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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담론*행복론/인생행로*나침반

정보화 경쟁시대와 인간

by 바로요거 2007. 9. 4.

정보화 경쟁시대와 인간/리영희 - 전 한양대 교수

나는 가끔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물질문명이 지금 이 정도에서 그 발달을 멈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막연한 직감적 판단이기는 하지만, 과학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도왔거나 도울 수 있는 긍정적이면서 진보적인 기능의 한계를 지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과학과 기술을 직분으로 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그런 생각을 일축하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은 반드시 비과학도이거나 반과학적인 정신주의자가 염려하는 미래의 세계관만도 아닐 성싶다.
고전적 이야기로는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과학자가 떠오른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인간의 `자연정복`에 크게 기여한 노벨이,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무기의 주성분으로써 가공할 `생명, 인간파괴`의 수단이 된 것을 후회하여 인류의 평화를 희구하는 속죄의 표시로 창설한 것이 `노벨 평화상`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퀴리의 방사성 물질의 발견으로 시작되는 뢴트겐 이래의 과학지식이 인간의 병을 치료하고 물질의 성질을 밝히는 데 기여한 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그런데 그 지식과 기술의 발달선상에 출현한 원자탄과 핵무기는 인간과 인류의 행복을 수십년 동안 위협해왔다. 앞으로 언제 사라질지 기약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인간지식(과학)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할까?
몇해 전에 세상을 떠난 브라운 박사가 그의 만년에 술회한 글을 읽으면서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일이 있다. 브라운 박사의 말은 이러했다. "과학자로서의 나의 일생의 업적 가운데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이 브라운관(管)의 발명이다. 브라운관이 텔레비젼을 낳고, 그 텔레비젼이라는 과학의 산물이 지구상 인간의 총체적 백치화와 저질문화를 초래하는 현상을 보면서 나는 서러워진다."
다이너마이트와 핵물질과 브라운관의 발명자들의 말은 물론 진실의 일면을 강조한 것이다. 원시로의 회귀를 제창한 것은 물론 아니다. 반과학적 선언도 아니다. 어차피 과학과 기술의 본성은 인간의 가치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그런 속성의 과학과 기술, 통틀어 인간의 지식이 인간의 가치관과 마찰하게 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이고 인간이성의 한계성임을 난들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인간관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인간이란 어떤 특성으로서 예정된 존재가 아니다. 자기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형성해나간다는 말은 옳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되려고 결심하는 그것이 된다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이성이라는 길잡이의 안내로 인간으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뇌가 발명한 과학-기술적 결과도 완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인간이성`의 승리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다이너마이트는 토목공사에만 쓰여서 인류의 축복으로 찬양됐을 것이고, 방사성 물질도 핵무기로 둔갑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의 머리 위에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브라운관 또한, 인간에게서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아, 오로지 텔레비젼 브라운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을 무엇이든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고정지증(思考停止症)` 환자들만을 대량생산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인간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최근에는 또 다른 과학-기술의 괴물이 겁나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컴퓨터라는 이름의 인간두뇌의 대행물과 그것들이 인류와 우주를 얽어매는 `정보화시대`라는 미래상이다. 이건 정말 겁나는 사태이다. 그 모습을 보면 볼수록, 어마어마한 크기와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마치 `어둑서니` 같다.
내가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자란 평안북도라는 이 나라의 북쪽지방에는 어둑서니라는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남한이 고향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하자면, 북한에서 출판된《현대조선말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둑서니 ― 일종의 어둑귀신으로서,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잘못 보이는 물체나 헛것"
나의 북쪽나라 고향에 사는 어둑서니는, 나같은 어린이들이 (밤길을 걷다가) 땅 위를 내려다볼 때, 처음에는 달걀만한 작은 크기인데, 무서워서 눈을 올려보기 시작하면 점점 커지고 겁에 질려서 하늘을 바라보면 그 크기가 하늘 전체를 시커멓게 덮을 만큼 무서운 형상이 되어 나의 뒤를 쫓아오곤 했다. 나는 70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삭주군 대관동(朔州郡 大館洞)이라는 작은 면 마을에서 밤길을 가다가 이 어둑서니를 만나 겁에 질려서 캄캄한 밤거리를 죽어라고 도망치는 소년의 꿈을 꾼다.
