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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

by 바로요거 2016. 11. 4.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

기사승인 2016.10.18 1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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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서에 나오는 여려개의 갈석산 어느 것이 진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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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단군)의 대륙강역의 열쇠, 갈석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어는?

'낙랑군 수성현', '진장성 동쪽 끝'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다섯 번째)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제3회)


▲ <그림 1> 각종 갈석산과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 황하 및 해안선의 변화는 Tristram R Kidder(워싱턴대 교수) & Yijie Zhuang(런던대학 연구원)의 공동논문『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을 참조하였다.

5.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착오 갈석산’

본래 갈석산은 『서경』「우공」에 기록된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황하 하류의 흐름이 달라지고 해수면의 높이에도 변동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갈석산이 있었다는 ‘황하 하류 해변가’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러한 황하 하류의 위치 변동을 몰랐던 학자들이 자기 시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음으로써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의 착오로 인하여 새로운 갈석산이 두 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 하나가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상속의 갈석산이다.

다른 하나는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현재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이들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갈석산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갈석산

앞의 <그림 1>에서 ‘갈석산 2’에 해당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는 BC 602년 ~ AD 15년까지 약 600년 동안 황하 Ⓑ와 같이 천진방면으로 흘렀다. 황하 Ⓑ의 하류 해변가는 허허벌판으로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서경』에 나오는 ‘우공갈석’을 찾던 학자들은 갈석산이라고 부를 만한 산을 찾을 수 없자, 갈석산이 바다 속으로 빠져서 사라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의 사료 E-1, E-2에서 보듯이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은 왕황과 장절의 말을 근거로 갈석산이 바닷물 속으로 빠져 사라져 버렸다고 하였다. 이 갈석산이 바로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있다’는 갈석산이다(사료 E-2).

하지만 아무리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한들 바닷물이 커다란 산을 삼켜 버릴 수 있겠는가? 이 ‘요서 임유현 물속에 있다’는 갈석산은 황하의 흐름이 바뀐 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갈석산을 찾다가 찾을 수 없자 궁여지책 끝에 나온 ‘착오 갈석산’이다.

이 ‘착오 갈석산’은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는 상상속의 산이지만 갈석산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훗날 주자학파들에 의하여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민족의 상고사를 혼란에 빠뜨린 단초를 제공한 갈석산이다.

E-1 “한나라 사공연인 왕황은 말하기를 ‘옛날에 하늘에서 연이어 비가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넘쳐, 서남쪽으로 수백 리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장절은 말하기를 ‘갈석은 바다 속에 있다. 아마도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 간 듯하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와 제나라는 요동의 벌판을 나누어 영주를 설치하였다. 지금 성이 바닷가에 닿아 있는데, 바닷물이 북쪽으로 침범하여 성의 절반이 물에 잠겼다. 왕황의 말이 믿을만하니, 갈석이 바다속으로 들어간 것이 증거가 없지 않다.”

漢司空掾王璜言曰:往者, 天嘗連雨, 東北風, 海水溢, 西南出侵數百里. 故張折云:碣石在海中. 蓋淪于海水也. 昔燕、齊遼曠, 分置營州, 今城屆海濱, 海水北侵, 城垂淪者半. 王璜之言, 信而有徵;碣石入海, 非無證矣. 『水經注』卷五, 河水

 

E-2 “항산은 북악으로 중산 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우임금이 그 돌을 뚫어 오른쪽을 끼고 황하를 받아들이게 했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올랐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침범하기를 세월이 흘러 그 산을 삼켰으므로 물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恒山為北嶽, 在中山上曲陽縣西北,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大禹鑿其石, 夾右而納河. 秦始皇、漢武帝皆嘗登之, 海水西侵, 歲月逾甚, 而苞其山. 故言水中矣. 『水經注』卷四十, 禹貢山水澤地所在

E-3 “곽박이 말하기를 ‘지금 제수는 형양군 권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진류를 지나서 잠음 북쪽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흘러 고평에 이르며, 동북쪽으로 흘러 제남을 지나서 낙안군 박창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갈석이다’ 하였다.” 郭璞云 : 今濟水自滎陽卷縣,東經陳留至潛陰北,東北至高平,東北經濟南至樂安博昌縣入海,今碣石也. 『山海經』卷十三, 海內東經

