라 일본에서도
전국시대가 마무리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점으로 힘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 정세를 변화시킬 조짐은 일본에서부터 나타났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일본 내부의 안정을 위해 준독립적인 여러 세력의 군사력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근조선과 명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먼저 조선 정부에 엉뚱한 시비를 걸어왔다.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이 요구는 당연히 거부되었으며,
도요토미는 이를 구실삼아 1592 년 조선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급속하게 진행했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15 만 명의 선봉부대는 방어준비가 거의 없었던
동래성을 쉽게 함락시키고, 신립과 이일이 지휘하는 근조선의 주력부대를 상주와
충주에서 간단하게 격파한 뒤, 20일 만에 수도 한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평양으로 옮겨갔지만 평양마저 6월 13일 점령되었으며, 곧 이어 함경도까지
일본군에게 짓밟히기에 이르렀다. 이제 근조선 정부는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를
옮겨갔으며, 성리학파의 종주국인 명나라의 구원부대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에게 뜻밖의 어려움이 닥쳤다. 첫째,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그들의 해상진격로를 철저하게 차단하면서 일본 함대를 상대로 무패의
전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부대는, 명나라 구원병을 상대로 장기전을
벌이면서 평양성을 방어하려던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안겼다. 특히 7월 8일의
한산도해전과 9월 1일의 부산해전은 해상으로 진격하여 명군과 조선군의 후방을
교란하려던 일본의 의도를 완전히 봉쇄해버렸다. 둘째, 예상치 못했던 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의 후방교통로를 교란시켰다. 각 지방에서 의병이 조직된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 경상도의 곽재우 부대와 승려 서산 등이 이끄는 전국 승병은 놀랄
만한 전과를 올리면서,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더구나 그들은 성리학파와 거리가
먼 인물들로서 그들의 활약은 전쟁이 끝난 뒤 사회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를 위해서 명군도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무릅쓰고
구원부대를 파견했다. 해상권의 장악과 의병부대의 활약 및 명나라 군대의 합세로
전세는 드디어 역전되었다. 그러나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 구원부대는 전투를
서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투력이나 사기도 낮은 편이었다. 조선 정부의
독촉으로 연합군을 편성하고 이듬해 정월 8일에 평양성을 탈환했으나, 한성의
길목인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여송은 일본과 휴전교섭을 진행했다.
  그 결과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휴전조건에 불만이 많던 일본군은 1597 년
다시 한반도로 침입해왔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에서 일본은 쉽게 무너져내렸으며,
결국 서둘러 군대를 돌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자는 근조선과 명나라였지만, 이 전쟁은 이들 두
나라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구원부대를 파견했던 명나라는 군사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유지할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조선에서는
성리학파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그들의 통치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쟁에서 입은 사회경제적 피해로 말미암아 민중생활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에
따라 성리학파의 통치는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파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재구축하기 위해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대동법'을 실시하고 내부숙청을 진행함으로써 부분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민중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이제 성리학파는 관복을
걸치고 입궐한 순간부터는 개혁정치를 논의했으며, 퇴궐해서 관복을 벗어제치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민중들을 쥐어짰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민중들을 강제 동원하여 불탄 서원을 다시 지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방관리조차 그 지방에 자신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를 원했다. 그러자
날이 갈수록 유랑민은 늘어만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성리학파에 의한 통치는 한계를 드러냈고, 마침내 성리학파
내부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흐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그럴 즈음,
근조선은 다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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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만전쟁과 흔들리는 '소중화'

  우리는 1627 년과 1636 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전쟁을 흔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고 부른다. 호란이란 '오랑캐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으로 우리 겨레를
침입한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상당히
심각한 역사적 편견이 내포되어 있다.
  여진족(만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은 '소중화'와 '한족중심주의'의 편견일
따름이다.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오랑캐의 한 부류일 수밖에 없는 우리 겨레가
한족의 표현을 흉내내서 같은 혈통의 기마종족을 오랑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혈통적 뿌리와 문화적 주체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굳이 오랑캐라는 표현을 버리지 않으려면, 그 말은 우리와 계통적 뿌리가 다르고
한결같이 기마종족을 모욕해온 한족에게나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호란'이라는
표현은 어떤 경우에도 적당한 역사적 표현이 될 수 없으며, 그런 표현을 쓸 경우
우리 역사는 아직까지 중국적 세계질서의 유령에 의해 끌려 다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차례의 이 전쟁을 각각 제1차 조만전쟁(조선과 만주족 사이의 전쟁)과
제2차 조만전쟁이라고 부른다.
  조만전쟁은 임진전쟁 이후 중국적 세계질서의 정점이었던 명나라의 쇠퇴와
직결되어 있다. 임진전쟁이 끝나가던 1598 년 요동을 공격한 기마종족 도무다와
접전을 벌이던 이여송이 전사했으며, 1601 년에도 요동은 여진족과 명나라의
전쟁터가 되었다.
  국력이 약해진 명나라는 그 이듬해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려
했지만, 사회경제적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민중들의 봉기와 내부반란은 그치지
않았으며, 이미 멸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관리를 죽이는
일이 잦았으며, 하남성 등에서는 큰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명나라 정부는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과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마종족 연맹을 이루어낸 여진족은 1615 년 이들 종족을
규합해서 '8기군'을 편성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그 이듬해 만주에서 후금을 세우고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임금이 되었다. 후금은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1619 년 심양
부근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며, 이어 1621 년에는 그 일대를 완전히
차지해버렸다.
  대륙을 제패할 준비가 완료된 후금은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근조선과
동맹관계를 맺어두려고 했다. 성리학의 위력에 휩싸인 근조선이 기마종족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근조선을 자신들과 가까운
형제혈통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조선은 여전히 한족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명나라를 은혜로운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현실적 여건에 따라 중립적 외교노선을 유지하던 광해왕(광해군이라는
표현은 역사적 개념이 아니고 성리학파의 주관적 관념일 뿐이다.)이 쫓겨나자,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 후금을 배척하는 입장이 공식화되었다.
  제1차 조만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후금이 조선을 자신들의 대열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3 만의 군사만 동원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그들은
근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은 뒤 철수했다.
  그러나 근조선은 오히려 명나라와 동맹해서 후금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워나갔다. 이에 후금은 다시 조선을 압박하면서 군량과 병선을 요구했고, 나아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후금에 대한 적대적 입장과 평화적
동맹론 사이에서 갈등하던 근조선은 결국 적대적 결전론으로 노선을 확정했고, 이로
말미암아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말았다.
  이에 나라 이름을 청이라고 고치고 그 군주를 황제라고 부르던 만주족은 근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내, 이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
외교문서를 아예 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나라는 오직 명나라뿐이라는
어리석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제2차 조만전쟁은 바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전쟁이다. 그러나 근조선의 어리석은 고집은 만주족의 강성한 군사력 앞에 힘없이
무너졌고, 마침내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 패배는 근조선의 성리학 통치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고 말았으며, 마침내
임진전쟁 이후 예고된 사회적 변화가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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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 왕조의 붕괴와 실학

  제2차 조만전쟁 이후 근조선은 사실상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근조선
앞에는 근본적 개혁을 통해 과거와 다른 새로운 통치체제를 세우느냐, 그렇지
않으면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에 의해 국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느냐 하는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떤 운명을 따르더라도 이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근조선에서는 이 두 가지 흐름이 모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중간적인
입장도 있었으며, 이런 선택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과거 체제를 고수하려는 흐름도
없지 않았다.
  과거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성리학파는 이러한 모든 흐름을 경계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고, 개혁적인 성리학파는 성리학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하는
한편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일부 세력은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성리학적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자신들이 근조선의 새로운 주도세력이 되려고 했다. 또 다른 세력은 성리학파의
통치뿐만 아니라 근조선의 이씨왕조 자체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조만전쟁 이후의 역사는 바로 이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서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뒷날의 학자들은 이들 가운데 두 번째 부류와 세
번째 부류를 통칭하여 '실학파'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정치적 용어를 빌려쓴다면,
실학파에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사회적 대안을 찾는 진실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진 실학은 애초부터 두 세력을
혼돈시킬 수 있는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실학적 경향'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개별적 연구는 상당히 진행된 편이다.
더구나 1980 년대 이후 역사연구의 주요한 관심이 사회경제 분야로 옮겨감에 따라
실학에 대한 연구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실학자들의 사상을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바뀌는 경향을 드러냈다. 그리고 차츰 실학연구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실학에 대한 연구에서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문제점은 유럽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역사연구의 관점을 우리
역사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실학이 '근대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은 역사적 변화의 방향을 자신의 과거 역사 및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내지 못하고, 남의 역사와 비교나 하는 엉뚱한 일이다.
  둘째 문제점은 실학이라는 개념을 근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에서만 찾아내려는
근시안적 관점이다. 그것은 소나무의 뿌리와 아무 관계없이 솔잎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다. 그 결과 실학은 근조선 이전의 고려 르네상스와 연결되지
못했으며, 나아가 우리 역사 전체를 꿰뚫고 있는 역사의 방향성이나 굽이치는
정신세계와도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앞서 밝힌 대로 실학에는 원래 두 가지 흐름이 있었고, 연구자들도 이를
인정해왔다. 즉 중농파와 중상파로 나누기도 하고,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로
나누기도 하며, 성호학파와 북학파로 나누기도 한다.
  중농파나 경세치용학파 및 성호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를 통해 변화된 현실을 이해하며, 나아가 그런 차원에서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유형원이나 이익이 그런 부류의 대표적 인물인데, 그들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했다.
  중상파나 이용후생학파 및 북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근조선이라는 틀을 개혁의
전제조건으로 삼으면서도 성리학을 거부하는 개혁가들이었다. 박제가나 박지원이
그런 부류의 인물인데, 그들은 토지제도보다 상공업의 발전을 개혁의 중심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마침내 이들 두 부류의 개혁파는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는 성리학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차츰 새로운 사상적
발전으로 이어졌고, 현실개혁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차츰 그것을 뒷받침할 사상에
대해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 의해 성리학파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성리학파가 그 동안 눌러놓았던 고려 르네상스의 기운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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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 또는 후기 문화부흥의 좌절

  흔히 근조선 후기는 사회변동기라고 평가된다. 신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생산력이 높아지고, 사회문화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서민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는 시기였다는 말이다. 또 상공업이 발전하고 시장경제가 발전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아울러 이런 변화는 '근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씨앗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복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역사에서 완전한 의미의 복고란 없는
법이지만, 근조선 후기의 이런 변화는 성리학파에 의해 흔적까지 지워질 뻔했던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가 부활한 것이기도 했다.
  다양해진 사회문화 가운데는 나라 밖에서 들어온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그 동안 억눌려왔던 과거시대의 문화가 변질된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이었으며, 이 시기에 발전한 서민문화의 본질도 정신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서민층에 의해 근조선 이전의 문화가 되살아난 것이었다. 이처럼 되살아난
전통문화는 근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을 추진한 문화적 원동력이었다. 이 문화는 차츰
성리학파에 의해 강요된 틀에 짜인 듯한 문화를 파괴했으며, 마침내 성리학
자체까지 삼켜버리기에 이르렀다.
  실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바로 이런 복고경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 특히 근조선이 없애버린 대진의 역사나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한 것도 그런 관심 때문이었다. 또 각 지방에 묻혀 있는 전통적인
풍습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들은 그 시대와 그런 문화를
되살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관심을 진정한 의미의 문화부흥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실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진 정약용이다. 처음에 그는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로부터
시작했지만, 19 년간의 귀양살이를 통해 성리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남과 아울러
전통사상과 불교, 나아가 천주교를 통해 전파된 유럽 문화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그런 차원에서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문학가이자
상당한 수준의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작품들에서까지 성리학적 발상을 벗어던지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시에서는 기마종족의 전통 수련법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나 불교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작업조차 고려 르네상스를 완전히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그가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구할 수 있는 자료도 한정되어 있었으며, 고려 르네상스를
그 한 사람이 완전히 부활시킨다는 것도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김정희와 같은 사람도 문화부흥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부흥 활동은 아직 힘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성리학파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성리학파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 높은 봉우리에 올라 마침내 창조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기 이전에 유럽의 문물이 먼저 한반도를 강타했고, 그 문물에 의해
이들의 업적은 다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져야만 했으며, 마침내 우리 역사는 자기
문화 속에서 주체적 발전의 기회를 또다시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19세기의 비극이었고, 겨레 역사가 다시 한 번 움츠러든 결정적 계기였다.
    16. 정조,대원군의 실험정치 실패
  (타율적인 개항을 초래한 세도정치)