21세기의 인류를 지배한다는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분비물 작용의 결과적 산물이지만 거꾸로 인간두뇌를 앞지르는 지능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지배와 관리를 벗어나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어 마음대로 걷고, 커지고, 움직이게 된다고들 야단이다. 이건 틀림없이 60여년 전에 이북의 고향마을 밤길에서 나를 겁주던 어둑서니의 21세기형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얼마나 더 크고 얼마나 더 무서울까?
그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인간의 이성의 극치라고 찬양되고 있다. 인간이 못하는 일을 더 빨리, 더 정교하게, 더 많이,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더 아름답게 또는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완벽하게 ? 해치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마스터(상전)였던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혼자 행동하고 혼자서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이건 내일의 것이면, 미래의 것이면, 한결같이 장미꽃빛으로 보인다는 선천적 색맹환자인 소위 `미래학` 학자들은 두 손 들어 컴퓨터와 `정보화시대`의 21세기를 찬양하고 있다. `축복의 21세기론`이다.
20세기 말의 오늘을 굶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수천만 수억 인간도 몇해 뒤에 찾아오는 21세기에는 무소불위의 과학-기술과 정보화의 힘으로 배불리 먹고, 오늘의 문명사회 같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꿈같은 이야기라구?" 이런 의문에 대해 과학-기술만능주의 신봉자들은 한마디로 답한다. "인간이성의 승리의 21세기가 온다!" "만능적 과학-기술, 정보화시대는 그것을 보증한다." "정보화시대 만세! 만만세!"
오늘 저녁에도 텔레비젼의 뉴스와 해설과 상품광고 시간에 또 정보화시대의 찬송가를 들었다. 요컨대 미국의 무슨 컴퓨터 제작회사와 일본의 정보통신 과학자들이 함께 놀랍고도 놀라운 `정보과학의 꿈`을 실현하는 장치와 시스템을 개발한다는 소식이다. 이 장치만 갖추면 지구상의 어디에 사는 누구나, 집안에 앉아서 그 장치의 단추만 누르면 프랑스 파리의 샹제리제가에 있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라칸티나 여자의상 패션쇼에서 어제 처음으로 선보인 최첨단 유행의 `누벨 모드` 의상을 오늘 저녁에 배달 받아서 입고 파티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무주구천동이라는 시골에서 이 장치의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한국에 앉아서, 한국여성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세계 최신유행 의상을 입고 서울의 사교장에 나갈 수 있는" 경이로운 문명의 이기가 결코 멀지 않은 장래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지정된 단추만 누르면 그 백화점 상품을 고르고, 가격흥정이 이루어지고, 주문계약이 성립되고, 국제금융 카드번호를 입력하면 가격의 국제적 청산이 이루어진다. 그 순간에 그 의상은 포장되고, 항공우주학, 기체역학, 재료공학, 고분자화학 등의 새 이론으로 개발된 대륙간 탄도탄 같은 `로케트식 수송기`에 실려서, 한시간 내에 한국에 운반된다. 버튼을 누른 후 몇시간 이내에 당신 집의 현관에 배달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기적이 아니고 뭣인가! 21세기 정보화시대의 인류의 행복을 그린 가까운 미래상이라고 한다.
나는 일제시대의 중학(고등)교도 해방 후의 대학도 이공학을 공부한 사람이어서 과학과 기술의 일반개념 정도에는 생소하지 않은 형편이다. 순수 인문학이나 예능, 사회과학 분야 등의 지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보다는 `정보화시대`의 미래상이라는 것이 환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이해는 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정보화시대의 예찬론자들의 찬송가를 들으면서 언제나 그런 미래상에 겁을 먹는 까닭은 인간이성(지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이성의 한계라고 할까.
