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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JeungSanDo/甑山상제님과 종통

[증산도] 상제님(하나님)을 기다려 온 약속의 땅, 객망리

by 바로요거 2016. 8. 26.

[증산도]의 도조이시며 우주를 주재하시고 통치하시는 우주의 절대자이신 상제님(하나님)께서 내려 오신 땅,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증산도 성지- 증산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객망리 전경- 좌측의 산이 시루산>



[증산도] 상제님을 기다려 온 약속의 땅, 객망리


대전의 주산인 보문산의 주봉 시루산, 서울시 은평구의 증산동, 그 외에도 증산골, 증산리, 증봉 등등. 우리나라 지명에는 유달리 ‘시루[甑]’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스스로 ‘증산(甑山)’이란 호를 취하신, 인간으로 오신 우주의 하나님 증산 상제님. 상제님께서는 왜 조그마한 땅 한반도, 그 중에서도 전라도 객망리로 오셨을까? 시루산 아래 작은 마을,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역사적 성지인 객망리에서 그 비밀을 더듬어보자.  
 
구구지(九狗地)의 중심, 미륵구지
공자는 『주역』의 「설괘전」에서 구원의 장소(방위)에 대해 이렇게 밝혀놓았다. “간(艮)은 동북지괘야(東北之卦也)니 만물지소성종이소성시야(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일새 고(故)로 왈성언호간(曰成言乎艮)이라.” 간은 동북방의 괘이며 만물의 종말과 새 출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간방에서 창조의 섭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지구를 24방위로 분류했을 때 한반도는 간방(艮方)에 해당하고, 간방은 12지지에서 술[戌, 개]자리에 해당한다. 이 간방, 술(戌)자리의 모든 기운이 최종적으로 결실된 곳이 호남 일대의 구구지(九狗地)라 한다.

 
조선시대에 한 도인이 전라북도 부안 변산과 고부 두승산 등의 산세와 인근 지형을 살피고 나서 개 구(狗)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아홉 군데 붙이면서 구구지라 불렸는데, 구구지(九狗地)는 ‘가활만인(可活萬人)의 길지(吉地)’라는 말이 전해온다.
 
구구지는 ‘배양구지, 흙구지, 진구지, 돌구지, 거멍구지, 역구지, 숙구지, 각(서)구지, 미륵구지’를 말하는데 그 중 가장 중앙에 있는 자리가 미륵구지이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시루산 아래 객망리는 바로 미륵구지로 후천 가을개벽을 맞이하여 우주 봄여름의 전 과정을 매듭짓고 가을의 성숙한 문화로 인도하시는 미륵부처님, 즉 상제님의 땅임을 태모님께서 밝혀주셨다.(증산도 道典 11:20:5)
 
1871년 신미(辛未)생이신 상제님께서 개[戌]자리를 취해서 오심은 상제님 일을 매듭짓는 대두목 공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하겠다.


상제님이 탄강하신 곳
우주의 절대자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고 한적한 마을 객망리. 본래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의 지역으로서 이 마을은 예로부터 ‘하늘의 주(主)를 기다리는 마을’이라 하여 선바래기(仙望里)로 불렸는데 이것이 나중에 손바래기(객망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상제님 탄강 후에는 신기리로 불렸다가 현재는 북쪽의 송산마을과 합쳐 신송마을로 불리고 있다.


신송(객망리)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강증산 강세지’라고 적힌 낡은 팻말이 서있는 집이 있다. 상제님 어천 후 성부님과 양자 강석환 씨가 살았던 집인데, 정확히 상제님 탄강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상제님은 어렸을 적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워 작은 이 마을 안에서도 자주 이사를 다니셨기 때문에 탄강하신 생가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신이하심을 보이셨던 상제님께서 일곱 살 때, 사시던 집 마당 한쪽 구석을 고사리 손으로 파시면서 ‘어서 물 나라, 물 나라’(道典 1:21:3) 하시자, 정말 샘물이 솟아나와 우물이 되었는데 동네사람들이 모두 이 곳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이 증언을 토대로 볼 때 우물 주변 터 쯤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우주의 가을문화가 포태된 시루산
상제님의 유년 시절과 성부, 성모님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객망리 마을 뒤엔 큰 시루봉과 작은 시루봉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상제님의 부모이신 성부님과 성모님께서는 이곳 시루산(甑山)에 올라 득남(得男)과 다손(多孫)을 하늘에 기원하며 치성을 올리시고 상제님의 성령을 잉태하셨다고 한다.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상제님의 뜻에 따라 모든 걸 맡기고 친구처럼 따라주셨던 성부 성모님. 참하나님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성체는 큰 시루산 중턱에 합장(合葬)으로 모셔져 있다. 그 지난하고도 거룩한 삶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낀다.
 