    나침반 없는 나라

  언젠가 어느 공영방송의 역사 프로그램에서 근조선의 '예송논쟁'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그 프로그램은 근조선의 당쟁이 결코 야비하고 음모적인 권력투쟁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효종의 장례와 효종비의 장례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가 남인의 정치투쟁은 사회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건강한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과 남인의 지도자 허목이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서로
신뢰하며 존중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예송논쟁은 과연
합리적이고 건강한 정치투쟁이었을까?
  서인과 남인 사이에 처음으로 예송논쟁이 벌어진 것은 1660 년이었다. 1659 년
5월에 효종이 죽자 임금자리를 물려받은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서인인 송시열 등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아들의 상복을 1 년만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고, 임금은 이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이듬해 3월에 남인의 두령인 허목과 윤휴는 상소를 올려 1 년 상복은 틀린
것이고 3 년 상복이 옳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을 비판했다. 그들은 효종이 비록
맏아들은 아니지만 임금이었으므로 맏아들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 자의대비는 3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윤선도는 1 년 상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견해가 반역행위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즉 효종은 임금으로서 사대부와
다른 특수한 존재인데 그런 그에게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하려 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반역의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송시열의 주장은 그대로 관철되었으며, 그를 거칠게
비판했던 윤선도는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에 대한 비판상소는
1667 년 윤선도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가끔씩이긴 하지만 계속 올라왔다.
  그러다가 1674 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이 문제가 다시 정치적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아들에 이어 며느리까지 앞세운 자의대비가 며느리 인선왕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다시 격돌한 것이다. 즉
인선왕후를 작은며느리로 보아 9개월 상복을 입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맏며느리로
보아 1 년 상복을 입을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34세의 청년 임금 현종은 인선왕후를 작은며느리로 보는 것은
아버지 효종을 작은아들로 보는 것이고, 이는 임금을 능멸하는 것이라며, 송시열 등
서인을 귀양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인의 주장이 왕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서인과 남인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을 공격했다. 또 그들은
모두 성리학을 숭상했으며, 성리학적 예법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적 바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들의 논쟁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을까?
  예송논쟁이 벌어진 시기는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맛본 지 24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달래며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1653
년에는 전염병이 돌아 서북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곡식이 부족해서
금주령을 내렸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상평청(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과 다르며, 평상시에 곡식을 비축했다 기근이 들면 이름을 진휼청으로 바꾸어
빈민구제를 했음)은 죽을 쑤어 빈민을 먹여야 했으며, 재정이 부족해서 관료들의
녹봉까지 줄여야 했고, 신분질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행성 열병은 전국을
돌고 또 돌았으며, 인육을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예송논쟁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것이 당시
정치세력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있었을까? 예송논쟁은 성리학파의 '낡은 질서
지키기'였을 따름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외면이며, 새로운 국가
세우기에 대한 의무 방기였다. 한마디로 그런 논쟁은 근조선 후기의 성리학파가
역사적 방향을 상실하고 있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 사이의 의리와 예의는 전체
역사에서 너무나도 부차적인 것이다. 역사를 읽을 때는 늘 눈을 크게 뜨고 큰
줄기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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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와 문화부흥운동의 발전

  사회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 될수록 성리학파의 낡은 질서 지키기는 더욱 거친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천주교는 성리학파를 놀라게
했으며, 문화부흥운동에 힘입은 학문적 성장과 전통문화의 부활은 성리학파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경우
성리학파의 파멸은 매우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 때에는 임금과 왕실조차 문화부흥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성리학파를
견제하려고 했다. 정조는 임금이 됨과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고금도서집성"
5,020권을 수입했으며, 새로운 성과들을 원활하게 출판할 수 있도록 활자를
보수하고 서둘러 추가제작에 들어갔다.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이 바로 이때 만들어진 활자들이다.
  그리하여 정조 때 문화부흥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근조선에서 가장
많은 서적이 간행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으며, 그 가운데 성리학과 무관한 서적이
놀랄 만한 분량을 차지한 것도 이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도 '개유와'라는
서재에서 청나라 건륭 시기의 문화사업을 열심히 검토하였다.
  정조는 역사의 진행방향에 대한 감각과 현실적 정치감각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인 성리학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 내부의 경쟁관계를 이용하기도
했다. 홍국영 일파를 내세워 홍인한 등 구세력을 제거했고, 마침내 홍국영까지
쫓아낸 것이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근조선을 재건국하려 하였는데, 이를
위해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남인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참된 면모는 개혁을 주장하는 젊은 인재들과 문화부흥파를 깊이
신뢰하고 그들에게 현실참여의 기회를 준 데서 잘 드러난다. 남인 가운데서도
문화부흥파의 선봉장이었던 정약용 등을 중용해서 왕권에 대한 지지도가 낮았던
북학파를 포섭하도록 하는 한편, 그들 모두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근조선
재건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박지원의 제자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등용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서얼로서 그들의 등용은 성리학파에 대한
강한 도전임과 아울러 사회변화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통치행위이기도 했다.
  문화부흥운동에 대한 정조의 지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중인 이하의
계층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조는 중인들의 문학단체인 '옥계시사'를 지원하여 그들이
성리학파의 문화독점에 반기를 들 수 있도록 그들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찬'까지
발간하게 했다. 그 결과 시문학에서도 성리학적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정조는 문화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다른 사상까지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보였다. 임진전쟁 때 큰 공로를 세웠지만 승려라는 신분 때문에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사당조차 없던 서산을 위해 표충사를 세우게 했고, 그곳에 친필 액자를
내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남쪽 행랑을 보수하도록 하고, 금강산
표훈사를 복구했으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수원 용주사를
개수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성리학파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전통문화와 실용적 지식의 연구를
장려했고, 그 결과물을 공식 출판하도록 허용했다.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작업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주장하며 중국적 어휘와 성리학파의 상투어를
배격하기도 했다.
  서학의 경우 공식적으로 개방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탄압 조치도 있었지만,
서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바른 학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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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도정치와 성리학파의 반동

  정조의 지원으로 문화부흥운동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가 죽은 뒤 근조선에서는
성리학파의 정치적 반동이 거칠게 진행되었다. 정조가 40 대의 젊은 나이에 죽고
12세의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되자, 모략을 부려 임금의 장인이 된 김조순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이다.
  김조순 일파는 풍양조씨, 남양홍씨, 동래정씨 등과 함께 남인 계열의 보수
성리학파였으며, 김조순은 중국적 세계질서를 옹호하면서 이에 도전하던 만주족과
대결을 벌일 것을 주장했던 성리학자 김상헌의 후예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즐겨 강조하면서 성리학적 도의정치를 표면에 내세웠다.
  김조순 일파의 권력은 철저하게 독점적이었다. 권력은 보수적인 몇몇 가문이
나누어 가졌을 뿐, 개혁적이거나 탈성리학적인 인물들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났다. 특히 정조 때 중용되었던 '실학파'는 하나도 남김없이 권력에서 밀려났다.
심지어 실학파의 보호자였던 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은 죽은 뒤에 관직을
빼앗았으며,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아 실학파의 지도자 정약용을 귀양보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천주교를 탄압한 데
이어 전통문화의 색채가 강한 무당들마저 더욱 강도 높게 탄압했으며, 승려에 대한
탄압도 다시 거세어졌고, '정감록' 등 예언서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의 파괴를 막기 위해 호적법을 다시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런 독점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계속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였고, 당시 세자였던 효명대군(뒷날 익종으로 추존됨)은 풍양조씨인
조만영의 사위가 되었으며, 안동김씨인 김조근의 딸은 다음 임금인 헌종의 왕비가
되었고, 김문근의 딸은 철종의 왕비가 되었다.
  이렇게 왕실과 외척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왕을 결정하기도 하면서
왕실을 약화시켰는데, 강화도에서 숨어지내던 나무꾼 출신의 왕족이 그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허수아비 임금이 되기도 했다. 철종이 바로 그 사람이다. 또 재물도
챙기고 권력의 분산도 막기 위해 공공연히 벼슬자리를 사고팔았다.
  이쯤 되자 김조순 일파의 정치적 독점이 철옹성이 되었다. 이리하여 성리학파의
낡은 정치적 이념이 다시 사회를 억압했으며, 개혁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민중생활은 구렁텅이로 빠졌다. 굶어죽는 사람과 떠도는 사람의 대열은 늘어만
갔으며, 전염병이 널리 퍼졌고, 이들의 반동적 권력독점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808 년에는 함경도 북청과 단천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1811 년에는
서북지역에서 홍경래가 지휘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 다음해까지 이어졌고, 1812
년에는 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큰 규모의 봉기이고, 규모가 작은
봉기나 유랑민들의 사회질서 이탈행위는 하루가 멀다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세도정치는 이미 과거의 성리학파가 누리던 사회적 기반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다만 권력을 이용한 버티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1860 년 최제우를
중심으로 부활된 전통사상이 동학이란 종교를 내걸고 포교사업에 들어감으로써
성리학파의 낡은 정치에 사상적 도전을 선언했으며, 1862 년에는 진주에서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일어나 남부지역을 휩쓸었다.
  그렇지만 세도정치를 앞세운 성리학파의 대응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남도 민중봉기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도 끝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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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을 실험한 대원군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안동김씨를 비롯한 성리학파의 반동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세운 허수아비 임금 철종이 죽고, 고종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이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이하응은 문화부흥운동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정희의 제자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성리학파가 세운 낡은 국가를 개혁하여 근조선을
재건국하려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방향을 잃고 있던 상황에서 먼저
성리학파의 권리를 최소화하는 한편, 문화부흥운동을 비롯한 개혁파의 권익을
최대화하려고 했다.
  이하응은 특권층으로 행세하며 세금까지 내지 않던 양반 성리학파에게 세금을
부과했으며, 그들의 사상적 근거지이자 지방통치의 상징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했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복잡한 관행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그들이 키워놓은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나아가 그는 인재등용의 폭을 넓혀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을 존중했다. 또 삼군부를 설치하여 왕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국방협의
기구에서 세도정치의 실권기구로 변질해버린 비변사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개혁을 실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국가재정이 허약하다는 점이었다. 이하응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특권 성리학파의 면세토지를 조사해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불필요한
잡세는 폐지하는 대신 은광산의 개발을 허용하는 등 새로운 세금원을 마련하려
했다. 그리고 안동김씨와 협상하여 그들을 가볍게 응징하는 대신 그 대가로 그들이
부정하게 축재한 재물의 일부를 국고로 되돌리려고 했다.
  이하응의 이런 정치는 왕권 강화와 근조선의 사회계약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측면은 그가 정약용과 김정희 등 문화부흥파의 사회사상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하응 자신이 문화부흥파로부터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신의 정치를 그런 실험무대로 삼고 있었던 셈이다. 요컨대 그는
문화부흥파의 개혁사상이 조선을 재건국하는 유일한 주체적인 대안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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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율적인 개항과 문화부흥운동의 좌절

