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몽의 죽음에 관한미스테리><주몽의 의미>
|
|
|
|
글쓴이 : 이문규 / 2006-06-12 오전 06:54:04 |
|
|
고구려 시조 주몽, 그 죽음의 미스테리
우리에게 자랑스런 역사를 안겨준 고구려. 그 고구려를 건국한 이는 바로 고주몽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인들에게 추모성왕이라는 시호로, 후대인의 기록에는 동명성왕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은 영웅이었다. 아무런 기반,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은 자수성가형 인물임과 동시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위대한 위인이다. 그런데 그런 주몽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가 있다면 믿어지는가?
많은 이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스테리라니...
나 역시 처음에 주몽의 죽음에 하등 이상이 없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고구려사를 공부할수록 나는 주몽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에 고구려의 고대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구려사의 최대 정점인 태조왕...
태조왕 대에 이르면 고구려는 국력이 강력해져 한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여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 많은 이들은 태조왕이 고구려의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했기 때문에 궁(태조왕의 이름)의 시호가 태조인 이유를 태조왕이 고구려를 중앙집권체제로 유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인들도 지금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졌을까? 중앙집권체제, 고대국가의 기틀.... 이는 후대인이 붙인 것이지, 그 시대 사람이 붙인 용어가 아니다.
나라를 열었다는 태조
왜 고구려인들은 6대 임금에게 이와 같은 시호를 붙였을까?
한권으로 읽는 시리즈의 저자인 박영규씨는 태조왕의 국력신장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저 멀리 중국 동해안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친 것인데 붉은 표범은 아열대 기후에 서식하는 동물인데 이 기후대가 맞는 지역이 중국 동해안 즉 산동반도 남쪽 지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영토를 넓혔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태조라는 칭호를 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게다가 표범이 아열대 기후에 산다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관자라는 책을 보면 조선의 대표적 특산품에 표범가죽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은 발해연안, 만주, 한반도 일대에 자리했는데 이로보아 표범이 아열대 기후에 서식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아열대 기후 지역인 산동반도 이남지역까지 차지했다는 것은 섣부른 해석이라 보여진다.
태조의 비밀,,,, 그 비밀에는 해씨에서 고씨로의 정권교체에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는 왕의 성씨가 해씨였다. 그런데 6대 태조왕 때부터 고구려 임금의 성씨는 고씨로 바뀐다.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 왕에 대해 처음에 소노부에서 나왔다 나중에 계루부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소노부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이 계루부로 대표되는 고씨세력에 의해 축출당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태조왕이 고씨의 천하를 이룩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그가 해씨의 천하를 종결하고, 고씨의 천하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바쳤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모본왕이 희대의 폭군이라 기록하였다. 하지만 모본왕의 기사를 보면 그가 폭군이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기록이 있다.
즉위 2년 왕이 군사를 일으켜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같은 해 서리와 우박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만약 모본왕이 폭군이었다면 백성들을 구제했을까? 이는 그가 폭군이 아니라는 점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그가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단군조선의 고토(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은 만리장성 이남인데, 이 지역은 옛 조선의 영토였다)를 회복한 중흥의 군주 모본왕은 왜 폭군이 되었을까? 그건 모본왕을 시해한 태조왕의 고씨세력이 자신들의 역성혁명의 명분을 찾기 위해 모본왕을 폭군이라 조작했을 것이다. 이로써 왜 고구려 6대 임금에게 태조라는 시호가 붙여졌는지 확인해봤다.
주몽의 죽음에 대해 다룬다면서 왜 모본왕과 태조왕에 대해 다루었느냐 물을 것이다. 이는 주몽의 미스테리를 밝혀줄 실마리이기 때문에 태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주몽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를 풀 수 없기 때문에 그러했다. 지금부터 주몽에 얽힌 죽음의 미스테리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주몽이 나라를 연지 18년이 지난 기원전 19년 그의 나이 40세 때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찾아온다. 그런데 주몽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태자로 봉하고, 얼마 안있어(5개월 후) 붕어(황제의 죽음을 높이는 말)한다. 이 기록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로 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각본 같이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성을 고씨라 하였다. 그런데 그 아들 유리는 해씨이다. 이는 주몽과 유리의 왕위계승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지 않을까? 유리가 아버지를 찾는 신물로 든 것이 칼인데, 이 칼은 무력을 상징한다. 결국 무력으로 소노부 계열의 해씨세력 유리가 계루부 계열의 고씨세력 주몽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유리왕의 기록을 보면 그는 아버지 주몽과 많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정책면에서 보면 아버지 주몽은 정복활동을 통해 고토를 회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유리는 정복활동 대신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게다가 유리는 고구려 개국공신이자, 선왕의 친구인 협보의 직위를 박탈하고 농가의 일을 맡긴다. 이에 협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얼핏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는 지배세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유리왕 ~ 모본왕까지는 주몽에 대해 제사를 지내지않다가 태조왕 때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에서 유리왕의 왕위승계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무력에 의한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유리왕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로 옮긴다. 이는 부여를 방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졸본의 고씨 세력의 견제를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즉 국내로 천도한 것은 고씨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유리왕의 한 방편이 아닐까?
