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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동이족? 41세 때의 초상화를 볼까요?

by 바로요거 2010. 9. 9.

석가모니는 동이족!! 41세 때의 초상화를 볼까요?

 

 

▲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초상 - 부루나 존자가 생존의 석가모니를 그린 그림이다.

 

석가모니는 벼농사를 짓던 동이족 출신이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 쪽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87~1m90cm정도로 짐작되는 형상이다.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동쪽에서 이동해 온 고리(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기원 =북경근처인 중국 난하지역에 위치)족이라면 당연히 단군조선의 후예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석가의 출생 및 사망 시기는 확실치 않다. 20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기원전 410년에서 400년 무렵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한양대 민희식 교수 등의 주장 -

 

 

석가모니 41세 때의 초상화

 

석가의 제자인 부루나미가 그린 것으로 동이족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석가모니가 우리와 가은 혈족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준환, '하나 되는 한국사', 1992년]

 

▼석가모니 좌상(석굴암 본존불상)

 

 

 

붓다의 가계(家系)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7월호), pp.12-20에 게재된 것이다.

 

 

 

1. 석가족은 어느 종족인가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를 추적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학자나 인도학자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까지 석가족(釋迦族)[1] 이 인도-아리야계 즉, 인도-유럽인의 일족(一族)이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학자들은 석가족이 아리야계로 자신들과 동족이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석가족의 인종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석가족이 비(非)아리야 계통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석가족이 비아리야계 인종이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2]

 

그러면 과연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은 어느 인종에 속하였을까?

조준호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도 유럽인(백인종)이었을까? 몽고 인종(황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드라비다(Dravida)인이나 호주-아시아(Austro-Asia)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러한 인종들간의 혼혈이었을까?"[3]
이러한 네 가지 인종은 인도 아대륙에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 온 주요한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족은 기원전 1,700년경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점차 동남쪽의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을 따라 이동하였던 인도-아리야계의 한 부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석가족이 아리야계라는 단정 아래 고대인도사나 불교사가 서술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저명한 인도사학자 스미스(Vincent A. Smith)씨가 석존은 몽고인종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석가족에 근접하여 살았던 릿차비(Licchavi)족이 티베트의 장례 풍습과 사법절차가 행해졌던 점을 증거로 들어 그 근친 종족인 석가족 또한 아리야계가 아닌 티베트 계통의 몽고계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4]
그러나 당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계에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5]

 

한편 일본의 불교학자 미야사카 유쇼(宮坂宥勝)는 석가족은 비아리야족이며 지리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몽고계 인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붓다의 씨족은 인도에 베다(Veda) 문화를 일으킨 아리야족과는 다른 몽고계의 한 부족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6]

또한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도 석가족은 비아리야 인종이라는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7]

생략..

 

왕의 후예라고 하는 불전 자체의 기록에 따르는 한, 사캬족은 아리야인 계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콜리야족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이 콜리야족도 오스트로-아시아계의 문다어를 사용하는 코르인과 관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8]

 

그리고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9] 그는 이 논문에서 석가족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락카나 숫따(Lakkhana Sutta, 三十二相經)>에 묘사된

 

"그들의(석가족)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았으며, 그들의 피부는 우아하고 부드럽고, 그들의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었다"

 

 

라는 신체적인 특성과 "석가 왕국이 설립되었던 네팔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고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석가족들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말라야 산록 일대로부터 비하르, 벵갈 지방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버마 인종의 제부족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산간 지역에 이 계통의 부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사캬족이 티베트·버마계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12]

 

그러나 사캬족이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캬족은 크샤트리야(Kshatriyas)라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야는 아리야인의 계급으로 사캬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아리야인임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캬족의 사람들 그리고 석존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캬족의 사회는 부계사회로서 모계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사캬족이 아리야계 인물이라고 결론짓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13]

 

이에 대한 반론은 사캬족이 크샤트리야라고 하지만 새로운 부족이 아리야 문화권에 흡수되어 갈 때, 무력과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크샤트리야로 자칭함으로써 아리야화되어 가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으므로, 크샤트리야라고 해서 아리야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14]

 

또한 사캬족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로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인종집단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통의 언어를 쓴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모두 인도-유럽인이 아니고 인도-유럽인 가운데도 드라비다계통의 언어를 쓸 수 있고 드라비다인 가운데도 인도-아리야어를 쓴다는 것입니다.[15]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캬족에 비바라문, 반바라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는 공공연히 부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다적인 제사도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존이 슈라마나(沙門)로 수행을 시작하였던 것도 비바라문적 요소가 강한 동인도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

 