 

(2)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

앞의 <그림 1>에서 ‘갈석산 3’에 해당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는 AD 15년 이후 황하 Ⓒ와 같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 방면으로 흘렀다. 그래서 황하 Ⓒ의 하류 해변가에서도 학자들의 착오로 인한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의 사료 E-3는 곽박이 『산해경』에 나오는 제수濟水를 주석한 것인데, 제수는 황하 Ⓒ와 같은 물길이다. 곽박은 제수가 발해로 들어가는 곳에 지금의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이 ‘착오 갈석산’은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성 북쪽 30킬로미터 지점의 발해 바닷가에 위치한다. 옛 이름은 갈석이고, 무체산·염산·마곡산·대산 등으로 불렸다. 해발 63.4M로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드넓은 화북평원에 유일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경남제일산’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산이다.

『서경』에 나오는 본래 갈석산인 ‘우공갈석’은 항산의 동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무체현의 ‘착오 갈석산’은 항산의 동남쪽 500여리에 위치하므로 본래 갈석산과 방향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 ‘착오 갈석산’은 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며, 『산해경』에 나오는 곽박의 주석(사료 E-3)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도 없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 산동성 빈주시에서 이 갈석산이야말로 『서경』에 나오는 진정한 ‘우공갈석’이라고 주장하며 중국 정부에 공식 갈석산으로 지정을 요청하였고, 지난 2005년 7월 22일 공식적으로 갈석산으로 지정을 받았다. 현재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하북성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 등 2개의 갈석산이 존재한다.

 

6. 하북성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

‘착오 갈석산’들이 황하 하류 흐름의 변화를 몰랐던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반면, ‘가짜 갈석산’들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본래의 갈석산을 동쪽으로 지명 이동하면서 생겨났다.

『회남자』·『태강지리지』 등에 의하면 갈석산은 고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하였으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며 또한 고대의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갈석산의 지명 이동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가짜 갈석산’도 두 개가 있다.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이들 가짜 갈석산들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끝없이 왜곡, 축소시켜왔다. 오늘날 한민족의 상고사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것은 모두 이들 가짜 갈석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 가짜 갈석산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인 중국 요나라(916~1125) 시대에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동쪽으로 1천여 리 지명이동된 것이다. 이 갈석산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갈석산에 얽히고설킨 제반 문제의 핵심은 본래의 갈석산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 어떻게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 갈석산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한민족의 상고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통하여 역사왜곡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12세기경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학파들의 주도로 생겨났다. 갈석산이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책은 『서경』인데, 오늘날 전해지는 『서경』의 주석은 주자의 명을 받아 그의 제자인 채침이 완성한 것이다. 채침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에 대한 주자학파들의 견해를 잘 알 수 있다.

『서경』「우공」(사료 B-1)에서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 구절의 갈석에 대하여 채침은 사료 F-1과 같이 주석하였다.

F-1 “갈석은 『지지』에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 하구의 땅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 평주의 남쪽이다. 기주는 북방에서 공부貢賦를 실어 올 때, 북해로부터 황하로 들어와서 남향하여 서쪽으로 돌 때 갈석이 오른쪽으로 도는 사이에 있으므로 ‘오른쪽으로 낀다’고 한 것이다...(중략)...또 살펴보건대, 역도원이 말하기를 ‘여성의 바닷가에 돌이 돌담과 같은 것이 수십 리가 있으며, 산마루에 큰 돌이 있는데 기둥의 모양과 같아 위소가 이것을 갈석이라 하였다. 이 산이 옛날에는 하구의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공물을 들여오는 황하의 길을 기록한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물에 침몰되어서 바닷물 속에 잠겼으니, 이미 강안과 거리가 5백여 리나 된다’고 하였다. 『전국책』에 ‘갈석이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고 한 것은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인 듯하며, 정씨는 ‘구문현에는 이 산이 없다’고 하였다.”
碣石 地志 在北平郡驪城縣西南河口之地 今平州之南也. 冀州 北方貢賦之來 自北海入河 南向西轉而碣石在其右轉屈之間 故曰夾右也...(中略)...又按 酈道元言 驪城枕海 有石如甬道數十里 當山頂有大石 如柱形 韋昭以爲碣石. 其山 昔在河口海濱 故 以誌其入貢河道 歷世旣久 爲水所漸淪 入于海 已去岸五百餘里矣 戰國策 以碣石在常山郡九門縣者 恐名偶同. 而鄭氏以爲九門無此山也. 『書經』夏書, 禹貢第十‧十一章