유리왕이 마음대로 주몽 시절의 지배층을 쫓아냈다는 것, 정책 노선이 주몽과 다른 점, 천도를 단행한 점, 그리고 그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오자마자 바로 태자로 책봉되고, 얼마 안있어 주몽이 죽음을 맞이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왕위계승이 확실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님을 분명하다.
이는 유리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이 주몽으로 대표되는 고씨세력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05002642
--------------------------------------------------------------------------
만주로 (2006-06-09 19:36:58)
태조라는 칭호는 고구려가 맨 처음 사용햇다던데 항상 왜 부자연스럽게 초대왕이아닌 6대왕에 붙엿을까 의아해 햇는데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말라스 (2006-06-10 10:04:40)
이 글대로라면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난 것도 설명이 될것 같습니다.
카오스 (2006-06-10 11:44:52)
카오스는 지금까지 .... 6대 태조왕(궁) 이후 부터는 왕성이 분명 고씨이고 태조왕 이전의 2,3,4,5대왕들은 분명히 해씨였으므로 6대 태조때에 비정상적인 왕통교체가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보아서...
원래부터 '고주몽'이 아니었고 '해주몽'(해모수의 아들이라 했음)이었는데 6대 태조왕이 역성혁명에 성공하고서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해주몽"을 '고주몽"으로 바꿔치기하여 사서에 기록(그 이후의 후손들에 의해서,,,)된 것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그대로 인용, 정리하므로서 정설화된 것으로 추측해 왔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의도에 '왕통의 정통성을 절대시하기 위함'이 있었다고 봄...)
이게 아니고, 처음부터 '주몽'은 고씨였는데... 나중에 '주몽'의 장손이라고 주장하며 부여에서 온 '유리(해씨)'에게 '주몽(고씨)'이 제거된 것이고, 그 이후 2,3,4,5대의 왕들을 '해유리'의 후손들이 장악했다는 것이군요... 즉, '고주몽'의 후손이 왕통을 다시 "고씨"로 되돌려서 시조 '주몽'을 복권(?)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아주,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군요... 의문이 되는 것은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군요... 왕통을 복원한 태조왕이나 이를 인용한 김부식이 왜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명해 두지 않았는지..?
그려면, '고주몽'이 혈혈단신으로 졸본부여(해씨)에 와서 고씨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이 너무도 드라마틱해 지겠네요... 그리고 또 나중에 졸본부여에 와서 '고주몽'을 제거한 '유리'가 같은 해씨였다고 보이는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탈출로 이어진 것도 숙제가 되겠네요...
어쨋든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는 하는 부분이 왜 아직까지 남아서 헷갈리게 할까?....
음....혹시,
1) 혈혈단신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온 '고주몽(고씨)'이 '해모수(해씨)의 아들, 하백의 손자'라고 사기치고 마누라인 '소서노'의 도움으로 졸본부여의 왕(소서노에 의한 허수아비왕?)이 되었는데, 국호도 고구려라고 고치려는 등 진짜로 왕노릇을 하려고 하다가 차츰 신분이 노출되고 세력이 줄어들어...
2) 결국, 이를 견재하려는 해씨세력(해유리)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이 해씨들이 오히려 역이용하여 '고주몽(고씨)'을 '해모수의 아들(해씨)'로 둔갑시켜 기정사실화하여 왕통(해씨)의 정통성을 유지하여 권력을 잡자, 고주몽에게 협조하였던 소서노 일파가 긴급 탈출하여 마침내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르렀고...