나라 야스아키의 지적에 따르면, "그 후의 불교문화의 발전을 살펴보면 비바라문적 토착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요가의 중시, 사리(유골)숭배, 스투파(탑)숭배, 동물숭배, 지모신(地母神) 계통의 야크샤니(Yaksan, 불전의 夜叉, 藥叉의 여성), 그 남성으로 귀령(鬼靈)의 하나인 야크샤 숭배, 나가(Naga, 뱀, 龍神) 숭배 등이 그러한 것이다. 물론 아리야 계통의 사람들도 이러한 토착문화를 흡수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을 가지고 사캬족이 인종의 계통에 있어 비아리야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캬족, 그리고 석존에서 시작되는 불교가 비아리야적 요소가 농후한 인도의 토착문화적 토양 가운데에서 성립·발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17]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캬족이 아리야인이라는 설의 근거도 박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의 인종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도 불충분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 성과에 의하면 사캬족은 아리야계와 비아리야계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라 야스아키가 말한 것처럼 현재로서는 사캬족이 아리야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 확증적인 증거들이 나타나면 사캬족이 비아리야 계통의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에 관한 기술은 대부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지 밝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사카족은 자기의 종족에 대한 계보(系譜)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왕국이 코살라(Kosala)나 마가다(Magadha)에 비해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18]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석가모니 붓다께서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9] 석존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 탁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탁발 모습을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고 있던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이 그의 뛰어난 용모와 비범하지 않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하를 보내 석존이 머물고 있던 처소를 알아냅니다. 그런 다음 왕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20]

 

"가계(家系)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태생(가문)은 사끼야(Sakiya, 석가족)입니다. 나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내가 기쁨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입니다."[21]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붓다는 분명히 자신의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를 의미함)이고, 가문은 사끼야(Sakiya), 즉 사캬(Sakya)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숫따니빠따>에서는 석존이 '감자왕(甘蔗王, Okkakaraja)의 후예'이고 '석가족의 아들(Sakya putta)'[22]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태양의 후예(Adiccabandhu)'[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딧짜(Adicca)라는 호칭은 좀더 빈번히 쓰이는 수리야(Suriya, 태양)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붓다는 종종 '태양의 후예(Adiccabandhu, 日種族)'로 불렸습니다.[24]

 

또한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의 암밧타-숫따(Ambattha-sutta, 阿摩晝經)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의 형식을 빌어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감자왕)라는 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5]

 

이 전설은 암밧타(Ambattha)라는 바라문 청년이 붓다께 석가족의 비천함에 대하여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석가족의 기원과 옥까까(Okkaka)왕으로부터 청정한 혈통이 유지된 석가족의 기원과 함께 암밧타의 혈통도 같은 왕과 하녀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암밧타여, 만일 너의 이름과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씨족을 생각한다면, 사캬족은 성스럽게 태어났지만, 너는 사캬족의 하녀의 아들이다.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왕이다. 오랜 옛적에 옥까까 왕의 왕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서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옥까무카(Okkamukha), 까라깐다(Karakanda), 핫티니까(Hatthinika), 시니뿌라(Sinipura)를 왕국에서 추방시켰다. 그들은 추방당한 뒤,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Saka) 숲에서[26]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다. 옥까까 왕은 왕자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의 신하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그들은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자 옥까까 왕은 감격적인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왕자들은 진실로 훌륭하다(Sakya). 왕자들은 진실로 가장 훌륭하다.' 그때부터 그들은 사캬족(Sakyas)으로 알려졌으며, 옥까까 왕은 사캬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27]

 

이것은 완성된 전설 중의 일부이며,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와 티베트 율장 및 팔리 주석서 등의 여러 곳에 실려 있습니다. 특히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주석서에서는 옥까까 왕 이전의 계보 등이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설, 즉 "첫 번째 사카족으로부터 왕들의 가계는 마하바스뚜와 티베트 문헌 및 팔리 연대기들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서로 너무나 다르다. 이것은 한 계통의 가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년대기에 있는 명단들은 자따까(Jataka, 本生譚)에 나타나는 여러 왕들처럼 대부분 분명히 인위적으로 끼워 넣은 것들이다?[28]라고 에드워드 토마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우스뵐(Fausboll)은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라마야나(Ramayana) 설화와 그 변형된 것이 자따까(본생담)에서도 발견된다고 지적했습니다.[29]

 

지금까지 살펴본 사캬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 붓다의 씨족은 아딧짜(Adicca)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카족이 아리야계의 태양씨족(太陽氏族)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0]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근거로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임을 증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1]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Comment]

- 석가모니 부처님은 샤가족이 아니라 코리(kori, 稿離)족 출신으로 한민족과 같은 동방족 계열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코리족은 동쪽에서 이동해 왔으며, 몽골리안 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稿離)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석가의 제자인 부루나 존자가 그린 석가모니의 41세 때 초상화가 동이족 한국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석가모니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확신하는 불교 신도가 늘고 있습니다.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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