F-2 “(상략)... 오직 정씨는 ‘구하 지역이 이미 바다 속에 잠겼다’ 하고는 갈석을 인용하여 구하의 증거로 삼아, ‘지금 창주 지역은 북쪽으로 평주와 접경하여 서로의 거리가 5백여 리이니, 우禹의 구하가 마땅히 이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뒤에 바닷물 속에 잠겼으므로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구하가 바다에 침몰되지 않았을 때에는 지금의 해안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다시 5백 리가 평지이니, 황하가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은 이 5백 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또 상문上文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낀다’고 하였으니, 구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갈석이 그 서북쪽 해안에 있었을 것이다. 구하는 물길이 변천하여 미루어 상고하기가 어려우나 갈석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기주 지역에는 이미 이러한 돌이 없다. 평주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있어 창주의 강안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 황하가 지금 바다가 된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흘러가서 비로소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이니, 황하의 물길이 이미 바다로 빠져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의 왕횡은 ‘옛날에 하늘에서 항상 비가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서남쪽으로 넘쳐서 수백 리를 침몰시켰다’ 하였으니, 구하 지역이 이미 바닷물 속에 잠긴 것이다.

역도원은 또한 이르기를 ‘구하와 갈석이 바다에 둘러싸여 침몰되었다’고 하였다. 후세의 유자들은 구하를 평지에서 찾을 줄만 알고, 갈석이 있고 없음을 찾아서 증거로 삼을 줄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전후의 이설이 끝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구하의 땅이 아닌 곳에서 억지로 천착하여 찾았으니, 당연히 갈피를 잡지 못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다.”
(上略)...惟程氏以爲九河之地, 已淪於海, 引碣石爲九河之證. 以謂今滄州之地, 北與平州接境, 相去五百餘里, 禹之九河 當在其地. 後爲海水淪沒故, 其迹不存. 方九河未沒於海之時, 從今海岸, 東北更五百里平地, 河播爲九, 在此五百里中. 又上文言夾右碣石, 則九河入海之處, 有碣石在其西北岸. 九河, 水道變遷, 難於推考, 而碣石通趾頂皆石, 不應沒, 今冀之地, 旣無此石, 而平州正南, 有山而名碣石者, 尙在海中, 去岸五百餘里. 卓立可見, 則是古河自今以爲海處, 向北斜行, 始分爲九, 其河道已淪入於海, 明矣. 漢王橫, 言昔天常連雨, 東北風, 海水溢西南, 出浸數百里. 九河之地, 已爲海水所漸. 酈道元亦謂, 九河碣石苞淪於海. 後世儒者, 知求九河於平地, 而不知求碣石有無以爲之證. 故前後異說, 竟無歸宿. 蓋非九河之地, 而强鑿求之, 宜其支離而不能得也. 『書經』夏書, 禹貢第十三章

사료 F-1에서 채침의 주석은 세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첫째, 『한서』「지리지」의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 하구의 땅에 있다’는 갈석산을 ‘지금 평주의 남쪽이다’고 한 점이다.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서』「지리지」가 말하는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그런데 채침 당시에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 부근이다.
평주의 위치가 요나라(916~1125) 시기에 본래의 갈석산이 있던 곳에서 난하 하류 쪽으로 지명 이동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주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라 때 평주의 위치가 옮겨진 사실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둘째,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 등이 제기한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을 차용하여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하윤해설’은 당시의 황하 하류가 위치하였던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으로부터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까지 500여리의 바다가 본래는 모두 육지였다는 것이다(<지도 1>의 500리 참조). 그래서 황하 하류가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흘렀는데 이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황하 하류와 갈석산의 위치가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구하윤해설’은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 등이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나,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의 학설이다. 이 설은 현대과학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설이다.