  이하응은 '쇄국정책'이라는 폐쇄적 외교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문화부흥파의 다른
한 세력이 개항을 주장하자, 이들을 배척하면서 쇄국정책을 밀어붙였다.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등이 개항을 통해 내부적 개혁사상과 외부적 개혁사상을 동시에
결합하려 했지만, 이하응은 먼저 내부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흔히 이 무렵 이후의 정치세력을 개항을 주장하는 파와 개항을 반대하는 파로
나누고, 전자가 진보적 세력이며 후자가 보수적 세력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드러낸 것이다. 당시 쇄국을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도 진보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개항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보수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뒷날 이하응을 밀어낸 민비 일파가 개항을 지지하는 보수파였다면, 집권 초기의
이하응은 쇄국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내부개혁이 우선이며, 내부개혁을
통해 외부세력과 맞서는 것이 옳다고 믿는 '중도우파적인' 문화부흥운동의
지지자였다. 그런데 '중도좌파적인' 문화부흥운동의 계승자였던 박규수는 내부개혁을
위해서도 개항이 필요하며, 개항이 내부개혁을 위한 주요한 조건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문화부흥운동의 계승자들조차 개항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성리학파는 개항이 몰고 올 파도를 경계하며, 적극적으로
개항을 반대했다. 그들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성리학적 질서가 개항과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한 일부 성리학파는 자신들의 사상을 버리는 대신 이하응으로부터
권력만이라도 뺏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개항을 지지했다. 왕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파의 세력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19세기 후반은 바로 이런 입장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는 시기였다. 이하응은 내부개혁을 위해 박규수 등과 손을 잡았지만,
쇄국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성리학파와 손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중정책으로 말미암아 이하응의 내부개혁은 성리학파한테 발목을 잡혔으며,
쇄국정책은 박규수 일파한테 발목을 잡혔다. 그의 정치는 이런 측면에서 외줄타기나
다름없었다. 이를 걱정한 이하응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극단적으로 강화하고자
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경북궁 중건이라는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이 같은 무모함은 정치적 실패를 낳았고, 그런 실책들은 철저하게 배척받던 민씨
일파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다. 권력욕에 물든 민비 일파는 최익현과 같은
성리학파를 동원해서 결국 이하응을 밀어냈으며, 마침내 문화부흥운동의 정치적
실험은 현실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민비 일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근조선은 다시 역사적 방향을 상실하고 말기적
상황에 빠졌다. 개항에 대한 준비도 없이 1776 년 일본에 의해 타율적으로 개항이
되었으며, 개항을 준비해온 세력은 오히려 이 과정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즉 개항을 주장하며 그것을 준비해온 박규수 일파와 이하응 일파는 개항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이는 앞으로 진행될 근조선의 개항이 결국 문화부흥운동의
좌절로 연결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하응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로 끝난 뒤에 이루어진 타율적인 개항은 우리 역사에
거대한 뒤틀림 현상을 몰고 왔다.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가 성리학파의 폐쇄적인
왕조라는 뒤틀림으로 직결되었다면, 타율적인 개항은 '외형적 발전과 정신적 혼돈 및
타율의 일반화'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뒤틀린 우리 시대로 직결되었다.
  타율적인 개항은 내부개혁 우선론자를 철저하게 좌절시켰으며, 내부개혁과
외부문화 수용의 동시성을 주장하던 세력을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그 대신 개항을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하려거나 개항정책과 내부개혁을 모두 반대하던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는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개항과 함께 변화가 일어나고 개혁이라 부를 만한 사건도 없지 않았지만, 그
변화와 개혁은 본질적으로 문화부흥운동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부흥운동이 가꾸어온 내부적 터전을 짓밟는 것이었다. 설령 외부적으로는
똑같은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그 변화의 정신적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이
시기의 개항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오늘날 우리 겨레가 사실상 정신적,사상적 주체성을 잃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있었던 문화부흥운동의 좌절과 관련되어 있다.
식민지를 겪은 것도 사실 그보다는 작은 원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겪은 인도에서 정신적,문화적 뒤틀림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일이다.
  타율적인 개항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주체적인
정신사적,문화사적 발전이 좌절되었고 우리 문화와 정신이 뒤틀려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타율적인 개항에서부터 정신적,문화적으로
작은 겨레의 까닭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17. 일본 군국주의의 한반도 강점
  (뒤틀린 대동아공영권의 잔혹한 여파)

    일본 침략의 7 단계

  미국의 흑선이 닫혀 있던 일본의 항구를 강제 개항시킨 사건은 근대 일본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개항과 함께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보수와
개혁의 대립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근대 1868 년에
단행된 메이지유신이 바로 그 계기였다. 즉 메이지유신은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시기부터 유럽에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의 성과물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성과물을 자신의 경제적 바탕으로 삼아 차츰 동아시아의
정치,군사적 강자로 떠올랐다. 그들은 메이지유신으로 말미암아 영주들이
몰락하고 실직한 무사층이 사회의 불평세력으로 떠돌자, 이들을 재조직해서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그 힘을 바탕으로 침략적인 외교노선을 세웠다.
  그들은 먼저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근조선에 대한 침략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내부정비가 덜 이루어졌으므로 내부정비를 강화하는 한편,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방법을 본떠 근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침략의 제1 단계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정치판에서 밀려나면서 근조선의 내부정세가 복잡해지자, 일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1876 년 근조선을 강제로 개항하게 한 뒤,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근대적 외교를 모르고 있던 근조선과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써 온갖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는 한편, 청나라와의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고치게 함으로써
근조선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 이후 일본을 통해 알려진 서양 문화는 근조선을 격동의 시대로 몰고 갔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자는 흐름이 역사의 표면으로 솟아올랐고, 일본의
진출에 저항하는 세력도 힘을 모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구식 군대의 정당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1882 년 군인폭동이 일어났고, 마침내 일본의 진출과 서양 문화의 수입
분위기는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을 밀어내고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으려던 청나라가 이 사건의 정리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정세는 한층 복잡해졌다.
  일본 침략의 2 단계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개혁을 갈망하던 김옥균, 박영효
일파는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 탈환을 노리는 일본과 손잡고 그들의 원조를 받아
1884 년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완전독립의 달성, 공평한 인재등용,
상공업의 발전 등을 목표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선포했다. 그러나 청나라로부터
즉각적인 반격을 받고 개혁정부는 며칠을 넘기지 못한 채 무너졌고,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 탈환이라는 일본의 계획도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중심으로 주도권 탈환의 기초를 다져갔다.
  침략 3 단계는 일본이 청나라를 밀어내고 다시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탈환하는
1984 년부터이다. 사회개혁과 반침략의 구호를 내걸고 전통사상(동학) 중심의
자주적 개혁을 목표로 삼아 1894 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청나라와 일본은
모두 근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근조선
영토에서 한판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들이 주도하는
일본식 개혁을 유도했다.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에게 일본식
개혁을 이끌어나가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1894 년의 타율적 개혁(이른바
갑오경장)이다.
  그러나 근조선 지배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남진정책에 따라 근조선을 손에 넣으려던 차르 러시아의 도전이 바로 그 고비였다.
독일 및 프랑스의 협조를 얻은 러시아는 청나라를 이기고 요동지역을 점령하려던
일본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한편, 정권욕에 불타는 민비 일파와 손잡고 친러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일본은 민비를 암살하는 등 친러세력을 위협하면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근조선 정부와 민중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근조선 지배를
위한 러시아의 기반만 강화시켜주게 되었다.
  근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의 4 단계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근조선에 대한 지배를 굳히려는 러시아와 결국 전쟁을 벌여(1904)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미국 및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근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게 되었다. 나아가 러시아마저 일본의 근조선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근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일본은 이제 지배권을 굳히기 위한 내부작업을 추진했다. 그들은 근조선 정부를
협박해서 1905 년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뒤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1907 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정미7조약을 맺었고, 의병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근조선의 모든 영역에 헌병경찰을 주둔시켰다. 이제 그들에겐 근조선을 일본 영토로
공식화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급기야 1910 년에 타율적이 합방이 이루어졌다.
  일본 침략의 5 단계는 토지조사사업 및 임야조사사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근조선 정부로부터 한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먼저 한반도의 경제적 바탕인 토지와
임야에 대한 소유권을 재정리함으로써, 이제 민중들로부터도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아울러 조사과정에서 약은 술수를 부려 많은 토지와
임야를 국유화하거나 친일파의 소유물로 만들어줌으로서, 한반도 지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반도 민중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토지와 임야를 둘러싼
분규와 소요는 폭압적인 헌병정치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 몰랐으며, 일본에 대한
한반도 민중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나 서양의 다른 열강에 비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그치지 않았으며, 마침내 한반도의
전체 민중들이 저항의 깃발을 들기에 이르렀다. 1919 년 3월부터 시작된 비폭력
저항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운동의 결과 한반도의 독립을 이루려는
지휘부가 이곳저곳에서 탄생했으며, 이들의 분열과 통합 과정에서 저항운동은
발전해나갔다.
  일본 침략의 6 단계는 이런 저항운동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반도에 대한 장기적
지배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이 추진한 전략은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화였다. 그들은 근조선의 귀족들을 자신들의 협조자로 만들어 통치의 앞면에
세우기도 하고, 한반도의 지식인과 부유층을 내세워 저항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한편,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부분적인 자율을 인정하기도 했다. 신문을 발행하게
했으며, 조건적으로 집회를 허용하고, '회사령'을 철폐해서 조선인이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도 어느 정도 용인했다.
  그러나 이 단계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훨씬 더 철저해졌다.
그들은 전시체제를 내세워 모든 물자를 수탈했으며, 쌀의 생산을 독려하여 군량미로
빼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인력 및 '정신대'까지 징발했다. 또한
조선식 성과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강요했으며, 일본의 글과
말을 쓰라고 억압하면서 겨레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짓눌렸다. 이 밖에도
'황민화'(일본화)를 위해 일본이 추진한 정책은 헤아릴 수 없으며, 사실상 교육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조선 민중을 일본식으로 개조하려 했다.
  따라서 일본은 많은 저항을 받았지만, 이 저항의 과정에서 한반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차츰 새로운 생활방식에 물들어갔다. 일본말이나 일본화된 말이
일상화되었고, 일본식 문장과 문법이 생활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일본은
패배했고,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침략야욕은 이 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았다.
  1945 년 뒤에도, 특히 1960 년대 이후부터 일본의 침략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
침략의 7 단계인 이 시기의 침략은 주로 문화적,경제적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직도 정당한 국제적 거래자가 아니며, 여전히 침략세력이다. 근래에 들어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린 독도(돌섬), 문제만 하더라도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침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잘 드러내주는
문제인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침략을 그만둘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선택을 대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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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은 우리 역사의 비극을 말해주는 대명사나 다름없다. 그것은 일본이
동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으려 했을 때,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간판구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단순한 정치구호가 아니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그 표현을 어떻게 바꾼다 해도 우리
역사에서 다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대동아공영권의 순수한 말뜻은 '동아시아는 더불어 발전해나가야 할 역사적인
단일주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함축을 담고
있다. 물론 세계가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이 말은 이제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유럽이 종교와 종족을 넘어서서 유럽공동체를 만들고, 아랍 지역이 종교와 종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그런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도 그런 차원에서 아직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공영권이 어떻게 구성되며, 그 공영권에 어떤 세력이 포함되느냐
하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는 원래 그런 공영권의 역사였다. 중국 한족 중심의 공영권과
기마종족 중심의 공영권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해온 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인
셈이다. 우리 역사도 기마종족 공영권의 역사 가운데 일부이며, 몽고족이나 만주족의
역사 및 일본인의 역사도 그 가운데 일부이다. 그들은 모두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각 나라마다 구체적인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를 가지고 있고, 그
뒤에도 긴밀한 상호관계를 맺으며 문화적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들은 혈통이란
측면에서도 매우 가까우며, 언어나 문화에서도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중국 한족은 이들을 자신들의 주변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주변 역사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들은 대진의 역사까지
자신들의 주변 역사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영토에서 발굴된 모든 유물이 자신들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믿으며, 그런 차원에서
은나라의 역사까지 한족의 역사로 둔갑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실제로 오늘날의 거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다양한 기마종족들까지 자신들의
주민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계화의 무대로 참여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 한족의 이런 소망은 실현되기 어려우며, 설령 실현된다고 할지라도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화인민공화국에 참여하고 있는 대륙 동북부의
주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문화적 색채에 따라 한족과 다른 독자적 세력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은 그런 의미에서 재검토할 만하다. 바로
거기에는 한족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가 아닌 또 다른 아시아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노선은 '근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아울러 중국적 아시아 질서에 대한
기마종족적 아시아 질서의 도전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대동아공영권은 원칙적으로 중국적 아시아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아시아 질서에 대한 가능성 탐색이었지만, 제국주의라는 근,현대적
야수성과 결탁되어 매우 일그러진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중국 한족이
아닌 기마종족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를 모색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타당한
일이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고 독점자본주의적이며 (소)종족우월주의적이었으므로,
마침내 그 개념은 동아시아 주민들 스스로에 의해 죄악의 개념으로 버려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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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뒤틀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은 어떤 면에서 미륵불교를 내세운
백제의 패권주의를 닮은 듯하다. 그리고 다른 형제종족을 무시하고 부여족의
권력독점을 추구했던 대진의 후기를 닮은 듯도 하다. 비록 시대의 차이가 있고
사회경제적인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며,
창씨개명까지 강요했던 그들의 황민화정책은 본질적으로 형제종족들 사이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족에 의한 권력독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마종족의 오랜 내부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쥐어보지 못한
일본족이 다른 종족들보다 먼저 자본주의의 물질적 혜택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은 뒤틀린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즉 식민지
확보라는 제국주의적 속성과 맞물린 그들의 대동아공영권에는 한 번도 주도권을
잡아보지 못한 일본족의 한풀이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셈이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에서 발견할 수 없는 역사왜곡과 창씨개명 등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에서 나타난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중국적 아시아 질서와 다른 기마종족 중심의
아시아 질서에 대한 가능성을 오히려 회의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공영권을 이루며
독자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야 마땅할 여러 기마종족들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뒤틀린
대동아공영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한족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옹호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은 충분히 제기될 만한 주제였다. 그러나 그런 공영권은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이 자율과 평등의 원칙에 따라 평화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주제였다. 그리고 중국 한족과도 평등과 상호공존의 원칙에 따라 제2차 공영권을
설정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공격적 성격과 확대재생산의 생리에 따라 일본족이 추진한
대동아공영권은 그런 가능성을 짓밟아버렸을 뿐 아니라, 그런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이미지마저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와 함께 사회주의의
국제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동아공영권이 끼친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뒤틀어 놓았다.
  사회주의가 소비에트연방을 중심으로 국제화될 때에도 자기 중심의 전통적 질서와
문화를 고집하던 중국 한족은 독자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잘못된
대동아공영권으로 자기 중심의 질서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기마종족은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분해되었다. 일부 종족은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질서 속으로, 또 일부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 속으로 줏대 없이 끌려
들어갔고, 다른 일부 종족은 중국 중심의 사회주의 질서 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갔다.
  물론 우리나라가 분단된 후 독일 등과 다르게 양 진영이 점점 더 적대화되어간
것도 이처럼 자기 중심의 질서를 잃고 줏대 없이 다른 축으로 각각 깊이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마종족이 자기 중심을 잃고 독자적인
국가마저 세우지 못한 채, 중화인민공화국의 충실한 주민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잘못된 대동아공영권의 부정적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은 참다운 동아시아공영권의
수립을 늦추고 그 구성원의 문화적 침체를 몰고 온 주요한 요인이다. '만약' 일본이
아닌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기마종족들을 식민지 주민으로 삼았더라면, 이런
정도까지의 해체현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일본이 지배했다 할지라도
왜곡된 대동아공영권의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고 '순수한' 제국주의적 착취만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은 없었을 것이다.
    18. 한반도 분단
  (포기되는 정통성과 문화주체성)

