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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반민특위의 실패와 친일 반역의 역사

by 바로요거 2017. 6. 5.

 

 

 

 

 

 

▣아! 반민특위의 실패와 친일 반역의 역사

 

친일파 숙청 문제는 단순히 반역자를 처단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이었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새국가를 제대로 세우는 과업의 첫 단추가 바로 친일 청산이었다.

제헌의회에서 <정부내 친일파 숙청에 대한 건>과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하면서 이 민족적 과업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친일 세력과 이들은 배후에서 비호한 이승만 정부의 저항과 방해 공작이 전면적으로 펼쳐졌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 공포를 전후해 서울 시내와 국회에는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는 내용의 삐라가 일제히 살포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내무부가 주관한 반공국민대회가 열렸다. 반공대회했지만, 실상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 반대 집회였다. ‘친일파 청산요구=공산주의’라는 더러운 여론몰이가 본격화됐다. 이승만 정부는 이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 끊임없이 법개정을 시도했다.

특위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사업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했다. 각 정부기관은 반민특위 자료 제출 요구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온갖 방해 책동으로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반민특위 와해를 노린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1948년 새해 벽두, 반민특위 요인 암살 기도 사건이 드러났다, 주모자들은 악질 친일파 노덕술과 일제 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었다. 5월 18일에는 이문원 의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 3명이 남로당 지시를 받았다는 혐의로 경찰에 끌려갔다. 6월에는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 국회부의장과 노일환 의원 등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그리고 마침내 6월 6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으로 특위 활동은 무장해제 됐다. 설상가상으로 서북청년단 출신인 안두희에 의해 6월29일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1949년 초여름, 극우 반공정국과 백색 테러 공포가 남한 사회를 뒤덮은 가운데 이승만 정부는 집요하게 〈반민족 행위 처벌법〉 개정 공작을 시작했다. 결국 7월 6일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말까지로 대폭 단축하는 개정안이 통과된다. 애초 공소시효는 특별법 공포 후 2년이었다. 개정안 통과 다음날인 7월 7일,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 전원은 특위 활동을 지속하는 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총사퇴를 했다.

 

7월 15일, 공소시효 단축안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 이인 의원이 반민특위 새 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등 2기 체제가 꾸려졌다.

하지만 새로운 특위 위원들은 대부분 친일파 비호 세력이었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의 의도대로 반민특위를 해체해 나가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해방이후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이자 지상 과제였던 친일청산작업이 별 성과 없이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는 외세에 빌붙은 기회주의 기득권 세력이 지배력을 재구축했고, 친일 세력은 그대로 친미주의로 갈아타면서 이승만 정부 중심세력이 되었고 , 극우 반공체제가 공고히 자리 잡게 됐다.

 

반민특위 설립에서 와해까지의 과정은 1945년 해방 직후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것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사건이었다. 한국은 이런 과정에서 외세 사대주의가 판을 치면서 제 뿌리역사를 부정하게 되었다.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난 지 7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식민사학은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은 초대 대통령에서부터 친일반역자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승만은 사실상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해체시켰다. 친일반역자 중 김창룡은 독립투사들을 잡아다 고문하던 가장 악질적인 분자였다. 이런 자가 현재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되어 독립운동가들과 떡하니 누워있다.

 

과연 정의가 살아있다고 보여지는가? 김창룡이 부하한테 총을 맞아 죽자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대한민국이 정의가 사라진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역사정의가 사라진 불의의 역사를 정의의 역사로 둔갑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한국은 외세가 만들어놓은 반공과 자유이념에 갇혀 남북이 갈라져서 민족끼리 분열되어 싸우고 있다. 한국은 고대사가 왜곡된 것 만큼이나 근현대가가 왜곡이 되어있다.

 

한국의 정체성! 바로 고대사와 근대사가 파괴된 원인을 알아야 한민족이 외세의 노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과 통일을 쟁취할 것이다. 이제 통일역사시대가 가까워 오고 있다. 통일역사시대는 우리역사 뿌리를 되찾아야 한다. 사분오열로 찢어진 한민족의 정신을 통일해야 통일역사를 열어나갈 수 있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사상으로 동북아시아의 태평성세를 열었던 고조선, 그 위대한 통치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외세 제국주의 유산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정복을 당해 공산과 자유진영 두쪽으로 남북이 갈라졌겠는가.

 

이제 해방 후 70년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한국은 제국주의 유산인 좌우 대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 역사문화의 정신은 홍익인간이다.좌우를 아우르는 대동사상이다. 이조 오백년 친명 사대주의 노선을 걸었던 조선은 결국 내부 부패와 외세 제국주의 패권이 맞물려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15 해방이 되었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념과 미소에 의해 남북이 갈리는 운명을 맞이했다. 이렇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랜 사대노선으로 인해 자기역사를 비하하고 맹목적 사대주의로 인해 우리 고유의 역사정신, 역사권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지사들에게 단군과 단군조선은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의 뜨거운 원천적 에너지였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와 통치정신을 역사 속에서 뽑아버리고 신화를 만들려하는 세력들이 주류사학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원천적 이유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부일 세력이 강단사학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그토록 단군을 부정하고자 했던 것처럼 지금 해방된 조국에서 똑같이 한국의 역사학자에 의해 단군조선이 거세되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의 망령이 단군 조선을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친일 부역자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이 나라를 가치가 전도된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불의가 정의를 대체하고,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능욕하는 배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잘못된 역사와 억압과 독재에서 인권을 되찾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민주화 운동을 보수 기득권에 도전하는 좌파로 규정을 한다. 그리고 좌파와의 역사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국정교과서를 추진했지만 정작 국정교과서 내용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등 친일과 독재미화와 한민족 고대사의 영토와 역사를 축소해버렸다. 권력과 기득권에 눈이 멀어서 역사까지 조작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결국 국정농단사태로 벌어졌고 국정교과서 폐지로 끝을 내렸다. 일종의 역사쿠데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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