셋째, 『전국책』에 나오는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고 한 갈석산은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채침은 상산군 구문현의 본래 갈석산을 이름이 우연히 같은듯하다고 평가절하하면서, 정씨의 말을 인용하여 이 갈석산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씨는 3세기경 훈고학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정현(鄭玄, 127~200)을 말한다.

위와 같이 채침이 본래의 갈석산인 상산군 구문현 갈석산의 존재를 부정하고, ‘구하윤해설’을 통하여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주장함으로써 본래의 갈석산이 동쪽으로 1천여 리 지명이동하게 되었다. ‘구하윤해설’은 현대과학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나 그 후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정설로 되어갔다. 더불어 한민족의 상고사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다음에 계속).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2).

기사승인 2016.10.24 11: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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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서에 나오는 여러개의 갈석산 어느 것이 진짜인가...

고대사에서 '요동'은 우리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요지명,

그러나 이 지명이 요나라 시대를 기준으로 동으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강단식민사학계는 무시함...


이제 ‘구하윤해설’이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서경』「우공 13장」에 ‘구하가 이미 물길을 따른다(九河旣道)’는 구절이 나온다. 구하九河는 황하 하류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황하가 하류에서 아홉 갈래로 나뉘었다는 뜻이다. 유학자들은 이 황하 하류에 있었다는 아홉 개의 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 아홉 개의 강을 찾을 수 없자, 그 아홉 개의 강물이 흐르던 지역이 바다 속으로 잠겼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구하윤해설’이다.
 
『서경』「우공 13장」의 구하九河에 대하여 채침이 주석한 것이 위의 사료 F-2이다. 구하九河에 대한 채침의 해설이 너무 길어서 앞부분은 생략하였으나, 채침은 이 생략한 부분에서 구하에 대한 여러 사서들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정씨程氏의 주장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씨는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채침은 이 해설에서 정씨와 왕횡 및 역도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아 ‘구하윤해설’을 구체화 하고 있다.
채침의 주장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위에서 사료 E-1, E-2에서 보았듯이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갈석산이 바다 속에 빠져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였다.  황하가 하북성 천진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하 하류 해변가는 모두 벌판으로 갈석산이라 부를 만한 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채침은 왕횡과 역도원 등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갈석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기주 지역에는 이미 이러한 돌이 없다. 평주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있어 창주의 강안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채침이 말하는 평주 정남쪽의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가리킨다. 역도원 등이 주장한 바다 속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상상속의 갈석산이 5백여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1>에서 학자들의 상상속에서 생겨난 ‘갈석산 2’가 채침 등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을 등에 업고 난하 하류의 ‘갈석산 4’로 슬그머니 환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서경』「우공」에 기록된 채침의 주석을 통하여 본래의 갈석산이 부정되고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 배경에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구하윤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이외에도 두 가지 요인을 더 꼽을 수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으로 ‘고구려가 예로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였다.

G-1

“(상략)...배구가 인하여 아뢰기를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으며, 한나라 때 나누어 3군을 삼았고, 진晉나라 역시 요동을 통치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따로 외역外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근심하여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입니다...(하략)’ 하였다.” (上略)...矩因奏狀曰: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 漢世分為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為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下略) 『隋書』卷六十七, 列傳第三十二, 裴矩傳

G-2

“『사기정의』: (朝鮮은) 조선潮仙 이음이다. 『괄지지』는 말하기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 하였다.” 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壌城,本漢樂浪郡王険城,又古云朝鮮地也.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사료 G-1은 황문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면서 ‘고구려가 옛날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왜곡한 말이다. 또 사료 G-2에서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고 하였다.
 