    '현대'라는 의미

  근대 자연과학과 그에 기초한 서양의 산업혁명은 인류의 일상생활에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인간 노동의 성격이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즉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자연 재창조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결과물, 곧 재창조된 사물은 자연사물이
인간생활에서 누렸던 지난날의 지위와 명예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사회의
여러 관계들은 주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먼저 현대는 세계시장의 형성단계, 곧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돛을 올린 현대에는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이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겨냥하여 시장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대량생산 체계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촉진되고 축적되어 마침내 만성적인 대량생산의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일정한 문화권과 민족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시대에서
마침내 세계를 기본단위로 하는 시대로 바라게 된 것이다.
  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늘려왔다. 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회주의가 등장함으로써, 두 체제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회적 지위가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즉
현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확대되는 주요한 시기였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가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경쟁은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오던 각 문화권의 붕괴와 재편을
촉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각 문화권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도
세계는 각각의 문화권으로 표현되며, 때로는 그 같은 구분에 의해서만 현실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기도 하다. 세계시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각 문화권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각 문화권이 더 이상 역사발전의 고립적 단위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각 문화권은 그런 사실만 가지고도 자기 권역과 자기 시대가 붕괴되거나
종말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유럽 시대의 종언', '중국적 세계질서, 화이관의
붕괴'라고 하는 표현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어떤 문화권은 자신의 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으며 ,또 어떤 문화권은 자신의 틀을 잃어버리면서 수동적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미국 문명권과 러시아 문명권이 자신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세계체제에 편입된 경우라면, 유럽 문화권이나 중국 문화권은
상대적으로 그 틀을 다치게 하면서 세계체제에 편입된 경우이다. 물론 기마종족의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다.
  현대가 고립적 지역문화권을 넘어서는 세계시대라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현대는 각 지역문화권의 독자적 성격을 한층 빛나게 만든 시대이기도 하다. 즉
세계시대에도 각 문화권의 중요성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각
사회와 나라는 자신의 고유한 문화권을 발판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세계무대의
주인다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무대의 경쟁단위는 궁극적으로
자기 문화권이며, 자신의 고유한 문화권을 잃어버린 사회나 나라가 세계사회에서
어떤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경우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다.
  산업혁명을 앞서 수행한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 또는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관계에서는 문화권 내부의 심각한 갈등이 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문화권 내부의 갈등관계는 차츰 협조와
공존 관계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회와 이들 선진 열강들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의 관계였으며,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식민지 지배나 종속국화의 형태를 띠고 이루어져왔다. 그럴 경우 한 문화권에
의한 다른 문화권의 해체작용이 일어나면서 인종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관계는 아직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약소국가로 구성되어 물리적
방어력이 떨어지는 문화권에 대한 '선진' 문화권의 경제적,정치적 지배가
공공연하거나 은밀한 형태로 잔존하고 있으며, 나아가 문화권 자체를 말살시킬 수도
있는 문화적 지배가 이와 관련하여 넓게 그리고 뿌리깊게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눈앞의 우리 현실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하나의 국제적
구조로까지 파악되어도 무방하다.
  더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적대적 경쟁관계는 이런 현상을 고착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선진' 문화권과 자본주의를 선택한 '선진' 문화권은
서로 대결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문화권을 자기들 중심으로 재편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문화적 파괴행위가 자행되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이
사라진 뒤에도 자기 문화권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현상은 물론 계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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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성격과 과정

  우리나라의 분단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는
기마종족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내부붕괴를 상징하며, 밖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선진'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해체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요컨대 우리의 분단은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내적 응집력이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세계화를 주도하는
문화권에 의해 우리 문화권이 급속하게 해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1945 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두 도시는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며,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1944 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을 계기로 패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1945 년 5월에는 이이오 섬과 오키나와 섬을 점령당함으로써 패전의 절차를 밟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음으로써 동아시아
주민들로부터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받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저항을 받은 결과,
일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상태에 있었다.
  어쨌든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은 기마종족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권을 철저하게
해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그릇된 대동아공영권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권이 내적 응집력이 약화된데다 강제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던
그 문화권의 틀이 일본의 패망을 계기로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것이다.
  그릇된 대동아공영권에 맞서기 위해 동아시아의 주민들은 현실적으로 일본과
필적할 만한 세력을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중국 한족과 손잡거나 소비에트연방
혹은 미국과도 손을 잡게 되었다. 즉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주민의 분열을 촉진시킨 셈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주민의 분열현상은
자신들이 손잡은 각 세력에 의해 동아시아 문화권이 철저하게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식민지 시기를 넘기면서
과거의 유산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오늘날까지 그 주체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일본과 맞서기 위해 손잡은 세력들의 문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들어왔다.
소련과 손잡은 결과 사회주의와 함께 러시아 문화가 들어왔으며, 미국과 손잡은
결과 국가독점자본주의와 함께 미국 문화가 들어와 주인 노릇을 했다. 또 중국과
손잡은 결과 중국적 사회주의와 함께 중국 문화가 다시 밀려드는 시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가 패배해서 물러간 뒤에도 왜곡된 형태의 기마종족 문화
곧 일본 군국주의의 문화적 잔재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바로 이런 문화권의 충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물밀 듯이 밀려든 문화 가운데 주도권을 가진 것은 사회주의 소련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문화와 자본주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미국 문화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이들의 정치적,국제적 세력관계에 따라
정치적,문화적으로 재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겪은 뒤여서 그들은 극단적인 대결을 원하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동아시아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재편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협상의 결과 한반도는 북과 남으로 나뉘어 각각 사회주의 소련(러시아 문화권)과
자본주의 미국(미국 문화권)의 세력권으로 편성되었고, 만주를 비롯한 지역은
중국(중국 문화권)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패망자 일본은 나름대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세력권으로 끌려들어갔다. 어쨌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이제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율적인 합의와 협상에
의해 재편성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협상과 합의는 일본의 패망
이전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해서 진행된 첫 협상은
1943 년 3월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외상 이든의 워싱턴회담이다.
그들은 이 회담에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날 한반도는 국제 신탁통치 아래에
둔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타율적인
재편성에 합의하였다. 물론 이런 합의와 달리 그해 11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자유독립시킨다"고 하여, 타율적인 재편성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타율적인 재편성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흐름이었으며, 미국이 소련과
손잡는 과정에서 이 원칙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먼저 테헤란회담에서
소련(러시아 문화권)은 사할린 열도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확보를 조건으로
루스벨트가 제의한 신탁통치안에 동의했다. 또 1945 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는
미국과 소련 및 중국이 20--30 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했으며,
중국의 내부혼란으로 말미암아 중국이 제외된 상황에서 열린 그해 7월의
포츠담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접수할 군사분계선을 설정했고, 그 뒤
38선의 설정과 함께 한반도는 분단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만주지역은 만주족이 아닌 중국 한족의 영역으로
확정되었고, 태평양 연안지역은 소련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는 자신의 문화권을 바탕으로 삼아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타율에 의한 문화 왜곡과 변질 및 종족분열의 어두운 세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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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성의 좌절