상제님은 스스로 호를 ‘증산’이라 하셨는데 이는 시루산의 지명을 취하신 바도 있지만, 1200여 년 전 미륵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고 미륵신앙을 대중화시킨 진표율사가 세운 금산사 미륵불상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미륵불상은 시루인 철수미좌를 받침대로 하고 있어 미륵부처이신 상제님과 시루(甑)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도전』을 보면 “세상에 시루만큼 큰 그릇이 없나니, 황하수의 물을 길어다가 부어보아라. 아무리 부어도 시루에 물을 못 채울 것이로다. 시루는 황하수를 다 먹어도 오히려 차지 않으니 천하의 그릇 중에 제일 큰 것은 시루니라.”(증산도 도전 2:38)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 속에서 당신님의 진리야말로 선천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넓으며, 우주안의 모든 것을 아우르심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호인 ‘증산’은 선천의 모든 미완성된 문명을 익혀 궁극의 성숙을 이루고, 당신의 도법이 온 우주를 포용하는 인류구원의 참 진리임을 선포하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루산 정상에는 ‘선인독서혈’이라고, 신선이 내려와서 독서를 하는 형국의 혈자리가 있다. 이 또한 상제님의 도통공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상제님께선 어린 시절, 밤이면 시루봉에 오르시어 큰 소리를 지르시며 산하정기를 호흡하시고 깊은 사색에 젖기도 하셨다. 3년 천하유력을 마치시고 30세 되시는 해에는 목에 붉은 수건을 거신 채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와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를 찾으시며 “도통줄 나온다!”고 큰 소리를 치시며 도통을 이루실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31세 되시는 해에 이곳에서 14일 동안 수도를 하시고 대원사 칠성각으로 가시어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열고 궁극의 도통을 이루셨다. 시루산은 상제님의 강세 목적이 우주의 완성된 열매문화를 열어주시는 것임을 전하고 있다. 또 그 일대 객망리는 인류구원의 큰 뜻이 포태되고, 천지공사의 기초가 세워진 중요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상제님을 기다려온 땅
시루봉 뒤쪽엔 두승산이 있다. 두승산 정상에서 보면 서쪽으로는 변산, 남서쪽으로는 방장산, 입암산, 내장산, 망제봉(망제봉), 동북쪽엔 상두산과 모악산 칠보산 등이 모두 시루산(증산)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루산을 향해 주변의 모든 산들이 폭 에워싸서 우러러 경배(敬拜)하고 있는 형국은 언제 봐도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시루산의 뿌리가 되는 두승산은 부안의 봉래산(변산), 고창의 방장산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으로 꼽히는 명산이다. 두승산의 다른 이름이 영주산(瀛州山)인데, 예로부터 이곳 사람들에겐 “영주산 아래 큰 신선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두승산의 아홉 봉우리 중 동쪽 끝에는 망선대(신선을 기다리는 대), 신선대가 있고, 산 아래에는 은선리(신선이 숨어 있는 마을), 선망리(신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을)가 있어 큰 인물이 나옴을 짐작케 한다. 또 망화대가 있는데 망화대란 용화세계를 기다린다는 미륵하생의 염원이 담겨있는 곳이다. 이처럼 이곳의 지명들은 한결같이 하늘의 큰 신선, 곧 하느님을 기다리는 기원을 담고 있어 참으로 신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이곳의 모든 지명과 지세들은 우주통치자이신 상제님의 강세를 기다리며 준비해 왔던 땅임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잉태되신 서산리
상제님 탄강지와 또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 상제님께서 잉태되신 서산리다. 객망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 성모님이 태어나셨고, 상제님께서도 외가인 이곳에서 잉태되셨다.



서산리(書山里)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 선조 때 청하(靑霞) 권극중(權克中)이 광해조를 만나 낙향하여 공부할 때 마을 사람들이 ‘책을 쌓아 놓음이 산과 같다’고 하며 그를 기려 서산사(書山祠)를 세움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당시 권청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도가문서를 집필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도가서는 권씨 집안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한다. 도학(道學)이 높고 단학(丹學)으로 유명하여 ‘동방단가문자(東方丹家文字)의 개산조(開山祖)’로 불렸다. 성모님은 이 권극중 선생의 9세손으로 태어나셨다.
 
결국 증산 상제님께서는 가장 오래된 원시의 성(姓)인 강씨 문중과 또 도가(道家)로서 유서 깊은 권씨 집안과 인연을 맺어 두 분을 성부(聖父), 성모(聖母)님으로 하여 육신을 받아 탄강하신 것이다. 서산리 역시 시루산의 줄기가 태극형상으로 마을을 감싸듯 둘러 안고 있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객망리와 시루산 그리고 서산리를 둘러보았다. 비록 짧은 순례였지만 이를 통해 우주가을의 새 문명을 열어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내려오시는 상제님의 탄강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장구한 우주사가 기다리고 준비해온 멀고도 긴 여정이었으며, 시루산 일대 객망리와 서산리는 천지에서 이미 정해놓은 확실한 약속의 땅임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개벽의 성지, 객망리와 시루산

상제님의 탄강지인 객망리 시루산에 서린 상제님의 성적(聖蹟)을 소개합니다.