인간은 개인 단위로는 퍽 이성적인 동물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위기에 직면하거나 변화를 대했을 때, 이것을 해결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주의 원리와 법칙을 꿰뚫어 보고, 그것들을 인간(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이용하는 과학과 기술을 창제해내왔다. 다이너마이트와 텔레비젼과 핵폭탄, 핵미사일이 그렇듯이. 자본가들의 자본을 들여 개발된 새 과학-기술은 으례 먼저 사람을 죽이는 새로운 무기로 군사화되기 마련이다. 무기산업은 자본의 이윤극대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복제인간` 기술로서 인간의 총체적 파멸을 자초한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성의 한계인 것 같다. 인간들이 모여서 조직화된 집단적 존재로서는 전혀 이성과는 동떨어진 비이성적 사고와 행동을 하기에 말이다.
민족, 교회, 계급, 체제, 정권, 국가 ? 등으로 집단화된 인간들은 차라리 반이성적 존재인 것만 같아 보인다. 이성을 믿는다는 서양에서 종교의 이름을 빈 십자군의 `성스러운 대학살`로부터 쉴새없이 반복된 (종교)전쟁. 드디어는 가장 과학-기술사상의 숭배자였던 독일민족 나치 히틀러체제의 인류말살 철학, 행위가 그것을 대표한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과학과 기술을 달구어 만든,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무기로 무장한 기독교와 민주주의와 이성의 나라라는 미국이 지구상의 약소국을 닥치는 대로 짓부수고 돌아다니는 것이 그 으뜸이다.
인간두뇌보다 앞섰다는 컴퓨터와 그것들을 엮어서 이룩됐다는 `문명의 꽃` 정보통신 시스템의 예측능력과 해결답안 제시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의 터전인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중병을 앓고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인류의 유일한 생존환경은 `인간이성`에 의해서 죽음을 강요당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생사결단의 보복을 시작한지 오래이다. 인간과 자연의 전쟁이다.
나는 그래서 가끔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물질문명이 지금 이 정도에서 그 발달을 멈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구상에는 마음놓고 마실 물은 고사하고, 안심하고 손 발을 담글 수 있는 물도 한 방울 남지 않았다. 남 북극지대의 공기를 통조림으로 해서 수만리를 비행기로 날라다가 파는 공기장사가 성행하여 떼부자가 되고 있다고 한다. 웃기에는 너무나 서글픈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과학, 기술, 물질 만능주의자들도 앞으로 이 통조림 공기를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할 상황이 머지않아 닥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주유소에서 1리터에 650원 하는 휘발유를 넣고 나오는 길에, 같은 양의 물(생수)을 1,000원에 사들었을 때, 머릿속의 모든 판단체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곤 한다. 인간에게 천대받는 자연이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웃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집에서 변소를 사용할 때, 소변을 두번 누고서 물을 흘려보낸다. 비교적 오줌을 자주 누는 체질인 까닭에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나는 100그램의 오줌을 흘려내보내기 위해서 그 200배나 되는 20리터의 수돗물을 버려야 하는 문명, 문화생활의 `이성`에 아직도 익숙치 못해서이다. 그 20리터의 수돗물은 70킬로미터 떨어진 팔당에 있는 수도 정수장에서 비싼 돈을 들여 여러 날을 두고 처리된 뒤에, 군포시 산본에 있는 나의 아파트까지 막대한 공사비를 들인 급수망을 거쳐서 공급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가격계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의 `은혜`인 물을 그렇게 낭비하는 오늘날의 소위 문화생활은 차라리 범죄가 아닐까. 자본주의적 대량소비 문화양식은 그 본질에서나 그 결과로서나 반(反)생명적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이윤극대화를 운영원리로 하는 자본주의적 지구자원의 대량파괴는 인간성의 황폐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정보화시대`에는 인간이 정보홍수에 빠져 죽는다는 말도 들린다. 정보가 희소가치였던 시대와는 반대로 무정부적으로 생산, 유통, 공급되는 정보의 홍수가 인간이성을 혼란 또는 마비시키고, 인간의 소중한 내면적 평화를 파괴할 것이라는 전문가 자신들의 심각한 우려의 소리가 크다. 어쨌든 누구도 단언하기는 어려운 엄청난 물질문명의 변화이다.
