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기원의 미스터리]한국인은 어디에서 왔나? |
북방기원설? 남북방혼합설? 자생설? 세 가지 기원설 제기… 최근 들어 자생설 주목 |
복기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성씨와 본관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조가 누구이시고 몇 대 손인가 등의 질문이 부수적으로 따라붙는다.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간단하게든 혹은 장황하게든 '의무적으로' 이에 대답을 해 주게 마련이다. |
이처럼 한국인들이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기원이자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 확대해 보면 한 개인이 속한 사회단체도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점이 당사자가 활동하는데 있어서 행동의 지침이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는 더욱 큰 규범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민족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그 민족의 정체성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어는 간단하게 세 글자로 구성돼 있지만 여기에 함의된 뜻은 매우 많다. 같은 혈통에, 생김새가 비슷하고, 행동도 비슷하고, 같은 말을 쓰는 등 여러 공통점이 한민족이라는 말에 압축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같이 살아나가기를 원하는 것이 한민족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즉 한민족의 기원은 어디인지 그리고 그 민족의 고유 문화는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 차원에서 그칠 일은 아니다. 흔히 한국사를 표현할 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참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복잡한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의 문화권으로 말이다. 아메리카나 싱가포르와는 그 ‘류’가 다른 나라인 것이다. 하나의 문화권으로 맥 이어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기원은 어디일까 하는 점은 사실 한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뜻 있는 학자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현재는 대체로 세 가지 기원설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북방기원설’이다. 이 설은 세계 역사 연구의 큰 흐름을 타는 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세기 전반 서구에서 불기 시작한 문화 단일기원론에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다. 또한 한국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밝혀진 문화요소들 중 이른바 북방문화 요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은 지금까지도 우리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설이다. 북방기원설에서 ‘북방’이라는 지역은 지리적으로 동시베리아나 만주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학설은 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우리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견해이기는 하지만 서쪽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다. 서쪽은 지금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연선(沿線)을 가리키는데, 쉽게 말해 중국쪽에서 왔다는 견해다. 이는 주로 문헌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학설이다. 북방기원설의 주된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민족은 언어·체질·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러한 특징은 알타이 어족에서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알타이 어족은 역사적으로 민무늬 질그릇을 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의 알타이 어족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하는 것도 궁금한 것 가운데 하나다. 그 전에는 고아시아족이 이 땅에 살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고아시아족은 알타이 어족의 확산으로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알타이 어족이 차지했다는 개념이다. 편두 등 남방문화 요소 많아 둘째는 ‘남북혼합설’이다. 1960년대부터 제기된 이 설은 우리나라 남쪽에서 보이는 남방 해양문화권의 문화 요소들을 그 주된 증거로 삼고 있다. 또한 이 설은 고고학적 조사보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제기된 주장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그 문화 요소들을 살펴보면 한반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 솟대, 머리를 납작하게 하는 편두 등은 남방에서 전해진 문화 요소이며,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한 어깨삽 등도 남방기원설의 가장 큰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문화는 북방에서 전파해온 문화 요소와 남방에서 유래한 문화 요소들이 결합해 형성되었다는 것이 남북혼합설의 골자다. 사실 한반도는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 열린 지역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서도 그것이 어디서 왔든 유용하면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어느 한 방향의 문화 요소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쪽의 것도 있고 남쪽의 것도 있을 수 있다. 남방에서 온 문화 요소들도 우리 민족의 생활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본토기원설’이다. 최근 들어 한국 상고사 연구의 한 조류로 떠오른 설이다. 이는 한민족의 문화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선조들이 대대로 문화를 일궈 오면서 형성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로 문화 단계를 거치면서 자체 발전해 왔다는 견해로,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설은 학계에 제기되기 어려웠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그 뒤를 이어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면서 점점 설득력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설은 과거부터 제기돼 왔던 북방기원설의 일부와 겹치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첫 단추인 ‘고조선’과 결부시켜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고조선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과 언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민족문화의 기원을 찾는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고조선 문제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상당히 다른데, 현재는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4~5세기에 시작되었다는 설과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20세기 전후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북방기원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일 경우 평양 지역의 북방은 만주 지역과 동시베리아 지역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후자의 경우로 보면 본토기원설이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북방 기원설의 한 지역이던 만주지역과 그 인근의 동시베리아 지역이 자연스럽게 본토의 개념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왜 케케묵은 민족 문화의 기원을 찾는 일이 중요한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며 떠드는 이 시점에 과연 민족을 찾는 일이 그리 중요한 일인가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해 한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독립한, 인도양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는 원래 자주 독립 민족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굳세게 지키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외세의 침략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고, 포르투갈의 지배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인도네시아에 합병당해 스스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긴 채 박해당하며 살아왔다. 전체주의 아래서도 민족 특성 지켜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면서 최근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로부터 독립했다. 그들이 원래부터 지배받은 민족이었다거나 지배받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민족이었다면 이런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독립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들은 비록 현실적으로 좀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주체성을 갖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한 예를 더 들어 보자. 20세기 세계사의 최대 사건을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꼽는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중이 봉기하여 전제군주정권을 쓰러뜨린 것이다. 이 혁명과 함께 출범한 옛소련은 이후 60여 년간 세계의 양대 축을 이루며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독립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모태가 바로 민족이었다. 그 숱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도 민족의 특성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민족은 중요하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뭉클한 감정이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전통시대 때 사대(事大) 외교를 하였던 것도 바로 민족끼리 뭉쳐 살고자 함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그 많은 피를 흘려가며 광복 투쟁을 했던 것도 바로 민족끼리 뭉쳐 살고자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면서도 그에 비례해 매우 지난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일수록 그 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다.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설사 기록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민족의 기원은 그 기록의 앞 시대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현대는 과학의 시대라고 할 만큼 발달된 과학 문명을 가지고 있다. 고고학의 수준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되게 발전하였고, 생활사를 연구하는 인류학이나 의학도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이제는 문헌에 기록된 몇 구절을 가지고 민족의 기원을 찾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최신 과학 기법을 동원한 고고학적 조사, 그리고 의학적으로 DNA를 통한 유전자 분석 등 많은 방법들이 있다. 이처럼 과거에 연구해 놓은 결과를 토대로 최첨단 학문 방법과 기술을 도입해 그 민족의 기원을 찾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세계 4대문명과 동일한 문명 수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볼 때, 세계 4대 문명권이니, 어떤 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문화를 이루었다느니 하는 설들은 이제는 정말 옛날 얘기가 되었다. 4대 문명이 형성된 시기에 그와 동일한 문명 수준이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존재했고, 그 문화의 후예들이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민족은 원래부터 고립된 민족은 아니었다.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살면서 주변지역의 문화 요소들 중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후대에 전하여 생활에 유용하게 쓰도록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문화 요소들이 우리 민족의 생활사에 스며 있는 것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한 핏줄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융통성 있는 민족이었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21세기는 국경이 없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설사 국경은 없어져도 민족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출처: 역사탐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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