3) 졸본부여에 남아있던 고씨 후손들이 2,3,4,5대 해씨왕 밑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드디어 6대 태조왕 때에 왕권을 완전히 탈환(역성혁명)하여 '해주몽이 되어 버릴 뻔 했던 자기 조상인 주몽을 다시 복권시켜 '고주몽'으로 하고 (국호도 이때 부터가 정식으로 '고구려'라고 했을 듯...) 사실상 창업을 이룬 '고궁'이 태조가 된 것인데...
4) 후대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고려왕조 입장과 고려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김부식등 신라후손들이 대륙측 사서등에 근거가 많은 '백제의 건국(BC18)' 년대를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이 백제의 건국년대로 부터 역으로 계산하여 고구려건국(BC37), 신라건국(BC57) 년대를 짜 맞추기 위하여 고구려 6대 태조의 조상인 '고주몽'을 시조로 등재시켜...
4) 우리의 고대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편년을 종합 재정리한 것이라는 말인가?.... |
|
|
|
|
|
|
1 / 글쓴이 : 이문규 / 2006-07-11 오후 3:04:15 |
|
|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슴 벅찬 역사가 있었다. 그 역사는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다. 그 영토는 남으로는 지금의 충청도, 동으로는 연해주, 북으로는 북만주, 서북으로는 동몽골,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북경지방까지 차지한 대제국이었다. 고구려는 단순히 땅만 넓은 나라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천손의 나라라 인식한 천자의 나라였다. 게다가 통일왕조 수, 당의 침입을 물리치고, 오히려 그들에게 역공을 가한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국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에 필자는 고구려 창업군주 주몽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주몽의 탄생년도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59년이라 기록하고 그가 나이 22세인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년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고구려가 맨 먼저 중앙집권체제로 진입하였고, 고대국의 기틀을 마련한 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고구려가 먼저이다.
구당서에는 시어사 가언충의 말을 빌어 고구려가 900년이 채 못되어 80살 먹은 대장에게 멸망할 것이다 란 고려 비기의 내용을 인용 고구려의 역년이 최소 900년은 되었을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문무왕이 안승을 위로할 때 고구려의 역년이 800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철저한 신라주의자인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깎아내리고, 신라의 건국년대를 크게 부풀렸다고 한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소급하고 있다.
학계에서 정식사서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에는 주몽이 기원전 79년생이고, 신라보다 1년 앞선 기원전 58년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고구려의 건국년대, 주몽의 탄생연도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 필자는 이것에 대해 이 말이 옳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년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년도보다 훨씬 더 많이 올라갈 것이라는 점이다.
주몽탄생설화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만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 사가들은 모계사회의 유풍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게다가 신화학자들은 이런 구조가 영웅의 신비성을 더해주는 구조적 장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 해모수가 아니면 동부여의 금와왕이라 암시하고 있다. 한단고기라는 사서에는 해모수의 증손 고모수 즉 불리지가 바로 주몽의 아버지라고 한다.
왜 주몽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몽은 부여에서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 그런만큼 고구려는 부여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역사를 보면 고구려와 부여의 공방전이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몽은 자신을 낳은 부여, 즉 자기 자신을 낳았지만 자신을 죽이려한 부여를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몽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은게 아니었을까? 고구려인이 남긴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주몽의 아버지가 일월지자, 즉 천제의 아들이라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군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주몽의 혈통이 천제지자라는 점을 미루어 그의 아버지는 최소한 부여의 왕족 같은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몽 설화를 보면 유화부인의 임신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해모수와 관계를 맺어 집에서 쫓겨난 유화가 우발수에서 금와왕을 만나게 되고 금와왕이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 온다) 금와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여자를 방안에 가두었더니 그 여자에게 햇빛이 비추었고, 그 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가면서 비추었다"
위 기록에 대해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해석을 하였다.
여자를 방안에 가두었다 --> 유화를 강제로 방으로 끌고 갔다
여자에게 햇빛이 비추었고, 그 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가서 비추었다--> 유화를 욕보이려 하니, 유화는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했으나 결국은 욕을 당하고 말았다.
