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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키워드] 원寃과 한恨

by 바로요거 2018. 1. 26.

[증산도키워드] 원寃과 한恨


문자적 의미

'자전(字典)'에는 원에 대해 ()은 원()과 같은 자이며, ()과 같고, ()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과 한은 동의어라는 것이고 원과 한이 쌓이게 되면 그 대상과는 원수()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과 한은 스스로 만들어 낸 욕망이 내적 외적 조건에 의해서 방해받거나 좌절될 때 생기는 마음의 부정적 상태를 말한다.


<만화 '보호신과 척신이야기' 중에서. ▶만화 더보기☞ http://jsdmessage.tistory.com/646 >


본질적 의미

그러나 양자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원은 토끼가 족쇄에 갇혀 있는 모양으로 외부적 압박에 의해 당하는 고통이며, 한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원이 내면화되어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고통이다. 여기서 볼 때 한은 원이 깊어진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원은 한보다 앞서며, 좀 더 그 고통이 구체적인 상태를 말한다. 즉 원()이나 한()은 모두 원()이 깊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 양자를 합하여 원한(怨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원()과 한()을 다시 구별한다면 원()은 원()이 깊어져서 공격적 성향의 심리상태로 응축된 것을 말한다면, ()은 원이 깊어졌지만 공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내장된 심적 상태를 말한다. '漢語大詞典' 제 2459쪽의 원굴지한(寃屈之恨)”원통함으로 인해 생긴 한’, ‘원통함의 한’, 혹은 원에 대한 한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원()과 한()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이 깊어져서 생긴 것이 바로 한()이라는 것이다.


핵심 사상

원과 한의 문제는 증산도 사상에서 해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원․한은 부정적 심리 상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에 미치는 병과 죽음의 가장 근원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증산도에서는 원․한이 발생하는 원인을 무언가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찾는다. 즉 욕망과 그 욕망의 좌절에서 원과 한이 쌓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 무엇을 가지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 원과 한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원과 한이 없는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며, 삶 자체를 관조하면서 타인과 더불어 아무런 불평불만이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 인간의 삶이 그러하지는 않다.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무언가 하고자 하는 힘인데 이 때 그 무언가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쾌락이거나 행복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은 쾌락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쾌락과 행복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다. 즉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욕망과 욕구를 가지는 것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개체보존의 욕망과 종족보존의 욕망이다. 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의식화된 욕망을 들 수 있다. 이는 2차적 욕망인데 사회 속에서 쾌락을 얻기 위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과 충족사이의 틈이 존재하고 그 틈을 좁히려는 노력은 투쟁과 갈등 대립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틈에서 욕망이 충족되면 쾌락과 행복이 주어지고 좌절되면 원과 한이 발생하게 된다.



원과 한은 이러한 욕망의 좌절에서 오는 모든 내적 불만 및 외부의 억압과 불의, 폭력에 의해 마음에 가해지는 고통이 만들어 내는 병적 상태이다. 그러나 이 두 부류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이러한 고통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쌓여 다시 스스로를 억압하는 힘이라면, 후자는 그 고통이 쌓여 외부로 표출되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심적 상태로 드러난 것이다. 어쨌든 원과 한이 극에 달하면 그 고통은 내면에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표출되며, 그 표출되어 드러난 힘을 척이나 살기라고 부를 수 있다.

 

()에 대해 '說文解字'에서는 ()은 구부린다는 뜻이다. ()과 토()로 이루어져 있다. 토끼가 문 밑에 있어서 달릴 수 없으므로 더욱 더 구부리고 꺾게 된다.”라고 풀이한다. 즉 원이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함으로써 마음에 쌓이는 고통과 절망 회한 등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욕망이 사회적,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 혹은 타인의 방해나 억압에 의해서 좌절될 때 그 욕망의 크기만한 고통이 가슴속에 쌓이게 되는데 이를 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과 한이 발전하여 척과 살기로 드러난다. 해원의 필요성은 이처럼 원과 한이 자라나서 타인의 생명을 억압하고 천지만물의 생명을 위협한다는데 있다.

 