  타율에 의한 문화 재편성과 외부세력에 의한 정치적 결정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정이 복잡한 만주지 역은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이런 노력의 흔적은 많다. 식민지 시기의 신간회(1927.
2--1931. 5)는 나름대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외부 문화권에서 배워온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넘어 민족자주성의 회복이라는 공통의 명제를 내걸고
좌파와 우파가 결합했던 신간회는 매우 초보적이고 불건전한 형태의 주체적
운동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사회운동은 민족운동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구호 아래
민족의 주체적 단결을 주장하며 한때 4 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렸지만, 결국 우파
지도부의 변질과 사회주의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기구 코민테른의 영향으로 힘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5 년 8월 15일에 발족한 건국준비위원회는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주권 확립에 매진한다는 계획 아래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참여한 단체였다.
물론 미국 문화권의 그늘 아래에서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던 일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했지만, 145개나 되는 인민위원회를 설치할 정도로 정치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입장에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를
서두르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좌절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38선 이남의
점령자이자 외부세력인 미군정에 의해 타율적으로 불법화되었으며, 38선 이북에서도
이것을 기회로 소련이 주도하는 타율적인 정치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3 년이
지나자 남쪽과 북쪽에 주체성 없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이들 두 세력에 의해 주체성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1950 년의 '한국전쟁'은 그 성격상 주체성 파괴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은 늘 주체성을 무기로 삼아 다른 세력을 '괴뢰'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어느 세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
주체적인 정치세력은 아직 없다. 한반도의 분단 그 자체가 타율적인 주체성 파괴의
결정체이므로, 분단을 극복해야만 주체성이란 말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과 북, 북과 남의 분단은 그 어떤 이념과 명분에도 불구하고 작아진
우리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 주체성을 상실한 역사를 상징할 따름이다. 나아가 그
주체성 상실은 한반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된다. 즉
우리나라의 분단은 기마종족이 주도해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를 상징하며,
우리가 문화적 노예상태 또는 준 노예상태에 있음을 가리킨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한반도 분단은 과거 삼국시대의 분열보다 훨씬 심각한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문화적 주체성이 없으므로 두 정부에도 정통성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남과 북의 두 정부는 스스로를 정통이라 여기는 자세를 버리고 각자가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서
타율적이거나 비주체적인 요소를 차츰 줄여나가야 한다. 생존과 관련된 현실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업은 진행되어야 한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길(사실은
원래의 우리 길)이 남과 북 스스로에 의해 모색되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해나갈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작은 민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세력이 되어 세계무대에 주체적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19. 언어를 잃어버린 겨레

    한자와 한글

  나라말을 바로 표현하기 위해서 한글만을 쓸 것인지 한글에 한자를 섞어 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쓸 경우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쓸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자를 중심으로 괄호 안에 한글을 달아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한자가 이미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은 한자가 여전히 중국 한족의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한자가 원래부터 우리 글자였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도 한글이
우리 글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한자를 오늘날의 문자로 발전시킨 것이 중국 한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자는 은나라를 비롯한 중국계 기마종족의 문자였으며, 기자계의 이주(제2장
참조)를 통해 우리 겨레의 문자로 자리잡았다. 물론 우리 겨레를 비롯한 동아시아
기마종족은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글의 원형인 훈민정음은 그런 문자를 재정리(제13장 참조)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한족의 손에서 다시 다듬어진 뒤에도 한자에 우리 겨레의 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인 씨는 오늘날의
중국 발음으로 '스'이지만 옛 발음은 '씨'였고, 지금도 중국 북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런 발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성이 모계혈통을 가리키던 말인 데 비해
씨는 부계혈통을 가리켰지만, 어쨌든 씨라는 글자는 우리말의 씨와 같아서 씨앗의
의미로 쓰인다.
  한자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신자의 현대 중국어 음가는 '렌' 또는 '르언' 이지만, 옛
발음은 역시 '인' 또는 '닌'이었다. 그런데 '인'이라는 글자의 발음은 왜 인일까?
이것은 우리말의 '임'과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 임을 음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리를 가리키는 '?'의 발음이 '도'(현대 중국어 음가는
'투')인 것도 복수형을 나타내는 우리말의 '∼들' 또는 '둘'(두레)과 관련되어 있으며,
'한'과 '한'의 발음이 '한'(현대 중국어 음가는 '한')인 것도 크다는 뜻의 '한'과
관계가 있고, '여'의 발음이 '녀'(현대 중국어 음가는 '뉘')인 것도 여성을 나타내는
우리말의 '뉘'(누이)와 관련되어 있다.
  기마종족의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던 말은 한자의 '마'(마, 현대 중국어 음가는
'마')로 나타났으며, 사냥대상이었던 '돗'(돼지)은 '돈'(돈, 현대 중국어 음가는 '툰')이
되었고, 개는 '구'(구, 현대 중국어 음가는 '거우')가 되었다. 또 우리말의 '알'(아이
또는 얼이, 얼라)은 '아'(아, 현대 중국언 음가는 '알')와 같으며, 신을 나타내는
우리말의 '검'(가마, 고마, 개마)은 '금'(금, 현대 중국어 음가는 '진')과 같아서
검줄이나 금줄이 섞여 쓰이기도 하고, 우리말의 '참'은 '진'(진, 현대 중국어 음가는
'쩐)과 같으며, 우리말의 '풀'은 시(불, 현대 중국어 음가는 '푸')와 통한다. 한자에서
'수'(화, 현대 중국어 음가는 '후아')의 발음은 우리말 해와 관련이 있고, '백'(백,
현대 중국어 음가는 '바')의 발음은 '밝다'와 관련이 있으며, '막'(막, 또는 '막'이나
'막', 현대 중국어 음가는 '머')의 발음은 '막다'와 관련이 있다. 옷과 '의'(의, 현대
중국어 음가는 '이')의 관계나 갖(가죽)과 '혁'(혁, 현대 중국어 음가는 '거')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이런 관련성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중국 한족이 남방계
농경종족과 혼혈되는 과정에서 문법체계와 함께 문자의 발음체계가 크게 바뀌었고,
그 결과 오늘날 한자와 우리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자를 뜻으로 읽는
일본인의 발음이 한자의 중국 발음과 매우 거리가 멀 듯, 한자도 혼혈 한족의 문화
속에서 그 발음체계가 크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문법체계마저 바뀌었던 것이다.
  설령 이런 이야기가 한낱 재미있는 낭설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한자는 중국
한족만의 문자가 아니며, 최소한 은나라 멸망 이후 기마종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한
문자였다. 즉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한자가 들어왔느냐는 따위의 의문은 그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까지 한자를 그대로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자를 영어와 같은 차원의 외국어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한자어
가운데는 우리 역사와 함께 남아야 할 것들도 있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것들도
많다. 어떤 면에서 이웃나라 일본은 그런 생활을 잘 발전시켜온 셈이다. 만약
한자를 모두 버린다면 우리말 가운데 임금의 옛말이 임검이고, 임검은 사람(임,
인)과 신(검 또는 가마, 금)의 합성어로서 '사람 신' 또는 '신 같은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즉 임금은 찰나 사이에 영어의 king이 되거나
최고와 권력자라는 정치경제적 개념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말뜻이 제대로 담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말
그 자체에 이미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무엇보다 그 의미를
바르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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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요 속의 빈곤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생활은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매우 많은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나라 밖에서 들어온 말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처럼 많은 말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제대로 담긴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어떤 경우 적절하게 사용되는 듯한 말도 사실 매우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푸른 하늘'은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언어가 조금만 제대로
교육되었더라도 '푸른 하늘'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푸르다'는
'풀'에서 온 말이므로, 푸른 하늘을 영어로 옮길 경우 blue sky가 되는 것이 아니라
green sky가 되는 탓이다. 물론 엄밀하게 살펴보면 하늘도 sky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또 '알'이라는 말도 닭이나 오리의 알처럼 둥근 모양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는데, 그것도 잘못된 경우이다. 알이란 완성된 생물에 의해 재생산된 그 생물의
씨앗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이 낳은 사람 씨도 '아이'(baby) 또는 '알라'(얼라)라고
부른다. 즉 알이란 어떤 모양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원초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며, '얼(알) 빠진 사람'은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마저 잃어버린
사람을 가리키는 셈이다. 소의 새끼를 송아지라 부르고 개의 새끼를 강아지라
부르며 말의 새끼를 망아지라 부르는 것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때 '아'는
알이 발음 편의상 줄어서 된 것이고, 지(또는 치)는 중성적 생물을 나타내는 명사형
어미로서 '그치', '저치' 등도 사용되고 있다.
  '우리'라는 말도 나의 복수형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원래
'울'(울타리 또는 우리)을 함께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우리는 작은 우리들이
모여서 큰 우리가 된 것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쓰는 경우도 있다. 복수형을 나타내는 '--들' 이라는
말은 원래 '두레'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물에만 쓰일 수 있지만,
우리는 '나무들', '돌들'처럼 삶이 없는 사물에도 '들'자를 붙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말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역사책에서 '선돌'과 '고인돌'이
나오는데, 고인돌이란 말도 잘못지어낸 말이다. 옛 시대의 돌무덤(묻은 다음 돌로
덮은 것)인 고인돌에서 중요한 돌은 괴어놓은 돌이 아니라 덮어놓은 돌이다. 즉
고인돌이 아니라 '덮은돌'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선돌은 '세운돌'이라 하지 않고
선돌이라 했으므로 덮은돌도 '누운돌'이라 불러야 그 사물이 바른 우리말 이름을
얻는 셈이다.
  문자의 체계를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구분하면서, 우리 글은 표음문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표음문자라고 해서 글자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글에도
나름대로 뜻이 있으며, 이 뜻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와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숫자를 표시하는 말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것이 숫자를 나타내는 약속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발음조차
임의로 바뀌면서 허망한 표준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하나는 으뜸이고
크다는 뜻의 '한'에서 왔으며, 둘(두리)은 단수형 복수를 가리키는 '두레'에서 왔고,
셋(서이)은 삶을 뜻하는 '서다'에서 왔으며, 넷(너이)은 죽음을 뜻하는 '넣다' 도는
'눕다'에서 왔다. 또 다섯(닫서)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닫고 서다'에서 왔으며,
여섯(엿서)은 한걸음 나감을 뜻하는 '열고 서다'에서 왔고, 일곱(일굽)은 '일구다'에서
왔으며, 여덟(엿덜)은 자유로움을 뜻하는 '열고 닫다'에서 왔고, 아홉(아ㅎ)은
'아우르다'에서 온 말이다.
  이처럼 우리말에도 우리 문화와 사상이 꿈틀대고 있으며, 그런 꿈틀거림을 알아야
참으로 우리말을 쓰고 가꾸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우리말은 살아 있는 우리들의
말이 되며, 나아가 우리의 정신적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언어생활은 우리말의 껍데기만 보살피는 꼴이다. 한자를
섞어 쓰든 한글만 쓰든 중요한 것은 바로 말의 뿌리를 스스로의 문화적,정신적
능력으로 삼는 일이다. 예컨대 '먹다'라는 말이 '막다'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뜻이 '백'(넋)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준다는 의미라는 것을 모를 경우,
먹는 행위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조상들이 먹는 행위를 한자로
표현할 경우 '요기하다'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먹다의 말뜻을 모르면 이 또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요기라는 말은 '기운에다 재료를 대주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먹다'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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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잃어버린 나라