“상제님께서 하늘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의 간곡한 기도와 하소연을 들으시고, 새우주를 열어 도탄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건지시기 위해 새 역사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방 땅에 강세하시니, 환기(桓紀) 9070년, 배달국 신시개천(神市開天) 5769년, 단군 기원 4204년, 조선 고종 8년 신미(辛未: 道紀1, 1871)년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1일) 자시(子時)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古阜郡優德面客望里)에서 탄강하시니라.”(도전 1편 11장)
 
 1번 국도를 달리며 보니 멀리 정면으로 모사재천의 위대한 어머니 산, 호남의 상징인 모악산이 큰 모성애를 깨우쳐 주듯 유난히 우뚝 솟아 보입니다. 창밖으로는 아직 여름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초가을의 들녘이 쪽빛이 더욱 깊어가는 하늘과 어우러져 상쾌함을 자아냈고, 지금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길을 상제님 태모님과 당대 성도들이 몸소 걸어서 다니시며 역사의 새판을 짜는 천지공사를 보셨다고 생각하니, 무한한 감상이 피어올랐습니다.
 

 ‘징게맹경 외에밋들’, 이 말은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이라는 호남식의 표현입니다. 시야 멀리로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가운데, 동학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만석보유허비(萬石洑遺墟碑)가 지평선과 어우러져 바라다 보이고, 세계 대운을 조선으로 몰아들이기 위해 천하의 난리를 지으신 상제님의 천지공사도 중첩되어 보입니다.
 
 또한 거대한 지평선을 이루는 호남평야에 고부의 진산(鎭山), 평지돌출의 두승산(斗升山)이 신비로움을 발하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설로는 ‘겉으로 보면 일곱 봉우리인데, 산을 올라보면 아홉 봉우리’라고 해서 북두칠성이 응기한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지는 이 두승산은 정읍의 방장산, 부안의 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으로 일컬어집니다.
 
 삼신산이라는 별칭의 유래는 한민족 고유의 신교(神敎)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던 성지(聖地)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천황이 내려오신 장소를 봉래(蓬來), 소도(蘇塗)가 있는 곳을 방장(方丈),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을 영주(瀛州)라 하는데, 이곳 두승산을 다른 이름으로 영주산이라고도 합니다.
 
 하늘의 주(主)를 기다려 온 마을, 객망리
 바로 이곳 두승산 자락에 우리 아버지 상제님이 오신 땅, 객망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객망리는 현재의 지명으로는 덕천면 신월리입니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시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였다가 탄강하실 때는 객망리(客望里), 일명 손바래기라 하여 ‘하늘의 주(主)를 기다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다하여 선바래기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손바래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손’은 神, 仙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증산도 道典 1:14장 측주 참고)
 
 조금만 더 가면 객망리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앞에 네거리를 만납니다. 서쪽방향은 고부면으로 넘어가는 황토재, 하늘재와 북쪽방향은 상제님의 외가인 서산리로 가는 영달재가 있습니다. 도전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어천하신 후에도 자주 오시어 이곳 영달리 주막에서 술을 드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객망리가 얼마 전까지는 신기마을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신송(新松)마을이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정말 고즈넉한 곳… 바로 여기가 인류역사가 그토록 희구했던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곳이라니… 도전을 보면 상제님의 생가는 너무 가난하여 사립문도 없이 작은 방 하나에 볏짚으로 두른 부엌 하나가 전부인 집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호남서신사명(湖南西神司命)의 주인산, 시루산
 아쉬움을 뒤로하고 평온한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따가운 햇살과 함께 시루산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것은 곧 묵은 신앙을 참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가운데 터질 듯 부풀어오른 가슴은 천지일월에 대한 신앙심을 깊이 자극합니다. 아, 시루산! 해발 101m의 나지막한 산. 세상 사람들은 이름조차 없는 야산으로나 여길 법한 그런 산입니다. 그러나 시루산에 얽힌 내력을 알고 나면 높고 거대한 어떤 산보다 더 큰 산이 시루산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산을 오르는데 이토록 힘든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상제님께서는 도기 27년(1897) 정유년에 3년의 천하유력을 떠나셨다가 경자년(1900)에 본댁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시루산은 호남서신사명(湖南西神司命)을 관장하는 주인산(主人山)이라.” 하시며 이후로는 항상 시루산에서 천지에 사무치는 공부를 하십니다.(증산도 道典 1:78) 그처럼 인존 상제님의 정성과 열망이 오롯이 담겨 있는 산이기에 더욱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또 객망리를 떠나시어 대원사 칠성각에서 천지대신문을 여시기 전, 신축년 6월에는 이곳 시루산에서 정씨 부인의 시봉으로 14일 동안 수행을 하십니다. 천지대신문을 여신 뒤에는 천지 원주인으로서의 당신님의 신원을 선언하시고, 전주 풍남문에서 새 우주 개벽을 축복하는 노래를 친히 부르십니다. 그러고 다시 이곳 객망리 본댁으로 돌아오셔서 천지공사의 주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시는 공사를 처결하시는데, 제일 먼저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일체의 문서·서책을 모조리 불사르시며 인존 천주시대를 선포하십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증산도 道典 2:13:5)라는 선언적 말씀에서 천지공사를 매듭짓는 일꾼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도정에 임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봅니다.
 