위 해석에 의하면 해로 상징되는 고귀한 인물, 즉 해모수라 자칭하는 부여의 왕족이 하백의 딸 유화를 강제로 임신시킨 것이고, 유화가 알을 낳았을 때 금와왕이 그 알을 버리라고 한 것은 금와왕으로 상정된 주몽의 친아버지가 그 아이를 버리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백에 주목해야 한다. 하백은 물의 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백이 물, 즉 강가를 기반으로 하는 대호족이었음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물고기와 자라가 도왔다는 것은 하백 세력이 외손주인 주몽을 도와준 것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하백은 고대의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인에게 있어 물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요소였다. 그런 물을 다스리는 하백은 고대인들이 숭상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을 세운 왕검의 부인이 하백의 딸이라는 점을 보면 하백의 혈통은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유화가 아버지인 하백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하백이 화를 내며 유화를 쫓아낸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무튼 유화와 해모수로 상징되는 부여의 왕족 사이에 태어난 주몽은 날 때부터 그 자질이 특출하였다. 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장치임과 더불어 그가 영웅으로써의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나라를 호령한 서나라의 서언왕 역시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고, 부여를 세운 동명 역시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다. 이는 동이족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영웅으로써 자질을 보인 주몽은 7세의 나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신궁으로써 이름을 드높였다. 주몽의 본래 이름은 추모로, 주몽은 그가 활을 잘 쏘는데서 유래한 그의 별명이다. 부여어로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이란 뜻이다.
이런 주몽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부여의 대소왕자와 그의 6형제이다. 대소는 틈만 나면 아버지인 금와왕에게 상주하여 주몽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때마다 금와왕의 보호로 주몽은 무사할 수 있었다. 금와왕은 주몽을 대소로부터 지켜내고자 주몽을 목장 마굿간지기로 보냈다.
그런데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준마와 비루먹은 말을 구분시켜 준마에게는 먹이를 조금 주어 야위게하고 비루먹은 말은 살을 찌워, 금와왕으로부터 준마를 선물로 하사받는다. 활을 잘 쏘고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주몽이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특출함을 의미한다.
기원전 59년(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본인은 한단고기의 기록을 따르고자 한다) 주몽은 마침내 절친한 벗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탈출한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대소와 일곱형제들이 주몽을 죽이려는 것을 알아내고 주몽을 탈출시킨 것이다. 이 때 주몽은 부여에 예씨라는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임신한 상태이다. 훗날 그의 자식이 찾아올 수 있도록 자신의 신표를 일곱모난 돌 위의 소나무에 묻고 부여를 탈출하였다.
동부여를 탈출한 그는 북부여로 망명하였다. 당시 북부여는 고무서란 임금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의 자질이 특출함을 알아본 주몽은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둘째 딸을 주몽에게 주어 사위로 삼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기원전 58년 고무서는 후사가 없어 사위인 주몽에게 북부여를 맡기고 세상을 떠난다.
기원전 58년 주몽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구려를 세운 시조 추모성왕이다. 하지만 아무런 기반이 없는 그를 북부여의 원로대신, 귀족들이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지지해줄 사람을 물색했고, 그 사람이 바로 졸본부의 수장 연타발이었다.
연타발은 소금과 생선장사를 통해 거대한 부를 얻은 사람이었다. 주몽은 연타발의 딸이자 과부인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소서노와의 결합으로 주몽은 왕으로써 입지가 강화되었고, 고구려의 국력 또한 강해졌다.
나라를 건국하는 것을 천명이라고 한다. 이는 나라를 건국하는게 그만큼 힘이 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주몽은 맨 손으로 고구려라는 제국을 세운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물론 그가 소서노라는 조력자, 고무서 단군의 사위라는 특권이 있었지만, 그의 고구려 건국은 맨 손으로 이루어낸 신화 창조나 다름이 없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뛰어난 자질 하나로 나라를 건국한 영웅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주몽은 여타 다른 나라들의 창업군주와 다르다.
그는 고구려를 건국하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펼친다. 주변의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개마국, 말갈족 등을 접수한다. 그리고 한나라의 현토군과 맞서 대승을 거둔다. 이는 그가 군사적인 면에서도 특출났다는 걸 의미한다.
건국한지 얼마 안된 고구려가 이처럼 왕성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고구려의 모태가 된 북부여의 국가적 역량과 소서노와의 결합으로 막대해진 재정력이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지만 정복군주로서의 주몽의 자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고대에는 군주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정복활동에 나섰다. 정복군주의 상징인 광개토태왕 역시 몸소 군사를 이끌고 정복전쟁에 나선 걸로 확인할 수 있다. 신이한 탄생, 신궁으로서의 기량,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 이는 고대 영웅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주몽은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고루 갖추었다. 그의 왕성한 정복활동은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창업군주임과 동시에 정복군주라 할 수 있다.