`정보화`란 자본주의 논리에서 또 다른 형태와 방법으로서의 `시장운영수단`이다. 과거에는 상품생산의 구상에서 설계, 투자, 생산, 유통, 소비, 재투자, 생산 ? 의 끊임없는 반복과정에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두뇌를 컴퓨터가 대신한 이른바 `21세기 정보화시대`에는 그 시장(자본주의)경제의 시간을 `순간`으로 환원하고, 공간을 하나의 기하학적 최소단위인 `점(点)`으로 축소함으로써 물질적 생산과 소비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파리 패션쇼의 최신유행 의상을 지구 어디에서나 몇시간 내에 보고, 고르고, 흥정하여, 사고, 날라서 입고 파티에 나갈 수 있다는, 무제한적 `빨리 빨리!`의 자본주의 시장문화의 `생활화`이다. 그 문명은 당연히 `빨리!`와 병행해서 필요치도 않은 상품들까지 `더 많이, 더 많이` 생산하고 `인위적 유행`을 조작해내고, 소비하고 파괴하는 `낭비주의` 문화를 궁극적 목표로 한다. 더 빨리 생산하여 더 많이 소비하는 문명은 지구가 내장하고 있는 물질의 `더 빠르고 더 많은` 수탈과 파괴로써만 가능하다. 아무리 물질주의적 과학-기술 숭배자들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런 인간능력은 바로 `신(神)`(이 있다면)의 초월적 권능을 부정하는 행위이니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종합적 혜택으로 열시간에 가던 공간이 다섯시간의 공간으로 축소된 나머지의 다섯시간을 무엇에 어떻게 쓰려 하는가? 일상생활이 모든 소요시간을 영(零 ― 제로)으로 단축시킨 정보화시대의 혜택으로 얼마나 행복해졌(진)다는 것일까?
우리가 정보화시대의 덕으로 예전에 몰랐던 수천만 수억만가지의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의 질은 얼마나 풍요해지는 것일까? 과학과 인간행복이 정비례하는 단계를 넘는 것은 아닐까?
몰랐던 사실(지식)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은 정보를 남보다 더 빨리 갖게 된 사람은 21세기의 `무한경쟁시대`에 남보다 앞서 가고, 남보다 부자가 되고, 남보다 성공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경쟁지상주의적 심성(心性)`이 모든 인간에 일반화할 `정보화시대형` 인간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놈이 나의 경쟁자이구나! 저놈도 경쟁의 상대이구나! 아침부터 밤까지 만나는 인간들이 온통 나를 앞지르려는 흉악한 경쟁자이구나!" 나는 이런 세상에서는 한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정보화시대형 인간!` 나는 그 얼굴에서 인간적 정을 느끼는 작은 미소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것만 같다. 인간과 인간, 이웃과 이웃 사이의 존재양식이 오로지 경쟁으로 규정되는 사회, 제도, 체제 ? ! 이것은 나처럼 "좀 쉬엄 쉬엄 가면 어쩌냐!", "홀로 생각하는 시간도 귀하다"는 사람에게는 겁나는 세상이다. 그리고 잡다한 지식과 정보의 양에 대해서 큰 경외심을 갖지 않는 나같은 사람은 평생 낙오자가 아니면 고작 `열등생`밖에 삶의 자리가 없을 성싶다.
지구상의 50억 100억의 인간들이 `끝없는 경쟁`의 경주장에 들어서서 서로 밟히고 쓰러질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쉴 사이도 없이, `성공`과 `돈`이 기다리는 종착점을 향해서 일생을 달려야만 하는 정보화시대! 21세기의 그 모든 인간들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거친 숨소리가 나의 귀에는 벌써 들려온다. 나는 그 끝없이 이어진 경주의 대열의 맨 끝에서 따라가고 있다. 그 내가 눈에 보인다. 쓰러질듯 말듯, 헐떡거리면서 따라가고 있다. 결국 나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런 경쟁만의 세상에서 죽도록 달려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에서 평화를 찾음만 못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낙오자로서, 패배자로서!