 시루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동북쪽으로 상두산, 모악산 남서쪽으로 방장산, 입암산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올라선 곳은 큰 시루산의 정상입니다. 샘이너머를 사이로 두고 이곳 큰 시루산과 작은 시루산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상제님께서는 낮이면 두승산 일대를 오르시고, 밤이면 큰시루산과 작은 시루산을 뛰어 다니셨습니다. 특히 9세 되시던 해에는 집 뒤편 한쪽의 초막에서 천지와 교감하시며 깊은 도심을 여는 공부를 하십니다.(증산도 道典 1:23)
 
 상제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대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편할지라. 오는 일을 아는 자는 창생의 일을 생각할 때에 비통을 이기지 못하리로다.”(증산도 道典 2:45) 삼계대권을 주재하시는 상제님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어 천지공사를 준비하셔야만 했던 소년 상제님의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증산도의 도전을 보면 사실 상제님께서는 생가가 있는 객망리에 그리 오래 머무시지 않으셨습니다. 차경석 성도와의 만남에서 대화중 “어느 곳에 머무르십니까?”하고 여쭈자 상제님께서는 “나는 동역객(東亦客) 서역객(西亦客) 천지무가객(天地無家客)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증산도 道典 3:180) 그 말씀 그대로 상제님께서는 성장하신 이후로 거처를 늘 옮겨 다니셨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상제님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삶이셨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그러한 심경의 한 단면을 땅끝 마을 해남에 가셨을 때, 삼십년의 인생을 회고하듯 망망대해를 바라보시며 탄식조로 토해내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천지 대동길을 찾아 천황으로서 천지주름을 삼는 상제님께서 상념에 잠기시는 모습. 여기서 그리 멀지않은 서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당시 상제님의 그 심정을 전해주는 듯합니다.(증산도 道典 1:81) 힘겹게 오른 시루산 길을 따라서 천지일월 부모님의 삶을 가슴에 그려보며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말둥굴이재에서 보신 심법전수 공사
 객망리에서 북쪽으로 가다보면 영달리를 지나, 성모님의 고향인 서산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서산리로 가는 길목에 이평면 마항리가 있습니다. 말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마항리로 넘어가다 보면 ‘말둥굴이재’라 불리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상제님께서는 갑진(도기 34, 1904)년에 동학이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막기 위해 모범을 보이시는 공사를 이곳에서 매듭지으셨습니다.
 
 “나부터 먼저 망하여 모범을 보이리라.”(증산도 道典 3:98:9) 하시고 그 길로 가셔서 객망리 본댁의 집과 일곱 뙈기 고추밭을 모두 처분하신 상제님은 이삿짐을 동리 사람들에게 마음가는 대로 지고 가도록 하십니다. 성심을 다해 쌀섬, 장독 등 중요한 것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면치레로 값없고 가벼운 빗자루나 멍석 따위를 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달리를 지나 10여리 길을 가다, 문득 상제님께서는 짐꾼들을 이곳 말둥구리재에서 쉬게 하십니다. 그 때 이삿짐과 돈을 동리 사람들과 걸인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시는데, 각자 자기가 들고 온 짐을 고스란히 가져가게 하십니다.
 
 이 공사에서 또 다른 일면으로 상제님의 심법전수를 깨닫게 됩니다. 성심을 다하여 도장살림에 임한 결과와 잔꾀를 부리며 심량없이 신앙생활을 한 결과가 어떻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지를 일깨워주신 공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도장중심의 의로운 신앙, 헌신적인 신앙을 할 때 그 결실이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되돌아온다는 교훈을 가슴에 되새겨 봅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지공사 현장의 자연경관과 역사적인 배경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임과 동시에, 무엇보다 상제님의 체취와 심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005년 음력 919(양력 1021) 135주 증산 상제님 성탄절을 맞이하여-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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