  근래에는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코미디 극에서도
바른 우리말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나름대로 뜻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문화적
어설픔과 천박함에 보기가 민망스럽기조차 했다. 더구나 일본말에 대한 감정적
배척과 한자어에 대한 포용적인 자세는 편견의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예컨대 '복지리'라는 말이 나오자 '지리'는 싱겁게 끓인 음식을 뜻하는
일본말이므로 써서는 안 되고, 그 대신 '복싱건탕'이라고 써야 한다고 했다. 또
'다라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라'는 둥근 그릇을 가리키는 일본말이므로 쓰지 말고
'함지박'이란 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리라는 말은 일본말이면서도 우리말
'질펀하다', '질다'와 뿌리가 같은 말이므로 소금을 조금 넣었다는 뜻의 싱겁다와
뜨거운 음식을 가리키는 탕이라는 한자어를 어설프게 붙일 까닭이 없다. 또 일본말
다라는 '달'이나 '담'(담울 또는 다물)이라는 우리말에서 생겨난 표현인데,
일본에서도 담이 둥글게 쌓인 것을 일러 '다라'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은 성도 다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며, 이런 표현은 원래 성을
둘러쌓인 백제시대의 자치구역 '다물'(담로 또는 다라)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
밑바닥이 평평한 다라는 밑바닥이 둥근 함지박과 다른 것이며, 그러므로 적당한
말이 없을 때에는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은원관계가 깊다고 해서 같은 기마종족계의 표현을 무조건 배척하는
행위는 언어생활의 주체성 상실을 상징할 뿐이다. 오히려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경우에까지 한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틀린 말을 바로잡으면서 생긴 이런 사례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은 정서적인 차원의 감정이 아니다. 언어가 바르게 사용되지 않을 때
커다란 문제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사람의 힘이고, 그 말과 글에 함축된
의미와 뜻이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한다.
  예컨대 '나쁘다'는 말은 '나뿐이다'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기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 뜻을 잃고 영어의 bad처럼 받아들일 때 그
말은 끝내 '해롭다'는 말과 섞이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이기적인 행위에 대한
경계심이 알게 모르게 줄어들고 말 것이다.
  '바른 정치'라는 말도 가끔 보이는데, 이때 '바른'이라는 말도 참뜻을 잃어버린 채
사용되고 있다. 즉 영어의 good이나 right처럼 받아들이면서 어설픈 개념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본래 '바른'은 '왼'의 반대말이며, '여이다'(해를 떠나보내다)에서 온
'왼'이 음을 가리킨다면, '밝다'(해를 받다)에서 본 '바른'은 양을 가리킨다. '왼'이
'그르다'와 다르듯이 '바른'도 '옳다'와 다르다. 즉 '옳다'와 '그르다'는 수직운동과
수평운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찬성과 반대를 나타내기 때문에, 각각 '지지받다'와
'지지받지 못하다'의 뜻으로 쓰여야 한다. 이에 비해 '바른'과 '왼'은 각각
'밝히다'(또는 드러내다)와 '가무리다'의 뜻으로 쓰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아무렇게나 쓰인다면 그 사회의 정신문화는 이미 파괴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개념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문화적 발전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즉 말들이 뜻을 잃은 채
사회를 요설의 잔치판으로 타락시키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그런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권에 의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체, 그로 말미암은 한반도의 분단과 주체성 상실이 아마 그런
역사의 바탕이 될 것이다.
  잃어버린 국가를 되찾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잃어버린 말을 되찾는 일이다.
말이 없으면 문화가 없는 것이고, 우리말이 없으면 우리 문화가 없는 것이다.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말을 쓰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말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우리말은 사실상 미국말이나 일본말 및
중국말의 한반도 사투리나 다름없는 탓이다. 말은 남아 있으나 그 말에 담긴 원래의
개념이 사라지고 다른 개념이 거기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주체성 없이
흘러 다니는 우리 겨레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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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과 외래어

  우리말을 아끼는 사람들은 무분별한 외래어의 사용을 안타까워한다. 어떤 사람은
한자어의 비행기를 '날틀'로 옮기자는 주장까지 할 정도로 우리말 오로지쓰기를
고집하기도 한다. 비교적 친숙한 한자어에 대한 거부감이 이 정도니, 서양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외래어에 대해서는 그 거부감이 어떠할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외래어는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우리말의 말뜻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야 한다. 문화적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미국 문화권의 영향을 받는 오늘날, '배우다'는 말의 말뜻을 모르면 '배우다'는 결국
'learn'이나 다름없으며, '나라'는 같은 식으로 nation이 되고 만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짝을 이룰 적당한 영어가 없는 우리말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겨레'란 말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겨레'는 '물결'이라는
말의 '결'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나눌 수 없을 뿐 아니라 같은 흐름을 가지는
어떤 단위라는 말과 '누에'(누워 있는 생명체)나 '게'('기에'의 줄임말로 기어다니는
생명체)의 '에'처럼 생명을 뜻하는 명사인 '에'(애)가 결합된 말이다. 즉 겨레는
'생명공동체'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적합한 미국 문화권의
말이 없으므로 차츰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말뜻을 가지지 못한 나라는 문화적 주체성도 없을 뿐 아니라
창조적인 능력을 잘 드러낼 수도 없다. 뛰어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모방을
잘할지는 모르지만, 창조적 능력은 밑바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자신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뛰어난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고, 철학을
공부하더라도 남의 이론을 남의 말뜻에 따라 이해하기 바쁠 뿐이며,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더라도 남의 나라 흉내를 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뜻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말까지 잃어가는 근현대의 우리 겨레를 작은
겨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문화권이 타율적으로
해체되어 생긴 현상이라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과 뿌리를 함께 하는 셈이다.
    20. 사라진 식객문화

    두 부류의 부자

  사회과학자들이 꼽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사회적(공동체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개별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끊임없이 발전된 공장제 생산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분업이 촉진되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은 철저하게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지만, 자본의 사적
소유라는 특징에 따라 공동체적으로 생산된 재화가 자본가 개인의 손에 집중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를 세계적인 생산양식으로 발전시킨 주요한
동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의 성격이 공동체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재화(부)의 집중화 현상은
인류역사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사회경제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제시한 시대구분의
용어를 빌릴 때,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에서도 부의 집중화 현상은 늘
특징적이었다. 노예제 사회에서 부는 노예주에게 집중되었으며, 봉건제
사회에서는 그것이 봉건영주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표현은 인류역사의 오랜 슬픔이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특징을 다른 데서도 찾아보아야 한다.
수많은 임노동자를 하나의 작업장으로 불러모아 공동체적으로 노동시키는 과정에서
사회적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겉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즉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실현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그 이전 시대의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신분제도의 붕괴와 함께 사회질서를 위한 새로운 개념으로서
민주주의가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재화가 개인의 손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노동착취를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그런
미완성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의
편중이 시비거리가 되는 까닭은 자본주의 자체가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제도인 탓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측면은 부의 사용 용도와 관련된 문화적 가치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부의 사용 용도에 대한 한국 자본가들의 가치관은
과거의 가치관과 거의 단절되어 있다. 즉 오늘날의 한국 부자(자본가)는 과거의
부자들(노예주나 봉건영주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그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 겨레의 부자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식객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가에게는 그런 식객문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마종족
특유의 정서가 약화된 근조선 이후부터 이런 문화는 차츰 사라졌으며, 자본주의라고
하는 무책임한 사회제도를 앞세운 서구 문명의 파도 앞에서 이제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의 부자도 오늘날의 부자처럼 대부분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사회적으로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호화로운 생활과 함께
사람을 키우는 데 상당한 투자를 했다. 서양 역사에서 그런 현상을 끌어대는 데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지만, 동양의 역사 특히 기마종족의 문화사에서 사람을 키우는
문화는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우리 과거의 어떤 시대에도 부유층은 사람을 키우는 데 상당한 재물을
사용했으며, '식객'은 그들의 부를 소비하는 계층이었다. 물론 신분제라는 한계가
한층 뚜렷해지는 시대, 예컨대 근조선에서 '식객'이 주로 평민 이상에 한정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특정한 신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부자들은 가난한
집안의 아동이나 사회적 기회를 얻지 못한 미완성의 인재 혹은 경제적 생활과
무관한 수련인이나 예술인 등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부장의 집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생활하는 식객도 있었으며, 자신의 집에서 부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식객도 있었다. 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을 펼 수 없는 아동은
부자의 식객이 되어 그 부자의 또 다른 식객으로부터 기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일정한 능력을 갖춘 식객은 어린 식객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능력을
더 개발할 수 있었다.
  식객 가운데는 주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거나 주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경우까지 있었다. 부자들은 그런 식객을 빈객이나 상객이라 불렀다. 예컨대 자신의
아동과 어린 식객을 위해 교육을 담당하는 식객인 '훈학'은 별채까지 받아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 경제적 부담 없이 자신의 지적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혜택을 입어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옛 은인에게 은혜를 갚거나, 옛
은인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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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과 직업의 함수관계

  식객문화는 직업에 대한 서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동양 문화에서 직업은
철저하게  서열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육자나 공직자 및 사상가로 구성된 사(선비)가
가장 위였고, 자연으로부터 먹고 입을 것을 생산하는 농이 그 다음이었으며, 자연을
모방하여 인공적 사물을 생산하는 공이 그 아래였고, 모든 생산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상이 맨 아래였다. 물론 살생을 담당하거나 놀이 등 유흥문화를 담당하는
직업은 어떤 경우에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 사회는 직업상의 서열이 신분상의 서열과 직결되었고, 신분의 세습을
통해 직업도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사는 직업이기 이전에 높은 신분을
상징했으며, 상도 직업이기 이전에 낮은 신분을 상징했다. 그리고 신분제도의 확립과
함께 직업선택의 자유는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의 서열은 모든 과거 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은 그 재화의 상당한 부분을 늘 사를
키우는 데 투자했다. 그렇게 해야만 축적된 재화가 자신의 임무를 완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상위 신분에 의한 하위 신분의 착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 때로 하위 신분의 신분상승 욕구와 관련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사회를 오늘날의 눈으로만 들여다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지난날 기마종족이 가졌던 재화에 대한 개념, 즉 재화는
축적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데 사용되어야만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해야만 한다.
  많은 재화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신분상 식객을 키울 수 없을 때, 그는 자신의
재화 가운데 상당한 정도를 적당한 사람에게 맡겨서 식객을 키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재화로 키워진 식객은 그 사회를 주도하는 인재가 되었다.
  사회를 주도하는 인재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이름난 정치가나 학자는 아니었으며,
그들은 사회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할 따름이었다. 때로 이름난 사람들이 식객문화의
그늘에서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의 일생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런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특별히 내세울 일도 아니라고 여겼으며,
사회적 관행상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탓이다. 그들 자신도 재력을 갖추면 다른
인물들에게 그런 혜택을 베풀었다. 그것이 바로 지난날 공동체 사회의
순환논리였으며, 이러한 순환관계를 맺음으로써 부유층의 호화로운 생활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전통적 신분제도의 파괴를 전제로 해서 세워진 사회다. 그리고
신분제도의 파괴를 통해 사람의 타고난 억눌림을 해소할 수 있었다. 즉 현대는
인류역사의 고질병인 신분제도를 걷어냄으로써 인간의 평등과 자기 삶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발전된 명제를 실현하려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신분제도만 파괴한 것이 아니다. 현대는 신분제도의 파괴와 더불어
신분제도의 또 다른 얼굴인 직업질서까지 파괴해버렸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명제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명제와 직결되어버린 것이다.
직업질서가 파괴되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겨났다. 재화(권력까지
포함)의 보유 정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의 내용적 가치에 평가되지 않고 그가 보유한 재화의
정도에 따라 평가받게 되었다. 예컨대 연봉이 1천만원인 공직자나 교육자보다
연봉이 1억 원인 유흥업소 주인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재화에는 얼굴이 사라졌으며, 재화는 사용 용도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완성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재화는 사를 생산하는 일까지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었지만, 현대의 재화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재화의 용도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에 달려 있다. 재화를 보유한 자본가가 그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 것이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라는 말은 현대사회의 그런 사정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러다 보니 사를 키우는 식객문화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를 키우는 대신
더 많은 재화를 벌어줄 기능인만을 키우며, 교육에 사용될 재화는 자본가가 개인적
특권을 누리는 데 사용된다. 그들은 교육에 재화를 투자할 경우에도 그것을
사업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현대사회의 공공교육은 점차 의무교육으로 바뀌면서 사회적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지만, 재화의 개념이 바로 서지 않는 이상, 그곳에서 성장한 인재는 권력과
재화를 추구할 뿐이다. 실제로 전인교육을 표방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이
현실적으로는 개인적 만족과 정치경제적 능력을 실질 목표로 삼고 있지 않는가!
  식객문화가 사라진 결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잠재적 능력자들은 사회의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되었으며, 그들의 잠재적 가능성은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짓밟힌다.
자본가들은 이제 직업적 질서를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의 위력을
발휘해서 상업적 이윤이 직업적 질서를 대신하도록 만든다. 사회나 인간 본연의
발전과 아무리 깊은 관련이 있어도 자본가는 자신의 이득이 되는 일에만 '투자'할
따름이다.
  잠재능력이 모자라도 돈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온갖 억지를 부려서라도
최대한의 교육을 받는다. 자식을 서로 바꾸어 기르기도 하던 기마종족 공동체의
문화는 이제 완전히 짓밟혔다. 식객문화의 본질이 모든 젊은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는 공동체 원리인 데 견주어, 오늘날의 교육문화는 공동체의 폐허 위에 버티고
선 이기주의의 소산임을 이 대목에서 확인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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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되어야 할 현대 민주주의