인간의 이기심에 호소하고 이기심의 충족에 궁극적 목표를 둔 경쟁원리의 자본주의가 맑스사상과 사회주의를 20세기 말에 상실한 시대변화는 자본주의 문명과 문화를 위해서 차라리 불행한 일이다. 사회주의라는 경쟁자가 사라진 상태를 경박한 사상가들은 `역사의 종언`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체질적인 제도적 질병에 대해서 맑시즘과 쏘셜리즘은 일종의 강력한 `항생제`의 역할을 해왔다. 염증을 일으키고 화농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마이신의 기능을 해온 것이다. 자본주의적 물질문명과 그 문화양식의 내재적 모순들이 그 모체의 죽음으로까지 중태화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치료제의 역할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맑스철학 사상과 사회주의라는 마이신이었던 것이다.
이제 `승리한` 자본주의는 앞으로 새로운 마이신을 제도 밖에서 발견하거나 제도 내에서 창출해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형태일까? 이기심과 무한경쟁과 정보의 홍수가 그 대안일 수가 있을까? 나에게는 위태로워 보이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면 종교는 어떤가?
종교도 물신숭배적, 자본주의적, 이기주의적, 무한경쟁적 정보화시대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는 무력함이 입증됐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신, 구교) 내부에서 그렇다. 기독교 신도는 서양 어느 나라에서나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다. 성직자 지망자도 신도의 감소와 병행해서, 오히려 더 큰 비율로 줄고 있다. 사제와 목사가 없는 교회, 신도라야 일요일에 십여명의 노인들이 왔다 가는, 텅빈 대가람이 수두룩한 것이 종교계의 실상이다. 기성 종교들의 위선, 부패, 타락, 상업주의적 기업화 ? 가 `집단적 인간사랑`을 병적 형태로 실천하는 사교, 사이비종교의 창궐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2년, 세계 160개국의 기독교(신, 구교)교회 전체에서 신자 수로서 가장 큰 50대교회 가운데 23개가 남한(한국)의 교회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뿐이 아니다. 한국의 교회가 `세계 50대교회`의 제1, 2위를 비롯, 7, 10, 11, 12, 13, 15, 16위 등, 23개가 남한 사회의 `기독교화`를 입증한다.(《크리스쳔 월드》, 1992년 3월) 남한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떤 사회이며 그 국가는 얼마나 타락하고 범죄적인 어떤 국가인가? 이 통계적 사실은 바람직한 인간적 사회와 종교가 얼마나 무관(오히려 반대)한가를 말해주지 않는가?
바로 며칠 전(1997년 3월), 미국에서 일어난 `천국의 문` 신도들 37명의 질서정연하고 `평화스러운(?)` 집단자살이 그 좋은 증거이다. 그들은 모두가 무한경쟁시대의 영웅이라 할 컴퓨터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 21세기의 과학-기술문명의 꽃이라 할 그들이 컴퓨터화된 인간 존재양식에 목숨으로 반항한 것이다. 몇해 전 일본에서 일어나 세계의 인류를 소름을 끼치게 했던 종교집단 `옴 진리교`의 무차별적 대량학살 시도 역시 그렇다. 그 범행을 구상하고 실천한 `옴 진리교`의 간부들과 신도들은 모두가 일본이라는 과학-기술 숭배사회의 명문대학의 이공학 전공의 과학도들이었다. 21세기의 물질만능적, 무한경쟁주의적, 과학-기술 숭배적 대량생산, 대량소비적 자본주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인간`의 절망적 몸부림이라고 하면 지나친 혹평일까? 지나친 비관론일까? 그렇기를 바란다.

 

출처:개벽실제상황 http://gaebyeok.jsd.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