주몽은 고구려를 부여와 한나라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만들어내고, 부여에서 온 아들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붕어한다.
주몽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건 불가능과도 같다.
하지만 그는 맨 손으로 나라를 건국한 창업 군주였으며,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안겨준 고구려를 세운 위대한 임금이었다. 그가 있음으로써, 고구려가 있었고, 고구려가 있음으로써 현대 우리가 있듯, 민족사적 견지에서 주몽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04945953 |
|
|
2 / 글쓴이 : 사무불통 / 2006-07-11 오후 3:31:36 |
|
|
"주몽"은 과연 활을 잘 쏘는 사람(善射者)"만을 뜻할까?
고주몽에 관련하여 정리를 잘 해 주신 이문규님께 감사의 말씀드리며 "주몽"에 대하여 짤막하나마 제 의견을 올릴까 합니다.
1. "주몽"은 개인의 인칭이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거나 현재 MBC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보더라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고주몽"이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는 데에 기인하여 "주몽"이 마치 어느 한 사람 즉 "고구려 건국자의 이름"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맞지만 개인의 인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군이 사람 이름이 아니듯 "주몽"도 사람 이름이 아닐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가 사람의 이름이 아니듯 징기스한(成吉思汗. 징기스칸이 아니라 징기스한이라 해야 맞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모두 징기스한이라 함)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듯 주몽도 사람의 이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는 대각자(大覺者) 고타마 싯달타를 높여서 석가모니라 하고 초원의 부족을 통일한 영웅 태무진(鐵木鎭)을 징기스한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주몽"은 하늘의 아들을 뜻하는 위대한 군주이다.
"주몽"이라는 말이 사서에서 전하기를, 주몽(朱蒙)은 선사자(善射者)를 뜻하는 부여의 말 또는 고구려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사자(善射者)라는 말이 단순히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것만을 뜻일까?
그럼 선사자(善射者)를 뜻한다는 주몽은 어떠한 것이 더 있을까?
2세 부루단군 때에 지었다는 "어아가(於阿歌)"를 보면 그 답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아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善心大弓成 惡心矢的成(선심대궁성 악심대적성)
선한 마음은 큰 활이 되고 악한 마음은 화살의 과녁이 된다.
여기에서 선한 마음(善心)은 바로 천손민족으로서 하늘의 뜻을 마음에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마음을 갖고 있으면 천하에 두려울 것도 이겨내지 못할 것도 없으며 이는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것을 이 어아가는 그러한 뜻을 감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끓는 물과 눈덩이도 활과 과녁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활을 잘 쏜다는 것은 기능적으로 목표물을 잘 맞추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잘 이끌어 간다는 의미도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광개토왕은 주몽의 "다물(多勿)"정신과 주몽정신(활을 잘 쏘고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군주의 정신)을 현실화시킨 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군대를 진군할 때 병사들에게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천군(天軍)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하여 사기를 앙양시킴은 물론 하늘의 뜻을 이어가는 천손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고취시켰던 것입니다. 광개토왕이 어아가를 부르게 했다는 것은 태백일사에 나와 있습니다.
아리랑이 남녀 사랑을 빗대어 하늘의 뜻을 노래한것처럼 "어아가(於阿歌)"도 활과 과녁 그리고 끓는 물과 눈덩이를 비유해 하늘과 조상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몽"이라는 말은 하늘의 뜻에 따라 경천애인(敬天愛人)하고 옛 선조들의 강역을 되찾고(多勿),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실천한 위대한 군주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것입니다.
태무진이 몽골부족을 통일하고 세계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후 징기스한(成吉思汗)이라는 대칭호를 받았듯이 말이죠.
주몽을 한자어로 "朱蒙"이라고 한 것은 위의 위대한 군주를 뜻하는 "추모", 또는 다른 말을 음차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어떤 이는 "추모"라는 말이 우리말의 "주먹"을 나타낸 것이라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3.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다."
호태왕비에는 분명하게 "나는 천제(하느님)의 아들(我是天帝之子)"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며, 25史 중에는 "태양의 아들(日之子)"이라고 하는 사서도 있습니다.
천제지자(天帝之子)이건 일지자(日之子)이건 그 의미는 바뀌지 않습니다.
지나에서 나라를 건국한 자에게 이런 칭호가 붙어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추모" 또는 "주몽"이라는 말은 바로 "천제의 아들" 또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 가장 합당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