  공동체문화가 꺾어진 오늘날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만드는 일은 이제 개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개발하고
전달해서 사람을 '자연인'으로 가르치는 스승도 존재할 수 없다. 때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이해관계가 똬리 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일정한 사회적,경제적 조건만 갖추면 '자신의 내면세계'(이 말에
대해서도 이제 상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 글에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겠다)를 개발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명예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것은 물론
끊임없는 개발의 대상이 된다. 이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동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공통적인 정치이념인 민주주의는 그런 현상의 바탕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조건 아래서 모든 인간은 만 18세 또는 만 20세가 되면 저절로
완성된 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의 내면세계가 얼마만큼 깊이 있게 개발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법적,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의 주된
구성원인 부모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으며, 보통선거(국민 1인 1 표의 평등한
선거)와 비밀투표라는 원칙에 따라 부모와 전혀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부모가 그의 선택을 사전에 묻는 것도 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는 가족제도 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객문화를 혐오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든 가족을 해체하고 개인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를 구성하려고 한다.
이제 가족은 경제적인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키워주고 키워준 만큼 되돌려받기만 하면 되는 경제공동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대 민주주의가 가족제도 속에 남아 있는 식객문화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어 민주시민의 권리를 획득하는 순간, 인간은 이제 사회적으로 완성된다.
그는 더 이상 정치경제적 동기말고는 내면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할 다른 사회적
동기를 찾지 못한다. 이제 내면적인 인간발전이란 정치경제적 적응력이 낮은
인간들의 유치한 자기 변명으로 간주된다. 마침내 '인간수련을 한다고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라는 말이 넓은 공감대를 얻게 되었으며, 자아개발이니 인성함양이니
하는 말들도 정치경제적 변화에 따라 개념을 바꿔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내면적으로 점차 보잘것없어지고 만다. 마침내
'문화적 생활'이라는 말도 사회경제적 편의를 도모하고 자신의 육체적 만족도를
높이는 생활을 뜻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문화적 생활이라는 개념 속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개발하던 과거의 전통이 상당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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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가 되어버린 자유인

  '타자녀 교육'이란 말은 어느 근대 종교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 덕목도
식객문화의 기초적인 항목에 해당하며, 공동체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항목도 식객문화와 함께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학사업 정도에 그치고 있다. 즉 이 항목도 현대 사회의 병폐에 직접
도전하는 인간을 기르지 못하고, 현대사회에 알맞은 인간을 기르는 것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식객문화는 한 시대가 자신을 부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다음 시대를 재생산하는
공동체문화다. 즉 그 시대에 잘 맞지 않을지라도 재능있는 사람을 길러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가 바로 식객문화의 본질인 셈이다.
그리고 식객문화에서 재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그런 인재들을 키우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재화를 많이 가진 부자들은 미래시대에 지도적 역할을 맡을
'사'를 중심적으로 키웠다.
  식객을 키우는 사람들은 재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일에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재화의 노예가 아니라 재화를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자들은 재화를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고,
재화를 숭배하며 재화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재화가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재화를 재화답게 쓰기 위해 재화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재화를 모으기 위해 재화를 모을 따름이다. 재화를 모으는 일과
관계없이 재화를 쓰는 경우, 그들은 공동체에 대한 파괴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객문화와 함께 재화의 사용에 대한 문화적 감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재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재화 소유자의
무질서한 마음에 달려 있다.
  신분제도의 파괴와 함께 등장한 자유민주주의는 내면세계를 추구하던 불완전한
인간은 법적으로 자유,평등하게 만드는 대신, 재화를 새로운 주인으로
앉혀놓았다. 이제는 사람이 재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가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내면적 발전을 추구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며, 직업질서를 존중할 필요도
없고, 공동체의 내일을 적극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식객을 키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식객문화가 사라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일이란 없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을 닦아가는 문화는 없다. 가족도 없다. 스스로 부자가 되지 않는
이상 과거의 식객이 누렸던 혜택을 받아 미래의 일꾼이 될 인재는 없다. 물론 어떤
개인이 학자금을 받는 등의 혜택을 입을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이미 식객문화와
본질적으로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즉 그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투자 개념에서 그런
혜택을 받은 것이며, 혜택을 입은 사람은 새로운 세대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을 베푼 이에게 그 대가를 되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객문화'와 함께 그 속에 흐르던 공동체 원리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우리는 작은 사람이다. 이제 우리에게 민족적 기상이니 전통적 인간상이니 하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공염불이 아니 되려면 식객문화를 다시 키우고
공동체문화를 꽃피워야 한다. 작은 겨레를 벗어나려는 소망이 진지하다면, 부활된
식객문화 속에서 그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21. 작은 겨레를 고백하는 까닭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일

  작은 겨레를 고백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답답한 일로서,
때로 삶의 의욕을 줄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관론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는 앞에서 우리 겨레가 작아진 역사적 사건들과 우리 역사를 뒤틀리게 만든
역사적 관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독일의 거리를 짓밟고 지나갈 때, 독일의 많은
젊은이들이 비참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거리로 뛰쳐나와 고함을 지르며 돌팔매를
휘둘렀다. 그러나 한 청년은 그의 다락방에서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낡은
문헌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뒷날 독일 관념론을 집대성하여
유럽정신의 탯줄이 된 헤겔이다. 그는 조국의 현실을 비참함과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독일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옛 정신세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마침내 '유럽정신'을 밝혔고, 나아가 '작은 독일'이 '큰 독일'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초석을 닦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작은 겨레를 고백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작은 겨레를 고백하는 것이 비관론과 패배주의를 부추긴다고 보지 않으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조상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우리 처지를 비관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오늘날 우리 겨레가 놓여
있는 좌표를 바르게 읽어내어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설계도를 짜보려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훌륭한 설계도가 나올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잘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일까지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겨레의 역사를 되짚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역사는 참으로 흠집투성이다. 차마 글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았기에, 갈등이 일기도 했다. 어쩌면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덮어두기를 바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를 앞장서서 외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을 집필하는 기간이 길어진 데는 아마 그런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역사고백은 이제 우리들에게 너무나 절실하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좌절하고 충분히 비관하여 충분히 비참해질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좌절이
패배주의를 낳는 것은 그 속에서 큰 믿음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탓이며, 비관이
의욕상실로 이어지는 것은 그 속에서 큰 의심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탓이고,
비참함이 굴욕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속에서 큰 분노를 일으키지 못한 탓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고백은 결코 패배주의나 의욕상실이나 굴욕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고백에는 이미 그런 것을 넘어설 대안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작은 겨레를 고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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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눈은 작은 세계를 본다

  작은 겨레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먼저 우리
겨레가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보잘것없이 누렸던가 하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 작아진 실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실제
사건들에 대한 선택은 매우 제한되었으며,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까지 같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역사고백의 길눈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앞에서 살펴본 주제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측면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주제는 우리의 비뚤어진 역사관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치우와 왕검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뿌리를 밝힌 첫 번째 주제와 기자를 빌미삼아
단일민족 사관의 편협함을 밝힌 두 번째 주제가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첫 번째 주제를 통해서 역사의 뿌리가 오늘날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야기하려고 했다. '탄생기와 성장기가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으며, 배꼽 없는 역사를 가진 겨레가 어찌 제대로 커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겨레의 알을 잃어버린 채 끊임없이 작아져 온 것은 뿌리를 잃어버린 겨레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터져나온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그리고 이 울부짖음은 좌절이나 비참함에 빠질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희망을
되찾아야 한다는 호소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을 일러 흔히 세계화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계화의 필수적인
앞단계로서 문화권을 바탕으로 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두 번째
주제는 바로 그런 관점에서 우리들의 미래를 과거 역사, 특히 기자시대의 역사
속에서 설계해보려는 것이었다. '단일민족의 좁은 울타리를 깨고, 함께 고조선의
구성원이었으며 문화와 혈통 등에서 비슷한 전통을 가진 기마종족 형제들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보자'는 것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더듬어본 우리의 자주적 역사구도였다. 그리고 이 구도는 서구문화의 홍수에
휩쓸리고 중국문화의 잔재에 매달리며 일본 문화의 독침에 허덕이느라 얼이
빠져버린 서글픈 세계화 구도에 대한 도전장이며, 큰 우리를 모르고 작은 우리만
아는 편협한 단일민족 사관에 대한 엄중한 경고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면서 찰나라도 잊지 못한 점은 우리 문화의 특징이
다투거나 억누르는 데 있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우리 문화의 정통이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우리들의 현실은 분명 밝지 않다. 어떤 이는 아무런 대안이나 근거도 없이 우리의
현실이 밝다고 하거나, 최소한 우리의 현실이 동트기 직전의 어둠 정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벽은 그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들의 몫이다. 스스로
빛을 밝히지 않으면 어둠은 언제까지든 계속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적
뿌리가 바로 어둠을 밝히는 참된 횃불이 되리라고 믿으며, 이 횃불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높이 솟았음을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횃불의 정체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밝혀서 우리들의 '역사숙제'로 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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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지는 문화, 작아지는 영토