『괄지지』는 당태종의 4남인 이태(李泰, 618~652)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장수왕 평양성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2부 4장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참조>.
그리고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은 갈석산(백석산) 부근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1부 5장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찾아서’ 참조>. 당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보다 1천여 리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괄지지』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라고 운운한 것은 고구려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역사왜곡에 다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당태종은 서기 645년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요동은 중국 땅이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렇게 명분을 쌓은 후에 마침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사료 G-2에 인용된 『괄지지』의 기록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1천여 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 하류 일대로 오인하도록 만든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료 H-1, H-2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기 801년 편찬된 역사서인 『통전』의 갈석산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H-1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晉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通典』卷一百七十八, 州郡八, 古冀州 上

H-2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 『通典』卷一百八十六,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통전』은 북평군 노룡현의 갈석산을 ‘우갈석’으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을 ‘좌갈석’으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통전』은 <그림 1>에서 본래 갈석산인 ‘갈석산 1’을 ‘우갈석’으로, 가짜 갈석산인 ‘갈석산 4’를 ‘좌갈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 갈석산은 동일한 ‘우공갈석’으로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통전』은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상서』의 문구를 엉뚱하게 ‘우갈석’으로 해석하면서 ‘좌갈석’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괄지지』의 기록대로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을 난하 하류의 고구려 평양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둘째,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중국 요나라(916~1125) 때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여 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의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때에 갈석산의 지명 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 이동이 일어났다.
 
이때 본래의 갈석산이 있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포로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킨 기록을 『요사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요나라는 난하 하류 일대에 평주 요흥군(『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속한 안희현과 망도현의 기록을 살펴보자.

I-1

“안희현은 본래 한나라 영지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안희현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평주 동북쪽으로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安喜縣. 本漢令支縣地, 乆廢. 太祖以定州安喜縣俘户置. 在平州東北六十里. 户五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I-2

“망도현은 본래 한나라 해양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망도현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해양산이 있다. 현은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望都縣. 本漢海陽縣, 乆廢.太祖以定州望都縣俘户置.有海陽山.縣在州南三十里.户三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위의 기록에서 정주定州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로 본래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보정시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평주 요흥군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위치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의 갈석산 지역의 주민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지명도 함께 이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갈석산의 지명도 이때 함께 지명 이동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그림 6> 요나라 때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 요나라 이전 요동의 각종 지명은 필자가 고증한 것이며, 요나라 이후의 요동의 각종 지명은 강단사학계의 통설이다.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 송나라 주자학파의 ‘구하윤해설’로 인하여, 당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지명 이동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을 두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제작된 중국 고지도들을 보면 1177년 제작된 『기주협우갈석도』와 1209년 제작된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는 본래의 갈석산인 보정시 백석산을 갈석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1136년 제작된 『우적도』와 1177년 제작된 『구주산천실증총도』는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표기하고 있어 갈석산에 대한 당시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결국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현대과학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로 이론적 존립근거를 마련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그러나 이후 주자학파들이 득세하면서 정설로 굳어져 갔다.
그리고 본래의 갈석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무려 1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진짜 갈석산 행세를 해오면서 한민족의 상고사를 짙은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집요하게 진행된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판이었다.
 
(2) 한반도 평양의 ‘가짜 갈석산’

 
일제 강점기에 또 하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났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평양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역사왜곡 하면서부터이다.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일본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사학잡지』에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를 통하여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을 이어 1928년 중국학자 왕국량은 『중국장성연혁고中國長城沿革攷』라는 책에서 평양 일대에 갈석산을 표기하고 진나라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연결시켰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평양 지역을 한나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려 하다 보니 자연히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이곳까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동단이 위치한 갈석산이 어떠한 산인가?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뚜렷한 시‧공간적 좌표가 존재한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위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산이다. 지금까지 여러 갈석산들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하나같이 황하 하류 해변가와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도 그곳으로 황하 하류가 흘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하윤해설’을 만들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갈석산의 본질마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주장하려면 그곳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황하 하류가 한반도 평양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사 기록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병도의 낙랑군 수성현 주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J-1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에 요동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고산자의 『대동지지』에는 이를 패강장성의 유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48쪽.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만리장성이 있어야 하며, 또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러야 한다. 이병도는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을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하면서 그곳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을 찾을 수 없자, 중국 정사인 『진서』「지리지」의 기록을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만다.
 
하지만 필자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곳에는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갈석산도 있고, 만리장성의 동단도 있으며, 과거에 황하 하류도 그곳으로 흘렀다. 『진서』「지리지」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이병도는 엉뚱한 곳에서 한나라 낙랑군을 찾으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중국 정사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이런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은 그러나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통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다음회 계속).


글쓴이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김봉렬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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