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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으랏차차 치우천황

by 바로요거 2005. 9. 26.

중국은 우리나라 고구려의 역사뿐 아니라 단군의 역사
그리고 그이전 치우천황을 비롯한 환웅의역사도 가져가려 하고 있습니다
상고사의 정립에 대한 노력이 절실한때
많은 분들이 .. 움직여주었으면 합니다

국회의원 정문헌님의 노력이 많은 분들에게 전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

中, 역사왜곡 넘어 ‘文明 훔치기’ 시도

으랏차차 치우천왕 / 국회의원 정 문헌(1)





붉은 악마, 그리고 치우천황

어제(8월 7일-일요일) 한일전,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이 있었지만 일본에 1: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경기 결과는 안타깝지만, 붉은 악마의 응원은 열정,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3년 전,
한일월드컵의 해에 붉은 악마만큼 우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스포츠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얼과 뿌리를 되찾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펄럭이는 붉은 악마의 깃발에 그려진 치우천황(蚩尤天皇)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와 기원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흔히 치우천황은
올림푸스의 아테나 여신처럼 용맹하고
병기를 잘 다루었던 군신(軍神) 또는 전쟁의 神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재야사학자들이나 붉은 악마는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14대 천황으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기원전 2707년에 즉위,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으며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라고도 불리며, 한민족의 선조’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上古史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과연 치우천황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지, 과연 한민족의 조상인지’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우리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계는 서로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한단고기』에 대한
위서(僞書) 논쟁은 양측의 대립된 시각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양측의 논박에 대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연구와 정리입니다.
우리 상고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 뿌리를 되찾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정부ㆍ여당이 적극 나서야 할 것은 현대 과거사보다 민족 상고사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정립 없이는 첫째로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기원을 내세울 수도 없으며,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신화까지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대내적으로는 뿌리에 대한 혼돈이 지속될 것이고,
앞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도 명확한 잣대를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사에 편입되고 있는 치우천황

지난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차량으로 세 시간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쟝쟈커우(張家口)市 줘루(탁록)현 일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현재 중국은
이 일대에 남아있는 치우(蚩尤)와 황제(黃帝), 그리고 염제(炎帝)의 유적지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그들만을 위한 역사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간 중국은
사마천의『史記』를 토대로 황제헌원(黃帝軒轅)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고,
또 황제의 자손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20여년 전부터 염제 신농(炎帝 神農)을 자신들의 선조로 삼더니
10여년 전부터는 아예 치우까지 포함시켜 “염황치자손(炎黃蚩子孫)”이라 떠들고 있습니다.

즉,
황제(黃帝), 염제(炎帝), 그리고 치우(蚩尤)가 중화민족의 공동시조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황제와 치우천황이 결전을 벌였던 탁록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까지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 중화삼조당 정문: 내부에는 황제, 염제, 치우상을 모셔놓고 자신들의 조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史記』에는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탁록대전이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중국사서에는 ‘치우가 구려(九麗)의 군주이며, 구려는 곧 동이(東夷)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는 치우천황에 대해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는 식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황제와 신농에 치우까지 끼워넣어 그들의 할아버지라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물론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승리를 기원하며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남의 집에서 우리 조상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처럼 지어놓고 모시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끼고 구경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독도를 일본에 내줄 수 없듯이 치우천황을 중국에 내줘서는 안 될 것

중국이 동북공정이라 해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와 신화 속의 조상까지 자신들의 조상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국이
최근 역사문제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신경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수민족에 의한 독립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분열없는 ‘하나의 중국’을 유지해 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민족주의의 확산이 심화될 경우,
중국으로서는 민족분열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중화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또 이를 위해 매개체를 바로 역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러한 커다란 맥락 하에서 중국의 신화와 역사가 모두 새롭게 단장되고 있습니다.

즉,
중국은 신화와 역사를 중화인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유지관리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 탁록현 황제성 구역의 입구. 사진처럼 ‘귀근원(歸根苑)’이라 적어놓았는데,
중국의 모든 민족의 뿌리가 하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치우천황까지 중국에 내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정말 힘이 없어서 땅을 빼앗긴 적도 있습니다만,
지금처럼 조상을 빼앗길 지경이니 참 요지경이기도 합니다.

선조를 잃고, 할애비를 빼앗긴다면 도대체 무슨 낯으로 후손을 대하겠습니까?


天地人의 기운을 모아야 할 때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 역사는 수탈과 이에 대한 항쟁,
그리고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사이 빼앗긴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잃었습니다.

간도협약으로 만주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넘어가버린 것뿐만 아니라,
만주의 역사도 고구려의 역사도 도적질 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2천년대에 들어와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남이 자기 이야기라 하고,
우리 조상을 자신의 것으로 우기고,
우리의 역사를 이미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세계에 홍보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총칼이 보이질 않을 뿐, 한민족의 역사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天地의 기운에 힘을 얻고,
人의 하나된 마음으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우리 조상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역사학자인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습니다.
그 대화를 위해서 우리 상고사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으랏차차 치우천왕 / 국회의원 정 문헌(2) [2]

최휘성 : 치우 천황!! 우리의 위대한 조상님 이시다!(07.13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