  삼국시대로부터 나진남북국시대를 살피는 과정에서 등장한 주제들은 다섯
가지였다. 먼저 우리는 세계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기나긴 삼국분열의 시대를
살피면서, 그 시대가 겨레 문화의 체계화 시기임을 밝히려고 했다. 즉
'하늘사상'이라고 표현한 겨레 문화가 어떻게 성숙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 삼국을 비교하기도 하고, 오행사상과 같은 이론적 요소도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 주제를 살피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이 시대가 고조선의
발전적 복원을 위한 '기마종족 내부 재편성기'였다는 관점이다. 고구려와 신라 및
백제를 기본축으로 경쟁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키고 기마종족연맹체의 영역을
확장해갔던 것을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길었던 분열의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외래문화의 수입과 문화
주체성의 변질이었다. 두 번째 주제인 제4장은 바로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주제 속에서, 수입문화(특히 불교문화)와 전통문화의 지나친 대립을
고구려의 비극과 연결시킬 수 있었으며, 수입문화가 전통문화를 대체해버린 현상을
백제의 비극과 연결시킬 수 있었고,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수입문화를 소화해낸
저력에서 신라의 생존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불안정한 문화대립이나 지나치게 안정된(따라서 침체된) 독점문화가 역사발전의
독소가 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지나친
중앙집중화는 결국 겨레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장애물이 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에게 무너진 것은 문화적 관점에서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것은 겨레 역사의 또 다른 비극과 연결되었다. 삼국 사이의 경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먼저 겨레 영토를 좁혀놓았으며, 나아가 고구려와 백제의 주민이었던 여러
기마종족을 겨레 역사의 변두리로 내어쫓았던 것이다. 세 번째 주제인 제5장은 바로
그런 이중적 관점에서 남조신라의 등장과정을 평가하려고 했다.
  겨레 영토는 뭍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륙과 반도를 연결시키는 주요한 교통로이며
영토적 안정을 보장해주는 해상지배권도 영토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작은 승리에 도취한 남조신라는 해상 지배권을 지키고 가꾸기는커녕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독자성을 추구하는 장보고의 해상세력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네 번째 주제인 제6장은 그런 관점에서 해상지배권의 중국
한족에게 넘어가는 비극을 되짚어본 것이다.
  삼국 사이의 경쟁은 신라의 불완전한 승리로 매듭지어졌으며, 그 결과 새로운
경쟁구도가 등장했다. 신라의 세력이 대동강을 넘지 못하자 그 북쪽에서 고구려의
옛 주민들이 대진국(발해)을 세웠고, 마침내 대진국은 고구려의 옛땅을 어느 정도
되찾음으로써,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대진국이 대립하면서 고조선의 발전적 부활을
위한 제2차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진남북국시대였다.
  그러나 대진국도 결국 백제와 같은 문화적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권력의
지나친 중앙집권화, 수입문화(불교문화)에 의한 전통문화의 대체, 나아가 형제종족
사이의 지나친 적대감 조장 등이 대진국의 운명을 낭떠러지로 몰고 갔다. 그 결과
대진국은 같은 기마종족의 한 갈래였던 거란 겨레의 손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진국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조 신라도 마찬가지여서 마침내 새로운 왕조인
고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던 바, 제7장은 바로 그런 과정을 다루고 있었다.
  어쨌든 삼국시대에서 나진남북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는 우리 겨레들이 문화적으로
성숙해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해상지배권을 중국 한족에게 빼앗긴 것도 결국 이
시기의 일이었으며, 대륙지배권을 놓고 벌여온 중국 한족과의 대립에서 수세로 몰린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는 한편 문화적 성숙기였으며, 다른
한편 영토적 축소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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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민족이라는 역사적 실험

  대진국의 멸망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진국의 멸망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공존을 지탱하던 문화권의 분열과 해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거란 겨레가 요나라를 세우고 대진국을 대신해 동아시아 기마종족을
이끌면서부터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문화권은 심각하게 해체되어 각 종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대진국의 멸망 자체가 그런 현상의 주된 동기는
아니었다. 남조신라를 대신한 고려왕조가 오히려 그런 동기를 제공했다. 대진국이
무너지자 고려왕조는 거란 겨레를 비롯한 요나라의 구성원들을 철저하게
적대하면서, 동아시아 기마종족 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역사적 행로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순수한 단일민족의 역사라는 관념도
바로 이때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다.
  고려시대를 살펴보면서 고려장성을 첫 번째 주제로 삼은 것도 그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바로 우리 겨레와 다른
기마종족을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갈라놓기 위해 쌓았던 것이며, 실제로
고려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그런 경계선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고려시대가
비록 전통문화와 유교문화 및 불교문화의 공존에 의해 유지되는 왕조였다고 하지만,
천리장성이 쌓이는 순간부터 기마종족의 전통문화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왕조는 중국으로부터 과거제도를 도입해서 유교문화를 실용적
통치이념으로 삼는 데 주력했으며, 불교문화를 종교적 통치이념으로 삼으려고 했다.
즉 전통문화의 실용적 측면은 이제 유교문화에 의해 밀려나거나 변질되기
시작했으며, 전통문화의 종교적 측면은 불교문화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통사상을 밀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유교문화였다.
과거제도를 기반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유교문화는 고려왕조를 체계화하는 데도
중요하게 기여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사회적 획일성이라는 고질병을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를 다루면서 과거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사실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기마종족 사이의 공생공존을 거부하고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중국 한족과 손을
잡고 준독자적 문화를 내세웠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치원이나 도선 등의 계통을 이은 전통문화 중심의 문화통합론자들이
자주적 입장에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침내 그들에 의해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묘청의 고려 재건국운동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다시 검토한 주제이다.
  문화통합론자들은 비록 내전에서 실패했지만, 그들의 정당한 요구는 고려왕조의
후반기를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전통문화 중심의
자주적 문화통합론이 고려 후기를 뒤흔들면서, 그 시기를 우리 역사의 문화부흥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지식인들은 독자적으로 문화부흥 활동에 참여했으며, 어떤
지식인들은 정치적 뿌리가 약했던 무인정권과 손잡기도 했고, 다른 어떤 지식인들은
문화적 뿌리가 비슷한 몽고제국의 보호막 아래서 그런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르네상스는 실패하고 말았다. 전통문화 중심의 자주적
통합문화가 발돋움하기도 전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이 들어와 고려 르네상스를
강제로 중단시켜버렸던 것이다. 특히 일부 야심가들에 의해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성리학이 그들의 통치이념이 됨으로 말미암아 문화부흥운동은 표면적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의 이런 문화적 경향은 뒷날을 기다려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를 살펴보면서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와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을 각각 작은 겨레의 중요한 까닭으로 꼽은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우리 겨레가 일부 세력에 의해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커다란
문화권에서 벗어나 단일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기 시작한 시대였으며, 그 울타리
속에서 겨레 문화의 중심축을 놓고 전통문화와 수입문화가 한편 경쟁하고 한편
공존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비록 실패했지만, 그런 경쟁과 공존 속에서 통합문화를
내놓기 위해 문화부흥기를 이루어낸 시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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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조선과 문화적 뒤틀림

  이성계 일파가 친중국적 성리학파의 후원을 받으면서 조선왕조를 세우자, 문화적
자주성은 '작은 중국'이란 구호에 휩쓸려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통치세력은 '작은 중국'과 '성리학 문화'를 굳히기 위해 다른 사상과 문화를 힘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적 업적에 대한 탄압은
문화말살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들은 전통문화에 바탕을 둔 자주적 입장의 역사서와 사상서적을 금서목록에
올려 탄압했을 뿐 아니라, 먹고 입는 일상생활 부분에서도 전통문화의 색채를
지우려고 했다. 기마종족의 강건한 기상을 순화시켰으며, 그 대신 복종을 강요했다.
  이런 굴레는 너무나 강력해서 조선왕조의 군주들조차 그 굴레를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주된 탄압의 대상이 아니었던 불교조차 관료들의 반대로 편하게 신앙할
수 없었으니, 문화적 자주성을 내세우고 탈중국화를 지향하며 기마종족의
문화권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조선왕조의 가장 뛰어난 군주였던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높이 평가된다. 그것은 세종이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라는 원칙과
타협하면서 이루어낸 최대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사실상 우리 겨레의 옛
문자를 재정리한 것으로서 문화적 자주성을 상징하지만, 그런 자주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겨레글을 재정리했다는 것은 분명 자주적이지만, 타협을 통해 이루어낸
자주성은 결국 성리학을 널리 알리는 문화통치의 도구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자주성은 없더라도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신선함이 유지되는 동안 조선왕조의
통치기반은 굳건했다. 몇 차례의 사화를 통해 길재에서 김종직과 조광조 등을 거쳐
이황에 이르는 성리학파의 정통이 수립되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파의 정통이
수립되는 순간, 성리학파는 이리저리 분열되어 타락함으로써 자신들이 수립한
정통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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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모색과 시련

  자주적 역량을 중시하지 않던 그들의 통치가 타락으로 치닫자, 우리 겨레의
백성들은 굶주림과 문화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성리학 통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이웃나라들의 침입이었다. 일본이 쳐들어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여진족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종족통합을 이루어내면서 대륙을 넘보던 청나라(처음엔 금나라)의 종족연합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두 차례나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왕조를 뒤흔들었고, 이에 따라 비자주적 성리학 통치에 반대하는
자주적 경향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실학파'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고려
르네상스 시기의 업적을 계승하려 했으며, 조심스럽게 '작은 중국'과 '성리학 통치'에
맞서 전통문화에 입각한 현실개혁을 주장했다. 조선왕조 후기의 가장 뛰어난 군주인
정조도 이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백성들도 차츰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참으로 2세기가 넘게 진행된 거대한 문화 뒤틀림이 바로잡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리학 통치를 내세우는 낡은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통치방법을 통해 낡은 비자주적 문화를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저항도
훨씬 더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단을 조직해서 통치질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런 극단적 대립과정에서 이른바 대원군 정권이 들어섰다. '탈중국'과 '자주적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실학파 출신이었던 대원군
이하응은 왕권 강화를 빌미로 두 세력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면서, 성리학파의
점진적인 축출을 시도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이 땅에 불어닥친 또 다른 문명이
그의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더 이상 외줄타기가 어렵도록 만들었다. 쇄국정책을
선택했던 그는 개항론을 악용한 일부 통치배들의 공격을 받아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자주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이 땅에 서구 문화가 파도 치듯
밀려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시련이 시작되었다.
  자주적 준비기간을 거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이웃나라 일본은 이 나라를
자신들이 식민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우리 겨레의 자주적
전통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들이 겨레의 뿌리를 뒤흔들고 지나간 뒤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작아진 영토마저 반으로 갈라놓고, 내부대립을 이용해서 남과
북 모두를 자신들의 문화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우리는 말과 문화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를 내세우는 우리들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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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새로운 좌표를 모색할 때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제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비자주적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정치,
경제, 문화적 종속성은 더욱 깊어진 나라,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저버린 나라, 전통문화를 찾는다 하면서 오히려 전통문화를 짓밟아버릴
정도로 뒤틀어진 겨레, 전인교육을 한다 하면서 자주적 전통을 찾지 않고 서양
교육의 틀을 고집하는 뿌리 빠진 나라, 얼빠진 개방을 세계화라고 주장하는 뿌리
모르는 지도자가 설치는 나라, 제 나라 말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겨레, 사람을
화폐가치나 상품가치로만 판단하는 국적불명의 문화, 이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이
빠르게 파괴되는 땅,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 문화의 주소인 것이다.
  나라옷을 입고 다니면 괴짜가 되며, 나라말을 찾아 쓰면 고리타분한 퇴물이 되고,
전통적 방식에 따라 몸과 마음을 닦을라치면 사회낙오자나 도피자가 되며, 청렴하게
살려는 이는 무능력자가 되기 일쑤다. 옛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일은
천직으로 알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은 부동산과 유흥업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얼빠진 사람의 놀림감이 되며, 공동체 원리에 따라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안락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우리다운 우리 역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알맹이가 빠진 과거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조차 우리 문화의 관점이 아닌 다른 문화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거짓 투성이의
역사, 사료와 사료를 짜기워서 엮은 생명 없는 역사, 편견으로 가득 찬 눈에서
한쪽만 다루어진 역사, 미래를 설계할 안목을 보여주지 못하는 무용지물의 역사,
이제 이런 역사는 마땅히 새로 쓰여야 한다.
  역사는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는 재미있는 지식놀음이 아니다. 역사는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창고이며, 현실생활의 절대적 지표이고, 미래를 위한
최고의 설계도다. 그런 뜻에서 역사는 살아 있는 것이며, 죽은 것이 아니다.
  틀이 제대로 짜여진 생명체가 온전하듯, 역사도 먼저 큰 틀을 제대로 짜야 한다.
누가 우리이며 그 가운데 보다 가까운 우리는 누구인지도 밝혀야 하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우리 문화의 관점에서 밝혀내야 한다. 앞서 여러 번
말했듯이 단일민족이라는 테두리를 극복하고 우리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은 그
가운데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역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치경제적 식민지를
겪은 뒤 문화적 자주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적 미래 설계도를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의 문화에 마냥 취해서 세계로 나아가려고만 한다. 이른바
선진 열강이 갔던 길을 따라 그들을 본받으려고만 한다. 일정한 양이 축적되어야
질적 변환이 일어나듯, 세계화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라 것이 충분히 축적되어야
그 폭발의 힘으로써 세계무대의 자주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매우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현주소를 고백할 저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미래는 매우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런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