척과 살기의 근거가 되는 심리상태는 원과 한(寃恨)이며, 이 원과 한이 깊어진 병리적 현상이 원한(怨恨)이다. 그러나 원()이나 한()에 그친다면 척이나 살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과 한이 원한(怨恨)으로 화할 때 여기서 척과 살기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원한(寃恨)과 원한(怨恨)의 심리상태는 상호 구별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원한(寃恨)은 원()과 한()을 합쳐서 만든 용어이지만 단순히 산술적 더함이 아니다. 원한(寃恨)이라고 할 때는 원()이나 한()의 감정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한 걸음 나아간 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은 곧 한()과 원한(怨恨)의 이전단계이며, 한이 대상이 없고 비지향적 개념이라면 그러한 한은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은 원으로 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못생긴 상태였고 못생긴 얼굴로 인해 그 여성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도 불만족하고 있다고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원을 갖고 있으며 그 원은 차츰 한으로 맺히게 된다. 이 때 외모는 그 여성의 어떤 의지나 행위, 혹은 외부적 원인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그 여성은 원과 한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과 한은 이 상태에서 원한(怨恨)이나 살기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의 풀림방식은 원한(怨恨)의 갚음과는 다르다. 그러나 만일 이 여성이 자신의 원을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의 구조나 문화적 풍습 등 외부적 요인에서 찾는다면 그녀의 원과 한은 결국 원한(怨恨)으로 진행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원을 갚는다는 표현보다는 원의 풀림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억압된 심적 상태가 해원되지 못하면 원()-()-원한(寃恨)-원한(怨恨)-()-살기(殺氣) 등의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가 이 다양한 개념들에 대응하는 심적 상태를 그 병리적 현상의 크기에 따라 일일이 산술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말이 사용되는 여러 용례에 유추한다면 위의 순서가 타당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애석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 애석한 마음이 깊어지면 한()이 되며, 이렇게 쌓인 원과 한은 억울하다는 마음으로 진행하여 원한(寃恨)이 되며, 이보다 더 나아가면 결국 원통하고 분한 마음(怨恨)에서 상대방을 해하려는 강력한 심적 상태(隻과 殺氣)에서 그 대상을 해코지하게 된다.





원과 한이 무대상적인 상태로 계속 유지되게 될 경우 그 원과 한의 해소는 내면적 풀림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원과 한이 무대상적인 상태에서 대상을 갖게 되면 원한(怨恨)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 원한은 갚음에 의해서 해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갚음의 힘은 바로 척과 살기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원이 맺히게 되는데 이 원이 맺히게 된 원인이 외적이라면 그 원은 원한(怨恨)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상대방에게 갚음을 통해 원한을 해소하려고 할 것이며, 그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척과 살기이다. 즉 이러한 심리적 증상의 발전은 '애석하다'에서 '억울하다'로 그리고 더 발전하여 '분하다'는 상태로 나아가서 드디어는 상대방을 해코지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도전'에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이 구절에서 원한은 원한(怨恨)이 아니라 원한(寃恨)이다. '도전' 4:16:3.) 라는 구절에서 바로 이러한 설명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증산도 http://www.jsd.or.kr/



<일화> 늘 따라다니는 척신


 하루는 수행을 하다가 한 가족이 수행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도장에 매일 나와서 봉사 잘하고 포교 열심히 하는 성도님들은 따라다니는 보호신명님들이 환한 빛이 나고 힘이 강해 보입니다.

 그런데 도장에 잘 안나오시고 신앙의 의지가 별로 없는 성도님들의 보호신명님들은 같은 가족인데도 완전히 틀렸습니다. 숫자도 적고, 힘도 약해 보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하려면 진리를 믿고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을 150% 확실하다고 믿고 내 모든 것을 바쳐야지, 나의 보호신명님들도 떠나지 않고 나를 믿고 뒤에서 도와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먼저 정성과 믿음을 보여야 그만한 기운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도장에 잘 안나오시던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한동안 안나오다가 도장에 오셨길래 무엇 때문에 잘 안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보니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감을 잡았습니다. ‘척신이구나.’ 왜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냐고 척신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런 말을 안 하더라구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척신이 도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장밖에 있는 가로수 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째려보지 말고 이리 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했습니다. 순간 오는 것 같더니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왜 못 오지? 하고 다시 보니, 도장 들어오는 입구에 칼을 든 신장과 창을 든 신장이 떡 하니 버티고 서있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척신에게 물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 분의 보호신명을 찾았습니다.  
 처음엔 못 찾았는데 희미하게 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호신명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많이 시달린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보호신명이 맞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습니다. 아까 본 척신이 왜 따라다니냐고 물어보니까, 윗대 조상의 집에 있던 하인이었는데 억울하게 매맞아 죽어서 그 한을 풀기 위해서 그 자손에게 쫓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척신들은 그 원한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운장주를 읽어서 떼어놓는다고 해도 또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 성도님에게 도장에 나와서 7일 동안 참회배례와 정성수행을 하도록 권해 드렸습니다. 그 성도님이 참회배례 하는 모습을 수행하면서 뒤에서 보니까 척신의 기운이 많이 수그러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도장에서 성도님들이 참회배례를 할 때 척신들이 그 앞에서 절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선천은 상극의 이치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서로 자기만 잘되기 위해서 상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그 과정 속에서 무수히 많은 원한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내 눈엔 안보이니까 나는 예외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제가 본 바로는 척신이 없는 사람은 거의 못 봤습니다. 항상 참회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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